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사카(大阪)에서 피어난 조선(朝鮮)의 혼(魂), 이복남(李福男) 장군
웅치고개가 시작되는 곳. (진안군 부귀면 산정리에서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월상마을)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
금산을 점령한 왜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그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에게 1만 명의 군사로 별군(別軍)을 편성하여 진안과 용담을 거쳐 웅치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진안 웅치의 방어는 김제군수 정담을 중심으로 동복현감 황진, 나주판관 이복남에게 그 책임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남원성이 위기에 빠지자, 이광은 웅치로 보내려던 황진의 부대를 남원 방향으로 긴급 투입하기로 했다. 이 때문에 웅치로 향하던 황진의 부대는 말머리를 남원으로 돌렸다.
1592년 8월 8일(음력 7월 2일)경에 남원성으로 이동하던 황진 부대는 웅치로 가서 전력을 보강하라는 전라도관찰사 이광의 명령을 받아 다시 웅치 방향으로 향하다가 이곳 안덕원에 이르러 주둔하게 된 것이다.
전라도관찰사 이광은 전략도 전술도 없이 그때그때 임시 처방으로 군사를 운용하고 있었다. 군사 지식이 없는 무능한 지휘관을 가진 조선군이 오랜 세월 전투로 단련된 왜군을 상대하기란 사실상 처음부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거기에다 조총(鳥銃)이라는 당시로서는 무시무시한 첨단무기를 가진 왜군 앞에서 어쩌면 전술이라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었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황진이 안덕원에 주둔하여 진을 편성하기 시작할 때, 왜군이 진안을 거쳐 웅치 방향으로 접근하여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지 불과 며칠 만에 웅치전투에서 후퇴한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삼삼오오 안덕원 들판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부상 중이었고 손에 든 무기도 변변치 않았다.
그 와중에 이복남과 황박 등이 무사히 웅치 현장을 벗어나 이곳 안덕원에서 진(陣)을 치고 있던 동복현감 황진의 관군에게 합류한 것이다.
이복남과 황박은 황진을 만나 웅치전투의 상황을 전달하고, 곧 왜군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므로 방어 준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동복현감 황진은 나주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의 병력을 다시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사방이 어둑해질 때까지 방어진지를 다시 구축했다.
마침내 뜨거웠던 해가 서쪽 들판으로 넘어가며 땅거미가 몰려오자, 모두 진지로 찾아들어 준비에 들어갔다.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이 오자 맑은 하늘에는 반달이 걸려 주변을 밝혀 주었다.
하루 종일 웅치에서 후퇴해 오느라 피곤했던 군사들뿐만 아니라 진지를 구축하느라 힘을 쏟았던 군사들은 이내 참호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낮 동안 들판에 서있는 느티나무와 미루나무에서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끊기자, 이번에는 모기떼가 극성스럽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지쳐있었던 군사들의 잠을 깨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안덕원 들판의 밤은 조선군 병사들의 코골이 소리도 삼키면서 깊어만 가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반격
웅치의 총성이 멎었을 때, 산길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쓰러진 사람이 더 많았다. 나주판관 이복남과 의병장 황박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전주 동쪽 10여 리에 위치한 안덕원으로 물러났다.
물러났다는 말은 살아남았다는 뜻이었으나, 누구도 그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다. 군사들의 옷과 갑옷에는 웅치에서 묻혀 온 흙과 피가 엉겨 있었고, 빈 전통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벼운 소리를 냈다. 부상자를 부축하는 사람도, 숨이 끊어진 동료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복남의 머릿속에서는 정담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떠나지 않았다. 웅치의 방어선이 하나씩 무너지고 왜군이 정상부로 밀려들던 때였다.
정담은 이복남을 불러 남은 군사를 이끌고 안덕원으로 물러나라고 했다.
“이 판관(李判官)은 군사를 데리고 먼저 가시오.”
“군수께서도 함께 물러나셔야 합니다.”
“아니오. 나는 이곳에 남아 이 고개를 끝까지 지키겠소.”
정담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복남은 그 허리춤에 있는 화살통을 바라보았다. 통에 남은 화살이 많지 않았다. 주위에는 이봉과 강운, 박형길을 비롯해 마지막까지 싸우겠다고 나선 군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도 자신들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알고 있었다.
김제군수 정담 교지
정담이 그의 등을 밀었다. 이복남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 했다.
“전열을 수습하면 군사들을 모아 곧 돌아오겠습니다.”
정담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흐트러진 갑옷 끈을 조이고 왜장바위 쪽으로 몰려드는 왜군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복남과 황박은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장황한 당부도,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입에 올리기에는 세 사람 모두 전장의 이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복남과 황박이 수하들을 데리고 급경사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내려가는 자리에는 흙먼지가 일었다.
안덕원에 도착한 이복남은 슬퍼할 겨를조차 군사들에게 허락하지 않았다. 왜군이 웅치를 넘었다면 다음 목표는 전주부였다. 전주부가 무너지면 전라도의 곡창과 병력이 적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웅치에서 정담이 죽음으로 벌어 준 시간을 눈물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쓸 수 있는 활과 화살부터 모아라. 다친 자 가운데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뒤로 물러나 활줄을 손질하라. 창을 들 힘이 남은 사람은 길목을 지킨다.”
군사들은 대답 대신 몸을 움직였다. 부러진 창대는 짧게 잘라 다시 묶었고, 화살은 적에게서 빼낸 것까지 추려 전통에 나누어 담았다.
이복남과 황박은 안덕원의 지세를 살폈다. 전주로 이어지는 길목은 넓지 않았고, 숲과 비탈을 이용하면 지친 적을 기습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병력을 길가에 드러내 놓지 않았다. 숲속과 언덕 뒤편, 골짜기가 굽어지는 곳마다 군사를 나누어 숨겼다.
얼마 뒤 웅치를 넘어온 왜군의 선두가 안덕원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고개를 돌파했다는 사실에 취해 있었지만, 행렬의 모습은 온전한 승전군과 거리가 멀었다. 피로에 절어 어깨가 내려앉은 병사가 많았고, 부상자를 부축하거나 등에 업은 자들도 보였다.
웅치에서 부대를 지휘하던 중간 장수들을 잃은 탓에 대열 곳곳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왜군은 눈앞에 전주가 있다는 생각으로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이복남은 적의 선두가 골짜기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활을 들지 않았다. 웅치에서 살아남은 군사들은 숨소리까지 낮춘 채 그의 손만 바라보았다.
마침내 이복남이 활을 당겨 대열 한가운데를 향해 화살을 놓았다. 그 한 발의 신호로 안덕원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숲과 비탈에서 조선군의 화살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선두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왜군이 서로 부딪쳤고, 좁은 길에서 조총수가 사격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 황박의 군사들은 측면으로 내려가 왜군의 허리를 끊었다. 웅치에서 수세에 몰렸던 조선군이 이번에는 지형과 기습으로 적을 흔들었다.
“웅치에서 물러선 까닭을 보여 주어라!”
이복남의 명령과 함께 군사들이 숲을 박차고 나왔다. 숨어 있던 조선군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화살 하나와 창끝 한 번에 왜장바위에 남겨 두고 온 전우들의 원한이 실렸다.
이미 한 차례 죽음을 본 조선군은 황망하게 쏘아대는 왜군의 총구 앞에서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싸움이 한창일 때 동복현감 황진의 군사가 전장에 도착했다. 황진은 왜군이 조선군의 매복에 붙들려 있음을 알아차리고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군사들이 후방을 공격하자 왜군의 대열은 앞뒤에서 동시에 흔들렸다.
진퇴양난에 빠진 왜군이 우왕좌왕하며 길을 잃었다. 전진하면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가 막았고, 물러서면 황진의 병력이 길을 끊었다. 왜군은 서서히 궤멸되기 시작했다.
안덕원의 골짜기에는 다시 조총 소리와 활시위 소리가 뒤섞였다. 그러나 웅치에서와 달리 이번에는 왜군이 쫓기고 있었다. 안덕원의 싸움은 살아남은 자들이 죽은 자들의 희생에 답하는 반격이자, 웅치에서 끝내 이루지 못한 승리를 되찾으려는 복수혈전이었다.
왜장바위에 숙인 적의 머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지휘 아래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끈 왜군은 웅치를 돌파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길을 얻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웅치를 오르는 좁고 험한 고갯길에서 수많은 병사가 조선군의 화살과 돌에 쓰러졌다.
부대의 앞뒤를 잇고 병사들을 통솔하던 중간 지휘자들도 적지 않게 목숨을 잃었다. 웅치 정상부를 차지했을 때 그들의 군세는 외형상 승리한 군대였으나, 내부에서는 명령과 대열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안덕원에서의 예상치 못한 조선군의 기습은 그 상처를 다시 벌려 놓았다. 매복한 이복남과 황박의 군사가 전진을 막고, 뒤늦게 합류한 황진의 부대가 후방을 압박했다. 왜군은 물러설 길을 잃고 급격하게 무너졌다.
안코쿠지는 더 나아갈 경우 전주성을 얻기는커녕 퇴로마저 잃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웅치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할 병력도, 안덕원에서 다시 결전을 벌일 여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왜군 진영에 퇴각을 알리는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쫓기듯 대열을 돌렸다. 안덕원에 들어설 때 앞세웠던 깃발은 축 늘어졌고, 부상병들의 신음이 행렬을 따라 이어졌다.
조선군은 적이 전열을 정비하지 못하도록 뒤를 압박했다. 웅치를 넘어 전주를 삼키려던 군대가 불과 며칠 만에 지나온 길을 되짚어 진안 방면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퇴각하던 왜군이 다시 웅치 정상부에 이르자 행렬이 서서히 멈추었다. 왜장바위 아래에는 조선군의 시신이 겹겹이 쓰러져 있었다. 싸움이 끝난 뒤에도 누구 하나 그들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부러진 활과 창, 찢긴 옷자락과 깃발이 시신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바위틈에 고인 피는 검게 굳어 있었고, 산바람이 불 때마다 주인을 잃은 깃발 한 자락이 낮은 소리를 냈다.
정담은 바위 가까이에 쓰러져 있었다. 그 곁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싸운 이봉과 강운, 박형길이 서로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었다. 살아 있을 때는 군수와 장수, 군관과 병졸로 불렸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두 한 고개를 지키다 쓰러진 조선군이었다.
왜군 병사들 사이에서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들은 눈앞의 시신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고 있었다.
화살이 떨어진 뒤에도 칼을 들었고, 칼이 부러진 뒤에는 창대를 붙잡았다. 상처를 입고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몸으로 고갯길을 막았다. 적이었으나 그 죽음까지 업신여길 수는 없었다.
안코쿠지는 말에서 내려 왜장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말없이 전장을 바라본 그는 조선군의 시신을 거두도록 명했다. 왜군 병사들은 흩어진 시신을 한곳으로 옮겼다. 누구의 부하인지, 어느 고을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이들도 함께 거두어 묻었다.
왜장 안코쿠지는 무덤 앞에는 나무패 하나가 세워도록 했다.
‘弔朝鮮國忠肝義膽.’ (조선군의 충성스러운 마음과 의로운 용기에 삼가 조의를 표하다.)
안코쿠지는 패말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 뒤에 서 있던 왜군 장수와 병사들도 하나둘 머리를 숙였다. 승자의 자만도, 패자를 향한 조롱도 그 자리에는 없었다. 웅치를 얻고도 전주를 얻지 못한 자들이 목숨으로 길을 막아선 이들의 죽음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산바람이 왜장바위를 돌아 무덤 위를 지나갔다. 잠시 뒤 왜군은 다시 행군을 시작했다. 발걸음은 고개를 넘어올 때보다 무거웠다. 그들이 남긴 나무패는 저물어 가는 웅치에 홀로 서 있었다.
정담과 조선군은 모두 쓰러졌으나, 적군에게조차 자신들의 충의와 용맹을 인정하게 했다. 육신은 고개에 묻혔지만, 그들이 지키려 했던 전주는 끝내 왜군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
웅치전투전적비
웅치에서 시작된 승리
안덕원전투를 웅치전투와 완전히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와 지휘 양상은 달랐지만, 두 싸움은 전주와 호남을 지키기 위해 연이어 벌어진 하나의 방어전이었다.
웅치에서 정담이 목숨을 걸고 적의 진격을 늦추지 않았다면 이복남과 황박은 남은 병력을 수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진의 군사가 안덕원에 도착해 반격에 가세할 시간도 얻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담은 웅치에서 승전보를 듣지 못했으며, 왜군이 안덕원에서 패퇴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안덕원의 승리는 그가 웅치에서 벌어 준 시간 위에서 이루어졌다. 정담은 전장에서 패한 장수가 아니라 다음 전투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을 자신의 목숨으로 마련한 장수였다.
왜군이 완전히 물러난 뒤 안덕원에는 짧은 환호가 일었다. 군사들은 서로의 생사를 확인했고, 부상자들은 땅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황진과 황박은 흩어진 대열을 수습하고 적의 재공격에 대비했다. 누구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전주로 향하던 왜군을 돌려세웠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복남은 칼을 칼집에 넣은 뒤에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칼날에 묻은 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동쪽 산줄기를 바라보았다. 겹겹이 이어진 산 너머에 웅치가 있었다. 정담과 이봉, 강운과 박형길, 그리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수많은 군사가 그곳에 누워 있었다.
이복남은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먼 고갯마루를 향해 몸을 돌린 그는 두 손으로 투구를 받쳐 들고 허리를 깊이 굽혔다. 기쁨에 차 있던 군사들의 목소리가 하나씩 멎었다.
황박과 황진도 무기를 내렸다. 살아남은 장졸들이 차례로 동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군수께서 지키셨소.”
이복남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것뿐이었다. 승리를 알리는 외침도, 원수를 모두 갚았다는 선언도 없었다. 정담이 없는 자리에서 승리를 자랑할 수 없었고, 웅치에 남겨진 이들을 생각하면 기쁨을 앞세울 수도 없었다.
산 너머의 대답 없는 사람에게 살아남은 장수가 바칠 수 있는 것은 짧은 한마디와 오래 이어진 묵례뿐이었다. 조선군은 모두 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조용한 흐느낌은 이어졌다.
이복남은 한참 뒤에야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웅치에서 물러날 때 보았던 김제군수 정담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흐트러진 갑옷 끈을 조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그의 얼굴이었다.
그때의 침묵이 이제야 분명한 말로 들리는 듯했다. 고개를 지키는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만 전주를 지키는 싸움은 그대들이 이어 가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왜군은 웅치를 넘었으나 전주를 얻지 못했다. 안덕원까지 진출했지만, 조선군의 결사 항전과 반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진안 방면으로 물러났다.
김제군수 정담은 적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지만, 웅치에서 왜군의 병력과 기세를 소진시켜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살아남은 조선군이 안덕원에서 다시 싸울 수 있는 시간을 남겼다.
왜장바위에서 바라본 안덕원 방향
그 결과 임진왜란 초기 전주성과 호남의 곡창지대는 지켜졌다. 전라도의 병력과 군량은 이후 조선이 전쟁을 이어 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웅치에서 흘린 피가 한 고개만 지킨 것이 아니라 나라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보존한 셈이었다.
안덕원에서 전투는 1592년 7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일어났다. 안덕원의 승전에는 웅치의 패배가 남긴 뜻이 스며 있다.
승리와 패배는 언제나 살아남은 자의 숫자로만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목숨을 바쳐 적의 발을 붙들고 다음 싸움의 길을 열었다면, 그 죽음은 이미 패배를 넘어선다.
김제군수 정담은 살아서 승리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지켜낸 시간 속에서 이복남과 황박은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황진의 지원군은 안덕원에 도착했다. 왜군이 왜장바위에 패말을 세우고 머리를 숙인 까닭도 그 죽음이 한 장수의 최후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웅치에서 김제군수 정담은 쓰러졌으나 안덕원에서 그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이 동쪽 고개를 향해 허리를 굽힌 순간, 정담의 패배는 비로소 전주부와 호남을 지켜낸 조선군의 승리로 완성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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