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나 소포 등을 한곳으로 모아서 배달하는 우편 체신 업무를 담당하는 우체국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기존에 말을 탄 전령이 릴레이식으로 우편물을 전해주던 역참제에 의해 이루어지던 전근대적인 통신 업무는 고종 21년인 1884년에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립되면서 근대의 우편제도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우정총국은 개국한지 17일 만에 갑신정변이 발발하면서 폐쇄되었고, 그 후 10년 동안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역참제에 의한 통신업무가 지속된다. 그러다가 고종 32년인 1895년 6월에 통신국 소속의 24개 우체사(郵遞司)가 설치되면서 근대적인 우편업무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체사의 수는 1900년에 38개소에 이르렀지만, 1905년에 일본과의 한일통신합동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됨으로써 국내의 통신권은 고스란히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1945년 광복 이후에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우편제도는 다시 미군정에 의해 운영되다가, 1949년 정부조직법이 제정됨에 따라 지방체신관서 설치법이 공포되어 명칭 또한 우체국으로 변경되었고,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1면(面) 1국(局)을 원칙으로 우체국의 숫자는 급속도로 증가하게 된다.
우리나라 우체국의 역사는 1884년 우정총국의 설치에서부터 현재까지 124년이나 지났다.
긴 역사 못지않게 현재의 우체국은 본연의 업무인 국내·외 우편 서비스는 물론, 공과금 납부, 예금, 보험, 경조금 배달, 인터넷 뱅킹 등 금융 업무에 이어 각종 쇼핑과 택배사업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울진우체국은 1905년 6월 25일 ‘우편국’으로 개국한 이래 1910년 10월 1일 ‘울진우편국’으로 승격했고, 1949년 8월 13일 ‘울진우체국’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1971년 12월 15일 사무관국으로 승격한 울진우체국은 1976년 구 청사로 신축 이전했고, 1989년 12월 23일 현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했다.
현재 울진군 관내에는 죽변, 부구, 기성, 후포, 평해, 매화우체국 등 일반우체국 6개소와, 삼근, 근남, 온정 등 별정우체국 3개소가 업무를 보고 있고, 기성면 구산리에 우편취급소 1개소가 운영되고 있다.
우체국과 멀리 떨어져 있어 우편업무 이용에 불편이 큰 지역에서 생활하는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된 우편취급소는 주로 편지, 소포 등의 우편업무를 비롯하여 공과금 납부 업무를 감당한다.
우체국과의 계약에 의해 공무원 신분이 아닌 개인이 운영하는 우편취급소는 급여 또한 국가에서 따로 지급하지 않고, 우편물 접수에 따르는 우표판매, 소포 접수, 제세공과금 수납에 따르는 일정액의 수수료를 지급받아 운영하게 된다. 한때 울진군 관내에서는 북면 하당리, 서면, 후포면 삼율리, 평해읍 거일리, 기성면 구산리 등에서 5개소의 우편취급소가 운영됐지만, 현재는 기성면 구산리에 위치한 울진구산우편취급소가 유일하게 영업 중이다.
남쪽 끝자락 바닷가 동네 남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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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 구산리에서 1985년 12월 30일 개국한 이래 23년 동안 우편취급소를 운영 중인 김정병(68세. 기성면 구산2리)씨는 경상남도 남해가 고향으로, 김윤기씨와 박성순씨 사이에서 6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쪽 끝자락 바닷가 남해에서 5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제 위로 정용이라는 형님이 한분 계시고, 제 밑으로 정수, 정상이라는 이름의 남동생과 정여라는 여동생, 또 정주라는 막내 남동생이 있지요. 바로 아래 남동생은 1년 전쯤에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어요.”
남해 바닷가에서 바다 일을 주로 하고, 얼마 안 되는 척박한 농토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병씨는 넉넉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들 먹고 살기 어려웠지요. 아버지, 어머니는 남해 바닷가에서 멸치잡이에 딸린 일도 하고 정치망 일도 하고 집에 딸린 논밭에서 농사도 조금 짓고는 했지만 먹이고 입혀야 할 자식은 많지, 큰돈은 못 벌지...... 오죽했겠어요? 항상 먹고 사는 일이 힘에 부칠수 밖에요. 부모님들이 우리 6남매 키운다고 고생하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가난한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씨는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남해 미조국민학교를 16회로 졸업하고 13살에 미조중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하던 해에 어머니가 갑자기 몸도 편찮아지는 일도 겹치고 하면서 그나마 넉넉하지 못했던 가정 형편이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도저히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어서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안돼서 미조중학교를 자퇴했어요.”
집안 형편으로 미조중학교를 스스로 그만둔 김정병씨는 우체국과 수협 등의 청사에서 급사생활을 하게 된다.
“내 입은 내가 벌어서 덜어야 했으니까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체국과 수협 등의 청사에서 급사생활을 했지요.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고 나면 돈으로 일당을 쳐 주는 것이 아니라, 쌀과 보리 같은 곡식으로 일당을 받았어요. 그것도 날마다 주는 것이 아니라 2~3일 일하면 한번씩 일당이라며 쌀, 보리쌀을 주는데 한번에 두어되씩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난해서 그저 힘들기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이야 정말 부자처럼 사는 거지요.”
불붙은 짚단을 바다로 던져서 멸치와 오징어를 유인하고 잡아들여
고향 남해에서 힘든 시절을 보내던 김정병씨는 17살에 별다른 연고도 없이 일거리를 찾아서 울진 후포로 올라오게 된다.
“그때만 해도 울진 후포 쪽 어선들이 사용하는 전기와 엔진이 남해에 비해 크게 뒤떨어져 있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만 듣고는 무작정 후포로 올라왔어요. 남해에서 급사생활을 하면서 배 엔진과 전기기술에 관심이 있어서 틈틈이 배워 두었기 때문에 그 방면으로는 꽤 기술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남해보다 기술이 뒤떨어져 있는 후포 같은 동해안 항구에 오면 기술을 써먹을 수 있고, 돈도 좀 벌겠다 싶은 생각에 작정하고 혼자 올라온 거지요.”
김씨는 당시만 하더라도 남해에서는 전기를 이용해서 멸치를 유인한 후 잡아 들였는데, 후포 인근에서는 그때까지도 짚단에 불을 붙여 희미한 불빛으로 멸치를 유인해서 잡아들이고 있더라고 말해준다.
“멸치잡이가 성행하던 남해에서는 당시에 이미 발전기로 일으킨 전기를 이용해서 큰 등을 켜고 멸치를 모아서 잡아들이는데, 후포에 올라오니까 불붙인 짚단을 이용해서 멸치를 잡아들이고 있더군요. 배위에서 짚단에 불을 붙인 후에 바다위에 던져서 잠시 타는 사이에 그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멸치를 그물로 후려서 잡는 거지요. 오징어배도 시동을 켜놓고 자체 배터리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이나 가스등 불빛을 이용해서 오징어를 불러 모으는데, 그렇게 잡아들이는 거야 포획량이 뻔한 것 아닙니까?”
17살에 후포로 올라온 김씨는 20살이 될 때까지 3년 동안 후포항에서 어선을 옮겨 다니며 전기 일을 맡아 보게 된다.
“불붙은 짚단을 던져서 멸치나 오징어를 끌어 모아 잡아 올리던 당시에 후포항에서 어선에 소형 자가 발전기를 장착해주는 전기 일을 했어요. 어느 일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자가 발전기를 달아주면서 벌어먹고 사는 일도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그때는 국산엔진은 거의 없었고, 미군부대에서 뒷빵으로 빼낸 스모루엔진에 벨트를 걸어서 전기를 자체 생산하는 소형 엔진을 구입 해다가 팔았지요. 부산 같은 큰 도시로 나가서 스모루엔진을 구입 해다가 어선에 장착해 주다보면, 군용물건이라고 특무대에서 자주 단속을 나와서 뺏어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타지에서 한동안 어려운 시절을 보낸 김정병씨는 현 김용수 울진군수와의 특별했던 기억 하나를 떠올리며 전해준다.
“제가 후포항에서 어선에 자가 발전기를 달아주며 생활하던 당시에 김용수 군수가 후포 어민예비군중대의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그때는 예비군 소집훈련도 잦았는데, 예비군 훈련이 있을 때면 멀쩡한 날인데도 어민들이 훈련에 참석하면서 어선들이 출항하지 못하고 항구에 발이 묶여 있을 때가 많았지요. 그러자 당시에 김용수 어민중대장이 연대본부 등을 찾아다니면서 후포어민중대에 소속된 예비군들은 일기가 궂거나 해서 배가 출항하지 못할 때만 예비군 훈련을 받겠다고 설득한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군부대에서 김용수중대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후포어민중대에 소속된 예비군들은 배가 출항하지 못하는 날을 골라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었고요. 그런 것을 지켜보면서 그 당시에도 김용수씨는 나중에 뭔가 큰일을 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울진대게를 소달구지에 싣고 영해와 영덕 장으로 내다 팔아
17살에 후포로 올라와서 전기 일을 하던 김씨는 20살에 기성면 구산리로 옮겨와서 멸치잡이 목선을 직접 운영하면서 전기 일을 계속한다.
“당시만 해도 후포, 구산 인근 바다에서는 멸치가 엄청나게 많이 잡혔습니다. 돈이 되겠다 싶은 마음에 20살에 구산으로 들어와서 멸치잡이 목선을 구입해서 직접 멸치를 잡기 시작했지요. 전기일도 계속 했고요. 목선은 바람을 받는 큰 돛이 하나 있었고 노를 대여섯개씩 걸 수 있는 규모가 꽤 큰 배였어요. 보통 뗏마라고 하는 배는 노를 한두개만 걸 수 있는 규모가 작은 배고요. 모터를 돌리고 벨트를 걸어서 전기를 켜고, 그 불빛을 보고 모여드는 멸치도 잡고 대게도 잡고 했습니다. 전깃불을 보고 모여드는 멸치는 그물로 떠서 잡기도 하고 후리로 당겨서 잡기도 했어요. 멸치는 참 많이도 잡혔습니다.”
하지만 김씨는 그토록 멸치가 많이 잡혔어도 이것저것 따져볼 때 막상 큰돈이 되지는 않더라고 전해준다.
“멸치는 많이 잡히는데 그것을 건조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인근에서 저 혼자 멸치를 잡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는 멸치를 말릴 곳이 없다 보니까 백사장은 물론이고, 묘지와 같이 잔디가 있는 곳이면 온통 멸치를 말리는 곳으로 변해 버리고는 했지요. 깨끗한 곳에서 건조를 해야 제값을 쳐서 받을 수 있는데, 건조장소가 시원치 않으니까 식용으로 비싸게 팔려 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료 등으로 헐값에 팔려 나갔어요. 힘들게 잡는 공에 비해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게 당연했지요.”
김정병씨는 당시만 해도 대게를 잡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영해나 영덕 장으로 소달구지에 싣고 팔려 다녔다고 말한다.
“뱃일을 나가서 게를 잡으면 한푼이라도 더 좋은 값을 받으려고 먼 길 마다않고 영해나 영덕 장으로 소달구지에 싣고 나갔어요. 게를 소달구지에 싣고 아침 일찍 줄을 지어 영해나 영덕 장으로 걸어 나가는 어민들을 상상해 보세요. 그 고생이야 말해서 무엇 합니까? 그 당시에도 비정기적으로 영해나 영덕으로 내려가는 완행버스가 다녔는데, 다행히 재수가 좋으면 그 버스라도 편하게 타고 갈수 있었지만, 차장이 손님이 꽉 차서 자리가 없다고 말하면 버스를 타지 못했어요. 그러면 방법 없이 소달구지나 구루마를 끌고 영해, 영덕으로 비포장 길을 따라서 앞만 보고 걷고 또 걸어가는 거지요.”
세상에 하나뿐인 금쪽같은 동갑내기 아내, 김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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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포를 거쳐 20살에 구산으로 들어온 김정병씨는 이듬해인 21살에 같은 동네에 살던 동갑내기 김희자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인다.
“당시에 대게를 잡는 동네 어른들을 도와주고 하다가 어느 어르신의 딸을 만나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된 거지요. 뭐, 연애도 아니고 중매도 아니고 뭐라고 해야 하나...... 그때 열심히 일에만 파묻혀 지내는 제 모습을 장인 되는 어른이 보시고는 젊은 사람이 대견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저 정도면 딸을 주어도 평생 밥은 안 굶기겠다 싶었나 봅니다. 집사람의 호적 이름은 김희자지만, 원래 처갓집에서는 김하난이라고 불렀어요. 처갓집도 원래 이 동네에서 대대로 살아왔고, 결혼식은 돌담에 초가지붕을 두른 처가에서 치렀어요. 집사람요...? 예쁘지요. 지금도 집사람을 금쪽같이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어렵고 고단하게 살아오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저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귀한 사람 아닙니까?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부부동반해서 이곳저곳으로 여행도 자주 다니고 그렇게 삽니다. 국내도 가고, 외국으로도 나가고요. 그런 게 사람 사는 행복이라 여겨집니다.”
21살에 동갑내기 김희자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김정병씨는 결혼 후에도 멸치 배를 운영하면서 전기 일을 계속해 나간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2~3년 정도 더 멸치 배를 운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멸치는 많이 잡히는데 판로는 점점 더 어려워지더군요. 그래서 멸치 배를 처분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차피 판로도 시원치 않았고 별다른 미련은 없었어요. 구산리는 예나 지금이나 멸치가 참 많이 잡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직산리 쪽의 툭 튀어나온 곶과 봉산리 방면의 툭 튀어나온 곶이 만나는 중간의 조류 특성으로 인해 멸치가 많이 모여 들어 오는 것 같습니다. 구산리는 동해안에서 남하하는 조류와 북상하는 조류가 합쳐지는 곳이기 때문에 온갖 고기가 많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인근 어민들이 옛날부터 종종 말해오고는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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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막상 멸치 배를 처분하고 나니까 당장 벌어먹을 일이 마땅하지 않았어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머구리배 선원으로 일하기도 하고, 미역채취도 했지요. 날씨가 고른 날이면 하루 종일 네모진 대형 수경으로 바다 밑을 내려다보며 미역도 채취하고 성게도 따고는 했어요. 그때도 어촌계에서 공동으로 해산물을 채취했는데, 직접 작업에 참여하면 어촌계원 몫에 작업한 몫까지 두배를 벌수 있었으니까 거의 매번 작업자로 직접 참여했습니다. 물론 집사람도 옆에서 열심히 도왔지요. 미역을 따가지고 돌아오면 발에 널어 말려서 내다 팔았고, 성게를 갖고 집으로 오면 껍질을 까서 운단을 만들고...... 무엇보다 집사람이 고생 참 많이 했어요.”
그 무렵 김정병씨 또한 마음고생을 많이 했었다고 술회한다.
“그때만 하더라도 다들 어렵게 살았는데, 제가 이 마을로 들어와서 처음에 정을 붙일 때 동네사람들이 저를 객지사람이라면서 괜히 따돌리고는 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가 그때였습니다. 몸뚱이 고단한 거야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지만, 그때 마음 고생하면서 속앓이를 많이 했지요. 그래도 계속 본마음 변하지 않고 저보다 어렵게 사는 주위 사람들을 보살펴주고 도와주고 그러다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저를 이웃으로 취급해 주더군요.”
작은 창고 얻어 '동해륜업사’ 차리고, 리어카와 자전거 오토바이 할부 판매
판로의 어려움을 겪다가 끝내 멸치 배를 처분하고 구산리에서 아내와 함께 미역과 성게를 채취하고 머구리배 선원 등으로 궂은 일 마다않고 돈벌이를 하던 김정병씨는 당시에 한창 주가를 날리며 잘 팔리던 자전거와 리어카를 인근 주민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한다.
“고작해야 소달구지나 구식 구루마를 이용해서 갖가지 해산물과 짐을 운반하던 그 당시에 리어카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자전거는 또 어떻고요...? 지금이야 승용차가 대중화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느린 자전거의 속도를 무시하기 일쑤고, 오히려 언제부턴가 자전거가 건강한 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의 운동기구쯤으로 치부되고 있잖아요? 하지만 이 동네 저동네로 볼일을 보러 다니거나 이웃으로 나들이를 할 때 대부분 발품을 팔면서 걸어서 다니던 당시였으니, 자전거의 편안함과 그 속도는 가히 놀랄만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대부분이 비포장인 길을 자전거 페달을 밟아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가야 했지만, 자전거는 시골에서 가장 빨랐던 이동수단이었어요.
자전거 가격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지요. 이거 돈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부산 등의 대도시로 내려가서 자전거를 떼다가 구산리 인근에서 팔기 시작했어요. 다들 가난하게 살 때였으니 대부분 할부로 판매했지요. 당시에 자전거를 팔려면 울진경찰서에 가서 고물상 6종 허가를 내야 했어요. 이름도 없는 창고 같은 가게에 고물상 허가 한 장을 붙여놓고 대도시로 나가서 자전거를 떼다가 현금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돈을 받고, 형편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신용을 담보로 할부로 팔았지요. 인근주민들이야 대개 수년 동안씩 낯을 익혀온 사이였으니 자전거 할부 값을 떼어 먹힐 걱정은 없었어요.”
김씨는 자전거와 리어카를 파는 일도 얼마 못가서 돈이 된다 싶으니까, 주변에 경쟁자가 하나둘 생기더라고 전해주며 웃는다.
“가게 간판은 별다르게 없었지만, 다들 그냥 저희 집을 동해륜업사라고 불렀어요. 마을 한쪽에 작은 창고 하나를 얻어서 살림집으로도 쓰고, 고물상 허가장을 붙여놓고 자전거며 리어카를 판매도 하고, 수리도 하고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장사가 된다고 소문이 나면서부터는 주변에 경쟁가게가 4군데나 생기더군요. 제 밑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던 종업원도 얼마 안가서 먼 곳도 아니고 근처에 자전거와 리어카 판매, 수리 가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 끝까지 가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곳은 저밖에 없었어요. 어릴 때부터 전기와 엔진 등을 만지며 몸에 배어버린 손기술 덕에, 인근에서는 자전거와 리어카를 수리하는 기술이 가장 뛰어나다는 주민들의 평가 덕분이었지요. 얼마 안가서 경쟁 가게를 하던 이들은 다들 뿔뿔이 구산리를 떠나버리더군요. 그래서 결국은 또 저만 남아서 장사를 계속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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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와 리어카를 판매하고 수리하는 것을 업으로 얼마간의 돈을 모은 김씨는 동해륜업사에서 당시 돈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오토바이까지 판매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토바이까지 판매하기 시작했어요. 70년대 후반부터는 시골에서도 오토바이 붐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엔진에는 소질이 있었기 때문에 오토바이 가게를 하기 시작할 때 자신이 있었지요. 오토바이도 따지고 보면 결국 엔진이 제일 중요한 거니까요. 전에 울진군의회의 의장까지 지냈던 평해읍의 김기현씨도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팔아서 돈을 번 사람입니다. 그 분은 원래 삼천리자전거 대리점을 했었는데, 70년대 후반부터 시골에서는 보기 힘들던 오토바이가 붐을 타기 시작하자 오토바이가게를 겸해서 운영했어요. 저보다는 훨씬 앞서 자전거와 오토바이 가게를 했지요. 그분도 젊을 때는 고생 많이 한 사람입니다.”
김씨는 자전거와 오토바이를 판매, 수리하던 동해륜업사를 1980년대,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지속했다고 기억한다.
“마흔이 될 때까지 오토바이 가게를 계속 했는데, 일평생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하면서도 그 당시에 그나마 돈을 조금 벌었던 것 같습니다. 울진군을 통 털어도 오토바이 대수가 그렇게 많지 않을 때였지만, 제가 가진 엔진 기술 하나 믿고 손님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집사람도 그때는 이미 지금 살고 있는 이집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문구점을 할 때였으니까 돈이 모였지요.”
15년 동안 셋방살이 전전, 3만원 주고 땅 사서 37살에 내집 마련
김씨는 21살에 결혼한 이후 15년 동안을 자기 집 한칸 없이 셋방살이를 옮겨 다녔었다고 전해준다.
“원체 비빌 언덕 하나 없고 가진 것 없이 살다보니 열심히 살아도 일어서기가 쉽지 않더군요. 결혼하고 애들이 태어나는데도 내집 한칸 없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셋방을 살았어요. 심지어 한두평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애들을 키우고 그랬습니다. 서른일곱 되던 해던가, 지금 살고 있는 이집을 지으면서 난생 처음으로 내집을 장만하게 된 거지요. 원래 이곳은 그저 고구마나 심어먹던 밭이었는데, 바닷가가 가깝다보니 땅을 조금만 파도 모래가 나오고, 곡식도 제대로 자라지 않던 땅이었습니다. 집을 짓기 수년전에 집사람이 이다음에 돈 벌면 혹시 집이라도 짓게 될 줄 아느냐면서, 도로도 가깝고 학교도 가까우니 이 땅을 사자고 졸랐어요. 그 당시 돈으로 3만원인가 주고서 이 땅을 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잘 샀다 싶어요. 그때 학교 앞의 이 땅에다 새로 집을 짓고 문방구를 파는 가게를 차리면서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지요. 형편도 훨씬 나아졌고요.”
어선의 전기 엔진 기술자, 멸치 배 운영, 머구리배 선원, 미역과 성게 채취, 자전거, 리어카, 오토바이 판매업을 거쳐 구산국민학교 바로 앞에 가게를 여는 등, 살아오면서 꽤나 다양한 직업을 거친 김정병씨는 문구점을 열었던 초기만 하더라도 기성국민학교 학생 수가 줄잡아 600여명을 상회했었다고 기억한다.
“학생 수가 계속 줄어들면서 이제는 기성초등학교 구산분교로 격하되고 말았지만, 한때 기성국민학교였을 당시에는 학생 수만 600명이 훨씬 넘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봉산, 황보 등의 인근 마을과 이곳 구산리 학생들이 모두 다 이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처음에는 문구점만 했었어요. 학생 수가 줄어들어 문구점이 시원찮아 지면서부터 일반 생필품도 함께 팔기 시작했지만요.”
1983년에 어렵게 개장한 구산해수욕장, 지금은 여름철 장사도 재미없어
김정병씨는 지난 1983년에 구산해수욕장을 개장할 당시에 이를 위해 누구보다 앞장섰던 장본인으로서 이와 관련해서 당초의 자세한 사정을 들려준다.
“오토바이와 자전거, 리어카를 팔고 수리하는 일을 한참 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인근에 위치한 구산해수욕장을 같은 동네 사람인 임반갑, 이상훈, 김용하, 이무웅, 안천갑, 안강욱씨 등 7명이 함께 모여서 개장하고 또 장사를 하면서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산해수욕장을 공용해수욕장으로 정식 개장해서 운영할 초창기만 하더라도 군인들이 관리하는 철조망이 해수욕장의 바다 앞쪽만 조금 걷혀 있고 해서 도저히 활성화되기가 어려웠어요. 그랬던 당시에 제가 발 벗고 나서서 어촌계장, 구산초등학교 육성회장등을 설득해서 해수욕장을 개장했습니다. 해수욕장 인근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에게 라면도 자주 끓여주고 연대장도 만나고 했지요. 먼저 군인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면서 해수욕장 앞쪽의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도 점차 걷어가면서 그렇게 힘들게 해수욕장을 개장하고 운영했어요. 구산해수욕장은 솔숲이 좋고 군부대에서도 많이 협조해줘서 당시만 해도 내·외지 관광객이 여름이면 넘쳐났어요. 당시에는 전부 다 노선버스나 관광버스를 타고 해수욕을 즐기러 왔었으니까 입주한 상가들의 장사도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다들 자가용을 끌고 놀러 왔다가 금세 떠나버리니까 별 재미가 없는 편이지요.”
1남2녀의 아들 딸, 그리고 둘째 딸 현숙’씨를 34살에 시집보낸 사연
김정병씨는 21살에 맞이한 동갑내기 부인 김희자씨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었다. 외숙(47세), 현숙(42세) 두 딸과 덕진(40세)이라는 막내이자 외동아들이 그들로서, 모두 대구시에 거주하고 있다.
“위로 딸 둘을 낳고 마지막으로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큰 딸 외숙이는 결혼해서 대구에 살고 있는데 지금 그 딸이 러시아에 유학을 가 있어요. 둘째 딸 현숙이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를 곧잘 했지요. 대학을 졸업하고 포항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결혼하면서 교사를 관두고 역시 대구에 살고 있고요. 막내 덕진이는 전문대를 졸업하고 대구서 현재 식품업을 하고 있어요. 며느리는 영남대병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고요. 다들 우리에게 잘 합니다.”
얘기를 주욱 이어가면서 김씨는 특히 둘째 딸 현숙씨의 결혼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준다. “둘째딸 현숙이는 포항 중앙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돈을 벌어 자기 아파트도 장만했지, 차도 있지 하니까 34살이 될 때까지 영 시집갈 생각을 않더군요. 먹고사는 일에 불편한 게 없으니 시집갈 생각을 않은 거지요. 그래도 여자나 남자나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하면서 가정을 꾸려가야 행복한 건데...... 그게 부모 마음 아닙니까? 사위가 그때 경기도 어느 반도체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들면 내가 밀어줄 테니 경기도에서 포항이 멀다 생각 말고 열심히 쫓아다니라고 권했지요. 정말이지 그때는 집사람이나 저나 둘째딸이 결혼도 하지 않고 저대로 혼자 살아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다급했었어요. 다행히 사위가 될 사람이 우리 딸이 마음에 들었는지 포항을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딸에게 선생이고 뭐고 사표 쓰고 빨리 시집가라고 강요했지요. 결국 사표를 쓰고 시집을 가는데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지금도 저는 그때 그런 결정을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지금은 8살, 5살 된 딸, 아들 두고 예쁘게 잘 삽니다. 사위는 결혼 당시에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어느 반도체 회사에 다니고 있고요.”
그러나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김정병씨의 부인 김희자씨는 이와 관련해서 다른 한마디를 거들어준다.
“그래도 그때 교사를 관두라고 한건 너무 했던 것 같아요.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세상을 살아나가기가 훨씬 더 수월한데...... 학교 교사는 대우도 좋고 월급도 많은데, 결혼도 좋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후회도 돼요. 결혼해도 교사를 계속할 수 있었는데.”
노인들에게 애틋한 아내, 1985년 개소한 울진구산우편취급소’
김정병씨는 1985년 12월 30일 울진구산우편취급소를 개소한 뒤 지금까지 23년 동안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곳 구산리에서 태어나서 구산국민학교를 졸업한 집사람은 딸만 넷인 집안의 맏딸입니다. 집사람이 맏딸이고, 아래로 옥순, 순희, 영미라는 여동생들이 있지요. 딸 많은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집사람은 나이든 노인들과 신체가 불편한 사람들에게 애틋한 무엇인가가 있어요. 그런 집사람의 영향으로 주변의 자식들이 없는 노인들이나 신체장애자들이 우편물을 보낼 때나 공과금 하나 납부하려고 버스를 타고 멀리 평해읍이나 기성면 우체국까지 나가는 걸 지켜보면서, 저들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마침 우편 취급소를 모집하더군요. 85년 당시에 우체국장이 가게까지 찾아와서 주변에 마땅한 사람이 없다면서, 가게도 하고 있으니 우편취급소까지 한번 해볼 생각이 없냐고 묻더군요. 두말없이 하겠다고 했지요. 이일을 하면 독거노인들과 신체장애자들을 도울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우편취급소는 일반 우체국과는 달리 교통편이 취약하거나 인구가 작은 곳에 설치되고, 취급할 수 있는 업무 또한 우표판매, 소포 접수, 제세공과금 수납 등으로 한정되어 있는 만큼 큰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달에 아무리 열심히 하더라도 30~40만원 벌기가 힘든 일이 이 일이지요. 지금 250원짜리 우표 한 장 팔면 수수료로 16원을 받아요. 전에는 기성우체국까지 가서 우표를 사다가 팔았지만, 이제는 포항 우체국에 주문하면 소포나 택배로 배달해 줍니다. 한달에 250원짜리 우표는 잘 나가면 100장 정도, 안 나가는 달은 50~60장 정도지요. 물론 연말이면 우표 판매량도 조금은 늘어나지요. 소포를 부치게 되면 전에는 1건당 650원 정도 받았는데 이제는 1건당 700원 정도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공과금 납부는 일반 우체국과 똑같이 1건당 90원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편취급소에 비해서 우체국은 수수료에 더해서 공과금 납부에 따라 발생하는 원금의 이자수입까지 챙기게 되니까, 상대적으로 우편취급소보다는 큰 수익이 발생하는 셈이지요. 공과금 납부는 한달에 100건 정도 됩니다. 그러나 100건이라고 해봐야 1건당 90원 받으니까 다 합해도 9천원밖에 더 됩니까? 지방세를 납부하는 달이면 건수가 조금 늘어나고요.
그런데 공과금을 받을 때 저야 숙달이 돼서 그런 실수는 없지만, 어쩌다 제가 자리를 비울 경우에 집사람이 납기후 금액을 계산하지 않고 수납해버리면 그 금액만큼 고스란히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럴 경우에 우리가 잘못해서 납기후금액을 덜 납부한 이웃에게 그때그때 몇십원, 몇백원 더 달라고 하기도 참 곤란하고요. 그냥 생돈을 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우편취급소에서는 소포 취급이 가장 이익이 크지만 구산리의 경우에는 동네 자체가 원체 작아서 물량이 얼마 되지 않지요.
농수산물을 취급하는 철이면 한달에 20~30개 정도 나오지만, 안 나올 때는 한달에 5~7개 정도가 보통입니다. 특히 소포의 경우에는 무게가 과다해서 그에 따른 요금이 소비자에게 부담이 간다 싶으면 그냥 우체국으로 연결시켜 줘서 보다 싸게 보낼 수 있도록 주선해 주기도 하지요.”
김정병씨는 우편취급소를 운영하면서 가장 컸던 보람이 1998년 정보통신부 장관으로부터 수여받은 표창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김정병씨는 1998년 우편취급소 운영 공로를 인정받아 정보통신부 장관의 표창을 수상했다
전국의 우편 취급소 가운데 최초로 받은 정보통신부장관의 표창을 받을 당시, “이 작은 동네의 우편취급소 소장을 어떻게 알아주나” 싶은 마음에 보람도 느꼈고, 다시금 긍지도 가지게 되었다는 김씨다.
그런 보람과 긍지와 자부심이 오늘도 김씨가 우편취급소 소장으로서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한 2년 전부터는 우편취급소에 대한 기본 운영비가 조금씩 나오기도 하지만, 한달 내내 취급소에서 근무해도 실상 돌아오는 돈은 고작 몇 십만 원이니 이 일은 돈보고는 못해요. 그저 촌 노인들이 공과금 몇천원 들고 와서 손이라도 잡아 주면서‘이 사람아, 수고하네’말해주는 진심어린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가장 큰 보람이지요. 이 우편취급소가 없다면 그 노인들과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들은 공과금 몇천원 납부하기 위해 비싼 차비 들여가면서 평해나 기성 우체국을 다녀와야 합니다. 혼자 사는 노인네들이 납부하는 공과금이 얼마나 되겠어요? 자칫 잘못하면 공과금 액수보다 차비가 더 비싸게 먹히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도저히 이 일을 관둘 수도, 게을리 할 수도 없게 됩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70~80살 된 노인들의 공과금 용지 한두장 수납하고 내 차 기름 때가면서 수수국인 기성우체국까지 가서 납부해야 하지요. 하루 일당도 자동차 기름 값도 안 나오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당장 제가 손해를 보더라도 어렵게 살아가는 나이 드신 분들 일인데 내일처럼 도울 수밖에요.”
그런저런 이유로 인해 구산우편취급소 김정병 소장은 끝까지 이 일을 관두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내 몸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우편취급소 돌아가는 속사정을 대충이라도 아는 이웃 사람들이 고맙다고 인사할 때처럼 기분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저나 집사람이나 너무 고단하고 힘들게 젊은 날을 보냈고, 시간이 지나 어느덧 먹고 살만해져서 뭔가 남을 도울 일이 없을까 하던 차에 시작한 우편취급소인데...... 90년대쯤이던가, 제가 암 판정을 받았던 적이 있었어요. 결국 그 일은 몇 군데 병원을 돌면서 정밀하게 검사한 결과 암이 아니라는 것으로 밝혀졌지만요. 그 당시에 참으로 많은 이웃과 지인들이 병문안을 왔었어요. 그때 참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외롭지 않아요. 이웃과 다들 사이좋게 지내고 있고, 수수국인 우체국 직원들과도 가족처럼 지내고 있으니까요. 특히 우편취급소 업무도 이제는 모두 컴퓨터로 처리하는데, 제가 나이가 있어서 컴퓨터에 익숙하지 못하다 보니까 시도 때도 없이 우체국 직원들을 불렀던 적이 있어요. 그럴 때면 우체국의 젊은 직원들이 곧장 달려와서 도와주고는 했지요. 주변의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우편 취급소를 지금까지 운영해 오기도 힘들었을 겁니다.”
구산리 해결사, “돈들이지 않고도 이웃에 봉사할 수 있는 일 많아”
구산리 주민들은 김정병씨를 가리켜 ‘해결사’라고 부른다. 그런 그도 배움에 대한 한이 있음을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남들은 저를 좋은 의미에서 해결사라고 부릅니다. 이웃집에서 보일러가 고장 나도 저를 불러요. 그러면 냉큼 달려가서 제가 고칠 수 있는 것이면 고쳐주지요. 온갖 궂은일을 부탁해도 원체 거절할 수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공부를 조금만 더 했었더라면 하는 한이 제일 크지요. 남들만큼 배웠더라면 지금보다 잘 살수도 있었을 테고, 다른 꿈을 키워서 이루려고 노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또한 만족스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살아오면서 기성지서의 자율방범위원, 울진군 여론 모니터 요원, 울진기미만세독립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마을교사 등으로 활동해 오면서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일은 많이 배웠다고 꼭 할 수 있는 일들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가난했던 젊은 시절을 성실하게 살아온 만큼 먹고 사는 일에 쫓기지 않게 된 지금, 이웃을 향한 꾸준한 관심으로 크고 작은 도움을 베풀고 있는 김씨는 무엇보다 우리 지역은 경로의식이 부족하다고 일깨운다.
“지역에서 돈을 들이지 않고도 봉사할 수 있는 일들이 참 많아요. 특히 이웃의 노인들에게는 너도 나도 다들 잘했으면 싶어요. 굳이 큰일이 아닌 작은 일이라도 서로 돕는 정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이지요. 한 예를 들면 아라비아 숫자는 알지만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노인들을 위해 제가 동네 전화번호부를 만들어서 노인들에게 나누어 준 일이 있어요. 보건소는 열십자를 그림으로 그리고 옆에 아라비아 숫자를 적어 넣고, 구장집이면 장독, 별명이 땡삐인 사람 집은 벌을, 횟집 전화번호는 고기를 큼지막하게 그려서 동네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더니 수개월 만에 동네 전화번호를 모두 익히더군요. 한글을 전혀 모르는 노인들이 말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해보면 돈을 들이지 않고도 이웃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많은 것 같습니다. 외롭지 않으려면 남의 일을 내일처럼 도와야 합니다.”
현재 전국적으로는 840개소의 우편취급소가 영업 중이고, 경북체신청에 소속된 우편취급소는 75개소이다.
울진군 관내에서는 한때 5개소의 우편취급소가 산간벽지와 오지 주민들의 우편업무와 공과금 수납 업무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지속적인 인구감소와 교통의 발달 등으로 인해 이용객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운영이 어려워져 4개소가 폐소되고 구산우편취급소 단 한군데만 영업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반면 대도시에서는 아파트 단지, 대학 구내, 백화점, 호텔 구내, 대형할인마트 등 도심 주변의 여건 변화에 따라 오히려 소규모 우편취급소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여서, 이 시대의 기형적 사회 구조 단면의 또 다른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기성면 구산2리 기성초등학교 구산분교 앞에 가면 미니슈퍼를 겸한 울진구산우편취급소가 있다.
오늘, 작고 아담하고 조금은 빛이 바랜 듯한 건물 외양을 지닌 23년 역사의 구산우편취급소에 들어서면 찾아오는 사람을 넉넉한 웃음으로 반겨 맞아주는 구수한 입담의 김정병씨와 김희자씨 내외를 만날 수 있다.
또 아는가? 그곳 구산우편취급소에 들러 한때 가까웠던 이에게 엽서 한장 써 보내며 퇴색되지 않을 그리움, 퇴색되지 않을 추억 한 움큼을 가슴으로 거머쥐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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