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월 어느 날 아침, 각 신문 1면 머리기사로 경북 영주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영주는 원래 신라 문화권에 속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고구려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에게는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있었던 나는, 지도교수를 따라 청량리에서 열차를 타고 풍기에서 내려 택시로 발굴 현장이 있는 영주 순흥으로 갔다. 그리고 그때 발굴단의 현장 안내로 처음으로 벽화고분의 내부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채색이 약간 바래기는 했지만 연도(羨道)의 남쪽 벽에는 명문(銘文)과 어형기(魚形旗)가, 서쪽 벽에는 우람한 청년이 뱀을 몸에 칭칭 감고 두 손에는 뱀의 목과 꼬리를 잡아 역도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역사상(力士像)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피장자의 유골이 일부 남아 있었다.
발굴단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나는 흥분한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고분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능선을 올랐다. 정상에 이르는 야트막한 7, 8부 능선에는 곳곳에 이미 고분 여러 개가 석실을 드러낸 채 파괴되어 있었다. 모두 도굴을 당한 것이다. 그중에서 제일 커 보이는 고분 내부가 궁금해서 입구의 거미줄을 걷어내며 석실 내부로 들어갔다.
허리를 굽혀 들어간 고분의 내부는 직사각형으로 만들어졌는데 제법 큰 현실(玄室) 내부 바닥에는 도굴 과정에서 깨진 듯한 토기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져 있었다. 사방 벽에는 강 돌을 쌓아 축조하면서 돌과 돌 사이에는 방수를 위해 진흙에다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반죽처럼 만들어 발라놓았다.
나는 벽 쪽으로 플래시를 비추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틈 사이에 진흙을 발라놓은 자리마다 수백 개의 지문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석실 한가운데 앉아 눈을 감았다.
이 무덤의 피장자는 누구일까? 이 지문을 남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이 사람들은 과연 천여 년이 지난 후에 자신들이 남긴 흔적으로 후손들에 의해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역사는 과거와의 대화”라고 카아(E. H. Carr)는 말했던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조사 결과, 이 고분들은 모두 6~7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1,300~1,400년 전의 사람들과 대화한 셈이었다.
나는 그때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며 얼마나 가슴 벅차했는지 모른다. 지금 와서 생각해봐도 살아오면서 그만한 충격을 받아본 적이 별로 없다. 그날의 현장은 오늘날 ‘영주순흥벽화고분(榮州順興壁畵古墳)’으로, 국가 사적 제313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는 가끔 역사 속에서 자기의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하고 시대의 풍운아로 사라진 몇몇 선각자들을 안타까워하곤 한다. 그들이 주장했던 사상이나 구현하려던 세상은 다음 세대에 이르러 그대로 현실로 나타났음을 우리는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하곤 한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그들 대부분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죄목은 당시 사회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파격적인 주장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들은 그들이 꿈꾸던 새로운 가치관을 사회적으로 보편화, 일반화하려고 시도했을 뿐이었다. 즉, 시대를 앞서간 죄밖에는 없었다.
지금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휘몰아치는 광풍(狂風)의 끝은 어디일까? 저 광풍의 주역들은 우리가 100년, 200년, 1,000년 후에 우리 세대가 치열하게 오늘을 살아가며 남긴 흔적을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두려워하기나 할까?
우리는 누구나 미래의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모습을 궁금해한다. 1,300~1,400년 전에 영주 순흥 지방에서 벽화고분을 만든 사람들이 그랬고, 각자의 삶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영화 “백투더퓨처(Back to the future)”를 보면, 주인공이 미래의 결과를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운명과 맞서는 소동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혹시 우리 주변에는 우리보다 한발 먼저 지나갔다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미래에서 다시 온 사람은 없을까? 어쩌면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 주위의 누군가는 반드시 그런 사람일지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역사라는 거울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자신을 돌아보며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어두운 밤, 아무도 몰래 한 말과 행동이라 해도 누군가는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마땅히 두려워하고 삼가야 할 일이다. 내 주위에 나와 더불어 열심히 살아가는 이웃이 그래서 더 소중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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