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밖으로 나오니 바야흐로 봄이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 보았던 앞산의 모습이 눈에 띄게 달라져 있다. 바쁘게 살다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먼 산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봄은 어느새 농익은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세월의 흐름이 나는 살과 같다고 하시던 옛 어른들의 말씀을 잠시 떠올려 본다.
예로부터 사람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의(信義)를 꼽아왔다. 선비사회에서는 명분을 강조했고 그 명분을 얻기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믿음이었다. 옛 어른들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고, 실제로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예도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옛 성현 중에서 누구보다도 신의를 강조했던 이로 공자(孔子)를 들 수 있다. 제자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선생님. 정치를 하자면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고 군대도 넉넉하게 갖추어야 할 것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정치를 하는 사람을 믿도록 해야 하느니라.”
“그 중에서 부득이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군대를 버려라.”
“그 중에서 또 하나를 버린다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식량을 버려라. 예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거니와 백성에게 신의를 잃으면 천지간에 몸 둘 곳이 없어지느니라.”
공자는 정치를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신의’를 든 것이다. 그래서 역사상 신의는 군자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높이 받들어졌다. 먹는 것을 하늘처럼 생각했던 옛 어른들이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신의(信義)를 꼽았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사마천도 ‘신의’를 중요한 덕목으로 평가하여 《사기(史記)》에서 〈자객열전(刺客列傳)〉을 한 편(篇)으로 다루고 있다.
자객이란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 일하는 살인청부업자를 말한다. 옛 사람들이 그런 자객을 높게 평가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명분과 신의를 높이 샀기 때문이다.
섭정(攝政)은 한(韓)나라 사람이었는데 사람을 죽이고 노모와 함께 제(齊)나라로 가서 백정을 하며 숨어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백정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신의와 의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명성을 듣고 엄중자(嚴仲子)라는 사람이 찾아와 재상 협루(俠累)를 해치워 달라는 부탁과 함께 황금 2,400냥을 내놓았다. 그리고는 섭정의 어머니에게 공손하게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섭정은 그의 태도에 감동했다.
그러나 섭정은 엄중자의 제의를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눈물을 흘리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자기가 죽으면 노모를 모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후일에 혼자가 되면 목숨으로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노모가 돌아가자 섭정은 엄중자를 찾아가 자객이 될 것을 자청한다. 그의 명분은 이러했다.
‘백정인 천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귀하신 분이 천리 길을 멀다 아니하고 찾아오셨으니......
모름지기 군자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미천한 이 몸을 알아준 엄중자를 위해 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리라.’
마침내 그는 협루를 살해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그 자리에서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뽑아낸 다음 할복하여 죽었다. 한(韓)나라에서는 그의 시신을 저자거리에 내어놓고 현상금까지 걸었지만 끝까지 그의 정체와 배후를 밝혀낼 수 없었다.
사람들 중에는 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평소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의 신의(信義) 때문이었다.
신의는 정치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람들 사이에는 일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약속을 지키는 것을 꼽는 것도 이런 관념의 연속성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구와의 약속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노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사랑하는 사람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소나기성 장대비가 쏟아지면서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생은 약속장소인 다리 밑을 떠나지 않고 사람을 기다리다가 불어난 물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교각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남의 약속을 어리석으리만치 고지식하게 믿는 경우를 일컫는 말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이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 1575~1646)이 엮은 〈유세명언(喩世明言)〉에는 좀 더 섬뜩한 고사가 실려 있다. 과거에 응시하러 가던 범거경(范巨卿)이라는 젊은이가 도중에 동상에 걸리는 바람에 다 죽게 되었다.
역시 과거를 보러 가던 장려(張勵)라는 젊은이가 그를 발견하고 며칠 동안 정성껏 돌봐주었다. 두 사람 모두 시험 날짜를 놓치고 말았지만 서로 의기가 투합 되어 의형제를 맺기로 했다. 두 사람은 이듬 해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장려의 집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해가 바뀌어 약속한 날이 되자 장려는 음식을 장만해 놓고 범거경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저물도록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자정이 가까워진 무렵, 초췌한 몰골에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범거경이 기척도 없이 장려의 방에 들어섰다. 그러나 그는 산 사람이 아니라 범거경의 귀신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 생활고에 시달리던 범거경은 중양절 당일에야 뒤늦게 장려를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해냈지만 천리 길을 가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범거경에게 옛부터 내려오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귀신은 천리 길도 단숨에 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비록 융통성과는 담을 쌓았더라도 약속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옛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감동과 함께 많은 교훈을 준다. 현실이 그 반만도 못하기 때문이다. 지방정권을 책임질 사람들을 뽑는 선거가 시작되었다. 저마다 자신이 내 고장 발전을 위한 적임자임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저마다 무지개 빛 약속을 내걸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반응이다. 아무리 목청을 돋우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냉소적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두 번 속아본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결코 스스로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이 자기 말을 믿으면 화들짝 놀란다.”고 드골은 빈정거렸다.
일찍이 흐루시초프도 “정치인은 다 같다. 그들은 강이 없는 곳에도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권에 대한 평가를 보면 대체로 한심하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국익은 온 데 간 데 없고 개인과 지역 이기주의, 당리당략에만 열중하는 바람에 시급한 현안들은 책상 위에 쌓여 낮잠만 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朽木不可雕 糞土之牆不可’ (썩은 나무로는 도장을 새길 수 없고, 시궁창의 흙으로는 담을 바를 수 없다) 라고 했다.
제자 재여(宰予)가 낮잠을 자는 것을 보고 하도 한심한 나머지 공자가 한 말이다. 오늘의 초심을 잃지 않고 미생과 범거경의 고사처럼 약속을 목숨보다 더 무겁게 여기는 사람들이 이 번 선거에서 뽑혔으면 좋겠다.
또 다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장 원 섭 (張元燮. 50)
·울진군 북면 나곡1리 출생
·부구초등학교 32회 졸업
·죽변중학교 13회 졸업
·울진고등학교 21회 졸업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강남대학교 인문학부 강사
·용인송담대학 겸임교수
·용인시민신문 객원논설위원
·세중옛돌박물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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