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이 내렸습니다. 반나절 만에 온 동네를 하얗게 덮어버릴 정도의 폭설이었습니다.
제 사는 이곳은 늘 눈이 늦게 내리는 편이었습니다. 그것도 대개 겨울 한 중간을 지나 음력 설 무렵이나 정월 대보름 즈음, 아니면 새잎 돋고 꽃망울 마악 피어나는 춘삼월 무렵해서 눈 같은 눈을 구경하는 편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이번엔 12월이 다 가기도 전에 눈이 맘껏 내려버렸습니다.
이것저것 밀쳐 둔 집안일을 끝내고 느슨한 차림으로 책장을 펼쳐들고 앉은 일요일 한낮, 창가 쪽에서 희미하게 눈발이 흩날리는 풍경이 눈에 잡혀오자 대번에 아이처럼 들떠서는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눈이 오네’를 외쳤습니다.
“첫 눈이야!” “올해는 빨리 오네” “모두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 ”서로에게 덕담을 나누기도 하다 보니 어느 샌가 이웃집 지붕 위에며 아파트 마당에 세워 놓은 자동차 위로, 혹은 먼데 산등성이까지 제법 하얗게 쌓이는가 싶더니 정말 눈 깜짝할 새 펑펑 소리라도 낼 듯 앞이 안 보일만큼 내리던 눈이 도로까지도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컴컴해지고 눈은 내리고 또 내렸습니다. 이윽고 눈 내리는 창밖은 딴 세상 같았습니다. 도로너머 저 쪽 아득한 산머리는 히말라야 산맥처럼 보였습니다.
창가에 의자를 당겨놓고 오래도록 그 풍경 속에 젖어있으려니 문득 오래 전의 시린 삽화들이 하나 둘 어둠을 밝히는 전등불마냥 조용히 걸어 들어왔습니다.
어릴 적, 유난히 길게 느껴지던 그 겨울엔 눈이 참 많이도 내렸습니다.
두터운 코트나 스웨터 하나 변변히 없던 시절, 얇디얇은 나일론 옷만 걸치고 버스도 다니지 않는 먼 길을 걸어 학교를 오가던 십리 마을 밖 친구들은 눈 내리는 길을 따라 세월 어느 편으로 흘러가버린 것일까요? 눈 오는 날이면 장갑 없이도 하루 종일 눈구덩이에서 뒹굴며 놀았던 친구들 얼굴이 슬라이드처럼 떠오릅니다.
날 고구마나 땅속에 묻어 둔 차가운 무를 깎아들고 눈 속에서 덜덜 떨면서도 맛있게 나눠 먹으며 놀았던 그 시절 우리들한테는 니꺼 내꺼가 따로 없던 때였습니다. 아무데서나 같이 놀다가 아무집이나 들어가면 같이 먹을 수 있는 밥이 있었고 같이 뒹굴다가 지쳐 잠들 수 있는 따슨 구들방이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쌀보다 많은 보리나 좁쌀이 섞인 거친 밥이었어도 아무도 탓하지 않고 귀하게 먹었습니다.
얼음이 둥둥 뜨는 물김치에 무짠지가 전부인 찬도 달기만 했었고 서로의 입가에 묻은 밥풀도 소중하게 떼어 입안에 넣던 그 때의 우리들에겐 어떤 경계도 존재하지 않던 때였던 모양입니다.
그렇던 시절이 분명 있었건만 세월의 질곡을 건너가는 우리들은 지금 어떻게 변해버린 것일까요?
중학교도 졸업 못하고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된다하여 대구에 있는 반야월 방직 공장으로 돈 벌러 갔던 제 언니도 떠오릅니다. 시집가기 전까지 줄곧 집에도 오지 않고 일만 하다가 가난한 부모님과 많은 형제들 몫의 옷가지며 양말을 가방에 담아들고 일 년에 한번 음력설이라고 찾아들던 때도 늘 저렇듯 차가운 눈길이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파리한 낯빛으로 며칠 내내 잠만 자다가 축 쳐져서 공장 기숙사로 돌아가던 언니의 눈 길 가득하던 발자국은 아직도 제 기억 속에 핏빛처럼 선연히 남아있습니다.
그 언니 덕분에 저는 분에 넘치게 늦도록 학교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제 언니의 피땀을 우골탑이라는 곳에 쏟아 부었던 것이지요. 몸도 많이 약하던 언니였는데 지금도 그 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 옵니다.
하루 종일 밤늦도록 방직 기계 앞에서 잔업을 할 때 잠을 쫒는 게 제일 힘들었다는 언니의 추억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가녀린 몸 어디에서 가난뱅이 식구들의 몇 끼니 밥과 더운 방을 구할 힘이 생겨났던 걸까요?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70년대나 80년 초쯤엔 가난이 지배적인 국민정서였던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과년한 딸을 가진 집들치고 돈 벌러 공장엘 나가지 않는 집이 없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 탓에 오히려 대도시 큰 방직 공장 같은 곳엘 다니는 딸이 있다는 건 자랑꺼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명절 날 저녁, 커다란 보따리 속의 내복 몇 벌과 나일론 양말은 은근히 집안간의 자부심이기도 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집들이고 공장 다니는 딸 덕에 언감생심 냉장고나 텔레비전을 장만하기라도 하면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자랑하기 바빴고, 집안의 막둥이들은 그 자랑스러운 언니들 덕분에 상급학교 진학을 꿈꾸거나 대처로 나가 공부하는 꿈을 기르기도 했었지요.
그러함에도 그 언니들의 사회적 이름은 지금도 너무나 처절하게 기억되는 공순이였습니다.
공장에 다니던 제 언니가 제일 가슴 아파하던 그 이름말입니다. 산업의 역군이니 조국의 새로운 횃불 같은 존재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한 뉴우스 속에서나 잠깐 불려 질 뿐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어째서 사회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아름다이 부르는 호칭 하나도 제대로 갖지 못하는 것일까요? 세상 그 무수히 많은 이름들을 두고서 왜 우리는 당사자가 들으면 가슴 아프거나 서러울 호칭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불러버리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살아오면서 늘 가장 못마땅하고 제발 고쳤으면 바랐던 것들이 그러한 호칭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는 사회의 가장 큰 병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을 하고 살건 제 가진 기술이나 힘으로 제 자신이나 가족들의 밥을 구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우리 생긴 모습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여 혼자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저는 제가 가장 하기 싫거나 하기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 가장 존경스러워집니다. 어쩌다 화장실 변기나 하수구가 막히거나 보일러실 온수가 새어나가서 때 아닌 물난리를 만날 때도, 설비하시는 아저씨께서 오시면 금방 해결이 될 때, 그야말로 아이처럼 그분이 가진 기술에 대해 대단한 경이로움과 함께 존경심까지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낡은 구두를 몇 번의 손놀림으로 단번에 새 것처럼 만드는 구두 방 아저씨나, 낡아빠진 헌 집을 얼마 만에 뚝딱 요술 할머니처럼 새 집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나, 산보다 더 높이 깎아지를 듯 고층 건물을 올려짓는 사람들이나 쓰레기 가득한 길들을 쓱싹쓱싹 빗질 몇 번으로 환하고 깨끗하게 만드는 사람들, 크고 헐렁하거나 너무 길어서 못 입는 옷들을 딱 맞게 재봉해내는 사람들의 남다른 기능 모두 모두 고마워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야말로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저보다 남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무엇보다 저 자신 너무나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 온 탓에 그러한 마음을 품고 살지 않았으면 거칠고 메마르기가 형편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 풀씨도 날아들지 않아 제 자신 풀 한포기 자라지 않는 사막 같은 사람이 되었을 테지요.
눈이 가득한 논밭에는 풍년이 든다 했던가요?
차갑기 이를 데 없는 눈들이 사실은 흙 속에 가득한 온갖 생명들을 이불처럼 덮어 따뜻이 감싼다하더군요. 자연은 그렇게 어느 자리 어느 형태로나 다 감사한 존재라는 사실이 또 한번 저를 경이롭게도 하고 부끄럽게도 만듭니다.
폭설이 내려 갇힌 새처럼 되고나니 더욱.
내일쯤 멀리 사는 언니에게 오랜만에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언니가 사는 곳에도 언니가 좋아하는 저 눈이 하얗게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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