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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엄마 히로꼬씨

  • 입력 2016.04.27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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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


늦은 밤, 하루 일과를 정리하다가 그냥 넋 놓고 있다.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연신 웃음소리가 TV를 통해 흘러나오지만 다까후지 히로꼬(57) 씨의 시선은 창밖 밤하늘의 별을 향해있다.

드라마, 노래, 다큐멘터리 등 한국 방송이면 가리지 않고 늦은 시간까지 시청하는 그녀지만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색에 빠지는 것을 좋아한다. 주말을 제외하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어린아이들을 돌봐야 해서 밤이 늦어서야 하루를 정리할 수 있다.

아이들을 돌보기가 그리 쉽지는 않지만 히로꼬 씨는 이 일을 할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어려웠던 지난 시절부터 생계를 위해 꾸준히 해온 일이지만 몇 해 전부터는 기성면 구산리 주변에는 아이들이 없어 멀리 죽변과 울진까지 와서 돌봄 일을 하고 있다.
 
일본의 조그마한 농촌마을

히로꼬 씨는 몇 해전 쓰나미가 밀려왔던 일본 동북지방인 이와테현의 작은 농촌 마을인 시주쿠이시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못해 딸만 셋을 둔 아버님은 농한기인 겨울만 되면 타 지역으로 돈을 벌러 다니셨다. 막내딸인 그녀의 눈에도 아버지의 어깨가 매우 무거워 보였다.

유교 사상이 강한 부모님들은 자녀교육을 엄하게 가르치는 편이라 말대꾸도 잘하지 못했다. 또 집안에 아들이 없어 딸 중에서 누군가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가업을 이어가야 한다며 수시로 딸들에게 주문했다. 바로 위의 언니가 몸이 약해 병치레를 자주 하는 탓에 큰언니와 막내인 히로꼬 중에 누구 하나는 데릴사위를 꼭 보아야 했다.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라고 하지만 어린 소녀의 마음에는 큰 부담으로 느껴졌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왜 먹고 살아야지? 왜 결혼을 해야 하지? 라는 고민을 하며 오래도록 사색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 친정엄마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히로꼬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반드시 도시로 나가서 취업을 하겠다고 친구들에게 공언하고 다닐 정도로 고향 집과 되도록 멀리 떠나고 싶었다. 다행히 학교에서 소개해준 동경 시내 A 증권회사의 서류 심사를 통과했다. 그러나 동경에 사는 가까운 친척이 한 명도 없어 회사에서 요구하는 보증인을 구하지 못해서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여고 졸업식(우측 히로꼬)

학교에서 재 추천서를 써주어서 동경 시내 최고급 찻집 사무직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사무 요원으로 취업은 했지만, 현장을 알아야 된다며 엄격한 직원 교육을 견디어 내야 했다. 사관학교처럼 규칙적인 생활과 힘든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 동기 중에는 1주일도 못 버티고 그만두거나 1개월을 버티면 성공이라고 할 정도로 신입사원 교육이 힘들었다.

입사 후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학교에서 담임선생님과 취업담당 선생님이 방문하신 후 이직을 알선해 주셔서 신협금고로 직장을 옮겼다. 안정된 직장과 어느 정도 타지 생활에 적응해 나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공허함이 있었다. 도시를 탈출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꾸 생겼기 때문이다.


찻집 입사 사진


농협 근무시 천만엔을 들고 있던 모습


바삐 움직여야 살아갈 수 있는 도시가 부담스러워졌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시골로 내려가고 싶었지만, 농사와 같은 일은 하기 싫었다. 친구와 지인을 통해 고향에서 일할 곳을 수소문해 다행히 농협에서 운영하는 유통업체에 경력사원으로 취업이 되었다.

어느 날 회사 기숙사로 통일교 신자들이 방문을 했다. 처음엔 찾아오는 것이 싫어서 외면했지만, 자꾸 찾아오시는 분들을 그냥 보내기 미안한 마음에 차를 대접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그녀의 마음에 남아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자살에 대한 충동과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마인드 등 올무에 묶여 허덕이는 짐승처럼 불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냈는데, 전도하시는 분들과 시간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제야 부모님의 마음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신앙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으면서 어느새 통일교 신자가 되어 있었다.


기모노 입은 히로꼬

한국으로 시집오다

신앙인으로 거듭나면서 히로꼬 씨는 결혼에 대한 두려움과 망설임도 없이 종단에서 선택해준 배우자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1992년 8월 25일 서울 올림픽경기장에서 그녀보다 한 살을 더 먹은 신랑 안귀곤 씨와 합동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얼굴은 결혼 이틀 전인 23일 저녁에 처음 보았으며, 24일 약혼식을 치렀다.

결혼식 이후에도 40일 동안 순례의 시간을 가졌으며, 93년 1월 25일 한국으로 다시 왔지만 6개월 정도 적응 기간을 가지고 8월이 되어서야 같이 살 수가 있었다. 결혼 이후 10개월 정도 시간이 흘러서야 잠자리를 하게 됐다.


결혼식 전날 모습


결혼식

신혼살림은 신림동 달동네에다 방을 얻었다. 그것도 누나가 사는 집에다 셋방을 내어 살았다. 신랑은 옷을 만드는 공장에 근로자로 다녔지만, 보수는 적었다. 히로꼬 씨는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해 취업은커녕 부부간의 대화도 어려웠다. 사전을 찾아가며 손짓, 발짓으로 겨우 의사소통을 했다.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나 차이가 있었지만 내 남편은 내가 선택했다.”며, 평생을 함께할 영원한 배필이라 여기고 열심히 섬기며 살았다. 남편은 사람이 착하고 더없이 좋은데 술을 좋아해 자주 결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더욱 어려워져 히로꼬 씨는 액세서리에다 큐빅 등을 붙이는 부업을 시작했다.

부업을 시작했지만 하루 꼬박 일을 해도 라면 한 봉지를 구입하지 못했다. 히로꼬 씨는 아이를 보면서 일을 하느라 힘도 들었지만, 무엇보다 손놀림이 남들보다 느려 다른 사람들의 작업량에 반의반도 못 따라갔다고 했다. 몸을 움직여 돈을 벌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들

주변에서 말이 안 통해도 된다며 옷을 만드는 작은 봉제공장에 취업을 시켜 주었다.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면 하루 1만2천원을 받았다. 출근하면 온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일을 하는 통에 어느 순간 한국말을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말귀가 열리니 답답했던 마음도 많이 좋아졌다.

남편이 오토바이 사고로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못했을 때 히로꼬 씨가 출근해서 벌어오는 적은 돈이 살림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녀는 생활용품 등을 구입할 때에는 싸게 파는 집을 찾아다니며 물건을 구입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다 보니 10원이라도 저렴해야 물품을 구입할 정도로 아끼고 또 아끼며 살았다.

누나가 이사를 하면서 신림동 산동네에서 이사를 해야 했다. 더 저렴한 동네로 이사하면서 그나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보라매공원 근처에 방을 구해 살다가, 구로동 산동네로 이사를 했다. 여러 가구를 붙여서 겨우 칸막이를 한 정도라 옆집에서 말하는 소리가 다 들리는 조그마한 한 칸짜리 방에서 가족들이 머리를 눕히며 살았다. 그래도 제일 힘든 것이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큰아들 종국(오)과  둘째 동국(왼)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귀곤 씨가 있고 지금은 군대에 가있는 종국(22), 동국(21), 그리고 올해 여대생이 된 원경(19)이가 있어 행복했었다.

아이들이 어렸지만 부모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기나 하듯 하나같이 잘 자라주었다.
 
시골로 귀향

99년 가을 즈음 남편 고향인 울진 기성면 구산리로 이사를 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시어머님 혼자 살고 있었지만, 형제들이 보탬을 주지 못했다. 히로꼬 가족들은 서울에서 먹고 살기 어려울 정도로 힘겹게 살면서도 시골로 내려오지 못했다. 고향엔 농사를 지을 땅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부족한 시골에는 더 어려운 삶이 기다릴 것이 뻔해 내려오는 것을 많이 망설였다. 처음엔 공사 현장 노무자로 일하러 다녔지만 그것도 여건이 좋지 못했다. 다행히 히로꼬 가족들은 생활보호 대상자로 지정되어, 작은 혜택들이나마 조금씩 받을 수 있었다. 귀곤 씨가 공공 근로를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생활보호 대상자라 가능했다.

시골 생활에도 부족하고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화목하고 함께하는 시간이 서울보다 훨씬 많아서 좋다고 했다. 다만 귀곤 씨가 지인들과 함께 술자리에 어울리다 늦은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으며, 남편이 술을 줄이지 못하는 것이 제일 속상했었다.

2000년 남편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났다. 사고는 술과 무관하지 못했다. 남편이 술 마시는 것을 강하게 말려 보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고쳐지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남편 제사상에는 술을 올리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당장 생계가 제일 큰 걱정이었다. 아이들도 어리고 집안에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다. 어판장에 나가서 통발을 보수하고, 그물을 꿰매는 일들을 했지만 손이 느려 한번 갔던 집에서는 두 번 다시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먹고 사는 것이 제일 막막했다.


구산해수욕장에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

김치 공장에도 다녀보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어 일거리를 찾아서 열심히 했지만 고용주들이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열심히 일하지만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작업 물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농번기에 농사일을 도울 때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도 최선을 다해 일해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부분들이 많았다. 천성적으로 손을 놀리며 일하는 것에 재주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해놓고 웃는다. 그렇다고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를 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한다.

히로꼬 씨는 몸을 쓰면서 일하는 것이 제일 힘들고 어렵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생활은 더욱더 힘들었다. 지인이 한 날 아이들을 좀 돌봐 줄 수 있겠느냐고 문의를 해 왔기에 다른 것은 몰라도 아이들을 돌봐주는 것은 자신 있다고 말했다. 인근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어린 자녀들을 돌봐주며 일정 금액의 수고비를 받았다. 작지만 생계에도 보탬이 되고 무엇보다 보람이 있었다.

남의 자녀지만 내 아이라고 생각하고 정성껏 돌보았다. 히로꼬 씨는 아이들을 돌봐줄 때 꼭 지켜야 할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 아이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지 않고 반드시 그들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 아이들의 가장 친숙한 공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불안한 느낌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고 무엇보다 그녀 집으로 아이를 데려오게 되면 돌보는 것에 소홀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서 아이를 키워 주다 보면 자연스레 집안일을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라며, “아이의 부모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가지면 그분들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것이 뻔해 아이들의 집으로 방문해 일을 한다.”라고 했다.


일본방문 시 눈에 묻혀 놀고 있는 아이들


세아이와 친정방문(빨간티 히로꼬)

봉사를 하며 살고 싶다
히로꼬 씨 자녀 중에 누구도 일본어를 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말이 서툴러서 고생했던 슬픈 기억 때문에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고 싶지 않아 서툴지만 한국말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했다. 주변 사람들이 그래도 모국어인 일본어를 가르쳤으면 좋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그녀는 지금도 확실하게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그들이 필요해서 배운다고 할 때 그때 가르쳐주어도 늦지 않다고 말한다.

그녀는 일본에서 살아온 시간과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이제 똑같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사춘기 시절 철없이 사색에 빠져 세상을 구할 것처럼 고민하던 소녀가 한국에서는 몸을 움직여 먹고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간이라고 했다.

지금까지 10여 차례 일본을 다녀왔지만 이젠 한국이 더 정감 있고 편하다. 아이들을 학원 한번 보내지 못했지만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교육을 시켰다. 지식보다 인성을 먼저 가르쳤다. 다행히도 엄마의 마음을 알았는지 다들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며 잘 성장해 주고 있다.


딸 원경의 졸업식

딸이 대학 진학을 위해 3월 초에 울진을 잠시 떠나게 되면 그동안 마음으로만 해온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계획이다. 봉사는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들어도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내가 받은 만큼 나보다 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줘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자녀들이 결혼하고 나면 함께 모여서 살고 싶다고 했다. “친정 식구들 없이 외롭게 살아온 한국 생활이 너무 힘이 들었다.”며, “여건이 허락된다면 4대가 한집에서 살고 싶은 것이 작은 소망”이라고 했다. 

히로꼬 씨는 오늘도 어린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꼬맹이들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제일 소중하고 보람이 있다며 아이들 곁으로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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