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좀 더 몸을 움직이면... 그만큼 남이 편하다
화려한 사이키 조명은 아니지만 은은하게 비치는 무대 조명 속의 카페는 7080세대들을 위한 공간이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노래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으며,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 밀려 손님들은 많지 않지만, 마니아들의 발길은 꾸준하다.
전자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장진업(60)씨가 이 카페의 주인이다. 진업씨 외에도 몇 명의 후배들이 시간을 조율해가며 도움을 주고 있다. 무엇보다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카페의 매력이다.
운동과 음악에 재능을 보여
진업씨는 울진읍 중심지에서 태어난 울진 토박이다. 지금은 도시계획 정비 등으로 허물어져 위치를 찾기 어렵지만, 군청 앞에 있었던 예전 소방서 바로 뒷집이 그가 태어난 곳이다. 4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으며,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체육대회나 각종 지역 행사 때마다 천막을 치고 국밥을 팔았다. 가게를 열고 식당을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서 평소에는 다른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어릴 때부터 노래도 잘하고 운동도 좋아하던 진업씨를 동네 어른들이 귀여워 해주고 잘 챙겨주었다고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웃집 형이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 가르쳐 달라고 떼를 써 배우기 시작한 것이 ‘딴따라 인생’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가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고 웃으며 말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진업씨는 기타를 들고 3인조 그룹을 만들겠다며, 음악을 좋아하던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연습하다가 부모님께 심한 꾸중을 듣고 기타까지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지금도 순수한 그때의 열정을 부러워하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추억을 되돌리며 위로받을 정도로 당시 열심히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한 부모님의 성화에 공부를 해야 했지만, 공부엔 소질이 없어서 그런지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음악 이외에도 축구와 배구에 소질이 있던 진업씨는 체육선생님의 권유로 축구선수로 뛰었다. 축구하는 것은 부모님이 반대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잠시나마 공을 차면서 음악에 대한 미련은 버렸지만 졸업 이후 축구가 진로로까지 이어지지는않았다. 생각했던 일들이 잘 풀리지 않아 방황도 조금 했다. 무조건 1년 정도는 쉬고 싶었으며,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백수로 놀고 있었지만, 노래와 운동에 소질이 있어서 그런지 주위엔 늘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와 울진극장에서 개최되는 노래자랑 대회에 출전해 보자고 부추겼다. 노래엔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노래자랑 대회에 출전하려고 하니 쑥스럽고 부끄러워 안하겠다고 했다. 나중엔 친구들이 자신이 없으니 핑계를 댄다는 둥 놀려대는 통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대회에 나갔다.
다시 시작한 음악
노래를 끝마치고 무대를 내려오는데 관객들의 환호와 분위기가 진업씨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짜릿한 희열과 묘한 느낌 때문인지 순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당시 장려상을 받았는데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상의 가치보다는 방황하고 있던 자신의 탈출구가 무엇인지 그 해답을 찾는 기회가 되었다.
진업씨는 노래자랑 관계자들을 찾아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임을 만들었는데 노래자랑 대회를 개최하고 연말에는 공연을 기획해 군민들에게 선보이는 등 지역에서 제법 많은 활동을 하고 있었던 단체였다.
모임에 들어간 진업씨는 선배들에게 다양한 악기 연주와 무대 매너 등을 배우게 되었다. 또한 무대에 오르는 기회도 많이 생겼으며 어떨 때는 사회자로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공연 연습을 하면서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날도 생기면서 부모님의 근심도 덩달아 늘어갔다.
진업씨의 장래를 걱정하던 부모님은 서울신문사에 근무하던 큰형 장봉업(73)씨에게 막내 동생을 빨리 취직시키라고 닦달을 했다. 얼마 뒤 큰형의 소개로 울산 현대중공업 자재관리부 광재과에 취업을 했다. 끌려가듯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당시 공무원들보다 2~3배 더 받을 만큼 보수는 괜찮았다고 했다.
직장 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회식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마다 노래를 부르는 횟수가 늘어났다. 또 노래 잘한다는 소문은 사내로 펴져 나가면서 울산공장 구내에 영빈관을 운영하던 사장님이 진업씨를 찾아와 회사 퇴근 후 자신의 식당에서 오르간 연주를 부탁했다.
퇴근 후 아르바이트로 영빈관에서 일을 하면서 사무실에서 잔업을 하는 것보다 보수가 좋았으며, 좋아하는 노래도 부르고 연주도 마음껏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무실 일에다가 아르바이트 시간도 조금씩 늘어나면서 진업씨 체력도 바닥을 들어냈다.
전업으로 야간 업소에서 일해
늦게까지 일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몇 시간 잠을 청하고 곧바로 출근을 해야 하는 등 바쁜 일과 때문에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 그 와중에 맹장 수술까지 받으면서 기력이 급속도로 떨어져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병원 퇴원 후 사무실에 출근하니 과장님이 이젠 알바를 그만두라고 했다.
그 말에 섭섭하기도 했지만 건강 때문에 더 이상 두 가지 일을 계속하기엔 사실 역부족이었다. 직장에서 일해서 받는 돈보다 부업으로 받는 돈이 더 많아지면서 둘 중 어느 하나 포기하기도 쉽지 않았다. 장래를 생각하면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선택했다.
회사를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울산지역 야간업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손님들이 노래를 부르면 오르간 반주를 통해 손님들의 흥을 돋우어주며 기분도 맞추어 주는 일이었다. 때론 손님들과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도 빈번했지만 직장 생활보다 더 재미있고 수입도 괜찮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했다.
인생 동반자를 만나
야간업소 일이 제법 적응되어 가던 어느 날 알고 지내던 지인과 술자리에서 장가를 가야겠다고 던진 말이 씨가 되어 얼마 뒤 부산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던 아가씨를 소개받았다. 그때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약속을 잡고 쑥스러운 마음에 만난 여인이 윤미정(54)씨다.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일하는 시간대가 각각 달라 어느 한사람의 희생이 없으면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다. 늘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여있는 미정씨가 그 희생을 감수했다. 부산과 울산을 오가며 힘든 내색 없이 늘 미소를 짓던 그녀에게 진업씨 마음도 녹아들었다.
울산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울진에 살고 있는 친구가 술집을 개업하게 되었다며,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같이해 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친한 친구의 부탁인지라 거절하지 못하고 10년 만에 울진으로 왔다.
그 무렵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던 때라 이왕이면 고향에서 결혼식도 올리고 살림집을 울진에 마련하자는 진업씨 뜻에 미정씨도 동의를 했다. 도시에 살던 아가씨가 남편 하나 믿고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울진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동윤(30), 동민(28) 두 아들까지 얻었다.
진업씨는 울진에 돌아와 3년 정도 생활하면서 기반은 잡았지만, 음악에 대한 갈등과 번뇌 등 무엇이라 딱 잘라서 말하진 못하겠지만 서서히 슬럼프가 찾아왔다고 했다. 연주자로서 한발 더 업그레이드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간절했다. 무엇보다 현실에 안주하며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좀 더 큰 무대로 진출
90년대 초 대구 지역 밤업소에선 나름 잘나가던 ‘김순명’이라는 고향 형님을 찾아갔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순명 형님이 걱정하지 말고 대구로 오라는 말에 식구들을 이끌고 지체 없이 갔다. 소개받은 업소에서 밤엔 일하면서 낮에는 열심히 연주 연습을 했다. 남편의 결정에 묵묵히 따라 주었던 미정씨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포항의 제법 크고 잘나가는 야간업소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 자리를 옮겼다. 이후 부산, 서울, 목포, 청주, 마산 등 전국 각지로 나름 규모가 큰 업소에서 연주를 하게 되었다. 연주자 중 내가 최고라는 자존심 하나로 그 자리를 지켰다.
잘나가던 시절도 40대를 넘기니 후배들이 치고 올라오면서 자연스레 자리가 좁아지고 나이트클럽에서 카바레로 자리를 옮겼다. 자존심도 상했지만, 현실 앞에서 한없이 무너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무대를 떠날 시점이 되었다는 위기감까지 느꼈다고 했다.
때마침 지인이 울진으로 내려올 의향이 없느냐고 연락이 오면서 미정씨와 의논 끝에 고향에서 불러줄 때 가자며 돌아오게 됐다. 평소 진업씨는 가족들에게 늘 나이가 들면 고향에서 생활해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죽변에 있던 야간업소에서 일을 했지만 노래방이 유행처럼 들어서면서 유흥업소 분위기가 바뀌었다. 호황이었던 카바레, 나이트클럽 장사가 울진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업소들이 문을 닫아 일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식당 개업으로 빚만...
앞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부천에서 해물탕 장사를 하는 친구가 울진에서 자기와 똑같은 식당을 한번 해보지 않겠냐고 소개를 해줘 장사를 시작했다. 울진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다 식당 문을 열었지만, 아무런 경험도 없이 시작한 장사는 빚만 눈덩이처럼 늘어나 버렸다.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져 예전에 지인에게 빌려준 돈을 되돌려 달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해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한다. “무시하는 것 같았으며, 분명 여유가 있는 것 같아 내 돈을 받겠다는 것인데 사람 마음이 나같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지요.”라며,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마음이 우울해진다고 했다.
진업씨는 그 당시 생활이 힘들어져 원자력 건설 공사장에 막일을 하러 다녔다고 했다. 그때 몸으로 익힌 신조가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70%의 힘을 쓰고 남은 30%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힘을 쓰면 모두가 편해진다.”며, “내가 좀 더 몸을 움직이면 그만큼 남들은 편하게 쉴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자신보단 남을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있는 진업씨는 늘 남들에겐 후하다.
‘부창부수’라고 아내 미정씨도 비슷한 성품을 가졌다. 시어머니가 쓰러지면서 8년 동안 대소변을 그녀가 받아냈다. “아무런 불평 없이 묵묵히 병수발을 해준 집사람은 천사이며,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진업씨는 어머님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리고 나서 곧바로 부산에 살고 계시던 장인·장모님을 모시고 오자고 미정씨에게 제안해 울진으로 모시고 왔다. 미정씨가 그동안 너무 고생하였는데 이렇게라도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돈 버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한다고 했다. 또한 어른들을 공경해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확고하다. 얼마 전 장인어른을 하늘나라로 보내드렸지만 장모님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기원한다고 했다.
가요제, 실버악단 만들자
진업씨는 2011년 연말 울진연예인협회가 주관한 불우이웃돕기 자선 모금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일찍 발견되어 포항 성모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한 달 넘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지금은 건강에 큰 무리는 없지만 정기검진 때 의사는 쉬는 것이 최고의 치료약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업씨는 아직 할 일이 많아 쉴 수가 없다. 올해 초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울진지회장을 맡아 바쁘다. 그는 임기 중에 울진 지역을 대표하는 가요제, 실버악단 등을 만들어 보고 싶다고 했다. 지역에 많은 인재들이 자신의 끼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기에 성취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오는 8월 29일 열리는 제4회 울진예술제 행사에서는 지역 동아리 회원들이 함께 어울려 공연할 예정이다. 울진 지역에는 다양한 동아리 모임들이 있지만 한곳에서 공연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며, 동아리 소개와 지역 주민들이 동아리 모임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진업씨는 마음이 우울해도 노래를 불러야하고 기분이 좋아도 노래를 부르는 것을 멈출 수 없어 오늘도 오르간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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