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모인 친구들이 음식을 먹으며 덕담을 나눈다. 서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요즈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일들이 화제로 올랐다. 식사를 마치자 후식으로 여러 가지 과일이 나왔다. 그 가운데 유난히 빛깔이 고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귤이 보였다. 얼른 집어 들어 껍질을 까니 이게 뭔가. 겉만 번지르르했지 실상 그 속은 반쯤 상해 있었다. 상한 귤을 보니 문득 한 고사(故事)가 떠올랐다.
장 원 섭 (경민대학교 교수)
주원장(朱元璋)을 도와 명(明)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했던 인물 가운데 유기(劉基, 1311~1375)라는 사람이 있었다. 홍건적이 일어나 어지럽던 당시에 송렴(宋濂), 장일(章溢), 섭침(葉琛)과 함께 절강(浙江)의 산악지역에 은거하며 ‘4대 선생’으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인데, 훗날 주원장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모두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고 그를 도와 명나라를 세우는 데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어느 날 유기가 귤(柑)을 사려고 항주(杭州)의 저자거리에 나왔다. 그 저자거리에 소문난 한 과일장사가 있었는데 감귤을 갈무리하는 솜씨가 남달랐는지 겨울을 지내고 여름을 나도 귤이 무르지 않은 채 물이 선연하였다. 마치 바탕은 구슬이요 색깔은 황금 같아 다른 가게에 비해 값이 열 배나 비싸도 금세 동이 나곤 했다.
유기는 이미 입소문을 익히 들은지라 곧바로 그의 가게를 찾았다. 그는 망설이다가 유난히 색깔이 곱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귤을 샀다. 그런데 귤을 까보니 딴판이었다. 과육의 수분이 빠져 솜덩이 같은데다가 이상한 냄새까지 나지 않은가.
“당신 이거 사기 친 것 아니오?” 화가 난 유기가 따지고 나섰다.
“사람들은 당신이 파는 귤은 변두(籩豆)에 담아 제사도 받들고 손님에게 대접하는데, 이렇게 겉만 번지르르하게 하여 우매하고 물건을 잘 볼 줄 모르는 사람을 현혹하다니……”
그러나 장사치는 태연했다.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하는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오늘날 호부(虎符)를 차고 장군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 나라의 간성(干城)인 것 같지만 그들이 과연 병법이나 제대로 알고 있소? 큰 관(冠)을 높이 쓰고 긴 띠를 두른 사람들이 조정의 인재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과연 탁월한 공적을 세우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소?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도 막을 줄을 모르고 백성이 곤경에 빠져도 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오?”
그의 말은 청산유수와 같이 이어진다.
“관리들이 교활해도 제재할 줄 모르고 법령이 무너져도 고칠 줄 모르며 앉은 채로 국고나 축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좋은 자리에 앉아 제 뱃속만 채우는 자들이 저들이오. 지금 당신은 그런 것들은 모른 체하면서 왜 남의 귤만 헐뜯고 있는 거요?”
귤 장수의 항변을 들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리에 맞지 않거나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유기는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귤을 들고 입맛을 다시며 발길을 돌린다.
명(明)의 개국공신으로서 홍문관 학사를 수여받고 성의백(誠意伯)으로 봉해졌던 유기가 지은《성의백문집(誠意伯文集)》에 수록된〈매감자언(賣柑者言)〉즉, ‘귤 장수의 말’에 실린 내용이다.
6월에 실시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길거리에는 벌써 예비후보자들의 대형 현수막이 내걸리고, 오가는 버스정류장과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서는 명함돌리기가 시작되었다.
선거가 다가오자 그동안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어 치열하게 진실공방을 벌이던 정치인과 단체장들의 ‘뇌물수수사건’에 대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사람만 다르지 그 악취는 해마다 반복된다(年年歲歲臭相似 歲歲年年人不同)’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고질병을 확인하니 그저 씁쓸한 생각뿐이다. 일일이 그 속을 갈라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더럽고 지저분한 일이라는 게 모두 어두운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당사자들이 입을 닫으면 그 실상을 제대로 밝혀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국민공천배심원단제와 시민공천배심원제를 도입해 비리 전력자들에게 공천을 주지 않기로 하는 등 투명공천, 개혁공천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며칠이 안 가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던 비리 전력자를 영입하거나 공천 길을 슬그머니 열어주는 구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단 선거에서 이기고 보자는 속셈이다. 경제적인 어려움에 삶이 고단한 국민들을 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화나게 하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창밖을 보니 먼 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봄은 벌써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다. 봄날 오후에 겉만 번지르르한 귤 하나를 들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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