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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전업사 전종환씨가 살아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05.03 20:16
  • 글자크기설정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노동과 생활풍속 등을 통하여 우리들만의 멋과 아름다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토종문화와 기층문화, 그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다. 고스란히 예전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토종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사람들.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않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 또는 직업적 방편으로 먹고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점점 잊혀 가는 것들이 정작 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본다면 ‘서민속의 서민’으로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들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현장을 잠시 기웃거려 본다.  

 

추억은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로 다가온다.     
디지털이 보편화된 지금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보다는 아날로그 필름 사진 한 장이 훨씬 더 추억이 묻어나는 듯 정감 있게 와 닿고, 그 사진이 칼라가 아닌 흑백이면 여운은 더욱 길어진다.

 

잡음하나 없이 깨끗한 소리를 자랑하는 CD보다도 지지직거리는 소음이 묻어나는 LP 레코드판이 근래 들어 새롭게 각광받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디지털화된 모든 것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현대인의 기호에 들어맞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허전하고 기계적인 냄새가 짙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단순하면서도 획일적이지 않은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언제까지나 명맥을 잃지 않을 만큼 두껍고도 질기다.
한때 우리들을 들뜨게 했던 최신 기기들은 전부가 아날로그였다. 현대 기술이 집약된 첨단 기능을 갖춘 디지털 기기들이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면서 하는 수없이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된 아날로그지만 여전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는 디지털이 아니라 아날로그이다.
 

우리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오감은 디지털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디지털 기기가 일상화된 요즘이라도 그 시작과 끝은 언제까지나 아날로그이고, 디지털은 단지 숱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따름이다.
  
한 마을에서 최고 부자가 아니면 라디오 한 대 장만하기도 쉽지 않던 시절, 나라 안팎의 뉴스, 대중가요, 일일 연속극을 듣기 위해 전선을 타고 집집마다 연결되어 있던 라디오 유선방송에 귀를 기울이던 그렇게 궁핍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는 채널이 고정된 채 각 가정으로 연결되던 라디오 유선방송이 외부의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구실을 했다.
1970년대 초반에 전기와 함께 보급되기 시작한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이전까지 라디오가 지녔던 힘과 역할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입으로만 전해 듣던 대중가수의 가요를 직접 들을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빠르게 국내·외의 새로운 소식들을 접한 다음에 주변 사람들에게 우쭐대면서 그 뉴스를 전달할 수 있었다.
 

오늘은 또 어떻게 진전될까 궁금해 하면서 매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을 기다렸고, 연속극을 진행하는 성우들과 가요를 부르던 가수들은 이미 대중들로부터 스타 대접을 받았다.
텔레비전에 이어 워크맨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컴퓨터와 MP3, PMP까지 대중화된 지금에 와서 들어보면 우스운 얘기일수도 있지만 그때는 그랬다.
인간의 오감을 따라 호흡하는 아날로그의 수명은 디지털보다 몇 배나 질기고 강인하다.

복잡한 첨단 기능을 가진 각종 전자 제품이 우리 사회의 곳곳을 점령한 지금까지도 라디오는 숱한 자동차 운전자들의 길동무로서, 또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실시간 뉴스를 신속하게 전파하는 뉴스 전달 매체로서의 역할을 고스란히 감당하고 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중학교 3학년 때 결혼


 

1954년 전종환씨가 울진농고를 졸업할 당시의 기념사진

 

울진 읍내에서 50여년 전업사를 운영하고 있는 전종환(72세)씨는 일제 강점기에 근남면 행곡리 샘실(천연동)이라는 곳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두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전씨의 아버지는 일정시대에 궁핍한 살림살이를 견디다 못해 식구들을 뒤로하고 중국 만주로 돈 벌러 떠나갔다가, 끝내 살아서 고향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임종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너도나도 중국이나 일본 본토로 돈 벌러 많이 나가고는 했어요. 아버지는 왜정때 돈을 벌겠다고 만주로 떠나셨는데, 어머니가 어린 저를 데리고 아버지를 만나러 만주를 몇 번 다녀오기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합니다. 만주에서 힘들게 돈 벌던 아버지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고, 후에 화장한 뼛가루만 고향으로 돌아와서 묘소를 꾸몄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다섯 살이었어요.”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손에서 자라난 전종환씨는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일곱살에 중매를 통해 원남면 기양리의 이순출(75세)씨와 평생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두형제의 맏이다보니 아버지를 일찍 떠나보내신 어머니가 장가를 빨리 들어서 대를 이어야 한다며 성화가 대단했습니다. 양쪽 집안을 왕래하던 처고모부의 중매로 서로가 얼굴 한번 보지 못하다가 결혼식을 올렸는데, 당시 아내는 저보다 세 살이 많았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일년 동안은 각자의 집에서 지내다가 일년이 지난 다음에 아내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지요. 그때는 그게 예법이었고, 모두들 다 그렇게 했습니다.”
 

요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지만 당시에는 중학생이 결혼하더라도 학교 측에서 특별히 제재를 가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고 전씨는 전해준다.
 “그때는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결혼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었어요. 물론 학교에서 결혼한 학생이라고 해서 특별하게 대하는 일도 없었고요. 다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장가갔다고 자꾸 놀려대는 바람에 민망해서 조회시간에 몇 번 빠졌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젊은날 부인 이순출씨와 나란히 선 전종환씨
전종환씨는 부인 이순출씨와의 사이에 고등학교 3학년 때 태어난 맏아들 원호(53세. 서울시)씨를 비롯하여 영호(47세. 울진군), 장호(44세. 경기도) 세 아들과, 경옥(41세. 포항시)씨 등 3남1녀를 두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힘겹게 가계를 꾸려가며 두 아들을 학교에 진학시켰던 전씨의 어머니는 맏아들의 자수성가까지 지켜보고 난 다음인 2년 전에 93세로 세상을 달리했다.
 

어머니와 함께, 전씨에게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에 두고두고 가슴 아픈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이 군을 제대하고 난 후니까 스물 일곱 여덟 살쯤이었을 겁니다. 60년대 후반이던 그때는 울진군 곳곳에서도 도로를 건설한답시고 공사용 다이너마이트가 흔할 때였는데, 누가 동생에게 고기 잡을 때 사용하면 좋다면서 폭약을 전해주었던 모양입니다. 남동생이 그 폭약을 들고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미처 불붙은 다이너마이트를 물속에다 던지기 전에 손에서 쾅하고 터져버린 사고가 일어났어요. 동생은 그 사고로 두 손과 양쪽 눈을 고스란히 잃었고 지금까지도 불편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전종환씨는 동생이 사고를 당하고 난 다음에 울진의 어느 병원으로 쫓아갔었는데, 담당의사가 이 방법밖에 없다면서 양손을 절단했었다고 아쉬워한다.
 “지금 같으면 어떻게 좀 더 나은 방법이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손수 동생을 돌보았는데, 돌아가신 후부터는 제가 매일같이 올라가서 이것저것 챙기고 있습니다. 씻겨주고 밥도 먹여주고 뭐 그러고 있지요.”
전씨의 부인 이순출씨는 남동생이 사고를 당하고 나서도 처음 10여 년 동안은 남편이 애써 정부의 장애인 지원금을 거부했었다고 귀띔한다.   
형인 내가 멀쩡한데 동생이 장애인이 되었다고 해서 어떻게 정부의 지원금을 받겠냐면서......
전씨는 살림 형편이 나아진 10여 년 전 몸이 불편한 남동생과 어머님이 편하게 지낼 수 있어야 한다며 행곡리의 본가를 허물고 새로 신축했다. 


라디오 유선방송으로 사회 첫발, 일년에 쌀 두되씩 받아
전종환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 라디오 유선방송업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 중반 근남면 행곡리에서 태어나서 울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없는 집안의 맏이로 태어났으니 돈은 벌어야겠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인 행곡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라디오 유선방송을 시작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그때는 라디오도 귀했고, 전화기 같은 건 아예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라디오 유선방송은 ‘앰프방송’ 또는 ‘스피커 방송’이라고 했다.
1950년대 후반 정부의 라디오 방송 보급 확대 정책에 따라 실시된 스피커 방송은 앰프장치에 의해 수신된 라디오 방송을 유선으로 각 가정에 가설되어 있는 스피커로 연결하여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하던 시설이었다.

 

1950년대 중반 정부의 주도하에 각 시·군 단위로 시범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한 라디오 유선방송은 50년대 후반 들어 민간 사업자에 의한 사설 유선방송 업체들의 민영앰프 시설로 인하여 전국의 농어촌으로 급속하게 보급됐다.
 

“3년 정도 행곡리에서 유선방송을 하다가 수요가 더 있겠다 싶어서 근남면 소재지로 장소를 옮겼어요. 현 근남파출소 인근에서 근남면 가구 전체를 대상으로 라디오 유선방송 사업을 했는데, 유선방송 비용으로 일년에 쌀 2되씩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큰돈이 될 리가 만무하지요. 당시에 한두대씩 보급되기 시작하던 가정용 라디오와 전축 같은 전기제품 수리도 함께 겸했습니다. 그런데 유선방송이란 것이 툭하면 강풍이나 비바람이 불어서 유선이 끊어지기도 하고, 그러면 금세 앰프 안 나온다고 난리들 나고...... 요즘이야 전선이라도 튼튼하고 질긴 것들이 많이 나오지요.”
전씨는 근남면 파출소 옆으로 장소를 옮겨서 10여년 정도 유선방송업을 겸해 라디오나 전축 등 가전제품 수리업을 했었다.

 

유선방송과 전업사, 변변찮은 수입

오토바이 센터를 운영할 당시 어느 여행길에서
라디오 유선방송은 물론이고 당시에 몇 종류 안 되던 전자제품을 고치는 기술 또한 전씨는 혼자서 스스로 문제점을 진단하고 해결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전씨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스승도 하나 없이 독학으로 각종 제품 수리하는 방법을 하나하나 터득해 나갔다.

 “기술을 배우겠다고 학원을 갈수 없었습니다. 학원에 입학할 돈도 없었지만 몇 달간이라도 학원을 가서 집을 비우게 되면 남아 있는 식구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 또 집안의 종손이다 보니 때가 되면 제사음식도 이것저것 준비해야 하는데 수중에 가진 돈은 없지, 정말 그럭저럭 살수밖에 없었지요.”

울진농고를 졸업한 후 처음에 시계기술을 배우고 싶었다는 전씨는 타지로 나가서 기술학원을 다닐 여력이 없었고, 무엇보다 당장 먹고 살아야하는 일이 가장 절실했기에 모터, 라디오, 전축 등의 전기제품 수리와 전기설치 등 전기와 관련된 기술을 스스로 터득해 나가면서 차근차근 노하우를 쌓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터수리를 참 많이 했습니다. 어떤 기기에 장착된 모터든지 가리지 않고 수리했지만, 특히 양수기 모터는 정말 많이 고쳐봤어요. 모터수리도 혼자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기술을 터득해야 했습니다.”
 

전씨는 포항의 모터 전문 대리점이나 대구등지의 모터 수리점에서 전문 기사들이 모터를 수리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고 기억해 두었다가 실전에 곧잘 응용하고는 했다고 전해준다.
 “그때 포항에 가면 역전 앞에 모터 수리점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 기술자가 모터를 분해해서 고치고 조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배웠습니다. 전업사에서 모터를 수리하게 되면서부터는 제 기술로 못 고치면 포항뿐 아니라 대구까지 직접 모터를 들고 다니면서 고쳐서 손님들께 전해 주고는 했어요. 포항이나 대구까지 비포장 길을 7~8시간씩 덜컹거리는 버스에 시달리던 일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근남면 파출소 옆에 전업사를 열고 라디오 유선방송업을 겸해 전기제품을 수리했지만, 당시에는 일반 가정에서 보유한 전기제품의 종류도 많지 않을 때여서 수입은 보잘것없었던 것으로 전씨는 기억한다.      
 “어쨌든 그러다보니까 기술이 있다고 소문이 났는지 자전거나 오토바이에 고장난 라디오나 전축을 싣고 근남까지 가게를 찾아오는 울진읍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 울진읍내에는 마땅한 전자제품 수리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참에 터전을 옮기자고 작정하고 울진읍으로 가게를 옮겼습니다. 그때는 이미 라디오가 일반 가정으로 빠른 속도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라디오 유선방송을 그만둘 시점이기도 했고요.”


낮에는 전업사와 오토바이 가게, 밤에는 연탄 배달

울진읍 월변에서 전종환씨가 운영하던 울진전업사와 오토바이 센터

 

십여년 동안 운영하던 라디오 유선방송업을 그만 두고 울진읍 월변으로 가게를 얻어 이사를 나온 전씨는 현재 동명목욕탕 인근에서 근 10년 가까이 전업사를 겸한 오토바이 가게를 운영한다.
 

“지금이야 작은 스쿠터까지 정말 흔한 게 오토바이 아닙니까?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울진군 전체에 오토바이라고는 관공서용 15대와 개인용 15대 등 30여대밖에 없었어요. 지금 오토바이가 감당하는 일을 그때는 대부분 자전거가 대신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오토바이가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만큼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습니다. 오토바이 한 대가 논 세마지기 값이었으니까요. 울진에서도 제법 부자소리를 듣는 사람들만 탈수 있었던 것이 오토바이였지요. 오토바이를 수리하는 기술도 그냥 혼자서 터득해야 했습니다. 기술 익히겠다고 밖에 나가 있으면 식구들 밥은 누가 먹여주겠습니까? 전기제품도 그다지 많지 않지, 오토바이도 고작 30대밖에 안되지, 어떻게 여러 명의 식솔이 밥 먹고 살 수 있겠어요? 낮에는 고장난 오토바이와 전기제품 수리하고, 밤이면 리어카를 끌고 온 동네로 연탄배달을 다니고는 했어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업사와 오토바이 가게를 겸해서 운영하던 중 울진군 관내 마을 곳곳에도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전씨도 그에 맞춰 전구, 전선, 콘센트 등 각종 전기재료도 판매하고 오토바이도 수리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는 가운데, 박정희씨가 대통령이 되었고 곧 전국 각지에 새마을운동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농촌지도소 공무원 입사, 녹색혁명과 새마을운동 

농촌지도소에 근무할 당시 농촌여성들에게 경운기를 교육하며

 

바쁘기만 했지 아무리 부지런히 움직여도 큰돈을 벌지 못하던 전씨는 새마을운동과 함께 밀려든 녹색혁명 바람을 타고 울진농촌지도소에 공무원으로 취직하게 된다.
 “당장 살기 힘드니까 월급이나 받아서 먹고 살아야겠다 싶어 공무원으로 취직을 한 것이지요. 그때 받았던 월급이 1만원이 채 안되는 적은 돈이었어요. 이십대에 근남 행곡에서 농사를 지을 당시에 모내기철이면 품앗이로 한달이 넘게 이집 저집으로 모내기를 하러 다녔습니다. 그때 혼자 생각에 모를 자동으로 심는 기계는 안 나오나 했는데,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때 이앙기라는 농기계가 나왔습니다. 물론 상용화가 되기까지는 그 후로도 한참이나 더 세월이 지나야 했지만요.”
 

새마을운동과 녹색혁명 붐을 타고 전국의 농촌으로 농기계가 보급되던 초창기에 농촌지도소 공무원으로 입사한 전씨는 이앙기와 경운기 등의 전문 기술교육을 이수하고 나서 일반 농민들을 대상으로 농기계 교육을 하러 다녔다.
 “녹색혁명이라는 기치아래 박대통령은 전국의 농촌 부흥에 매달렸습니다. 사실 박대통령 때문에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먹고 살게 된 것이지요. 요즘 밥걱정하는 사람 몇 사람이나 됩니까?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농민들이 처음부터 농기계에 호응을 보인 건 아니었어요. 농기계가 보급되던 초창기에는 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으면 농사가 망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한번은 근남면 잘미에 가서 경운기 교육을 하는데 농민들이 하나같이 경운기로 논이나 밭을 갈면 폐농한다며 주저하더군요. 보다 못해 제가 직접 경운기를 이용하여 어느 집 논을 깊이 갈아엎었지요. 물론 그해에 그 집 농사 수확량이 다른 집들보다 월등하게 많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농기계가 농촌으로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농기계가 보급되던 초기에는 기계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으면 끝내 농사를 망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농민들의 믿음으로 막연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만큼 농기계의 보급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일해서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던 새마을운동이 전국의 농촌으로 확산되어 가던 초창기만 해도 농민들은 이앙기를 구입하고서도 손으로 모를 심었고, 경운기를 옆에 두고도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고 논을 갈았었다고 전씨는 기억한다.
 

다수확을 갈망한 유신정부는 전국 각지의 농촌으로 농기계와 함께 농업용수(農業用水) 확보를 위한 양수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울진군에도 정부로부터 수백대의 양수기가 지급되어 각 읍·면마다 수십대씩의 양수기가 설치되어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농사에 필요한 물 관리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농사짓는 현장에 설치되어 있던 양수기가 고장 나면 하루아침에 군청의 담당자들 목이 날아가던 때였습니다. 정부에서는 농사철 양수기의 필요성을 그만큼 대단하게 생각했어요.”
 

울진군에 보급된 수백대의 양수기를 관리하고 수리하는 임무는 농촌지도소에 들어가기 전부터 전업사를 하면서 이미 전기제품을 수리하는 일에 이력이 붙어있던 전씨의 몫이 되었다.
 “참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각 읍면마다 수백대의 양수기가 지급되어 곳곳에서 가동되고 있는데 고장이 날 때마다 이곳저곳으로 정신없이 불려 다녀야 했으니, 시간은 또 얼마나 빨리 흘러가던지.”
 

10여년 공무원 생활 청산, 농기계 대리점 운영
농촌지도소에서 공무원으로 10여년 근무하던 전씨는 항상 일정한 월급만으로 빡빡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공무원 생활을 접게 된다.
 “어릴 때부터 너무 가난하게 살았기에 무조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성실하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 그저 밥이야 먹고 살겠지만 돈을 번다는 건 거짓말이지요. 그래도 농촌지도소에서 10여년 근무하는 동안 농민들 교육하고 농기계 수리하러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제 얼굴을 모르는 농민이 없게 되었고, 결국 그런 인간관계가 재산이 된 셈이었지요.”
 

농촌지도소에서 10여년 근무하면서 안면을 익힌 농민들을 대상으로 전씨는 북면 신화리에서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하게 된다.
 “공무원을 그만 두고 북면 신화리에서 농기구 대리점을 하면서 농기계도 팔고 수리도 하고 했는데, 역시 접근이 쉬운 북면 시내가 아니라서 주변에서 많이들 도와주는데도 장사가 잘 안되더군요. 그래서 수년전에 사두었던 울진읍내 빈 땅에다 건물을 짓고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이 지금 이 자리지요.”
 

월변 다리 옆 현재 위치로 이사를 나온 전씨는 수년 동안 알뜰하게 농기구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고 전한다.
 “경운기와 이앙기 정도만 출시되던 농기계 보급 초기와는 달리 세월이 흐르면서 콤바인과 트랙터같이 값비싼 대형 농기계가 출시되기 시작했고, 농민들도 농촌인구가 감소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웬만한 농기계는 집집마다 다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 농기계 판매마진이 15%쯤 됐으니까 이곳에서 농기계 대리점을 하면서 돈을 꽤 벌었지요.”
 

전씨는 한창 돈을 벌 때는 가게 앞의 월변 다리 밑으로 농기계를 쭉 깔아놓다시피 하고 물건을 팔아야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었다고 말한다.
농기계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던 십수년 전부터 농기계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돈을 번 전씨는 5~6년 전 농기계 대리점을 접었다.
 “전체적으로 농촌에 가난이 들기 시작하니까 농기계 판매 대금의 수금이 어렵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집을 통째로 저당 잡히고 본사에서 농기계를 가지고 와서 농민들에게 외상으로 물건을 주는데 수금이 안 되니 큰일 아닙니까? 울진에서 영업하던 농기계 대리점은 다들 그때 부도가 났어요. 이대로는 도저히 버티기가 힘들겠다 싶어서 과감하게 농기계 대리점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농기계 대리점 그만두고 전업사만 운영

농기계 대리점을 접은 전씨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각종 기계의 모터를 수리하는 일만 하면서 지낸다.
 “주로 작업현장에서 사용하는 드릴과 절단기 같은 공구 모터를 비롯하여 양수기 모터 등 다루는 않는 모터 종류는 없습니다. 여러 종류의 모터 중에서도 한일과 금성 모터가 주된 수리 품목입니다. 가까운 포항과 대구에 대리점이 있으니까 우선 부속품 구하기가 쉽습니다. 신일 모터도 있지만 회사가 원체 작다 보니까 부속품 수급이 제때 안돼서 고치기가 힘들지요.”
 

전씨는 농촌지도소 근무 시절부터 오랫동안 취급해오고 있는 양수기가 그중 가장 고치기 수월하다고 말한다.
작업 현장에서 주로 사용하는 전동 공구가 수리하기 까다로운 종류인데, 전동공구가 고장 나면 차라리 부속품 전체를 통째로 갈아 끼우는 편이 낫다고 전씨는 알려준다.  
 “수십 년 동안 모터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모터수리는 힘든 일입니다. 지금까지 젊은 사람들 서너 명에게 기술을 가르쳐봤는데 중간에 다들 도망갔어요. 그만큼 모터 다루는 기술은 숙련된 정밀성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일이지요.”
 

 

모터수리뿐 아니라 손재간이 남들보다 뛰어난 전종환씨는 ‘울진전업사’ 앞에 세워져 있는 특별한 이앙기(?)를 이참에 꼭 소개해달라며 웃는다.
한때는 논에 모를 심는 농기계로 현역에서 활동했을 이앙기를 자세히 보니 아랫부분에 경운기용 쟁기 날이 달려 있다.
연륜이 오래된 이앙기를 보름이나 걸려가며 전씨가 직접 수리하고 하부에 날을 붙여 제작한 쟁기라고 설명한다.
 

나이든 노인들이 대부분인 농촌에 이런 소형 동력 쟁기가 보급되면 논밭 가는 일이 훨씬 더 편리하고 수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라디오 유선 방송업, 전업사, 오토바이 센터, 공무원, 농기계 대리점 등 꽤나 다양한 이력을 지닌 전씨는 일흔을 넘긴 지금까지 여전히 자신의 건물 한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에서 전업사를 운영하면서 각종 전기제품을 수리하는 일로 바삐 하루해를 넘긴다.
 

어릴 때부터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기에 남을 속이고 피해주는 일만 아니면 어떤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평생 돈 버는 일에만 충실했다는 전종환씨는, 언제부터인가 먹고 살만 해지니까 그동안의 고생스러웠던 경험도 쓰라린 아픔도 모두 다 서서히 잊히더라고 전한다.
 

타고난 멍에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평생 밤낮으로 일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전종환씨는 이제는 힘도 딸리고 눈도 침침해져서 모터수리업도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렇더라도 전씨의 옹골진 손마디들을 보면서 그가 모터를 수리하는 일을 오늘 내일 당장 그만두지는 않을 것이라 믿는다.
 

지역에서 전종환씨 만큼 모터를 제대로 이해하고 고치는 기술자는 없다는 것을 아는 주민들이 여전히 고장 난 작업 공구 등을 들고 변함없이 그의 가게를 찾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노인 일자리의 사회적인 편견이 너무도 두터운 우리나라에서 전종환씨처럼 나이 든 기술자가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은 경쟁력 있고 건강한 우리 사회를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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