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 온 사람들 중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지요.
지나 간 시절을 깡그리 잊고 혹시나 자신의 몸 어딘가에 그때의 냄새가 묻어날까 전전긍긍
잘나가는 사람들의 발뒤꿈치를 불이 나도록 쫒아 다니며 흉내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나간 가난을 내 살점인양 끌어안고 옴짝달싹 못한 채 거기에만 얽매어 사는 것이 그 대표적 범주에 속한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은 과거가 없으면 좋을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과거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으니 자린고비 양반 천정에 매단 굴비 쳐다보며 밥 먹는 격이라고 해야 할까요.
둘 다 어느 쪽도 우리가 심정적으로 옳다 그르다 할 성질의 것은 아닐 테지요.
다만 지나 간 가난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엉뚱한 불편을 준다거나 자신의 모습이 일그러지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 조심스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라 전체가 어렵고 힘들던 시절, 이젠 우리 세대에게도 추억 속에서나 잠시 서럽게 떠오를 뿐인 보릿고개도 분명 있었고 분식장려니 혼식장려니 그런 것이 정책적으로 실현되기도 했던 시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음에도, 요즘 시대에 밥 굶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소리를 대할 때면 가슴이 아려옵니다.
이젠 어지간히 살만한 세상이 아니냐고 너나없이 삶의 질을 논하고 가늠하여야 한다고 목소리들을 높이지만, 과연 그 삶의 질이란 것이 어떤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지 이만큼 살고도 여전히 알 수 없는 깊이가 바로 그것입니다.
네, 밥만 먹고 살던 시대로부터 탈피해서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인간답게 혹은 문화인답게 살아봐야겠다는 목소리들에 대해선 달리 더 보태거나 뺄 말이 없습니다.
우린 정말 그동안 너무도 힘겹게 살아왔고 예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것만은 분명하니까요.
이젠 갖가지 문화 공간에 뛰어들어 개인의 발전을 꾀하는 일이나 어지간한 형편이면 한번쯤 외국으로의 나들이도 어색하지 않는 형편에 이른 요즘 시대를 생각하면 우린 얼마나 멋진 신세계에서 살고 있나요?
월드컵 축구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비싼 경비를 두려워않고 경기가 열리는 외국으로 원정 응원 길에 오르는 사람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하는 걸 보면 분명 우린 살맛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도 하구요.
그러나 참 유감스럽게도 우리 사는 이 땅에는 분명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목숨 걸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는 사실에서 아직 벗어날 수 없다는 겁니다.
남편 아내 둘이서 허리띠 졸라가며 24시간 안자고 벌어도 자식 놈들 공부시키며 세끼 밥 먹는 것이 너무도 숨차다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일 년 내내 신문 지면을 빼놓지 않고 채우는 정규직보다 훨씬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아픈 현실을 볼 수밖에 없는 세상,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급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은 사실을 숨기기 힘든 세상, 아니 세끼 밥도 밥이려니 사는 형편이 사람의 것이라고 보기에 너무도 열악한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살아갈수록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외면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근간의 답답한 심사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런지요.
요즘은 누구든 이러한 생각들과 소통이 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얘기부터 하고 싶어집니다.
모두가 삶의 질을 더 높여야 한다고 떠들지만 그런 사람들의 삶은 어찌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잘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제 노력이 부족하고 제 게으름이고 제 팔자라는 것이지요. 부가 유전되고 부가 신분의 격차를 드러내는 세상입니다
가진 자는 그것으로 제 신분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하고 급기야 자신들 만의 집을 만들어 끼리끼리 자신들만의 세상을 공유합니다.
그런 세상이 이 땅에서 버젓이 살아 움직이는데도 모두들 그것을 부러워하고 그 대열에 끼고 싶어 할 뿐, 그런 것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를 조각내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독히도 가난하던 이 땅의 60년대 70년대, 그 시절을 살아 온 저는 어릴 적 그토록 참혹한 가난 속에서도 사람들이 무엇이건 나누며 사는 모습을 보았고, 그런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참뜻이라 여겨왔습니다.
거지가 동냥을 오면 먹던 밥에서 덜어 깡통에 담아주고 부엌 아궁이 불기운 앞에서 먹고 가기를 권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 온 저는 그런 모습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하리라 생각하였습니다.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아 늘 힘겨운 삶이었어도 사람이 가진 여러 가지 덕목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나눔의 예'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그런 성정은 누구나가 의례 지니고 사는 습성이라 여겼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기억에도 어렴풋하지만 '禮'라는 것은 누구에게도 아쉬운 부탁을 하지 않는 것이라든가 형제간에도 돈 이야기는 안하는 것이 시대적으로 달라진 '禮'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쓸쓸한 禮이지요.
지나간 시절을 반추하며 늘 거기에만 매달려 사는 것은 그다지 온당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지난 시절의 가난이 지금의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옷섶을 파고드는 뼈아픈 회한과 어떡하든 잘 살아야겠다는 분투 의지 정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자신을 한곳으로만 몰아붙여 주변의 불행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바삐 서둘러 잘 사는 고지로만 치닫게 하는 건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 런지요.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기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여유는 풍요로운 곳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라고 믿는 저로서는 세상이 나눌 수 있는 것은 부가 아니라 가난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릴 적 그 가난하던 담장너머로 오가던 어머니들의 뜨거운 국 한 그릇의 온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면 말이지요.
이 명희/시인, 울진문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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