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 모 잡지사 권두언에 쓰인 제목을 잠시 옮겨와 적어 보았습니다.
처음 그 책을 펼쳐 들었을 때 전 그 제목 앞에서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지요.
그리고 그 제목은 지금도 저의 가슴 속에서 늘 숙제처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요즘 누구나 만나면 농담처럼 한마디씩 걸치는 말들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주고받는 말이 세상 참 좋아졌다는 푸념 아닌 푸념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은 정말로 그렇게 좋아졌는가를 생각해보면 이내 고개를 저어야 합니다. 그 말에 합당한 대답을 저로선 아직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한 지인과 함께 우연히 알게 된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오랜 노숙 생활로 연세가 그리 높지 않으심에도 가랑잎같이 마르신 할머니를 어찌어찌 한 평반 쯤 되는 방이나마 구해 드리고 이것저것 생활에 필요한 이부자리며 살림살이들을 챙겨 거처를 마련해드린 일이 있습니다. 주변사람들이 십시일반 할머니의 이불이며 옷가지, 밥그릇 등속까지 하나 둘 마음을 보탰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식솔이 많이 딸린 가정이 아니라 홀로인 할머니였기에 마음들 엮는 게 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소식을 들은 자활후견기관에서 득달같이 달려와 낡은 방을 환하게 도배해주셨으므로 할머니의 작은 방은 어느 새 곱게 새 각시 분통 속처럼 단장이 되어졌지요.
하지만 어쩐 일인지 관공서일은 너무 느렸습니다. 할머니 주소지를 정했으니 생계비를 타야하는데 절차는 왜 그리도 까다로운지, 까다롭더라도 신속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하루하루 날만 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속상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이것저것 도운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계가 있는 것이니 관에서 빨리 할머니께 보조금이 나와야 하는데 맨 날 무슨 조사만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 짝이 없었지요. 게다가 몇 몇 분들은 할머니 집에 들락거리는 우리더러 아예 우리나라 노숙자 전부를 해결하면 더 좋지 않겠냐고 비아냥거리는 바람에 속이 끓기도 했습니다. 노숙자가 많다고는 합니다.
일할 수 있는 신체를 하고서도 그저 무기력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게 오늘 날의 노숙자들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니 국가가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시건 농촌이건 가림 없이 노숙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라면 분명 사회 구조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지금 같은 세상에 민족이나 국가라는 말은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 같은 명제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한 단어를 도용해 개인의 권력과 영광을 극대화하거나 세상 사람들을 끝없이 황폐화시킨 시대는 너무도 많았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나 민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월드컵 축구대회를 생각하면 지금도 저는 소름이 끼치곤 합니다.
분명 스포츠의 한 종목이고 국가 간의 경기일 뿐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지요. 붉은 옷, 붉은 띠! 그 뜨겁던 응원단 물결이 전 국토를 뒤덮는 현상을 보면서 무작정 그 열과 정성에 감동하기보다 군중의 힘이란 것이 한쪽으로 쏠리면 얼마나 무서운 힘을 발산하는지 경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내내 무섭고도 쓸쓸한 심정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온 국민이 거기에 함몰하던 그때 저는 경기는커녕 뉴스조차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알 수 없는 비애로 마음이 자꾸 가라앉기만 했지요. 아마도 저는 비애국자였던 모양입니다. 그 무렵 축구경기를 안보면 누구에게 잡혀 가든가 죽어라 맞을지도 모르는 분위기가 온 나라에 뻗쳐 있는 것 같은 막연한 공포감도 맛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축구경기를 안보는 사람은 세상에 저밖에 없는 것 같은 비이성적 자아를 느껴야했을 정도니까요.
그러나 그때의 그토록 뜨거웠던 열정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지금 우리 사는 사회의 언저리에선 냉담에 가까운 무심함이 전체 기류로 흐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날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는 소리들로 가득하지만 서로의 어려움을 나누는 일엔 인색해져 가고 있는 현상은 또 어찌 설명할 수 있을 런지요? 월드컵의 그 열기 반의반만이라도 우리 사는 사회 구석구석에 퍼내놓으면 그 훈훈함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등이 데워질지 모를 일인데 말입니다.
점점 추워지고 있습니다. 시절이 수상하고 어렵다는 소리가 세상을 채우는 계절이 와버린 것이지요. 며칠 전 제 가게에서 쓰던 선풍기모양 전열기와 라디오를 들고 할머니를 찾았더니 바싹 마른 손으로 제 어깨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아무 것도 안 들고 와도 좋으니 그냥이라도 자주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하셔서 가슴이 찡했습니다. 돌아가신 제 친정어머니께서 살아생전 늘 하시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드넓은 세상에 피붙이 하나 없이 혼자만 우두마니 살아가시는 할머니 어깨가 얼마나 좁은지 그제야 새삼 보이는 듯 했습니다.
종가의 맏이인 저는 아직 시부모님께서 그리 연로하시지 않아 함께 살지는 않지만 가까이 사시니 자주 뵙는 편이지만 그래도 더 자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우리 같은 아줌마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여유란 남아돌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가슴 한쪽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되었지요. 나누는 것 또한 내 밥 그릇 통째로 누군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한 숟가락씩만 덜어내면 충분하다는 것도 말입니다.
언제나 국가와 민족은 대단하고 거창한 명분만을 우위에 두지만 개인의 삶은 소소한 곳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이 어느 유명 철학자의 말보다 가깝게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이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을 구축한다는 사실을 살아갈수록 더욱 명료하게 깨닫노라면, 세상은 좋아졌는가를 묻기 전에 나는 세상이 좋아지도록 잘하고 사는가를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 속으로 걸어들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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