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
90세가 넘어 병석에 누운 할머니 유씨를 향한 그의 지극한 효성이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신(臣) 밀(密)은 올해 44세이고 할머니 유씨는 96세이니, 신이 폐하께 절의를 다할 날은 많이 남았으나 할머니를 봉양해야 할 날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미물인 까마귀도 다 자라면 먹이를 물어다 늙은 어미에게 먹여주며 은혜를 갚는다고 했듯이, 부디 저로 하여금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봉양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라나이다(烏鳥私情, 願乞終養). 신의 고충은 촉(蜀) 땅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양주와 익주의 관리들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의 어리석은 정성을 가엾게 여기시어 작은 뜻을 들어주십시오. 할머니께서 다행히 여생을 보존할 수 있다면, 신은 살아서는 마땅히 목숨을 바쳐 폐하를 섬길 것이며 죽어서도 반드시 결초보은할 것입니다. 신은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절하며 표(表)를 올려 아뢰나이다.”
무제는 이 글을 읽고 이밀의 효심에 감동하여 관직에 임명하려던 뜻을 거둔 것은 물론, 유씨를 잘 봉양할 수 있도록 노비와 식량까지 하사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오조사정(烏鳥私情) 또는 ’오조지정(烏鳥之情)‘은 ’까마귀의 효성‘이라는 뜻으로, 어린 까마귀가 성장하면 자기를 길러준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여가며 은혜를 갚듯이, 부모를 섬기는 자식의 지극한 효심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회자되어 왔다. 이밀의 《진정표》는 제갈량(諸葛亮)의 《출사표(出師表)》, 한유(韓愈)의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더불어 중국의 3대 명문에 속한다. 예로부터 《진정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효자가 아니며, 《출사표》를 읽고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
최근 부모를 가족이 함께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정작 그 중간에 끼어있는 베이비붐 세대는 자녀 양육과 노부모 부양 부담 때문에 은퇴 준비는커녕 먹고살기에 급급한 게 현실이다. 게다가 가정을 구성하는 기본요건인 결혼에 대해서는 ‘안 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청소년이 늘고 있다. 이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여러 기관들이 내놓은 보고서에 나타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청소년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부모를 가족이 돌봐야 한다’는 응답은 35.6%로 10년 전인 2002년(67.1%)의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반면, ‘가족과 정부, 사회가 함께 돌봐야 한다’는 응답은 50%로 2002년(20.5%)보다 두 배 이상 많아졌다. ‘부모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은 10.9%로 별 차이가 없었다. 결혼에 대해서도 ‘해야 한다’는 응답이 54.9%로 2002년(61.2%)보다 줄어든 반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는 인식은 34.1%에서 39.8%로 높아졌다. 이런 문제를 반영이라는 하듯이 최근에는 황혼이혼마저 늘어 가정 해체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가정이 해체되는 원인에는 경제적인 문제가 발단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경제적 부(富) 만으로 가정의 행복을 저울질하는 태도를 버리고, 부부가 서로 인정하고 신뢰하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 역시 서로를 인정하는 신뢰를 형성해야 한다.
2005년에 이르러 그동안 남녀평등의 대명사로서 사회적 논란의 중심이 되었던 호주제가 완전히 폐지되고, ‘호주’라는 표현 대신에 ‘가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가정 내에서 권위의 중심이 되는 주인은 없고 부부에게 동등한 지위가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이어져오던 호주제가 사라지면서 ‘대(代)’를 잇는다는 말이 적어도 법적으로는 무의미해 지고 말았다. 호주제 폐지가 불과 몇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오늘날 우리 사회의 왜곡된 현상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호주제’ 논의가 또 다시 불거질 기미가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이라는 불교경전이 있다.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고 깊음을 설하여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친 경전으로서, 예로부터 사람으로 태어나 반드시 읽고 깨우쳐야 할 가정교육의 기본지침서로서 부모의 은혜가 한량없이 크다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 어머니가 아이를 낳을 때는 3말 8되의 응혈(凝血)을 흘리고 8섬 4말의 혈유(血乳)를 먹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면 자식은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업고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須彌山)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없다고 설하고 있다.
부모의 은혜를 기리는 유교의 경전에는 《효경(孝經)》이 있다. 부모은중경이 은혜를 강조하는데 비해, 이 경전은 ‘효(孝)’를 강조하고 있다. 효경은 공자가 제자인 증자에게 전한 효도에 관한 논설을 훗날 제자들이 편저(編著)한 것으로 천자(天子), 제후(諸侯), 대부(大夫), 사(士), 서인(庶人)의 효를 나누어 논술하면서 효가 덕(德)의 근본임을 밝히고 있다. 효경은 부모은중경과 함께 우리나라 전통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 민간의 아동들로부터 군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전통사회 윤리관의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후한 말의 학자인 채옹(蔡邕)은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삼년 동안 옷을 벗지 않고 정성으로 간호를 했다. 병세가 악화되자 백일 동안이나 잠자리에 들지 않고 보살피다가, 마침내 세상을 뜨자 무덤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채옹의 방 앞에 나무 두 그루 싹이 나기 시작했다. 두 나무는 자라면서 가지가 서로 붙어 결이 이어지더니 마침내 한 그루 나무처럼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두고 채옹의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와 자식이 마침내 한 몸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뿌리가 다른 나뭇가지가 서로 엉켜 마치 한 나무처럼 자라는 현상을 말하는 ‘연리지(連理枝)’라는 고사로서, 《후한서(後漢書)》 채옹전(蔡邕傳)에 실린 이야기이다.
자유(子遊)가 ‘효’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효를 봉양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개나 말도 모두 먹이를 먹여가며 키울 수 있느니라.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엇이 이와 다르리오.(子遊問孝 子曰 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見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
여기에서 유래한 ‘견마지양(犬馬之養)’이라는 말은 “개나 말에 대한 사육”이라는 뜻으로 “부모를 봉양만 하고 정작 공경하는 마음은 없음”을 이르는 말로서,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가 아님을 이르는 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효(孝)’란 무엇인가? 물질적인 봉양도 당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봉양을 행하는 자식으로서의 마음가짐이다. 내 자식이 원하는 것은 아낌없이 다 해주고도 더 해주고 싶어 안달을 하면서도, 정작 부모에게는 봉투에 돈 몇 만원 넣어서 드리는 것으로 효도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현실이다. ‘견마지양’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면서도 조상의 시제나 제사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은 자식들이 종중 땅 팔아 분배할 때는 어찌나 큰소리를 내며 설치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가정은 삶의 출발점이요 행복의 근원이며 국가를 지탱하게 하는 기초적인 공동체다. 경전에서 가르치는 ‘효’의 가치는 단순히 부모에 대한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해 부모를 봉양하는 것에서부터 사회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함으로써 효와 충의 가치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효(孝)는 인간의 ‘모든 행동의 근본(百行之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들리는 가정을 바로 세우고 건강한 가족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시급한 일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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