저 빛과 색채는 어디에서 오는가?

한국 추상미술의 원류, 세계적 거장 유영국
기사입력 2020.11.25 15:55  |  조회수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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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붉고 휘황한 빛, 저 차갑고 서늘한 기운, 저 따사롭고 안온한 분위기의 그림, 때로는 강렬한 빛과 색채가 혼합한 광대무변함, 때로는 단순하면서도 때로는 소박한 빛과 색채가 주는 오묘함과 신비함, 점과 점, 면과 면, 선과 선이 주는 변화와 다양성! 모든 사물의 본질을 꿰뚫은 듯한 상상력과 골체미! 우와! 나의 숨을 멎게 하고, 둘레를 압도하는 저 그림의 마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저 빛과 색채가 태초의 원형질이 아닐까? 내가 그림 속에 있는가, 그림이 내 안에 있는가. 이럴 때를 물아일체? 나는 그림 한 점, 한 점마다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저 황홀한 색채가 나를 빨아들이는 듯, 내가 오묘한 색채의 바다에 빠진 듯, 그 소용돌이의 묘한 상태, 지금 나는 저 빛과 색채의 블랙홀을 헤맨다. 점과 선과 면의 형태로만 되어 있는 미묘한 그림, 과연 추상화란 무엇인가, 진짜 추상화란 이런 것인가? 한참 후 나도 모르게 심호흡을 내뿜었다. 그러자 긴장감이 풀리고 천천히 편안함이 나를 포근하게 했다. 그림이 주는 푸근한 안정감과 따뜻한 평화로움이었다.』
위에 짧게 쓴 글은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고 느낀 감상의 일단이다. 어쨌든 『유영국』이라는 이름은 진작부터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형 원작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유영국 작가와 추상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거의 없던 필자에게는 한마디로 놀라움이었다. 아직도 나에겐 그날, 그림에서 뿜어 나오던 황홀하고도 강렬한 색채와 빛에서 오는 그 감동은 여운으로 남아있다.

예술은 재미와 감동이다. 재미와 감동은 독자나 감상자가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느 작가든 그가 남긴 작품에는 그의 예술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곧 작가의 삶이자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세계이다. 유영국의 작품 배경(성장 배경, 환경, 시대적 상황 등)은 무엇이며, 왜 그는 평생 추상화를 고집스레 추구했는가? 유영국이 추구한 『절대와 자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침 그의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유영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절대와 자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2016. 11. 4.~2017. 3. 1.)』라는 표제가 붙은 초청장이 나에게 왔다. 초청장 표제부터 『절대와 자유?』 추상화에서 『절대』는 무엇이며 『자유』는 또 무엇인가? 3년 전의 일이다. 필자가 당시 울진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였다. 유영국 화백이 울진초등학교 출신(당시 울진공립보통학교 17회, 1931년 졸업)이라 전시회 주관처에서 모교의 교장에게 보낸 것이었다. 마침 서울 간(2017. 2. 19.)김에 짬을 내어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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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국 생가 중수후 모습(20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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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국 생가 중수전 모습(2017. 3)

유영국, 그는 1931년 일제강점기인 경북 울진군 울진읍 읍남리 126(현 울진읍 말루길 118-2)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안은 1840년대 증조부가 강원도 원주에서 울진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조부는 울진과 부산으로 오가며 상업으로 성공, 울진에서는 남의 땅 밟을 일이 없는 집안, 『말루 유부자』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부유했다. 아버지 유문종은 전통적인 한학교육을 받았으나, 자녀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등 모든 교육적 뒷받침을 했다고 한다. 그는『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진 동해안 지역 전기 평민 의병장이었던 신돌석에게 거액의 군자금을 제공하기도 했고, 1925년 제동초등학교를 설립하여 명문사학으로 발전시키는 등 울진지역 사회교육사업에도 기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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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진보통학교 졸업 후 1931년 서울 상경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유영국)

유영국은 1931년 울진보통학교(현 울진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그린 그림이 교장실에 걸린 적이 있어, 벌써 초등학교 시절, 미술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 후 울진을 떠나 서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경복고보를 졸업 1년을 남겨두고 자퇴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 군국주의 분위기 속에서 4학년 때 학급 반장으로 학생들의 비행과 동향을 밀고하라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강권에 순순히 따르지 않자 수차례 구타를 당한 것이 자퇴를 결행한 연유였다. 담임교사의 부당함에 맞서 자퇴 후 항해사(마도르스)를 꿈꾸며 요코하마 상선학교에 지원했으나 고등보통학교 졸업 자격 미달로 입학이 허용되지 않자 포기하고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하여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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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rk, 1988. 작품, 130×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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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풀, 1959, 103.2×96

문화학원은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문예전문학교로 한국인으로 유영국, 이중섭, 김병기, 문학수 등이 수학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일본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추상미술을 전공하였다. 20세기 초 당시의 추상은 하나의 양식을 넘어 이념이었다. 추상이라는 혁신적인 신조형법을 통해 정확한 질서와 동등성, 그리고 완벽한 평형성을 추구하는 것, 그리하여 어떤 극적 요소에서 자유로운 세계, 그것이 바로 유영국이 가고자 하는 말없이 순수한 추상의 세계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추상미술이 들불처럼 번졌지만 일본의 미술문화는 사실적 미술이 주를 이루었고, 전위예술을 반대하던 일본군국주의 분위기로서는 그에게는 과감한 결단과 선택이었다.

그는 문화학원에 재학시 독립미술협회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 입선하여 화가로서 첫 이름을 올렸다. 도쿄문화학원 졸업하던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화가로서 입지를 더욱 굳혔다. 이후 1940년까지 일본화단에서 각종 협회전에 참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1940년 초반이 되자 국가주의, 군군주의를 찬양 선동하는 주제의 작품을 압박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선택만이 있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작품을 내던가 아니면 붓을 꺾는 것뿐이었다. 추상을 통한 절대와 자유를 추구했던 유영국은 후자를 선택, 1943년 9년간의 일본 생활을 마무리하고 고향 울진으로 귀국했다.

그는 고향에 와서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뒤로 하고, 가업이었던 어선을 인수, 어업에 종사하였다. 죽변항에서 어부 생활을 하던 그 시절, 그의 가슴 속에는 언제나 추상미술을 향한 의지와 열정은 식지 않고 있었다. 1947년 마침 동료 화가였던 서울의 김환기로부터 서울대 미대 교수직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로 진출할 좋은 기회라 여겨 한창 돈벌이가 잘되던 어업을 접고 상경했다. 당시 해방정국은 온통 좌우 이념대립으로 어지러웠다. 미술화단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단은 친일우익이 중심이었던 조선미술가협회였다. 그 중심인물은 장발이었다. 그는 장면 동생으로 서울대학교 미대 설립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영국을 중심으로 몇몇 화가들은 좌우 이념을 떠나 여러 경향의 화단 유파들을 아우르자는 취지로 『50년미술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유영국은 앞서 김환기, 이규상과 함께 미술계의 혼란한 기류에 반기를 들고 『신사실파』라는 한국 최초 순수미술단체를 결성한 바 있었다. 『50년미술가협회』가 결성되자 장발은 유영국에게 이 단체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추상화를 통한 절대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자했고, 더구나 친일성향의 작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 요즘의 국전)에 출품을 거부한 바 있는 뚝심과 고집의 유영국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장발과 불화를 기화로 1947년 서울대 응용미술과 교수직을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그에게는 서울대 교수직보다 『50년미술가협회』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6·25 한국전쟁 통에 서울을 점령했던 인민군 종군화가로 차출될 뻔한 위기를 탈출, 울진으로 또다시 귀향하여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아버지가 경영하던 양조장을 인수하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가 경영한 죽변 양조장에서 생산한 술이 『망향』이라는 소주였다고 한다. 소주 이름을 『망향』이라 붙인 것은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었다. 왜냐하면 죽변항에는 6.25 한국전쟁으로 북에서 온 피난민들과 고기가 잘 잡혀 어선에 종사하는 뱃사람들도 북적댔다고 한다. 지금은 어획량이 턱도 없지만 꽁치, 오징어, 정어리, 양미리 등이 풍어를 이루었고, 바다에 나가기만 하면 어선들이 만선이 되어 돌아오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러한 때에 망향소주는 삶의 애환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불티나게 잘 팔려 돈도 꽤 많이 벌었다고 한다. 소주병에 붙이는 상표 또한 그가 도안했다. 상표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아쉬운 대목이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망향이라는 상표의 소주 공장이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울진 월변 도로가(현 경찰서 앞)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망향소주가 지금까지 유지되었더라면 향토기업으로 발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울진에서 양조업을 하면서도 그는 늘 가슴 한구석에는 그림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그래서 양조업을 하는 동시에 따로 자그만 화실을 두고 그림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5년 이후 서울에서 본격적인 미술 활동을 재개,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현대작가초대전, 신상회 등 한국의 가장 전위적인 미술 단체를 이끌었다. 그러나 1964년 미술그룹 활동의 종언을 선언하며 첫 개인전을 개최한 후 2002년 타계할 때까지, 오로지 개인 작업실에서 날마다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만 몰두하며, 평생 400여 점의 아름다운 유화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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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1957, 1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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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실에서 작업 중인 유영국 화백.

유영국을 가리켜 산과 색채의 화가라고 한다. 그는 말한다. 『내 그림의 주제는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자연이었고, 그중에서도 특히 산이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

그는 고향의 산과 바다를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가슴 탁 트이는 바다였다. 그 앞바다는 울진의 남대천과 왕피천이 마침내 합류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가 살던 말루 동네는 동해 바다를 동쪽에, 서쪽으로는 금강송이 울창한 응봉산, 통고산 등 태백준령이 멀리서 병풍처럼 두르고 있기도 하다. 그는 응봉산을 좋아해 가끔 오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응봉산은 지금처럼 단순히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없고 약초꾼이나 벌목꾼들뿐이었다. 그곳엔 계곡과 폭포가 있고 금강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천년의 비바람에도 하늘을 향하여 거침없이 꿋꿋이 자라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자기 자신 같아 볼 때마다 가슴 벅차곤 했다. 그는 산에 오를 때마다 산을 품고 돌아왔다. 산은 그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그의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산과 하나가 되었다. 아니 그가 바로 산이었다.

그는 울진의 산과 바다에서 무엇을 품고 어떤 생각으로 추상을 창조했을까? 물결치는 바다와 파도, 허공에 부는 바람, 금강소나무의 푸른 기백, 그리고 산의 장엄함 등. 험준한 산의 등뼈가 주는 거대함, 깊은 계곡, 그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유장함, 봉우리의 삼각형, 능선의 곡선, 원근의 면과 금강송의 푸름과 곧은 직선, 검붉은 껍질의 빛깔, 물결치는 바다, 거친 파도와 때로는 잔잔한 잔잔함, 그 속에서 자라는 온갖 바다 생물들, 깊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거대한 붉은 원색의 아침 태양, 그것이 주는 어둠과 빛이 주는 오묘함, 구름과 바람, 고요와 폭풍, 사시사철의 변화가 살아 숨 쉬는 곳이 바로 울진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을 배경이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으리라. 그의 작품은 사실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담은 것은 아니다. 그가 표현한 점, 선, 면, 형, 색에는 고향 울진의 바다와 산, 태양이 담겨 있다. 결국 그의 그림 뿌리는 울진의 자연과 그에 따른 색채가 원초인 셈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추상 속에 거대한 자연을 아니 우주를 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엄혹한 추상 속에 대자연과 우주의 숨결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그가 죽변에서 양조장을 경영하며 치열하게 고민했던 절대 추상의 길, 그것은 곧 유영국이 추구한 절대와 자유였다.

2002년 11월 어느 날. 유영국은 영면했다. 죽음을 앞두고 장남인 유진에게 최후로 남긴 유언 한 마디,『없다』였다. 그의 그림처럼 군더더기 없었다. 평소 과묵하면서도 곧은 성품과 추상의 절대정신을 추구한 세계적 거장다운 말이었다. 
그는 한국 추상미술의 원류요, 북극성 같은 존재다. 빛과 색채의 화가, 온몸으로 우주를 추상화로 창조, 표현하고자 했던, 울진이 낳은 추상 미술계의 세계적 거장, 유영국!

그에게 시 한 편 올린다.

유영국/있음으로 없고/없음으로 있는//태초 반란의 빛/태초 창조의 색상//하늘과 산과 바다와 /절대 추상과 자유//마침내 장엄한 우주와 삶의 고독에/숨결을 불어 넣는 일//붉음과 푸름/굽음과 곧음//안온함과 평화로움/단순함과 소박함//면, 형, 색, 점이 어우러진 신비함과 오묘함/자유로움으로 탄생하고//고독은 자유다/자유는 고독하다.//한없이 저 광야로/무변광대한 저 우주로//쉼 없이 달려 나가는 일/그는 바다가 되고//산이 되고 우주가 되어/마침내 있고 없다//절대 추상의/고독과 자유로 유영游泳한//한국 추상의 북극성, 유영국/영혼조차 빨려드는//색과 빛의 블랙홀/저 황홀하고 장엄한 빛과 오묘한 색//어디에서 오는가?/지금 여기
(시 / 유영국, 전문. 201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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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유영국미술문화재단에서 (시계방향으로 필자, 유진 이사장, 정용목 이사, 20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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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국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필자(국립현대미술관. 2017. 2.)

덧붙임: 지난 7월 3일. 서울 소재『유영국미술문화재단』을 방문하였다. 유진 재단이사장(유영국 장남, 전 카이스터대 교수)과 정영목(전 서울미대 교수) 이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유진 이사장에게서 울진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울진문화원과 업무제휴협약서(MOU) 체결 등과 정영목 이사에게서는『재단의 현황, 사람도 뿌리를 찾듯이 그림에도 뿌리가 있다. 유영국 작품의 원초적 뿌리도 고향 울진의 자연』이라는 말로서 설명해 주었다. 그는 또한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선구자요, 큰 산이랄 수 있는 4대 화가는 유영국, 김환기, 장욱진, 박수근이라고 하였다. 유영국은 세계 미술사적으로도 그 유명한 추상화가『피카소를 비롯해 100명에 들어가는 거장이다.』라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울진군에서 유영국 화백의 생가를 매입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적극 협조하겠다고 한다. 필자도 울진군이 유 화백 생가를 매입했다는 것에 참으로 환영하는 바이며, 앞으로 좀 더 창의적으로 구상, 발전하여 울진에『유영국미술전시관』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그의 그림은 호당(엽서 크기) 수천을 한다. 이 글에서 유영국 화백의 생전 작가활동 등의 내용은 두 분이 들려준 이야기와 재단 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 본문 중 사진은 필자가 촬영한 것과 유영국미술문화재단에서 제공한 것이 혼재했음을 밝힌다. 두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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