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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동문회「제동학교(濟東學校)」동창들 한자리에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8.09.2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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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가난한 시골에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먹고 살기조차 버겁던 그 시절에 야학이라도 다닐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으니, 학교에 진학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창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할 나이에 빈궁한 가계를 위해 땀흘려가며 농사를 짓거나, 대도시로 나가 열악한 환경에서 막노동판을 전전하던 시절에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이들은 행운아였다. 

 

지난 8월 16일 오전 10시 30분, 울진 읍내 S 식당 2층에서는 참으로 곤궁하고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어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된 제동학교(濟東學校) 졸업생 15명이 한자리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창밖으로는 며칠 달아오른 따가운 열기를 식히려는 듯 시원한 여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열일 제쳐놓고 손에 손에 우산을 챙겨들고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제동학교 동문 15명은 다들 이미 팔순(八旬)을 넘긴 노인들이었다. 

 

십대, 이십대의 젊은 나이에 제동학교에 다니면서 암울한 시기에 희망의 못자리를 일구어냈던 제동학교 동문들은 아직까지도 젊은 시절의 열정이 채 식지 않은 듯 지난날의 학창시절을 추억담으로 회고했다.    

 

장석문(84세) 제동학교 동문회장. 제동학교(濟東學校) 16회 졸업생이다
「2008년 제동학교 동문회」는 16회 졸업생인 장석문(84세. 울진읍 호월리)회장의 인사말에 이어 감사보고, 결산보고 순으로 진행되었다.
제동학교 동문회에 참석한 졸업생들 모두가 나이든 노인들이다보니 오고가는 말 한마디도 조금은 특별(?)했다.
다들 입을 모아 “내년에는 우리들 가운데 또 몇 명이나 이 자리에 모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들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에서도 동문회의 임원개편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제동학교 동문들 중에서는 그나마 막내 축에 속한다는 여든네살 연치(年齒)의 장석문 회장이 “여러 선배님들. 회장 임기가 2년인데, 전임 회장이 몸이 아파서 떠맡았던 1년을 포함하면 벌써 3년 동안 제동학교 동문회의 회장을 맡고 있으니, 이제는 그만 다른 분이 회장을 맡아주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하고 말하자, 이곳저곳에서“그나마 젊은 사람이 회장직을 사양한다면 이 자리에 모인 동문들 가운데, 누가 회장을 맡을 것인가? 그러면 직접 한번 차기 회장을 맡을 사람을 지명해보시게”하는 질타가 쏟아졌다. 

 

이런저런 논의 끝에 누군가가 “자, 이러지들 말고 그냥 회장단을 유임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다들 찬성하면 박수로 유임을 결정합시다”하고 말했다.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참석한 15명의 동문들은 박수를 치면서 회장단 유임을 순식간에 결정해 버렸다. 

 

참석한 동문들의 유임 결정 박수와 축하 속에 다시 2년 동안 회장직을 맡은 장석문회장은 “여러 선배님들께서 굳이 회장을 맡으라고 하니까, 죽을 때까지 한번 해 보겠습니다”며 화답했다. 

현재 울진군에 거주하며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은 광복절 다음날인 매년 8월 16일, 한자리에 모이는 제동학교 동문은 20여명이다. 

 

장석문회장은 “회장을 맡아보는 3년 동안 6~7명의 동문들이 저 세상으로 앞서 갔다. 글쎄, 우리들이 언제까지 한자리에 모여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며 오순도순 얘기꽃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쓸쓸해했다. 

 

현재 제동학교 동문회장은 장석문씨가 맡고 있고, 부회장은 방성진(울진읍 읍남리)씨, 총무는 장주한(북면 소곡리)씨, 감사는 임주호(북면)씨와 남재창(울진읍 고성리)씨가 각각 맡고 있다.    

 

제동학교 출신 전만중(田萬重)씨가 3, 4대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내던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8월 16일이면 200여명의 동문들이 빠짐없이 총동문회에 참석했다고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제동학교의 정확한 졸업생 수를 알지 못한다. 

 

다만 장석문회장이 16회로 졸업할 당시의 졸업생 수가 83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를 당하기 전까지 17년 동안 운영됐던 제동학교 졸업생은 줄잡아 2천여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장석문회장은 1962년 9월에 발간된『울진 제동학교 연혁지(蔚珍濟東學校沿革誌)』에도 정확한 졸업생 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이유에 대해, 연혁지가 발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동문들과 연락이 끊긴 졸업생들이 많았던 점과 제동학교가 강제로 폐교될 당시에 졸업생들의 명단을 포함하여 각종 서류들이 멸실(滅失)된 점을 꼽았다.    

 

특히 제동학교 연혁지의 졸업생 회원 명부에 유독 장석문회장이 소속된 16회 졸업생이 많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연혁지를 만들 당시에 16회 졸업생 중 한명이 총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제동학교 설립 당시에 울진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들은 적게는 오원부터 많게는 몇 백원까지 자신의 능력이 닿는 만큼씩 사재를 털어 기부했다. 

 

제동학교가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1970년 제동학교 졸업생인 장성업(張聖業)씨가 사재를 털어서 근남면 노음리에 제동실업학교를 설립할 당시에 제동실업학교에 기부채납(寄附採納)했다. 

 

이에 대해 장석문회장은 “제동학교가 없어지고 제동중학교가 개교할 때 기부채납한 부동산이 꽤 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때 선배님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없어진 제동학교의 ‘제동(濟東)’ 두 글자를 살리려고 제동중학교에 제동학교 소유의 부동산을 기부 채납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2007년도에 사학이었던 제동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제동중학교의 전 재산이 설립자인 장성업씨의 자손들에게 상속됐지만, 예전에 선배님들이 결정했던 일이니만큼 아쉬울 것도 미련도 없다”고 말했다. 

 

제동중학교의 설립자인 장성업씨가 세상을 뜨고 나서 학교법인 제동학원의 이사장으로 부임한 장덕용씨는 제동학교와 제동중학교의 이런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북면 두천리에 소재한 송이산 30정(약 9만평)을 제동학교 출신 동문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해주었다. 

 

현재 20여명의 제동학교 동문들은 무상으로 임대받은 북면 두천리의 송이산을 일반인들에게 입찰한 대금으로 동문회 운영 자금도 만들고, 봄가을로 날짜를 정해서 여행도 다녀오고 있다.    

 

장석문회장은 “송이산 입찰을 통해서 일년에 생기는 돈이 약 3백만원 정도 됩니다. 2006년까지는 3백만원 가운데 1백만원을 제동중학교 장학금으로 내놓고, 나머지 2백만원으로 동문회도 열고 여행도 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2007년 제동중학교가 폐교되면서 장학금을 내놓을 일이 없어졌습니다. 앞으로는 3백만원의 돈으로 동문회를 운영하는데 좀 더 여유가 생기겠지만, 그것도 모두들 노인네인데 얼마나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전했다. 

 

제동학교가 폐교된 후 8.15광복과 6.25전쟁을 겪으면서 서로 먹고 살기에 바빴던 제동학교 동문들은 1959년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49년 전이던 1959년 8월 19일, 울진문화관(蔚珍文化館)에 함께 모여 교가를 부르면서 서로 뜨거운 감회에 젖었던 그날이 제동학교 동문회 창립일이다. 

 

울진제동학교 동창회 총회 창립 기념(1959년 8월 19일)

 

겉으로 빛나고 화려하기보다는 구수하게 한결같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제동학교 동문회.
동문회가 끝나고 마련된 점심식사 자리에서 ‘나이가 들다보니까 이빨이 영 시원찮아 졌다’면서 국물만 떠 마시는 동문들과, 화기애애하게 얘기꽃을 피우면서 식사를 마친 후에 신발과 우산을 챙겨서 계단을 거쳐 일층으로 내려가는데 한참이나 걸리는 나이든 제동학교 동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부디 한자리에 모여서 흉금을 털고 마음을 나누는 제동학교 졸업생들의 아름다운 만남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울진강습소(蔚珍講習所)로부터 출발한 제동학교(濟東學校)는 

울진제동학교 전신 울진강습소 창립(1922년 4월 17일)

울진제동학교 10주년 기념(1932년 6월 7일)

울진제동학교 10주년 기념 운동회(1932년 6월 8일)

울진제동학교 임시총회(1960년 6월 19일)
제동학교(濟東學校)의 전신(前身)은 울진 강습소(蔚珍講習所)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뜻있는 이들이 전국적으로 독자적인 강습소와 학원을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전국적인 추세에 따라 울진 지역 내에서도 장인환(張仁煥), 임원화(林元華), 장식(張植), 전영경(田永璟), 노기일(盧箕一), 주보원(朱甫源), 전영직(田永稷), 최진현(崔臻鉉), 장주윤(張柱允), 장용석(張龍錫), 주진휴(朱鎭烋), 주진철(朱鎭喆), 김병인(金柄仁), 유영준(劉永峻), 이우석(李禹錫), 박문교(朴文敎), 진근익(陳根益), 장사현(張士賢), 장승택(張承澤), 이우영(李愚榮), 이우근(李雨根), 장보영(張普永), 임시린(林時麟), 장현두(張顯斗)씨 등의 유력 인사들이 기금을 모금해서 울진강습소를 설치하게 된다.    

 

『울진 제동학교 연혁지(蔚珍濟東學校沿革誌)』에 따르면, 울진 강습소는 1922년 4월 17에 창립했고, 이어서 북면, 근남면, 원남면, 서면, 기성면에 더해 삼척(三陟) 원덕(遠德)과 근덕(近德)까지 설치되었다. 

 

그 후 3년이 지난 1925년에 울진강습소는 울진제동학교(蔚珍濟東學校)로 승격되었고, 울진강습소를 설립한 인사 가운데 한명이었던 진근익(陳根益)씨를 초대 교장으로 초빙한다. 제동학교는 현 울진향교의 명륜당(明倫堂)앞에 1916년에 이축되었던 교궁태화루(校宮太和樓)를 교사(校舍)로 사용했다고『울진군지(蔚珍郡誌)』에 전한다.

 

교궁태화루(校宮太和樓)는 원래 조선 숙종 때 울진현 관사 태고헌(太古軒) 앞에 2층으로 지어진 건물로서 태고루(太古樓)라 했는데, 1916년에 명륜당(明倫堂) 앞에 이축(移築)하고 교궁태화루(校宮太和樓)라고도 불렀다.
이 건물은 애초에 울흥보통학교(蔚興普通學校)의 교사(校舍)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에는 울진보통학교의 건물로 사용되다가 후에 울진제동학교의 건물로 사용된다. 

 

그리고 1945년 8.15해방 후에는 울진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1950년 6.25전쟁 당시에 비행기의 폭격으로 명륜당(明倫堂)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알려진다.   

 

일제 강점기에 설립된 제동학교는 일제로부터 배일사상(排日思想)의 온상지로 지목되어 일제 경찰로부터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동학교에 재직하는 교사와 졸업생들은 끊임없이 학생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다각적으로 활동했고, 국외에서의 고려 혁명당 사건(高麗革命黨事件), 제동학교의 가을 운동회, 시보 출판사건(時報出版事件), 광주 학생 사건(光州學生事件), 이상촌 사건(理想村事件), 조선 독립 공작당 사건(朝鮮獨立工作黨事件), 노조 농조 사건(勞組農組事件), 제동학교 음료정 육혈포 발견 사건(濟東學校飮料井六血砲發見事件) 등 숱한 사건에 연류 되지 않을 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 일본은 중국에서 만주사변을 야기했고, 1941년 12월에는 미국의 하와이를 폭격해 일명 대동아전쟁을 촉발시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전세가 불리해지기 시작했다.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일제는 만만한 조선 땅에서 점점 악랄해졌고, 일선동조(日鮮同祖-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말로 한국과 일본이 한민족이라는 이론)와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과 조선이 하나라는 논리)라는 황당한 논리를 들이대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신사에 배례하는 의식), 궁성요배(宮城遙拜-천황이 사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도록 한 의식), 창씨개명(創氏改名-성씨를 강제로 고치도록 한것) 등을 강요하며 강제공출(强制供出)까지 서슴지 않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해 울진 지역 내에서도 일제의 횡포와 억압은 극에 달했고, 8.15 해방 2년 전이던 1943년 숱한 애국지사와 뛰어난 인재를 배출해낸 제동학교는 교사와 학생들의 복받치는 울분에도 불구하고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를 당하게 된다. 

 

1943년 폐교 당시에 제동학교에 재학하던 학생들은 울진공립보통학교(蔚珍公立普通學校)에 편입하는 절차를 거쳤다.  

『울진군지(蔚珍郡誌)』에 의하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교당한 설움을 잊지 못한 일부 인사들이 8.15 해방 후에 제동학교를 다시 복교(復校)하고자 노력했으나 1950년 6.25전쟁 등으로 인한 사정으로 그 꿈은 좌절되었고, 1962년에 방병주(方炳周)와 임대덕(林大德)씨 명의로 울진제동중학원의 설립 인가를 얻어내 3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했다. 세월이 흘러 1966년 7월 5일, 근남면에 울진중학원이 인가를 얻어 개교한다. 

 

울진중학원은 1967년 4월 15일, 학교명을 제동중학원으로 개칭하고 교사 1동과 4개의 교실을 신축했다.
다시 4년이 흐른 다음인 1970년 8월 18일, 일제 강점기의 제동학교 졸업생인 행은(杏隱) 장성업(張聖業)씨가 사재를 희사하여 근남면 노음리에 대지 425평, 연건평 628평의 교사를 신축하고 제동실업학교를 설립한 다음 경성 법정학교 법과를 졸업한 이시백선생을 초대 교장으로 발령을 내고 개교한다. 

 

행은(杏隱) 장성업(張聖業)씨는 1973년 6월에 학교법인 제동학원을 인가받아 제동중학교(濟東中學校) 초대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울진제동학교(蔚珍濟東學校) 유적비문(遺蹟碑文) 전문  

인류(人類)의 문화 발전과 그 향상(向上)은 어떤 자극(刺戟) 없이는 이룩되지 않는다.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충절과 예절을 받들고 학문을 숭상해 온 문향(文鄕)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이 나라에서 처음 개화의 물결이 일고 출렁일 때 우리 고을에도 진작 애국지사 백운(白雲) 주진수(朱鎭洙)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두 분 선각자들에 의해 매화 만흥학교(晩興學校)와 사동(沙洞) 대흥학교(大興學校)가 창설되니 이는 새 시대 새 조류를 맞은 이 고장 새 교육의 한 장을 여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술국치(庚戌國恥)와 더불어 민족 사학은 폐쇄 당하고 일제하에서의 울진의 명동(明東)학교와 평해의 평명(平明)학교가 문을 여니 이는 모두 일본인(日本人) 교장(校長)하의 식민지(植民地) 교육을 강요(强要)받던 이른바 그들 공립 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의 전신(前身)이었다.   

 

울진 향사(鄕史)에 의하면 이곳 선비들과 입향(入鄕) 시조(始祖)들은 국가 변란에 처하여 충의와 정신은 계속 이어져 혹독한 일제 치하에서도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을 비롯하여 국외의 고려 혁명당 사건(高麗革命黨事件), 조선독립 공작당 사건(朝鮮獨立工作黨事件) 그리고 제동학교 음료정(飮料井)의 육혈포(六穴砲)사건, 울진 흑두건 사건(黑頭巾事件) 등 크게는 민족적 대사건에서 작게는 몇 사람에 의한 결사(結社)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선열들은 항상 이 민족의 선두에서 저항하고 그 의기(義氣)를 떨쳤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자 바야흐로 세계정세는 약소민족의 편에서 민족 자결(自決)과 해방을 손짓하니 이는 곧 우리 민족에겐 기미년(己未年) 만세 운동의 기폭제(起爆製)가 되었다.   일제는 세계 여론에 위축된 나머지 잠시 가혹한 총독 무단 정치(總督武斷政治)를 중지하고 문화 회유책(懷柔策)을 써서 이 땅의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어느 정도 방임(放任)하는 한 편 교육 기관으로서도 사설 강습소와 유치원 학원 학교의 설립을 인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울진 청년회 간부들은 의기를 모아 울진에 강습소를 창립하고 그 후 3년 만인 서기 1925년 울진제동학교로 승격 개칭하니 이는 일찍이 만흥(晩興)과 대흥(大興)의 정신을 이음이요, 일제의 질곡(桎梏)속에 배태(胚胎)된 난산(難産)의 분만(分娩)이기도 하였다. 

 

제동학교는 일인 교장하의 공립보통학교와는 달리 이미 기회를 잃고 방황하며 배움을 갈구하던 청장년에서부터 소년에 이르기까지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여 명실상부한 이 고장 문화의 산실이자 사상의 진원으로서 숱한 인재를 양성하니, 이것이 일제하의 제동의 한 긍지였고 운명이었다. 저들이 일으킨 세계 제2차 대전이 종국에 이르러 패색이 짙자 그들은 유일한 우리의 민족 사학(私學)을 폐쇄(閉鎖)하고 1943년 울진 공립 보통학교(蔚珍公立普通學校)에 이를 강제 병합시키고 말았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졸업생 동지들에 의해 제동중학교는 동문 고(故) 장성업(張聖業)씨를 주축으로 다시 노음(老音)벌에서 그 불씨를 피우니 이는 이 고장 민족 사학의 요람(搖籃)으로서 그 의지를 현현(顯現)함이며, 향토 교육의 막대한 책무를 지고 있음이로다. 간단히 그 역사를 이 유적비(遺蹟碑)에 새겨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서기 1988년 8월 15일
글 동문 문학박사 장한기(張漢基) 울진제동학교유적비 건립추진위원회 세움

 

2007년 폐교된 근남면 제동중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제동학교(濟東學校)' 유적비

 

울진제동학교(蔚珍濟東學校) 교가(校歌)

1.산높고 바다넓은 화려동방은 / 옛부터 우리선조 터밭이로다 / 장하다 우리학교 굳센 용사는 / 선사의 새빛을 보이리로다 /
2.사람의 정화는 배움에 있고 / 배움의 으뜸은 교정에 있다 / 활발이 뛰노는 건전아들은/위대한 동량지재 첫싹이로다 /
3.장하다 우리학교 소리높여서 / 영원히 기념하여 노래부를제 / 남산의 높은봉에 뜻을 세우고 / 동해의 맑은물에 마음길러라 /

2007년 폐교된 근남면 제동중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제동학교(濟東學校)' 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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