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에 오늘날 운남성(雲南省)과 귀주성(貴州省) 일대에 약 250여 년 간 존속했던 ‘야랑(夜郞)’이라는 비교적 큰 부족국이 있었다.
처음에는 초(楚)나라에 속해 있다가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자 진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진나라가 망한 후에는 한(漢)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갔는데, 한나라가 북방의 흉노 때문에 서남지방을 돌보지 못하는 틈을 타 야랑국도 다른 수 십여 소수민족과 함께 스스로 왕을 칭하고 자립했다.
당시 야랑국의 왕 다동(多同)은 자신이 다스리는 야랑국이 천하에서 가장 큰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동은 지역을 순시하다가 부하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나라가 제일 큰가?”
“야랑이 제일 크옵니다.” 다동이 앞에 있는 높은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천하에 이보다 더 높은 산이 있느냐?”
“이보다 더 높은 산은 없사옵니다.” 강가에 이른 다동이 또 물었다.
“이 강이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이겠지?”
“물론이지요.”라고 신하가 대답했다. 다동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무제(漢武帝)의 사자(使者)가 인도로 가던 길에 야랑국을 통과하게 되었다. 다동이 사자에게 물었다.
“한(漢)과 야랑(夜郞) 가운데 어느 나라가 더 큰가?” 한의 사자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한나라는 수십 개 군(郡)을 가지고 있는데 야랑은 그 한 군만도 못합니다.” 놀란 다동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사기(史記)》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에 실린 글로, 세상물정을 모르고 혼자 우쭐대는 어리석음을 비꼬는 ‘야랑자대(夜郞自大)’라는 고사성어로 전해지고 있다.
선거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선거벽보와 배달된 선거공보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니 후보자 모두 저마다 잘난 사람들뿐이다. 적힌 대로 보면 어디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뭔가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겸손함이 묻어나지 않는 오만함으로 가득한 자기자랑 투성이인 내용 때문이리라.
자사(子思)가 지은《중용(中庸)》제1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군자의 도(道)는 비유컨대 먼 곳을 감에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고, 높은 곳에 오름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출발하는 것과 같다(君子之道 辟如行遠必自邇 辟如登高必自卑).”
오늘날 고사성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등고자비(登高自卑)’라는 말은 바로 이 구절에서 유래했다. 즉,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으로 모든 일은 순서에 맞게 기본이 되는 것부터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우리 속담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맹자(孟子)도 모름지기 군자는 낮은 데서부터 수양을 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흐르는 물은 그 성질이 낮은 웅덩이를 먼저 채워 놓지 않고서는 앞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군자도 이와 같이 도(道)에 그 뜻을 둔다면 아래에서부터 수양을 쌓지 않고서는 높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孟子》 盡心上篇).”라고 했다.
“1층, 2층은 필요 없으니 아름다운 3층만 지으라.” 불경(佛經)에 나오는 이야기로 이웃집 3층 건물의 아름다운 정자를 탐내던 이가 목수를 불러 했다는 말이다. 노력해 가며 좋은 업(業)은 쌓으려 하지 않고 기초없이 허황된 결과만 바라는 어리석음을 꼬집는 이야기다.
성경에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태복음 23:12)라고 가르치고 있다. 설령 학문이나 진리의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한들, 처음부터 스스로 몸을 낮추어 아래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서는 그 경지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맡겨만 준다면 못해낼 것이 하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스스로 잘난 많은 인재들을 가지고도 우리 사회는 왜 쓸 만한 사람이 없다고 아쉬워만 할까? 이렇게 많은 인재들이 그동안 어디에 꼭꼭 숨어 있었기에 선거 때만 되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다가 선거가 끝나면 바람처럼 사라지는 걸까? 그러나 아쉬워만 할 것도 아니다. 이들의 모습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우리는 세상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니 말이다.
더 높은 세상을 꿈꾸는 그대여.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턱대고 높은 데만 오르려 하지 말라.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높이 오르려면 낮은 데서부터 출발하라(登高自卑)”라 하였거늘, 스스로 몸을 더욱 낮추어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라.
그리고 혹시 나 자신이 우물 안에 스스로 갇혀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자신을 냉철하게 돌아보자.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야랑후 다동의 어리석음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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