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일
삶이 심드렁해지면 배낭 하나 짊어지고 나그네가 된다. 내 나라 어느 한적한 구석이라도 좋고, 풍물(風物)이 다른 이국(異國)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시인, 수필가)
더위가 한 풀 꺾이는 초가을에 중국 윈난성(雲南省)을 향해 길을 나선다. “어디를 또 가느냐?”는 주위의 인사에 소이부답(笑而不答)하면서 살며시 흘리는 내자(內子)의 미소가 밉지 않다.
생동감이 넘실대는 공항 라운지,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도 즐거움이다. 어디에 비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우리의 관문. 세계를 향해 도약하는 대한민국의 웅지가 느껴지는 곳이다.
상전벽해(桑田碧海)요, 환골탈태(換骨奪胎)다. 불과 오십여 년 전, 전장(戰場)의 폐허 속에 세계에서 최 빈민국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이웃의 구호품으로 허기를 달래던 질곡의 터널을 용케도 극복하고 이제는 주위를 도울 수 있는 당당한 모습으로 탈바꿈 했다.
한국과 중국. 운명 같은 소국(小國)과 대국(大國)의 함수관계다. 어찌 이뿐이랴.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간교한 왜국(倭國)이 가로막고 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조아리기 그 얼마련가.
대국에 일고 있는 한류(韓流)열기, 이는 분명 천지개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화(中華)의 구석구석을 소국의 민초(民草)들이 물결을 이룬다. 하루에도 백 여 편이 넘는 비행기가 오르내리고, 그 수가 한 해에 오백 만에 이른다고 들었다. 나 같은 소시민도 다섯 번째 걸음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쥐구멍에 볕이라도 든 것일까. 대국인?(大國人)이 메는 가마도 타 보았고, 내미는 손길에 퇴계선생이 그려진 지폐도 호기 있게 던져 보았다. 경망스러운 토끼와 태산 같은 거북이를 느끼면서도 말이다. 거북이를 타고 놀 줄 아는 토끼, 우리의 미래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밤하늘을 네 시간 여 날아 춘성(春城)으로도 불리는 곤명에 내린다. 해발 천 팔백 여 미터, 평균기온 15°C, 사시사철 꽃이 피는 낭만의 동네다.
우기가 끝나고 건기로 접어드는 계절, 우리의 초가을 날씨라고나 할까. 원통사와 취호공원을 둘러보고, 이천오백 미터 높이의 서산(西山)을 리프트를 타고 오른다. 발아래 펼쳐진 곤명호를 내려다보며 가픈 숨을 고른다. 용문(龍門)을 향한 내리막 계단이 천 길이요, 만 길이다.
「만만디」의 저력일까. 수직으로 동굴을 뚫어 층계를 만들고, 옆구리를 도려내어 길을 열었다. 그 기간이 무려 칠십여 년, 하늘을 향해 긴 사다리 하나를 걸친 격이다. 천애(天涯)의 난간에 도교(道敎)의 전각(殿閣)들이 묘기를 부리듯 걸려 있다. 인위(人爲)와 무위(無爲)는 차치하고라도, 인간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에 탄성이 절로 난다.
모닥불을 피우듯 향을 사르며 복을 비는 중화인(中華人)들, 그들에게 어찌 변증법(辨證法)적 유물론(唯物論)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지배자의 통치놀음에 애꿎은 백성들만 추풍의 낙엽처럼 스러져 갔다. 그 잘난 사상(思想)도 결국은 “고양이 색깔론”으로 흐지부지되었기에 이르는 말이다.
서안(西安)에 가면 무덤을 보고, 곤명에 가면 돌을 보라 했던가. 곤명석림(昆明石林)은 장강삼협(長江三狹) 계림산수(桂林山水)와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풍경구(風景區)의 하나다. 눈앞에 도열한 석림의 장관, 좋다. 정겹다. 보고 또 보고 싶고, 그냥 그저 머물고 싶다.
높은 산도 아니요, 깊은 골도 없다. 나지막한 언덕에 끝 간 데를 모르는 돌들의 숲이, 얽히어 절경(絶景)이요 설키며 비경(秘境)이다.
자락 자락에 잔디가 푸르고 드문드문 대숲이 어우러져 운치를 더한다. 사이사이 온갖 꽃들이 고개를 내밀고, 크고 작은 호수가 돌들의 그림자를 포근히 안는다. 천태만상 기기묘묘한 돌 숲길에 몽환(夢幻)을 앓다가 마음 한 자락 남겨두고 뒤돌아선다.
물소리가 지축을 뒤흔드는 구향동굴에 빨려든다. 음부를 연상케 하는 대협곡, 용궁을 방불케 하는 화려한 신전, 선녀궁, 아가채, 그 중 소리를 들어보라는 관음폭포(觀音瀑布)는 단연 압권이다. 큰물이 요동치는 지하 동굴, 어디에 또 있으랴 싶다.
열대화초 사이로 둠벙둠벙 고이고 넘치는 온천 사이를 오가며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망중한을 즐긴다. 그림자 같은 내 반려(伴侶), 연리지(連理枝)가 어디 따로 있으랴.
흐뭇하다. 뿌듯하다. 여행은 내 삶에 생기요 활력소다. 걸을 수 있는 한 내 기꺼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나그네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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