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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년 동안 일기(日記)를 써오고 있는 장보균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7.11.20 16:24
  • 글자크기설정

일기(日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기는 하루를 보내면서 그날 겪었던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 꼭 남겨두고 싶은 일 등을 기록하는 것이다.
일정한 형식의 얽매임이 없는 일기는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은 한두 문장으로 표현된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일기, 생활일기, 독서일기, 여행일기 등 숱한 종류의 일기를 매일 쓸 것을 강요당해왔다.
학생들이 쓴 일기는 담임교사가 검사했고, 이에 따라 아이들은 자존심과 수치심 등으로 인해 그날 하루 겪은 일에 대해 솔직하게 쓸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일어나지도 않았던 일을 이리저리 꾸며서 거짓으로 일기를 쓰는 해프닝을 벌여왔다.   
 

수십 년간의 이런 고질적인 관행은 근래 들어 초등학생들의 일기장을 교사들이 검사하는 문제를 두고 국가인권위원회가 아동들의 사생활 보장과 양심의 자유 등 헌법에 보장된 아동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개선을 권고하면서 숱한 논쟁을 이끌어내고 있기도 하다.   
 

원래 일기는 애초부터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자신의 하루 일과를 되돌아보는 일이 습관이 된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조차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자신과 주변인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또 일기를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꾸준히 써온 사람들은 일기는 세상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여주는 능력을 키워줌으로써 생각의 폭을 올바른 방향으로 넓혀준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일기는 솔직하고 실감나게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장보균씨는 일기를 쓰면서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생각을 조리 있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을 키워올 수 있었다고 전한다.

 

1964년 달력의 메모란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쓴 일지형의 일기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종갓집으로 양자 들어가

1964년부터 지금까지 43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써오고 있는 장보균(90세. 울진읍 호월리)씨는 호월1리 일명 무월리 윗동네에서 태어났다.
“무월리 웃동네에서 태어났지요. 아버님 함자는 장필희요, 어머님은 이중리였어요. 어머님을 두고 북면 주인리에서 시집 오셨다고 다들 중리라고 불렀어요. 이씨 성을 따서 그냥 이중리라는 이름으로 한 평생을 사셨지요. 그때만 해도 어디 여자가 이름이 있었나요? 그냥 친정 쪽 동네 지명을 따서 무슨 댁, 무슨 댁 그렇게 불렀고, 그것이 이름으로 불렸지.”
 

가난한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난 장씨는 열 살이 되던 해에 5촌 아저씨 댁으로 양자를 들어왔다.
“어머님이 서른여섯 되던 해에 청상과부가 됐어요. 그때부터 어렵게 고생하며 외동자식을 키웠는데 큰집에서 양자를 들어오라고 한 거지요. 어쩌겠어요...? 엄한 집안 어른들의 결정은 명령에 가까웠을 테니 종갓집이던 5촌 아저씨 댁으로 양자를 들어올 수밖에 없었지요. 서른여섯에 청상과부가 돼서 궂은일 가리지 않고 다 키워 놓은 자식은 큰집에 양자로 주고, 어머님은 또 다른 아이 한명을 골라서 당신의 양자로 맞아 들였지요. 그때는 다들 가까운 혈육을 따지고 하면서 그런 습속을 아주 중하게 여길 때였습니다.”
 

무월리 본동네로 양자를 들어온 장보균씨는 4년의 세월이 흘러 종갓집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이던 열네살에 정림리 남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었다.
“열네살에 장가를 들었지요. 장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갔어요. 친척 어른이 중매를 했는데 새색시는 정림리에 살던 나보다 다섯 살 많은 열아홉살의 남광조라는 처자였어요. 정림리에서 예쁜 꽃가마를 타고 무월리로 시집을 왔어요. 장가를 들어 처가댁으로 인사를 갈 때는 말을 타고 갔습니다. 그때 우리 집은 말 1마리와 소 2마리를 키우고 있었던 인근에 알려진 알부자였지요.”
 

열네살에 다섯 살 연상의 열아홉 색시 남광조씨를 맞아들인 장보균씨는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시윤(남, 70세, 울진읍), 화자(여, 69, 강원도 주문진), 성윤(남, 66, 울진읍), 문자(여, 60, 포항시), 선자(여, 58, 서울시), 만윤(남, 57세, 서울시), 광윤(남)씨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맏아들 시윤씨는 현재 울진읍내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고, 막내아들 광윤씨는 수년전에 유명을 달리했다.

“마흔살쯤에 죽은 광윤이가 제일 막내인데, 손재주가 참 많은 아이였어요. 손재주 하나는 참 뛰어났었는데 술을 너무 좋아해서...”

 

장가들고 2년 후, 열여섯살에 제동학교(濟東學校) 3학년에 입학

장필희씨와 이중리씨 사이의 외동아들로 태어나서 열 살에 큰집으로 양자를 들어 열네살이 되던 해에 남광조씨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장보균씨는 열여섯살에 ‘제동학교’에 입학한다.
 

울진 제동학교 재학 당시
장씨는 당시의 제동학교가 울진향교를 교사(校舍)로 사용했으며, 현재의 ‘명륜당’이 있는 2층이 사무실이었고, 아래층이 교실이었다고 전해준다. 울진읍 읍내리에 위치했던 제동학교(濟東學校)는 일제 강점기이던 1922년 4월에 설립된 ‘울진 강습소’가 3년 만에 승격된 학교로써, 뜻있는 지방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서 세운 학교이다.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과 간섭 속에서도 20여 년간 애국지사 등 숱한 인재를 배출해낸 ‘제동학교’는 1938년 4월 울진보통학교로 병합 편입되어 유지되다가, 1943년 봄에 일제로부터 강제로 폐교당하고 말았다.
 

“열네살에 결혼하고 2년이 지난 열여섯살에 제동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요즘의 초등학교격인 제동학교는 6년 과정이었는데 나는 곧장 3학년에 입학했지요. 제동학교 입학을 앞두고 집안 어르신들 반대가 무지 심했어요. 대대로 선조들이 익혀온 한문을 배우면 되지, 일본글은 왜 배우겠다고 제동학교에 입학하느냐는 거였지요. 당시에 한학을 배운 어른들은 일본글은 글도 아닌 것으로 취급했어요. 심지어 제동학교에 입학한다고 하니까 못 가게 하려고 목침위에 종아리를 걷어 세워놓고 매질까지 할 정도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동학교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입학했고, 나이 어린 사람들도 입학하고 그랬어요. 이미 결혼을 한 나이든 학생들은 허리춤에 담뱃대를 차고 학교를 오가는 게 예사였지요. 한 학년이 20여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열여섯 살에 3학년생으로 바로 입학했으니 스무살 되던 해 봄에 제동학교 11회로 졸업했습니다.”


스무살 나이에 춘천공립중학교(春川公立中學校)로 유학   

스무살 나이에 제동학교를 졸업한 장씨는 춘천시에 소재했던 상급학교인 ‘춘천공립중학교(春川公立中學校)’에 진학한다.
“궁벽한 시골에서 큰 도시로 유학을 간 셈이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해 있다 보니까 춘천만 하더라도 심정적으로 가까운 곳이었고, 춘천공립중학교 또한 강원도 내에서는 알아주는 명문학교였어요. 이 학교는 그 후에 춘천고등보통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가 다시 춘천고등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하게 됩니다. 일정시대에는 일본 본국의 고등학교는 그냥 고등학교라고 했고, 국내의 고등학교는 고등보통학교로 불렀습니다. 한마디로 조선을 얕잡아 보고 깔본 거지요. 일정시대였던 만큼 학교수업은 물론이고 총검술과 각종 화기 취급 같은 군사훈련과 노역 봉사에 시달리고는 했습니다. 학생의 신분이면서도 마치 군대생활을 하는 것과 똑같은 학교생활을 강요당했지요. 춘천공립중학교 14회로 졸업했습니다.”
 

대부분 사는 것이 어렵고 궁핍했던 일제강점기 시절에 멀리 유학을 떠나서 학교를 다녔던 만큼 춘천공립중학교 졸업생들의 우정은 남다른 것이어서, 장씨 또한 3년 전까지는 매년 꼬박꼬박 춘천시에서 열리는 졸업생 동기모임에 참석하고는 했다.
 

“매년 빼놓지 않고 춘천공립중학교 14회 졸업생들의 동기 모임을 한다고 초청장이 날아오고 또 참석하고는 했는데, 3년 전부터 내자(內子)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부터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어요. 무릎 관절이 좋지 않더니 3년 전부터는 일어서서 움직이지 못하게 돼서요. 꼼짝없이 옆에 붙어서 내가 삼시세끼 밥도 하고 이것저것 챙겨주고 그럽니다. 밑반찬이야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 며느리들이 만들어다 주지요. 3년 전부터는 참석하지 못하고 있지만 춘천공립중학교 동기생들에게서는 계속 통지가 오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장승태 전 체신부장관이 춘천공립중학교 동기생입니다.”

 

울진금융조합… 울진군청 서기… 대한청년단 울진군지부 간부 시절 

울진금융조합 재직 당시
춘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한 장씨는 ‘울진금융조합(蔚珍金融組合)’의 서기로 취직하게 된다.
금융조합은 일제 강점기에 세워진 ‘농공은행’이 담당하고 있던 제반 업무를 보다 신속하게 수행하기 위해 군 단위 이하의 농촌에 설치했던 보조기관으로, 후에 ‘농업협동조합’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춘천공립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서울에서 금융조합 서기로서의 교육을 일정기간 이수했습니다. 서울에는 금융조합의 연합회가 있었어요.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교육을 받고 난 다음에 고향 울진으로 돌아와서 울진금융조합의 서기로 취직했어요. 지금 울진읍내 농협중앙회가 위치하고 있는 자리가 원래 울진금융조합이 있던 자리입니다. 울진금융조합에서 한 이삼년 근무했나 봅니다. 더 이상 근무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지요. 그때만 하더라도 지정 ‘연령징용’ 제도란 것이 있었어요. 세계 2차 대전이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부터 일본은 마지막 발악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는데,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세울 수 있는 젊은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징용으로 끌려가고, 보다 나이든 중장년층은 탄광이나 군대의 보급요원으로 끌려갈 때였지요. ‘연령징용’이란 것이 이십대에서 사십대 사이의 남자들을 징발하여 전쟁터나 탄광으로 보내고, 탄광이 폐광되면 광산을 폭발시켜서 그대로 땅속 깊이 묻어 버림으로써 조선인들의 씨를 말려 버리는 계획이라는 소문이 나라 전체를 흉흉하게 떠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조선 징용’의 해괴한 소문이 한반도 전체를 휩쓸 그 당시에 장보균씨는 징용을 모면할 목적으로 울진금융조합을 그만 두고 울진군청에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자리를 옮기게 된다.
 

“울진금융조합에 그대로 있다가는 꼼짝달싹 못하고 징용으로 끌려가겠더군요. 그나마 징용을 피하는 데는 군청 공무원이 안성맞춤이겠다 싶어 울진군청 공원(公員)으로 취직했어요. 그때는 군청 공원도 징용대상이었지만 내가 노무 동원을 담당하는 부서의 공원이다 보니까 현명하게 징용을 피할 수 있었지요. 누구보다도 징용 대상자가 누구누구인지를 먼저 알 수 있었고, 혹시라도 내가 징용대상에 올라 있으면 항상 먼저 도망가겠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요. 그 당시 울진군청 내무과장은 일본 본토인이었어요. 공원으로 취직한 이듬해에 정식 지방서기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울진군청 지방서기로 몇 년 근무하는 동안에 해방이 되었지요.”
 

장보균씨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한 것을 계기로 해방이 되며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던 해에 울진군청 지방 서기직을 관두게 된다.
이 무렵에 장씨는 울진읍 토일리에 살던 친구와 함께 화물차를 한 대 구입하여 잠시 동안 장사를 하기도 했었다고 술회한다.
 

“금융조합을 관두었을 때던가, 토일에 살던 임해규라는 친구와 함께 화물차를 한 대 사서 무작정 장사를 한 적이 있었어요. 친구의 말만 듣고 덜컥 차를 사서 이런저런 장사를 해봤는데, 그것도 뜻대로 잘 되지 않았어요. 변변하게 돈도 못 벌고 화물차 값만 날린 거지요. 임해규라는 친구는 그 뒤에 죽변으로 들어가서 어선을 두척이나 사서 고기도 잘 잡고 돈도 많이 벌면서 재미나게 산다 싶더니 어느 날 갑자기 죽었어요. 사람이 산다는 것이 그렇게 허무합니다.”   
 

해방과 더불어 울진군청 지방 서기직을 그만 둔 장씨는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울진군지부의 총무부 차장직을 맡아서 일하게 된다.
“북면에서 태어나서 일제 치하에서 중국 만주로 옮겨가 살면서 독립군에 종사하던 전만중이라는 사람이 대한청년단 울진군 지부장을 맡게 되었지요. 대한청년단은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난 직후에 결성된 우익 청년단체입니다. 당시 좌익계 청년 단체였던 민주청년동맹(民主靑年同盟)과 견줄 수 있던 단체였지요. 사상적으로 우익과 좌익으로 나눠 있었어요. 전만중씨가 대한청년단 울진군 지부장을 맡았고 나는 총무부 차장직을 맡아서 활동했어요. 대한청년단 울진군 지부 또한 중앙 조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신중하게 움직였고, 총무부, 감찰부 등 여러 부서가 있었습니다. 그때 울진지부장을 맡았던 전만중씨는 후에 강원도 울진군에서 제헌의원을 지낸 김광준씨에 이어 3대와 4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결코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었던...’  6.25 전쟁 

젊은 시절의 장보균씨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1945년부터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까지는 좌파다, 우파다 해서 울진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서민들이 살아가는 것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할 때였다.
 

당시 울진 지역에도 좌파적 성향을 지닌 공산당들이 수두룩이 깔려 있었다고 장씨는 말한다.
“그때 지방에도 좌파가 많았지요. 그들은 울진군청에서 지방직 서기까지 지낸 나를 고운 눈초리로 보지 않았어요. 해방 전에 공무원 신분을 지냈던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디 의탁할 곳이 있어야겠다 싶었는데, 때마침 대한청년단 울진군지부가 결성되면서 자연스레 뜻을 함께 모으게 되었지요. 후에 좌파가 지방에서 득세했을 때는 우리들 모두 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어요.”
 

6.25전쟁 기간 동안에 현재 호월1리 장보균씨의 집은 한동안 인민군 부대의 중대본부로 이용되기도 했다.
“인민군이 울진까지 밀고 내려왔을 때 이 동네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우리 집은 자연스레 인민군의 중대본부로 강제 사용됐습니다. 그때 나는 인민군을 피해 도망을 갔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수산천을 건너다가 발각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요. 집에 돌아와서 급한 마음에 동네의 점쟁이에게 점을 봤는데, 집에 있어야 오히려 살 수 있을 팔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또 다시 도망가는 걸 포기하고 집에서 지냈어요. 그 점쟁이가 용하기는 용했는지, 어쨌든 무사히 6.25를 피해 살아남았습니다.”
 

인민군과 함께 한 집에서 기거하던 장씨는 인민군들이 ‘빨치산을 나가지 않으면 죽이겠다’고도 여러 차례 협박을 가해왔었다고 전해준다.
“인민군들과 한집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툭하면 빨치산에 나가라고 윽박지르고는 했어요.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면서 임기웅변으로 때워 넘기며 힘들게 버텨냈습니다. 무월리 이 동네도 빨치산이 말도 못하게 많았습니다. 그들은 동네 뒷산 대숲이나 짙은 숲속에다 구덩이를 파놓고 생활했는데, 그 흔적도 세월이 지나니까 지금은 다 메워지고 없습니다. 뭐, 그래저래 세월을 보내다 보니 인민군도 다 물러가고... 그때는 참으로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었지요. 우리 동네에서도 여럿이 죽고 다치고 했으니까요.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이 매한가지 듯이 공산당 하는 사람 중에도 어진 사람은 있었어요. 나에게 힘들고 괴롭더라도 조금만 참고 버티면 좋은 날도 있을 거라고 위로해주는 공산당도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고맙지요. 어느 세상이나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는 거지요.”
 

지긋지긋하게 길었던, 장씨의 말을 빌리면 ‘결코 사람 사는 것이 아니었던’ 6.25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장보균씨는 별다른 직장을 얻어 볼 요량도 않고 집안에 딸린 논밭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전쟁이 휴전되고 난 다음에는 직장에 취직할 생각도 안하고 그저 농사를 지었어요. 그게 마음도 몸도 편했지요. 잠시 한때는 대한청년단 동지였고, 선거운동도 앞장서서 많이 해줬던 전만중 국회의원의 힘을 빌려서 작은 사업이라도 하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세상사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더군요.”

 

반평생 써온 일기 가운데 중요 사건만 발췌해서 책으로 묶고 싶어 

거실 한쪽에 빼곡히 보관되어 있는 43년간의 일기장
일기를 기록하는 것으로는 울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장보균씨는 1964년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살아가면서 지난일이 더러 생각나지 않을 때도 있고 해서 무엇인가 자꾸 기록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제대로 된 노트에 기록한 것이 아니라, 달력의 뒷면을 이용하거나 달력 앞면 밑 부분의 메모 란을 이용하여 그날 일어났던 일 가운데 제일 중요한 일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일이 없는 경우에는 그냥 건너 띄기도 했고요.”
 

그의 말처럼 장씨가 제일 처음 썼다는 일기는 1964년 당시의 삼일양조장(三一釀造場) 달력의 앞면을 이용하여 기록되어 있고, 강원도 주문진읍(注文津邑)에서 운영된 것으로 보이는 삼일양조장의 전화번호가 31번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철 지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렇게 단순하게 일지 형식으로 중요한 일들을 기록하다 보니까 무엇인가 자꾸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더군요. 이럴 바에는 차라리 매일 정식으로 일기를 쓰자 싶었어요. 그래서 1971년부터는 매년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새로 공책이나 일기장을 마련했어요.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셈이지요. 매일을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써왔습니다. 뭔가 쓸 것이 많은 날에는 길게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짧게 쓰기도 하고 그랬지요.”
 

장보균씨의 일기를 들여다보면 한문 세대답게 대부분의 내용이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젊은 세대는 읽어 내려가는 일조차 힘에 부친다.
지나간 43년 동안 꾸준히 써왔고, 지금도 써 내려가고 있는 장씨의 일기장은 상당한 분량으로써, 40여년 손때를 간직한 일기장은 거실 한쪽 책장 밑에 연도별로 정리되어 일목요연하게 보관되어 있다.
 

“일기를 쓰는 것이 습관으로 굳어지면 많은 장점이 있어요. 지나간 언젠가의 일들이 가물가물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일기장을 들춰보면‘아, 그때 그랬었구나’하며 새삼 잊힌 기억을 되살려 낼 수가 있지요. 또한 그날 하루를 반성하게 됨으로써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귀도 어둡고, 눈도 어둡고, 기억도 어두워지다 보니까 어떤 날은 일기를 쓰는 것을 하루 이틀 깜빡하고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아, 내가 일기 쓰는 것을 잊었구나’하면서 또 쓰고는 합니다.”
 

고희(古稀, 70세)와 산수(傘壽, 80세)를 지나서 졸수(卒壽, 90세)에 접어든 장씨는 요즘 들어 반평생동안 빠짐없이 기록해온 자신의 일기 가운데 중요했던 사건을 별도로 발췌해서 또 다른 책 한권을 만들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부터 그동안의 일기를 뒤적여가면서 내 인생에서 중요했던 일들을 이것저것 가려 뽑아서 다른 공책 한권에 옮겨 쓰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죽고 나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아직은 살아서 숨 쉬고 있으니 의무감 비슷한 것도 있고, 이것도 역사인데 하는 생각도 있고 그래요. 사료관이나 박물관 같은 곳에 기증하라고 주변에서 권하는 사람도 있는데, 무슨 대단한 거라고 기증까지 하겠어요? 그저 나 개인과 우리 집안이 일평생 살아온 흔적에 불과한 것인데...”
 

장씨는 40여년 일기를 써오다 보니 이제는 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매일 매일 일기를 안 쓰면 무엇인가 잃어버린 거 같고,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습관이란 그렇게 끈질긴 것이지요. 아마 죽을 때까지 쓰게 될 것 같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 울진문화원 회원으로도 활동 중인 장보균씨의 자택은 삼백년이 훌쩍 넘은 고택으로, 장씨는 그 고택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을 수 있을까하여 현재 지정 신청을 해둔 상태라고 전했다.
  

장보균씨가 살고 있는 300년 역사의 고택 전경


반평생 일기 쓰기를 생활화해온 장보균씨의 근래 일기 한 구절을 옮겨본다.
「2007년 9월 17일. 태풍 사라지고 청천으로 변함. ①태풍이 서해남단에스 상륙, 큰 피해를 주고 있다. 부산 쪽으로 이동할 새 군 동해로 빠지자 곧 소멸 되여 동해로 사라젓다고 했다. 시가지는 침수 피해로 큰 몸살을 알코 있다고 한다. 비는 거치고 일조가 이어질듯. ②태풍은 전남 목포 앞바다에서 많은 비와 바람으로 해일로 많은 피해를 입핀 뒤 부산방면으로 실태를 마저 상실하고 동해 앞바다로 사라저 소멸되여 태풍은 사라젓고 먼 동해로 진출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비바람이 있을 것이라는 자취는 없으젓고 마침 청천이 됫고 비는 멈추었고 바람도 사라저 좋은 날시로 변했다. ③시윤과 진칠 둘이 형제봉 선영 묘 제초차 갓는데 봉상에 올나갓으나 묘소 있는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두메마을이 보이는 곳까지 미로를 허둥지둥 헤맷다고 하는데, 강우 중에 큰 고통을 격었다고 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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