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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4화] 민들레 홀씨 되어

  • 장원섭 교수
  • 입력 2026.11.02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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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사카(大阪)에서 피어난 조선(朝鮮)의 혼(魂), 이복남(李福男)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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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안덕원의 진(陣) 

안덕원에서 동쪽 고개를 향해 절을 올린 뒤에도 이복남(李福男)은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땅에는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의 신음이 남아 있었다. 그는 무릎을 펴고 가장 먼저 부상자가 누운 자리로 갔다.

“숨이 붙어 있는 사람부터 옮기시오.”

 

승전의 수를 헤아리려던 군관이 붓을 내려놓았다. 이복남은 그에게 물과 천을 먼저 가져오라고 했다. 적이 물러간 길은 다시 적이 들어올 수 있는 길이었다. 죽은 이를 거둘 사람과 길목을 지킬 사람을 나누어야 했다. 그 일을 마치고서야 그는 칼집에 말라붙은 흙을 털었다.

 

며칠 뒤, 웅치에서 살아 돌아온 군사 하나가 정담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함께 싸우던 동료를 어디에 묻었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이복남은 그 군사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군관에게 전투 중 사라진 사람들의 고향과 가족을 아는 대로 적어 두게 했다. 돌아오지 못한 자의 자리를 비워 둔 채 군적(軍籍)을 채울 수는 없었다.

안덕원을 지켜 냈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전주로 향하던 한 줄기의 길이 막혔을 뿐, 왜군은 다른 곳에서 성을 빼앗고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이복남에게는 더 넓은 전선으로 나가라는 명이 내려왔다. 그는 떠나기 전 웅치 쪽을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는 멀어서 보이지 않았지만, 어느 방향에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1593년 봄, 그는 전라도방어사(全羅道防禦使)의 직책으로 창녕과 의령 부근의 전선에 있었다. 웅치에서는 산비탈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적을 보았다면, 이곳에서는 서로 떨어진 고을의 소식이 하루가 지나서야 닿았다. 

 

군사는 흩어져 있었고, 한 고을에서 보낸 군량이 다른 고을에 도착할 때쯤이면 그 사이에 지키던 길이 이미 끊기기도 했다.

그는 낮 동안 지도를 펴고 물길과 고갯길을 따졌다. 밤에는 진영을 돌며 모닥불이 얼마나 남았는지 살폈다. 횃불을 많이 켜면 적에게 위치를 알리고, 적게 켜면 아군이 서로를 잃었다. 

 

장수의 결정이라는 것은 때로 병법의 큰 문장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어느 불을 남겨 둘 것인가 하는 작은 셈이었다.

한 병사가 젖은 버선을 말리려고 불 가까이에 발을 내밀었다. 발뒤꿈치의 살이 벗겨져 있었다. 이복남은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내일도 걸을 수 있겠느냐?”

“걸어야지요.”

대답이 너무 빨라 그가 다시 물을 수 없었다. 그는 곁의 군관에게 그 병사를 뒤쪽 운반대에 배치하라고 했다. 병사는 무안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뒤에서 짐을 옮기는 일도 군대가 앞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이복남은 살아남은 사람을 다음 싸움에 데려가는 법을 웅치에서 배웠다. 그러나 전선이 넓어질수록 그가 손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람은 줄어들었다. 보낸 명령이 닿기도 전에 한 마을이 비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길이 안전하다며 앞장섰던 백성이 길에서 돌아오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는 보고서에 빠진 이름을 묻고, 누구도 답하지 못하면 칸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1594년에는 남원부사로 남원을 맡았고,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중책도 지게 되었다. 성에서 내려다본 남원은 군영만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었다. 문밖으로 이어지는 장터 길, 짚을 엮어 올린 지붕, 성벽 곁에서 장작을 쪼개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먼저 무너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성벽 위에 오를 때마다 한쪽만 보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적이 들어올 길을, 안쪽에서는 사람들이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병사들이 돌을 쌓는 동안 고을 사람들은 곡식을 나르고 우물을 덮었다. 누군가에게 성은 지켜야 할 지형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저녁이면 돌아와 불을 지피는 집이었다.

 

싸움이 잠잠해졌다는 말이 돌던 때에도 이복남은 군량과 말먹이를 세었다. 한 관원이 장부를 앞에 놓고 근처 고을에서 조금 더 거둘 수 있겠다고 했다. 

 

이복남은 장부보다 그 고을에서 온 사람을 먼저 불렀다. 지난 수확에 남은 볏짚이 얼마나 되는지, 겨울을 날 종자는 남았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장부에 적힌 수보다 작았다.

“없는 곡식을 적어 보내면, 군사는 내년 봄에 무엇을 먹겠소?”

 

그는 요구한 수량을 줄였다. 그 대신 다른 고을로 향하던 수레의 길을 바꾸고 며칠을 더 기다렸다. 전쟁 중에는 기다리는 일도 위험했다. 그러나 백성이 굶은 자리에서 군량만 가득 채운들, 그 군량을 나를 사람은 남지 않았다.

 

이복남의 통솔이 누구에게나 너그럽지는 않았다. 군율을 어긴 자에게 내리는 벌은 무거웠고, 그의 엄한 처사를 둘러싼 원성도 조정에 전해졌다. 사람들은 그를 의로운 장수라 부르기도 하고 지나치게 거센 사람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어느 쪽 말도 직접 들을 수 없는 밤이면, 서명해야 할 문서를 촛불 앞에 오래 펼쳐 놓았다. 잘못된 결정을 되돌릴 시간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1595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옮겨 갔을 때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떠난 자리의 소식을 남의 입을 통해 들었다. 어느 길목에는 병사가 더 필요했고, 어느 고을에서는 쟁기를 쥘 손이 모자랐다. 

 

전쟁은 커다란 전투 사이의 빈 날에도 사람을 갉아먹었다. 이복남은 나주의 창고를 돌아보고, 낡은 장부에서 이미 죽은 사람에게 군역이 매겨진 줄을 찾아내 다시 쓰게 했다.

 

한 노인이 군영 밖에서 그를 기다렸다. 전해 줄 물건이 있다고 했다. 노인이 내민 것은 닳은 화살촉 하나였다. 웅치에서 싸운 아들이 돌아와 화살촉을 맡겼다가 다시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소식이 끊겼다. 노인은 아들이 어느 고개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묻지 않았다. 이복남은 화살촉의 녹슨 끝을 보며 한참 말을 고르다가, 아직 그 이름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노인은 화살촉을 거두어 품에 넣었다.

“확인되면 이름만이라도 보내 주십시오.”

그날 밤 이복남은 남은 군적을 다시 펼쳤다. 전사자를 다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알았다. 그렇다고 아는 이름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오래갈수록 승리의 장계보다 더디게 쌓이는 것이 있었다. 누가 어느 길에서 사라졌는지를 적은 기록이었다.


1596년이 저물 무렵에도 나라의 곳곳에는 싸움이 다시 커지리라는 소문이 돌았다. 평온은 전쟁을 끝낸 평온이 아니었다. 이복남은 비어 있는 화살통을 채우고, 말안장을 손보고, 흩어진 군사를 모았다. 밤이면 정담이 웅치에서 남긴 마지막 고갯길을 떠올렸다. 정담의 얼굴보다 또렷하게 남은 것은 자신을 떠밀던 손의 힘이었다.

그는 그 손이 무얼 부탁했는지 이제 알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는 한 번 살아남은 것으로 할 일을 마치지 않는다. 또 다른 사람이 지나갈 시간을 만들 때까지, 자기 몫의 길목을 지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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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남원으로 가는 길

1597년 여름, 바다와 육지에서 연이어 날아온 패전의 소식이 남원에 닿았다. 전라도 병마절도사로 다시 군사를 이끌게 된 이복남은 보고를 펼쳐 놓고 지도를 짚었다. 

한산도에서 수군이 무너졌다는 소식 뒤로 적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전주로 향하는 길을 막으려면 남원을 지나칠 수 없었다.

 

남원에는 명나라 총병 양원의 군사가 들어와 있었다. 성 안에는 다른 말로 명령하는 병사들이 함께 있었다. 어느 쪽 문을 누가 맡을지, 어느 곳에 화약을 놓을지 정하는 일에도 말이 한 차례 더 오가야 했다. 다급한 소식은 통역을 거치며 늦어졌고, 늦은 대답은 다시 의심을 불렀다.

 

산성으로 물러나 지형을 이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교룡산성은 높은 곳에 있었다. 남원 읍성은 평지에 가까웠고, 적이 사방을 에워싸면 성안의 병력은 서로를 구하러 가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남원읍성(南原邑城)을 지키겠다는 결정이 굳어졌다. 이복남은 이미 정해진 성의 높이를 다시 잴 수 없었다.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성문마다 선 사람들의 준비였다.

 

그는 북쪽 성벽을 살폈다. 바깥의 참호는 깊었지만, 적이 풀과 나뭇단을 던져 넣으면 언젠가는 메워질 것이었다. 바닥이 젖어 있으면 화공은 더디겠으나, 비가 오면 화살 깃도 눅눅해진다. 좋은 지형과 나쁜 지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조건을 먼저 이용하느냐가 싸움의 순서를 바꾸었다.

“활은 몇 번을 쏠 수 있느냐?”

 

군관이 모아 둔 화살을 셌다. 이복남은 그에게 총수만 적지 말라고 했다. 한 번의 공방에 얼마나 쓰는지, 다른 문에 나누어 줄 수 있는지, 남은 나무로 다시 깎을 수 있는지를 함께 적어야 했다. 창고가 넉넉하다는 보고만으로 성이 견디지는 못했다.

사람들이 성안으로 짐을 들였다. 쌀 한 자루를 두 사람이 나눠 메고, 나무 바퀴가 빠진 수레를 네 사람이 밀었다. 어떤 이는 아이의 손목을 놓칠까 봐 짐을 버렸다. 병사들은 문 앞에서 밀려드는 사람들과 군수품 사이에 통로를 냈다. 

 

이복남은 그 통로가 좁아지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서로를 밟고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그 무렵 어린 성현도 어른들의 다리 사이를 지나 성안으로 들어왔다. 이복남의 아들이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갑옷을 알아보았지만, 갑옷 곁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수레와 병사들 사이에서 이복남은 아이를 발견하고도 곧바로 다가갈 수 없었다. 문 바깥에 아직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잠시 뒤 그가 다가와 성현의 눈높이에 몸을 낮췄다. 아이의 손에는 길에서 주운 작은 둥근 돌이 쥐여 있었다. 길을 걷는 내내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쥔 모양이었다.

“무서웠느냐?”

 

성현은 돌을 쥔 손을 등 뒤로 감추고 고개를 저었다. 이복남은 아이가 겁이 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겁을 내보일 틈이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성현의 손을 잠깐 감싸 쥐었다가 놓았다. 손바닥에는 돌의 모서리가 남긴 자국이 났다.

“안에 가서 물을 마셔라. 해가 지면 밖으로 나오지 말고.”

 

더 긴 말을 하고 싶었으나 군관이 그를 불렀다. 북쪽 길에서 먼지가 일고 있었다. 성현이 어른들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이복남은 다시 성문으로 걸어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아이가 가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키는 성 안에 있었다.

 

이복남은 성의 준비를 확인한 뒤 흩어진 병력을 모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가 군사를 이끌고 돌아올 무렵 왜군의 포위가 좁혀져 남원으로 향한 모든 길이 전쟁터가 되었다. 천여 명의 정예 군사를 이끌고 적의 진을 돌파해 성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길목마다 적이 가로막았다. 

 

뒤에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어도 돌아가 사람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거듭되었다. 앞의 군사가 길을 열면 뒤의 군사가 그 틈을 지나갔고, 대열의 맨 끝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차례 군기를 확인했다. 깃발이 끊어지면 흩어진 군사가 돌아올 방향도 사라졌다. 군관 하나가 옆에서 성이 보인다고 외쳤다. 북쪽 성벽의 윤곽이 먼지 사이로 솟아 있었다. 성을 보고 안도할 틈도 없이 이복남은 달려 나갔다.

 

성문을 지난 뒤 병사를 세어 보니,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700명 남짓이었다. 처음 데리고 온 사람 가운데 300명가량은 성에 들어오지 못했다.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에는 그 숫자가 빠지기 쉬웠다. 

이복남은 군관에게 밖에 남은 이들의 부대와 마지막으로 목격한 자리를 적으라고 했다. 원군을 이끌고 온 장수는 성을 향해 달려온 길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양원의 휘하 장수들이 성문을 나누어 맡았다. 동문과 남문, 서문에 명나라 군사가 배치되었다. 이복남에게는 북문이 맡겨졌다. 성안의 서로 다른 말이 어둠 속에서 엇갈리면 군령도 길을 잃을 터였다. 그는 통역을 불러 신호를 단순하게 맞추고, 북문에서 다른 성문으로 소식을 보낼 사람을 정했다.

 

해 질 무렵 그는 한 번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적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참호 너머로 나뭇단이 쌓이고, 젖은 땅을 밟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복남은 웅치의 좁은 길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는 고개가 적의 수를 늦추어 주었다. 여기서는 자신들이 적이 건너올 시간을 늦춰야 했다.

 

성안에서는 저녁밥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군사들이 그것을 맡고 잠시 고개를 돌렸다. 이복남은 성 안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집집마다 작은 불빛이 있었다. 성을 지키는 이유가 무엇인지, 저 불빛들은 군령보다 분명히 말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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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에서 골목까지

정유년 음력 팔월, 남원성(南原城)의 밤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적은 성의 한쪽을 치고 물러나면 다른 쪽에서 다시 밀려왔다. 동문에서 조총 소리가 커질 때에는 북문의 군사들이 허리를 펼 수도 있었지만, 곧 자기들 앞으로 불빛이 모여들었다. 한 성을 지키는 사람들은 사방에서 서로 다른 밤을 맞고 있었다.

 

북문 위에서 이복남은 적이 참호 가까이 버린 풀단의 높이를 보았다. 처음에는 물 위에 뜬 몇 묶음이었고, 다음 날에는 사람의 발이 디딜 만한 폭이 되었다. 화살을 쏘아 운반하는 자들을 물리치면 다른 자들이 앞으로 나왔다. 조총이 성벽을 때리는 동안 참호는 조금씩 얕아졌다.

“아직 쏘지 마라. 더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라.”

 

그의 말에 화살을 건 군사의 손이 떨렸다. 손이 떨린다고 활을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적이 가까워지자 한 줄의 화살이 나갔다. 이복남은 빈 전통을 확인하고 창을 앞세웠다. 오래 버티려면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서 무너지는 곳에는 남겨 둔 화살이 쓸모없었다.

 

새벽녘 성안으로 어린아이의 울음이 들렸다. 울지 말라고 다그치는 어른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이복남은 소리가 난 쪽을 보지 않았다. 성현의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분간하려 들면 발이 성벽 밖이 아니라 성안으로 향할 것 같았다. 그는 전투가 끝나면 아이를 찾겠다고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먼저 살아 있어야 할 약속이었다.

 

남쪽에서 온 전령은 그쪽 성벽에도 적이 달라붙었다고 했다. 이복남은 예비 병력을 반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북문 안쪽에 남기고 하나는 골목의 갈림길로 보냈다. 성벽이 어느 곳에서 먼저 뚫리든, 그 골목은 사람들이 안쪽으로 달려올 길이자 병사가 밖으로 나갈 길이었다.

 

그날 밤 적은 나무와 풀로 참호를 더 메우고 어둠을 틈타 성벽에 올랐다. 총알이 흙과 돌을 튀겼다. 처음 사다리가 걸린 곳을 막아 내자 조금 떨어진 곳에 다른 사다리가 걸렸다. 

 

이복남은 군사를 옮기며 북문을 지켰다. 갑옷 어깨에 파편이 박혀 끈이 풀렸으나 다시 묶을 새가 없었다. 손으로 들고 싸울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칼 한 자루였다.

 

성 안의 다른 문에서도 다급한 신호가 이어졌다. 어디에서 무엇이 무너졌는지 확인할 사람이 제때 돌아오지 않았다. 

이복남은 더 늦기 전에 성벽 아래의 병사들을 골목 입구로 물렸다. 한곳에 모두 남겨 두면 성이 뚫린 뒤 싸울 병사가 없었다. 돌아오지 못한 병사의 이름을 셀 시간도 없었다.

 

골목에는 주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 여자가 항아리를 안고 달리다 문턱에 걸려 넘어졌다. 군사 하나가 항아리를 세워 주려 했으나 이복남이 여자를 먼저 일으키라고 했다. 항아리에서 쌀이 흘러나왔다. 여자는 한 움큼이라도 주워 담으려 손을 뻗었다. 이복남은 그 손목을 잡아 사람들 뒤로 보냈다.

“지금은 몸을 피하시오.”

 

이복남은 성을 지키러 들어오던 날의 길목을 생각했다. 성안으로 들어온 700명 남짓한 군사, 끝내 따라오지 못한 자들, 그 사이를 통과하던 백성들. 이 골목을 잃으면 살아서 물러날 방향도 잃는다. 그가 서 있던 곳은 성 전체를 되돌릴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눈앞의 사람 몇 명을 뒤로 보내는 자리는 될 수 있었다.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일부 기병과 함께 포위를 뚫고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누가 먼저 그 말을 꺼냈는지 몰랐다. 잠깐 동안 군사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이복남은 골목 끝에서 몰려오는 적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지나가기 전까지 길을 비우지 마라.”

 

그 말이 누구에게 닿았는지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신호를 받은 군사들이 창을 내밀었다. 별장(別將) 신호(申浩)와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을 비롯한 장수들도 성안에서 싸움을 이어 갔다. 다른 자리에서 버티던 이들이 어디에 있는지 서로 알 수 없게 되자, 마주친 군사들은 소속을 묻지 않고 함께 골목을 막았다.

 

이복남은 앞으로 나왔다. 좁은 거리에서는 큰 군세도 한꺼번에 칼을 들이밀 수 없었다. 그는 넘어온 자를 밀어내고, 쓰러진 병사를 밟지 않으려고 한 발 옆으로 디뎠다. 그러다 몸이 흔들렸다. 허리 아래로 뜨거운 감각이 번졌다. 군관이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복남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자기가 죽을 자리를 미리 정해 두지 않았다. 웅치에서는 살아서 물러나라는 말을 들었고, 안덕원에서는 남은 자들을 이끌고 다시 싸웠다. 남원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자루를 고쳐 잡고 골목으로 들어오는 적 앞에 섰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뿌연 연기 너머로 군사 몇 사람이 그를 지나 안쪽으로 물러났다. 이복남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살아남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들을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보내려면 지금 앞을 막아야 했다.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여러 번 났다. 그의 발밑에서 모래와 곡식 낟알이 섞였다. 전날 밤 장부에 쓰지 못한 이름들이 떠올랐다. 정담의 이름도 그 사이에 있었다. 이복남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입을 열 힘을 아껴 마지막으로 칼을 들었다. 곧 그의 몸이 골목 바닥으로 쓰러졌다.

 

성현(聖賢)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안쪽 길로 밀려가고 있었다. 잡고 있던 어른의 소매가 군중 사이에서 빠져나갔다. 한 번 소매를 놓치자, 앞사람과 뒷사람의 몸이 길을 막았다. 아이는 아버지가 일러 준 대로 성 안쪽에 있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 어디가 안쪽인지 알 수 없었다.

 

성현은 손바닥을 폈다. 남원에 들어오던 날 쥐고 있던 둥근 돌이 아직 있었다. 돌을 다시 쥐려는 순간, 뒤에서 달려온 군사의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는 손을 빼며 아버지를 부르려 했지만, 낯선 말소리와 발굽 소리에 자기 목소리마저 묻혔다. 손에서 빠진 돌 하나가 골목을 굴렀다. 이복남의 어린 아들 성현은 그렇게 왜군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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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

 

바다를 건넌 이름

 

1982년 봄,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는 남원으로 가는 길에서 가방을 여러 번 열었다. 꺼내 볼 것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넣어 둔 서류의 이름들이 혹시 달라지지는 않았는지, 그는 종이가 그대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오래 읽어 온 글자들이 처음으로 실제 땅과 만나는 날이었다.

 

그의 성은 ‘리노이에’, 한자로 쓰면 ‘李家’였다. 일본에서 그는 그 이름으로 학교에 다녔고 글을 썼다. 아사히신문사의 출판 부문에서 일하며 책을 만들었고, 아사히 학생신문사의 일을 맡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보내는 일을 오래 했지만, 자기 집안의 이야기는 선뜻 한 문장으로 쓰지 못했다.

 

집안의 기록에는 조선에서 온 어린 조상의 흔적이 있었다. 이성현(李聖賢)이라는 이름과 이경보(李慶甫)라는 이름이 서로 다른 계보에서 보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에는 ‘리노이에 모토히로’, 한자로 ‘李家元宥’라 적힌 이름이 이어졌다. 

한 사람을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개라는 사실은 그에게 처음부터 흥미로운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자기 뜻과 상관없이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다.

 

야마구치의 오래된 문서에는 조선에서 잡혀 온 사람이 모리 가문 아래에서 살아가며 ‘李家’ 가문의 선조가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뒤의 자손 가운데는 의술로 살아간 이들도 있었다. 

 

사로잡힌 아이가 어른이 되어 어떻게 말을 익히고, 누구에게 처음 자기 이름을 말했는지는 그 기록에 없었다. 문서가 알려 준 것은 후손이 이어졌다는 사실이었다. 문서가 비워 둔 곳에는 포로가 된 날의 공포와 그 뒤의 긴 삶이 있었다.

 

마사후미는 그 빈자리를 함부로 채우지 않으려 했다. 기자와 문필가로서 그는 한 장의 문서가 증명하는 것과 증명하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았다. 하지만 조상의 이야기를 읽을 때만은 종이에서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남원성에서 아버지를 잃고 바다 건너 낯선 집으로 들어간 아이. 그 아이가 살아남아 가족을 이루지 않았다면, 자기 이름도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1980년 그는 『찾아낸 이천 년 전의 뿌리―나를 인도한 흰 오얏꽃』이라는 책을 냈다. 책을 쓰고 나서도 찾아가야 할 자리는 남아 있었다. 종이 위에서만 이어지는 족보를 조상의 무덤과 남원이라는 장소 앞에 놓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1982년 봄 그는 바다를 건너왔다.

 

남원의 길은 1597년의 길과 같지 않았다. 차가 다녔고 사람들은 장을 보러 나갔다. 성의 모습도 그가 떠올렸던 전투의 성과는 달랐다. 그는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남원은 오래전의 참혹한 전투만으로 설명되는 곳이 아니었다. 어제와 오늘의 밥을 지으며 계속 살아온 고장이었다.

 

만인의총(萬人義塚) 앞에 섰을 때 그는 가져온 서류를 꺼내지 않았다. 거기에는 한 집안의 계보보다 훨씬 많은 죽음이 있었다. 이름이 남은 장수와 이름이 남지 않은 병졸, 성 안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을 함께 기리는 자리였다. 

마사후미는 오래 허리를 굽혔다. 자신이 찾아온 한 사람의 이름 때문에 이 자리의 다른 이름들을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어나서도 그는 한참 발을 떼지 못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로 글을 써 온 자신의 삶은 분명 자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삶의 출발점에 한 아이의 납치와 한 도시의 함락이 있었다. 피가 이어졌다는 말만으로는 그날의 고통을 다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침묵하면 자신이 알게 된 역사마저 다시 잃게 된다.

 

그는 이복남의 이름이 적힌 곳 앞에 섰다. 오래전 북문을 지켰다는 장수가 여기에는 글자로 남아 있었다. 남원성에서 아들이 어떻게 붙잡혔는지,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았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기록이 닿지 않는 곳에서 둘의 마지막 만남을 꾸며 낼 권리는 자기에게 없다고 여겼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된 이름을 읽고, 함께 쓰러진 사람들의 이름도 읽는 것이었다.

“이복남(李福男).”

 

입 밖에 내자 일본어 이름과 다른 울림이 났다. 하지만 낯설기만 한 이름은 아니었다. 집안의 문서에서 수없이 보아 온 글자들이 남원의 공기 속에서 소리가 되었다. 그는 아들이 ‘성현’이라 불렸을 때와 ‘모토히로’라 불렸을 때 사이에 놓인 바다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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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모사(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우계이씨 사당)

 

어느 이름도 그 바다를 없애 주지는 못했다. 다만 서로 다른 자리에서 끝까지 불린 이름들이 한 사람을 지워지지 않게 했다.

그 뒤 그는 선조들의 묘소를 찾았다. 절을 올리고 고개를 들자, 햇빛이 봉분의 풀이 자란 곳을 비추고 있었다. 마사후미는 특별한 표적을 찾지 않았다. 이 먼 길의 끝에서 무언가가 갑자기 해결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아이가 떠나야 했던 땅에 후손이 다시 발을 디딘 것만으로도, 오래 끊겨 있던 길 하나가 이어졌다고 느꼈다.

 

떠나기 전 그는 작은 수첩에 이름을 적었다. 이복남(李福男). 이성현(李聖賢). 이경보(李慶甫).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 이름 사이에 사선을 긋지 않았다. 어느 이름이 다른 이름을 밀어낸다고 적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에는 만인의총에서 읽은 다른 이름 몇 자를 덧붙였다. 집안 이야기의 마지막 줄을 혼자 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우계이씨(羽溪李氏) 족보에는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에게 3남 1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중 장남은 경여(慶餘)로 1613년 광해군 5년 무과에 등제하여 절충장군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이르렀다. 셋째 아들이 경보(慶寶)인데, 1591년생이며, 1597년 선조 30년 7세의 어린 나이에 적장에게 포로로 잡혀간 것이다. 

 

묘소 아래 길가에서 민들레가 홀씨를 날렸다. 마사후미는 수첩을 덮고 남원의 길로 걸어 나왔다. 

 

웅치에서 정담이 이복남을 보내고, 남원에서 이복남의 아들이 낯선 바다로 끌려간 뒤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마사후미는 들을 수 있는 이름을 하나도 지우지 않고,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기로 했다. 그는 그 일을 하러 다시 걸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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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이씨 본향(강릉시 옥계면 현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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