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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동안 베길쌈을 해온 전봉희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8.02.20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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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 놓세 베틀 놓세/옥난간에 베틀 놓세/뒷다리는 낮게 놓고/앞다리는 높게 놓고/잉어대는 삼형제라/눈썹대는 두형제라/눌림대가 우는 소리/등 굽은 신찐나무/헌신 한짝 목에 걸고/당겼다가 밀었다가/식구 많은 도투마리/엎어졌다 자빠졌다/대추나무 인조북에/그 베 짜서 뉘 줄라노/울 오라비 장가 갈적/직영 도포(道袍) 지어 주세/울 동생 시집 갈적/가마휘장 둘러 주세』(2001년 울진문화원 발간 ‘울진민요와 규방가사’에서) 

 

우리 민족이 삼의 줄기를 가늘게 찢어서 베틀에서 짠 천인 삼베를 입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알려진다.
전통 복식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베, 마(麻), 마포(麻布), 포(布)로 불리기도 하는 삼베는 고대 부족국가시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고, 통일신라시대부터 모시와 삼베로 분리되어 직조되기 시작했다는 견해를 정설로 받아들인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저마포와 대마포를 따로 직조해서 왕족이나 귀족은 등급이 높은 저마포(모시)를 입었고, 서민은 등급이 낮은 대마포(삼베)로 옷을 해 입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삼베를 직조하는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주요 의복의 소재였던 삼베는 쌀과 함께 세공(稅貢)의 대상이 되었고, 화폐의 기능까지 겸한 것으로도 전한다.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예맥전에도 마포의 생산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한시대에도 종마가 있었다고 전하며,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夫餘)의 험한 산중에서 마포가 산출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유리왕 당시부터 시작된 두레삼은 각 동리 부녀자들의 우의와 단결을 다지는 장이 되었고,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 태자는 나라가 망한 울분과 슬픔을 달래기 위해 서민들이 입고 다니던 삼베옷을 입고 개골산으로 들어가서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상(喪)을 당했을 때 삼베옷을 입고 망자(亡者)에 대한 애도를 표하는 상복(喪服)의 습속 또한 망국의 한을 안고 마의태자가 삼베옷을 입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지금도 4년마다 윤년 윤달이 찾아오면 모시풀의 줄기 껍질로 만드는 모시에 비해 삼 껍질로 만들어져서 올이 더 굵은 삼베를 부모님의 수의로 장만해 두는 사람들이 많다. 

 

인위적인 월력법인 윤달은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고 탈이 없는 달이라고 해서 윤달에 수의를 장만하게 되면 부모님이 보다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삼과의 1년생 식물인 삼 껍질의 안쪽에 위치하는 인피섬유(靭皮纖維)를 이용하여 만든 직물인 삼베의 섬유는 자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섬유질 가운데 가장 길어서 면사보다 그 강도가 10배 정도 강한 것으로 알려진다. 

 

삼베는 수의를 비롯하여 자외선도 차단하고 면직물보다 20배 이상의 신속한 수분 흡수력과 배출력으로 인해 여름철 각종 의류와 침구류로 선호되지만, 특유의 항균 기능으로 인해 주방의 행주로 사용되기도 하고, 생선을 건조할 때나 된장과 고추장 항아리를 덮는 덮개로도 이용된다. 

 

지극히 우수한 여러 가지 기능을 지닌 삼베의 원료가 되는 삼은 직물로서의 이용가치 이외에도 음식의 재료, 종이 생산, 의약품 원료, 화장품 원료, 페인트 원료, 플라스틱 원료, 화장품 원료 등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런 뛰어난 기능을 가진 삼과 삼베지만 요즘 들어서는 널리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삼의 줄기와 잎에 함유되어 있는 마취성 물질인 ‘테트라히드로카나비놀(THC)'이라는 물질이 1976년에 시행된 대마관리법에 의해 마약으로 규정되면서 삼의 재배와 취급이 철저하게 규제됨에 따라 재배면적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베를 짜는 기술이 워낙 복잡하고 힘든 여러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더 이상 삼베를 직조하는 기술을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삼은 현재 강원도, 안동, 보성, 남해, 순창 등 전국적으로도 일부 지방에서만 재배되고 있다. 
울진 지역 또한 3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직접 베길쌈을 해서 옷을 지어입고는 했지만, 지금은 베길쌈을 하는 여공(女功)들이 50명 내외인 것으로 알려진다.
어느 새인가 명물이 잊혀져가는 이 시대의 추세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지, 울진 지역에서도 베길쌈이 급속하게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다래끼 매고 들로, 소를 끌고 산으로 다니던 어린 시절 

10살부터 어머니에게서 베짜는 기술을 배운 이래 60여 년 동안 ‘박금’에서 베길쌈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봉희(69세. 울진읍 정림2리)씨는 북면 신화리 화동에서 전장출씨와 남윤경씨의 11남매 중 여섯째딸로 태어났다.
“신화리 화동에서 태어났어요. 지금과는 달라서 예전에는 자식이 생기면 그냥 낳았고, 또 어른들이 집안에 아들은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 형제자매가 많았지요. 위로 언니가 다섯명 있고, 아래로 여동생 한명과 남동생 네명이 있어요. 바로 위의 언니 이름이 봉학이고, 밑의 여동생이 춘자, 그리고 남동생은 호영, 호무, 호원, 호발로 불러요. 위의 언니들은 세월이 흐르다보니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드네요. 다 커서야 굳이 이름을 부를 일도 없고 했으니까. 어릴 때는 큰언니부터 난, 분노미, 몽꽁, 춘단이 뭐 다들 그렇게 부르고는 했는데.” 

 

뻔한 농사에 딸린 식구는 많다보니 전봉희씨는 넉넉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한다.
“그때만 해도 농토가 척박해서 농사도 잘 안되고 식구는 많지, 먹고 사는 일이 늘 어려웠지요. 자식을 11남매나 둔 데다가 아버지는 집안의 종손이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담양 전씨 14대 종손이었어요. 손바닥만한 농토에 제사는 또 어찌나 엄청시리 많은지. 그런데 종손이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저도 박씨들 종손 집으로 시집을 왔네요.” 

 

일제강점기 말기에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난 우리나라의 다른 여성들 마냥 전봉희씨 또한 학교에 다닐 형편은 아니었다.
“막 해방이 됐을 때쯤 저도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 학교는 다니지 못했어요. 이웃에서도 잘사는 집들은 딸자식까지 학교를 시키고는 했지만, 우리 집이야 원체 자식도 많고 먹고 살기도 힘들다 보니까 딸자식들은 학교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했지요. 다래끼 들고 들로 산으로 나물 뜯으러 다니고, 근처 산으로 소를 이끌고 꼴 먹이러 다니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밖에 없어요.”

 

결혼한 지 3년 만에 한줌의 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남편, 그리고 유복자 

전봉희씨는 25살에 남편 박장승씨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의 다른 또래들처럼 나물도 뜯고 소도 먹이러 다니고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전씨는 25살에 정림2리 박금마을에 살던 박장승씨와 부부의 연을 맺는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인 박금의 어떤 분이 중매를 했어요. 25살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남편은 저보다 한 살이 더 많았습니다. 그때의 결혼식 풍습은 요즘과는 많이 달랐어요. 먼저 신랑될 사람이 가마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 삼사일을 묵고는 다시 본가로 돌아갔어요. 그러다가 해가 바뀌어서 새색시인 제가 시집으로 가마를 타고 왔었지요. 그 당시에 신부는 사방이 전부 막혀있는 가마를 탔고, 신랑은 사방이 확 트인 가마를 탔던 기억이 새롭네요.” 

 

전봉희씨는 시집을 오니까 이미 시부모님이 두 분 다 계시지 않았다고 전해준다.
“남편이 6살 되던 해에 시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해요.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시아버님은 다른 여자를 얻어서 강원도 정선으로 떠나버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오갈 데가 없어진 남편을 오촌당숙이 거두어 준거지요. 우리 결혼도 오촌당숙이 시켜준 것입니다.” 

 

오촌당숙 집에서 신혼생활을 이태정도 했을 무렵에 전씨의 남편 박장승씨는 군에 입대하게 된다.
“오촌당숙 집으로 시집을 와서 2년 정도 살고 나서 남편이 9월 달에 군대를 갔어요. 그리고 다음해 음력 1월에 군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혼한 지 햇수로 3년 만에 남편과 사별한 거지요. 그때 제 나이가 28살, 남편은 29살이었어요. 남편은 군대에 있으면서 일요일 날 외출을 나갔다 오던 도중에 대형 화물트럭에 치여서 세상을 떴다고 전해 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어두울 때라서 그런지 별다른 보상도 못 받았고, 다만 집안어른들이 장례식에 참석한 다음에 장례비조로 약간의 돈을 받아오기는 했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어요. 그것으로 끝이었지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상도 전혀 없었고, 국가유공자 혜택도 못 받고 그냥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저는 남편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어요. 당시만 해도 교통편도 좋지 않았고, 제가 임신한 몸이라고 집안 어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말리기도 했고요. 며칠 뒤에 남편은 한줌 재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지요.” 

 

전봉희씨는 남편 박장승씨와의 길지 않은 결혼 기간 동안 1남1녀를 두었다. 맏딸 연숙(44세)씨는 결혼하여 경기도 부천에 살고 있고, 아들 재용(42세)씨는 울진군청에 근무하고 있다.
“아들 재용이가 아버지 얼굴도 못 본 유복자지요. 음력으로 정월달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5월에 재용이가 세상에 나왔어요. 요즘이야 어떤 어머니가 자식새끼까지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둥 좋지 않은 얘기도 간간히 들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당시에 저는 재가는 꿈도 꾸지 않았어요. 야속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도 부모 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오촌당숙 손에서 외롭고 힘들게 컸는데, 자식새끼들 버려두고 어디를 가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는데. 제가 글을 알아서 일기를 썼으면 수십권은 족히 되었겠지만, 글도 쓸 줄 모르고 그저 가슴속에, 기억 속에 파묻어두고 이날 이때껏 살아왔어요.”

 

베길쌈을 하는 재주가 없었더라면 사는 게 많이 힘들었을 것 

그나마 어렵던 살림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더욱 힘들고 막막했었다고 전씨는 기억을 떠올린다.
“처음 오촌당숙 집으로 시집이라고 오니까 무꾸(무) 하나 갈아 먹을 땅조차 변변히 없었어요. 예전에는 시댁도 인근에서 먹고 살만한 집이었다는데, 시어머니 되시는 분이 일찍 돌아가시면서 가세도 따라서 기울었다고 들었어요. 결혼한 지 3년 만에 남편조차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그저 아득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지요. 남편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 일처리를 맡았던 집안 어른들은 보상금이라도 얼마 받아왔나 보던데, ‘이게 네 남편 죽고 난 다음에 나온 보상비다’그런 말 한마디 없었어요. 그저 장례비조로 얼마를 받아오기만 했다고 알려주었지, 얼마를 받았는지 또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지금까지도 모르고 지내오고 있지요. 또 너무 일찍부터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이른 철이 든 것인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식들이‘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하며 물어본 적이 없었어요. 저도 자식들한테 아버지가 어떻게 돌아가셨고, 보상금이 얼마 나왔는데 오촌 할배가 어쨌잖나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해준 적이 없고요. 그런 말을 해봤자 서로가 가슴만 아플 뿐이지요.” 

 

전씨는 그래도 유복자인 아들 재용씨를 낳고 나서 얼마 후에 시집의 오촌당숙이 집 한칸을 마련해주었다고 말한다.
“재용이를 낳고 나니까 오촌당숙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을 새로 지어 주고, 곁에 딸린 작은 밭뙈기 하나와 인근에 있는 논 네 마지기를 주었어요. 그 땅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10살 때부터 친정어머니에게 배운 베길쌈이 그동안 먹고 살고, 그나마 애들을 고등학교까지라도 끝마치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마 베를 짜는 기술이 없었다면 남편도 없이 자식 둘 데리고 험한 세상을 헤쳐 나오는데 많이 힘들었겠지요.”

 

그때는 베 짜는 기술 없고 바느질 못하면 시집가기도 어려웠다 

10여년전 베틀에 앉아 베를 짜던 당시의 전봉희씨
60년 동안 베길쌈을 업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전봉희씨는 자신이 어릴 때만 하더라도 베 짜는 기술이 없으면 시집도 못 갔다고 전해준다.
“사오십년전만 하더라도 시골에서는 베 짜는 기술이나 바느질 솜씨가 없으면 시집가기도 힘들었어요. 베 못 짜고 바느질 못하는 여자를 어느 집에서 며느리로 맞아들이겠어요? 여자 아이들은 누구나 어릴 때부터 친정 엄마나 동네 아주머니들을 통해 삼베 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제가 정확히 언제부터 베 짜는 기술을 배우게 됐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대충 열살 무렵부터 어머니를 통해 삼을 삼고 베를 짜고 하는 기술을 배웠던 거 같네요.  

 

그때만 하더라도 다들 삼나무를 자기 집 주변에 심고 가꾸어서 삼 껍질을 채취하고는 했어요. 자기 집 삼 껍질이 모자라면 산중으로 들어가서 야생 삼을 직접 채취해 오기도 했고요. 그때는 야생 삼나무도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어요. 지금이야 대마초다 뭐다 해서 구경하기조차 힘들게 되었지만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삼 껍질은 때를 맞추어 강원도에서 내려오는 장사꾼을 통해서 구합니다. 울진에는 더 이상 삼을 재배하는 곳이 없어요. 장사꾼들이 삼을 채취해서 찌고 난 다음에 시장을 돌면서 내다 파는 거지요. 그 장사꾼들도 점점 뜸해지고, 앞으로는 삼나무를 많이 심는 가까운 안동에서 구해다 써야할 판입니다.” 

 

대마(大麻)로도 불리는 삼은 일년생 초본 식물이기에 해마다 봄이 되면 새로 씨를 뿌려서 재배한다.
“삼은 연연이 따로 씨를 구해 봄에 땅에 뿌려서 가꾸어야 해요. 3월쯤에 삼나무 씨를 뿌리고 서너 달이 지난 7월경이 되면 다 자라서 베어내야 합니다. 베어낸 삼나무는 칼을 이용해서 잎을 쳐내고 줄기의 굵기대로 골라내서 일정한 단을 만들게 되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삼나무 단을 냇가 가까운 장소에서 돌멩이를 쌓아 아궁이를 만들고 불을 때고 돌을 달구어서, 그 돌 위에 물을 끼얹으며 수증기를 피워서 묶은 삼단을 쪄내게 됩니다. 언젠가 강원도에서 삼 껍질을 벗겨내는 과정을 구경하니까 이제는 보일러로 쪄 내더군요. 그러나 예전에는 모두들 야외에서 아궁이를 임시로 만든 다음에 삼단을 올려놓고 수증기를 이용해서 쪄 냈어요. 삼나무를 수증기로 쪄낸 다음에 뜨거운 기운이 없어지면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합니다. 그런 다음에 손으로 삼 껍질을 잘게 찢어서 삼톱으로 톺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잘게 째고 삼톱으로 잘 톺아야 좋은 삼베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여름철 우리가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삼베를 만드는 공정은 너무 복잡하고 섬세하여 쉽게 이해되지도 않고, 그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는 더 더욱 어렵다.
“음력으로 8월 추석 무렵이 되면 가늘게 찢은 삼을 저녁으로 밖에 내놓고 밤이슬을 맞힙니다. 며칠 동안 그렇게 하면 시퍼렇던 삼 껍질의 색깔이 누렇게 변하지요. 그러다가 추석을 지나고 겨울 김장까지 끝내고 나면 삼을 삼습니다. 잘게 쪼갠 삼을 한올씩 빼내서 삼뿌리 부분과 끝부분을 실로 이어가는 거지요. 삼올의 두 끝을 허벅지에 올려놓고 손바닥에 침을 묻혀가며 비벼서 긴 실로 맞물리게 잇습니다. 그리고 올을 이은 삼실을 물레를 이용해서 잣고 꼬아서 실타래를 만들어 따뜻한 방안에서 건조시키지요. 적당히 말린 삼실은 양잿물에 익혀서 냇가로 가서 물밑에 깔아놓아요. 그러면 삼실이 뽀얗게 변하게 되지요. 그렇게 뽀얀 색깔로 변한 삼실에다 치제(치자)를 사용하여 노란색으로 물을 들입니다. 노란 물을 들인 삼실은 다시 풀어 마당으로 나가서 일일이 손으로 비비며 말려야 되지요. 그 다음에 실을 만져서 고르게 하고 소쿠리 같은데 담아서 열십자로 묶어 실떡을 만들어요. 마지막으로 세(샛수)를 정해 실떡에서 실 끝을 찾고 고무래의 구멍을 통과시켜서 바디와 북을 이용해서 베를 짜게 되는 것이지요. 한필의 삼베가 만들어지려면 수십 가지 이상의 힘들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삼베를 사는 사람들이야 베가 비싸다고 하지만, 정작 베를 짜는 우리들은 품값도 제대로 안 나오는 셈이지요.”


베 1필 짜는데 보통 3일 걸려, 열세 베는 1필에 200만원 이상 호가 

현재 박금에서 베길쌈을 하는 이는 모두 4명이다. 이들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삼도 삼고 얘기도 나누면서 반복 노동의 무료함을 달랜다

전봉희씨는 베를 한필 짜는데 보통 3일정도 걸린다고 전해준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울진에서는 베 1필하면 보통 넓이 1자 반에 길이 40자를 말합니다. 1자가 약 30센티미터니까 얼추 계산이 나오지요? 베를 1필 짜려면 보통 3일정도 걸려요. 베 짜는 도중에 올이 안 끊어지면 3일정도 걸리지만, 올이 끊어지고 하면 사오일도 좋지요. 예전에는 저도 베를 많이 짰지만 이제는 일년에 3필 정도 짜고, 사오년 전부터는 남의 베를 많이 짜주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이 삼을 삼아서 들고 오면 대신 베를 짜주고 품삯을 받는 거지요. 올이 섬세한 열세 베를 짜주면 보통 30만원 정도의 삯을 받습니다. 그것보다 못하면 15만원도 받고, 16만원 받기도 하고요. 옛날에야 젊은 사람들이 모두 직접 베를 짰지만 이제는 나이든 노인들이 삼을 삼게 됐고, 힘에 부치니까 삼을 삼아서 저에게 베 짜는 일을 맡기는 거지요.”     

 

삼베는 올이 가늘고 촘촘하게 짜인 것이 당연히 고급이어서 가격도 비싸고, 올이 굵은 것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떨어진다.
“열세(승) 같은 베는 아주 고급으로 1필 가격이 200만원을 넘어가기도 하지요. 예를 갖추어서 정식으로 남자 수의 한벌을 옥양목 하나 안보태고 만들려면 베가 4필 정도 소용되는데, 열세로 고급 수의를 지으려면 베 값만 하더라도 800만원 이상이 들게 되는 거지요. 수의를 짓는 품값까지 포함하면 천만원은 족히 드는 셈입니다. 베 1필이면 여자들 두적삼 2벌을 만들 수 있고, 남자들 바지저고리는 1벌 나옵니다. 열세야 원체 수공도 많이 들고 비싸서 일반인들은 엄두를 못 내고 돈 많은 절의 스님들이 여름옷으로 사가거나 하지요. 보통 사람들 여름 옷감으로는 일곱세나 그 이하의 것들이 제격이지요. 우선 가격이 적당하니까요.” 

 

베틀에 앉아 삼실로 베를 짜는 과정에서 올이 끊어지면 누에고치를 사용하여 쑨 풀로 두 올의 끝을 잇는다. 이 방법 또한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라고 전씨는 일러준다.
“베를 짤 때는 날실에다 가끔씩 물을 적셔 주면서 짜지만, 그래도 건조하거나 하면 올이 끊어지는 일이 생기지요. 베를 짜다가 올이 끊어지면 누에고치로 쑨 풀을 이용해서 양끝을 잇습니다. 누에고치를 솥이나 냄비에다 넣고 푹 삶으면 진득진득해지면서 풀이 만들어지는 거지요. 베를 짤 때 그 풀을 항상 옆에다 두고 올이 끊어지면 손에 발라서 끝을 잇고는 합니다. 삼실을 잇는 데는 누에고치 풀만 한 게 없어요.” 

 

어린 10살 때부터 친정어머니로부터 기술을 배워 60여년 삼베를 짜고 있는 전봉희씨는 요즘은 대부분 수의를 짓기 위해 삼베를 사간다고 전한다.
“지금이야 실용적이고 편하고 값싼 옷감이 지천으로 널려 있잖아요? 가격도 만만찮고 입으면서 관리하기도 힘든 삼베를 누가 선뜻 좋아하겠어요? 제가 짠 삼베는 대부분 수의로 팔려 나가고, 가끔은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들이 사위될 사람의 도포를 만들어 준다고 사가고 그럽니다. 수의를 만들 삼베는 그래도 윤년 윤달에 많이 찾아요. 베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옷감과는 달리 한꺼번에 많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까, 찾는 사람이 많을 때는 다른 사람들의 베를 소개도 해주고 그러지요. 어쩌다 타지에서 수의를 지어서 보내줄 수가 없는지를 물어오면, 수의 짓는 사람에게 수의를 짓게 한 다음에 택배로 보내 주기도 하고요.”

 

남의 집으로 돈 꾸러 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섬유를 자아서 실을 만드는 물레(위)

전봉희씨가 수십년동안 사용해온 베길쌈 도구들(왼쪽부터 자, 뚝불개, 말키, 북, 시물비, 자개비, 바디집, 바디, 사치미, 비갱이)(가운데)

전봉희씨가 짜 놓은 삼베(아래)

오랜 세월 무르팍이 헤질 만큼 쉴 새 없이 밤낮으로 삼을 삼고, 베틀에 앉아 베를 짜온 전봉희씨는 ‘삼베를 짜지 않았더라면 여자 혼자 벌어서 아들, 딸 두 자식 중학교도 보내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논밭이 있어야지요. 논농사라고 지어봤자 겨우 세식구 먹을 양식거리로도 빠듯하고, 밭뙈기라고 해봐야 고추나 심어먹을 정도인데, 삼베를 짜지 않았으면 두 자식들 중학교 보내는 것도 엄두를 못 냈을 테지요. 결혼 3년 만에 남편을 사고로 먼저 떠나보내고 나서도 단 한번도 죽고 싶다거나 어렵다는 생각을 안 해 봤어요. 그저 어쨌거나 애들 고등학교라도 시키면서 남의 집으로 돈 꾸러 가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지요. 그나마 애들 둘이 커오면서 아버지 타령을 안 해서 참 다행이었어요. 아버지 타령이라도 했으면 저들이나 나나 참 힘들었을 텐데...... 뼛가루가 되어서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은 소곡의 어느 산을 골라서 묘를 썼지요. 군청에 다니는 아들의 책임이 참 무거워요. 항상 그 점이 미안하고요. 박씨 집안의 종손이다 보니 많은 제사도 모셔야 하고, 몇십 자리 묘도 추석이면 몇 날 며칠 찾아다니며 벌초를 해야 하니까요. 지금이야 차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예전에는 추석이 되면 요만한 어린 아들을 앞세우고 일일이 조상들 묘를 찾아 다녔어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강원도 정선으로 새장가를 들어서 고향을 떠났던 시아버님도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고향으로 모셔왔어요. 살아오면서 후회요? 아이고, 이제 후회하면 뭐하니껴? 열심히 일해서 두 자식 키웠고, 지금까지 먹고 살았는데...... 저야 살만큼 살았고, 아버지 없이도 바르게 커 준 두 자식이 고맙고, 엄마에게도 항상 잘 해줍니다. 아들이야 가까이 사니까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부천 사는 딸아이는 여름 휴가 때도 놀러오고 늦가을 김장철이면 엄마 힘들다고 꼭 찾아와서 함께 김장도 도와주고는 하지요. 논농사 조금 있는 거야 일당 주고 농기계 불러서 시키고, 집 옆에 딸린 밭뙈기에는 채소나 조금 갈아 먹고 그렇게 지내요. 베길쌈이야 평생 해온 일이니까 하는데 까지 하게 되겠지요.” 

 

결혼 3년만인 28살에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앞세우고 40여년 두 자식을 뒷바라지하며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전봉희씨는 1980년 당시 나이 39세일 때 재단법인 보화원(補化院)에서 시상하는 열행상(烈行賞)을 수상했다. 이 상은 국내 효자, 효부, 열녀상의 효시인 보화원에서 시상하는 권위 있는 상인만큼, 수상 자체가 지역의 영광일뿐더러 전봉희씨 자신 또한 이미 열녀로서 전국적인 반열에 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전 어느 시절, 복잡하고 고단한 길쌈을 반드시 익혀야 여자들이 시집을 갈수 있던 때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길쌈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고, 10살이 되던 해부터 무릎이 벗겨져 쓰라린 것도 참아내면서 긴 겨울 내내 삼을 삼고, 베틀에 앉아 외롭고 고된 노동을 말없이 감내해온 전봉희씨. 

 

25살에 결혼한 이후 단꿈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3년 뒤에 군에 간 남편을 사고로 잃고, 어린 딸과 유복자로 세상에 나온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 타고난 숙명으로 베틀과 씨름해온 전씨. 

 

베틀에 몸을 묶고 베를 짜는 작업은 외롭고 고단한 노동이다. 허리에는 뚝불개(부테)를 두르고 배에 말코를 차고 발에 끌신을 신고 양손에 북과 바디집을 움켜쥐고 쉴 새 없이 온몸을 움직이며 일해야 하는 베짜기를 두고, 오죽하면 ‘베를 짜고 나면 사지 육천마디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전봉희씨는 베틀 앞을 떠나지 못하고 평생을 그렇게 베를 짜 왔다.
우리들 할머니, 어머니의 모질고도 지난한 생의 그것처럼 삶이 제 아무리 고달프고 박복해도 미소를 잃지 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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