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자그마한 밭농사를 지었다. 밭 귀퉁이에 농기구와 농산물을 보관하고, 쉼터로도 쓸 수 있도록 컨테이너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컨테이너의 허전한 벽을 그대로 둘 수 없어 무엇으로 채울까 하다가 쇠귀 선생 글귀와 이철수 선생 판화를 떠올렸다. 감히 흉내라도 내보자고 마음먹었다.
이철수 선생 판화집을 펼치며 두 분께 마음으로 사과부터 올렸다. 농사짓는 촌놈의 서투른 모방이니 부디 너그러이 봐 주시라.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열고,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킨다.'
쇠귀 선생 글귀다.
나름대로 그 뜻을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 민중은 때로는 물이요, 풀이요, 불이요, 바람이다. 이름 없이 불어와 역사를 움직이는 바람이다. 이 땅의 오늘은 그 바람들이 모여 열어 온 새날의 기록이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채 끝내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그 그림자를 되풀이하는 세력들이 일으킨 내란 속에서도 민중은 끝내 정의로운 역사를 써 왔다.
이처럼 쇠귀 선생 글귀는 마치 미리 남겨 둔 당부처럼 들린다. 우리 스스로 바람이 되고, 새날이 되고, 꽃이 되어 이 땅을 지키라고.
이철수 선생의 판화에는 어느 두 사람이 꽃으로 장식된 깃발을 들고 걸어 나가는 장면이다. 꽃이 깃발이 되고 깃발이 꽃이 되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숨결처럼 흔들리며 함께 나아간다.
그들은 이름 없이 가난하고 정직하게 하루의 노동을 하며 흙처럼 낮은 자리에서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걸음이 모여 길이 되었고, 그 길 위에 꽃은 다시 피어나 이 땅의 역사가 되었다.
바로 그렇게, 이름 없이 살아오며 끝내 이 땅을 지켜 낸 민중의 한 장면이 판화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찬란하게 흔들리고 있다. 쇠귀 선생의 글귀와 딱 맞게 그려진 멋들어진 판화였다.
재주가 없어 먹붓 대신 페인트 붓을 들고, 글씨도 그림도 천천히 서툴게 채워 갔다. 쉬엄쉬엄하다 보니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 졸작이 다 된 날이 2020년 4월 3일이다.
어느새 다섯 해가 흘렀다. 지금은 사진으로 추억 한 장이 남았다. 지금도 고향 밭에는 주인 없는 컨테이너 하나와 몇 그루 과일나무가 서 있다. 겨울바람 속에서도 나무들의 눈망울은 다가올 봄을 이미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자라나 때가 오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K민주주의 또한 그러하다. 흔들렸으나 꺾이지 않았고, 멈춘 듯 보였으나 다시 꽃처럼 피어난다.
오호, 쾌재여!
작가 소개
나는 요즈음은 백수의 몸이지만 연대체를 쓰는 재미가 즐겁다. 그것은 쇠귀 선생의 글씨 세계를 잇는 서예가 김성장 선생을 만나 연대체의 의미에 눈을 떴기 때문이다. 아직은 초보라 스스로 부끄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독특하고 파격의 글씨체를 쓰는 순간만큼은 더없이 행복하다.
1985년 문단에 나와 한국작가회의,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대구
경북작가회의, 경북아동문학회, 민족문제연구소, 세종붓길회 등에서 활동한다. 학급문집, 동시집, 산문집 등과 동인지 다수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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