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동원대학교 교수, 국제교류원장)
예로부터 어른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의(信義)를 꼽아왔다. 명분을 강조했고 그 명분을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믿음이었다.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실제로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성현 중에서 누구보다도 신의를 강조했던 이는 바로 공자(孔子)였다.
제자 자공(子貢)이 정치를 함에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을 때, ‘정치하는 자가 백성에게 신의를 잃으면 천지간에 몸 둘 곳이 없어진다.라고 경고했다.
믿음(信)과 의리(義)는 정치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의 하나로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꼽는다. 누구와의 약속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사랑하는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각이 지나도 여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는 약속 장소인 다리 밑을 떠나지 않고 여인을 기다리다가 불어난 물을 피하지 못하고 익사하고 말았다.
남과의 약속을 어리석으리만치 고지식하게 믿는 경우를 일컫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이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엮은 『유세명언(喩世明言)』이라는 책에는 좀 더 섬뜩한 고사가 실려있다.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범거경(范巨卿)이라는 젊은이가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동상에 걸리는 바람에 다 죽게 되었다. 역시 과거를 보러 가던 장려(張勵)라는 젊은이가 그를 발견하고 며칠 동안 정성껏 돌봐주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시험 날짜를 놓치고 말았지만 서로 의기가 투합되어 의형제를 맺었다.
두 사람은 이듬해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장려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해가 바뀌어 약속한 날이 되자 장려는 음식을 차려놓고 친구를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 촛불이 꺼지고 방문이 소리 없이 저절로 열렸다. 초췌한 몰골에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범거경이 소리도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귀신의 몸으로 나타난 것이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범거경은 중양절 당일 저녁 무렵에야 뒤늦게 친구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해 냈다. 천 리 길을 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너무도 놀라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에게 ‘귀신은 천 리 길도 단숨에 갈 수 있다.’라는 옛말이 생각났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부엌으로 들어가 칼을 잡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귀신이 된 몸으로 단숨에 천 리 길을 달려와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비록 융통성과는 담을 쌓았더라도 약속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옛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준다. 오늘날 현실이 그 반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양극화된 환경에서 정치인들은 개인의 진실성보다는 정당에 충성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정치인들은 그런 점을 악용해서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습관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지지자들이 자신들을 옹호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만들어 이를 이용하려 드는 행태가 가관이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다. “우매한 대중은 아무 생각이 없다.”라고.
“정치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결코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이 자기 말을 믿으면 화들짝 놀란다.”라고 드골은 빈정거렸다. 일찍이 흐루시초프도 “정치인은 다 같다. 그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권 행태가 한심하다는 여론이 저잣거리에서 들끓고 있다. 국익은 온데간데없고 개인과 지역, 당리당략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시급한 현안들은 책상 위에 쌓여 낮잠만 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썩은 나무로는 도장을 새길 수 없고, 시궁창의 흙으로는 담장을 바를 수 없다(朽木不可雕 糞土之牆不可杇也).’라고 했다.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보고 하도 한심한 나머지 공자가 한 말이다. 『논어(論語)』 「공야장(公冶長)」 편에 실려있다.
초심을 잃지 않고 미생과 범거경의 고사처럼 약속을 목숨보다 더 무겁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은 헛된 꿈인가?
개구리가 튀어나온다는 경칩(驚蟄)이 지났다. 꿈틀거리는 대지의 용틀임이 전해진다. 이제 곧 먼 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들판은 봄의 싱그러운 자태를 드러낼 것이다.
세상은 절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는다. 늘 순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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