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번지는 계절이다.
스산한 가을바람이나 황량한 겨울바람이 들판을 휘감을 때 하루하루 풍경의 변화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린이날을 지난 요즘, 아침 일찍 일어나면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마당가에는 간밤에 붓꽃이 몇 송이 더 피고 노란 미나리아재비며 양지꽃이 벌고 산나리가 눈에 띄게 자랐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찬란한 봄의 축복은 넘치고 있었다. 산과 들은 온통 연초록인데 그 초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냥 한 색만이 아니다. 이름이 다른 풀과 나뭇잎마다, 아래 위쪽마다, 어둡고 밝은 곳, 중첩되고 그렇지 못한 곳, 먼저 피고 늦게 피고 어느 한군데도 같은 색이 없다. 또 연한 순들에 햇살을 받는 곳은 마치 연노랑 꽃이 만개한 듯 화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전체는 초록이 분명한 데 어찌 된 일인지 그렇게 다르면서 눈에 거슬리게 튀는 푸른 것은 없다. 절묘한 푸른 화음의 물결이다. 아침의 푸른 잎사귀들은 심산유곡을 새벽에 흐르는 물로 갓 씻어낸 듯 하고, 푸른 박하향 같은 것이 얼굴 가득 닿인다. 이 촉촉한 연푸름은 내게 맑디맑은 정화수로 분에 넘치는 공양을 한다. 참 고마운 아침이다.
나같은 범부(凡夫)도 이러할진대 담록(淡綠)을 띠는 아름다운 이즈음을 읊은 대가들의 절창이 어이 없으리오. 이희승은『오월은 바다와 함께 퍼덕인다. 오월은 하늘과 함께 즐펀하다』라 하였다. 학교 때 배운 적이 있는 수필 몇 편을 다시 읽으니 그들의 녹음에 흠뻑 젖는다.
피천득은『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라고 이 맘 때를 읊었다. 이양하는‘신록예찬’에서『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 하지 아니한가?』라 했다.
신록은 아니지만 인생의 신록에 비유할 수 있는 청춘을 읊은 민태원은 ‘청춘예찬’에서『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꼭 이것이다.....(중략).....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따뜻한 봄바람이다. 풀밭에 속잎 나고 가지에 싹이 트고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천지는 얼마나 기쁘며,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을 얼음 속에서 불러내는 것이 따뜻한 봄바람이다. 인생에 따뜻한 봄바람을 불어 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청춘의 피가 뜨거운지라, 인간의 동산에는 사람의 풀이 돋고, 이상(理想)의 꽃이 피고, 희망의 놀이 뜨고, 열락(悅樂)의 새가 운다.』라 했다.
언제나 최고의 아름다움은 젊음이라고 피력했던 피천득은 ‘봄’에서『봄이 올 때면 젊음이 다시 오는 것 같다.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煩惱)를 해탈(解脫)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知性)과 둔해진 감수성(感受性)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智慧)도 젊음만은 못하다. 인생은 40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40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는 소설의 주인공들은 93퍼센트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라고 섬뜩하리만큼 젊음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오월’이라는 수필에서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에 불현듯 밤차를 타고 해변가 피서지를 가서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시 한 구절인 得了愛情痛苦 失了愛情痛告(얻었도다 애정의 고통을, 버렸도다 애정의 고통을)를 모래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고 했다.
김우창은 `피천득론'에서 “선생이 신록에 관한 글에서 갑자기 젊은 시절의 외로운 여행을 회상하며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고 할 때, 우리는 신록의 싱싱한 생명이 죽음으로 하여 더욱 찬란해지는 것을 아는 선생의 비극적 인식의 일단을 느낀다”고 했다.
우리도 애정의 고통을 버린 것일까.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일까.
그래 신록!
인생의 나이로 보면 10대 후반 아니면 20대 초반 쯤일까. 신록의 변화는 젊을 때의 우리네 인생처럼 닮아 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리라. 우리 모두 자연의 일부인 것을. 이 찬란한 봄에 슬프게, 부질없이 물어본다. 이내 몸과 마음은 어디쯤 와 있는 것일까.
“마음에 맞는 계절을 맞아 마음에 맞는 벗을 만나서 마음에 맞는 말을 나누며 마음에 맞는 글을 읽으면 이는 최고의 즐거움이지만, 이런 기회는 매우 드물다. 일생동안 겨우 몇 번에 불과하다”고 형암 이덕무(炯庵 李德懋)선생이 말했다.
그래 짧고 몇 번에 불과한 즐거움. 신록과 청춘 그리고 우리네 인생이란 것이. 그러할진대 진정 그러할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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