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예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몸담고 살아왔고, 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여전히 후손들이 몸담고 살아갈 이 땅에서 자라는 식물가운데 약초 아닌 것은 없다고 한다.
사지육신도 마음도 모두 다 병든 21세기라는 진단이 거짓말이 아닌 듯 받아들여지는 이 시대.
무수히 많은 이들이 힘을 하나로 합쳐 순리를 거스르며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네가 나고 자란 자연을 파헤치고 뜯어 고치는 와중에 한쪽에서는 이름 모르는 병으로 사람들이 괴로워하며 죽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병원에서조차 포기한 불치병을 순수 자연 요법으로 치료했다는 사람들의 놀랄만한 얘기도 간간히 들려오는 세상이다.
현대 과학으로도 채 밝혀지지 않은 우리 신체의 오묘한 메커니즘, 그리고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토종 약초의 과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놀랄만한 효능은 세상의 짧은 지식과 지혜를 전부인양 자만하는 인간의 속성으로는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말없이 인간을 포용해주며 사시사철 인간들에게 뜻밖의 정기를 선사하는 산과 그 산이 넉넉히 품고 있는 약초의 효험을 신앙처럼 믿어왔다.
그렇기에 산사나이들인 약초꾼들은 철마다 산야를 누비며 약초를 채취하기에 분주했고, 일반인들 또한 약초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면서 어떤 약초는 어느 병에 좋고 어떤 약초는 어디에 좋다며 껍질과 뿌리, 열매를 채취해서 물로 다려 먹기도 하고, 술로 담아 장복하기도 했다.
그런 효능에 대한 믿음은 요즘도 전혀 누그러들거나 잊히질 않아서 변함없이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약초를 구입하거나 직접 따고 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음용한다.
산에서 채취하는 약초가 사람에게 이로운 진짜 명약이 되려면 여러 가지로 궁합이 맞아야 한다고 전해진다.
약초를 캐서 약의 성질에 따라 가공하는 사람의 정성, 약초를 약으로 만드는 사람의 정성, 약을 먹는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일치하지 않으면 그 효능이 급격히 감소한다는 얘기는 이미 널리 떠돌아다니는 얘기다.
산을 사랑하고, 그 산이 생산해내는 약초를 귀하게 여기는 약초꾼들의 삶은 어쩌면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그것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순하고 고분고분한 그 마음 한 가닥이 아닐는지.
7살에 아버지를 잃고 영양 수비면 신암리에서 서면 전곡리 전내로
10살이 되던 무렵부터 이산 저산을 헤매 다니며 온갖 약초를 따는 일을 생업으로 삼고 살아온 방한덕(서면 전곡리 원곡마을. 68세)씨는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에서 태어났다.
전곡리 초입의 도로 표지석. 원곡은 이곳에서 자동차로 20여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수비면 신암리는 서면 옥방에서 917번 지방도로를 타고 가면 이르게 되는 곳으로, 영양군 신암리와 봉화군 남회룡을 잇는 ‘애미랑재’가 등산인들 사이에서는 낙동정맥 구간을 종주할 때의 구간 접속지점으로 유명하다.
“안태고향이 영양군 수비면 신암리라는 작은 동네입니다. 윗대 어른들은 이곳 원곡마을 옆 동네인 전내마을이 고향인데, 전내에서 죽 살다가 수비면 신암리로 이사를 가서 또 얼마동안 살았는데 저는 그때 태어난 거지요. 전내 안으로 들어가면 ‘골포동’이라는 곳이 있는데 원래 윗대 어른들이 먹고 살던 터전이 거기였어요. 부모님들이 ‘골포동’과 신암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다는데 어른들이 신암리에서 잠깐 사는 사이에 제가 태어난 것입니다.”
영양 수비면 신암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방씨는 7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서면 전곡리 전내에서 생활하던 할아버지댁으로 옮겨 오게 된다.
“신암리에서 태어나서 7살까지 자랐는데, 그 무렵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가 재혼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어머니는 곧 개가하셨지, 결국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저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전곡리 전내의 할아버지 댁으로 옮겨져 살게 된 거지요. 부모님은 슬하에 아들만 셋을 두었는데 제가 맏이로 태어났고 밑으로 남동생이 두명 있었어요. 각각 3살 터울이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할 당시에 막내 동생‘한촉’이는 갓 돌이 지난 애기였고, 어머니는 어린 ‘한촉’이만 데리고 새 살림을 났어요. 당시에 7살이던 저와 바로 아래 4살 먹은 남동생 ‘한석’이는 어느 정도 나이도 있고 하니까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할아버지 댁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어린 ‘한촉’이를 등에 업고, 저와 ‘한석’이를 앞세워 전내 할아버지댁까지 데려다 주었어요.”
방한덕씨는 원체 어릴 때 부모님과 이별하는 통에 이름 석자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며,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이제는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일자 진자를 써서 ‘일진’이라는 함자였던 것을 기억하는데 어머니는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겠네요. 7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헤어졌고, 그 나이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 이름조차 변변히 한번 불러 본적도 없고 해서요. 어머니에 대한 원망요...?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다들 먹고 살기에 급했으니까요.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크든 작든 입 하나 드는 것이 무엇보다 바빴잖아요?”
아버지와는 사별하고, 어머니가 개가하면서 생이별까지 하게 된 방씨는 전곡리 전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원래 윗대 어른들이 생활하시던 곳이 전내다 보니까, 전내마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외에도 백부님이 계셨습니다. 저와 동생 ‘한석’이를 할아버지댁으로 데려다준 어머니는 개가해서 애초에는 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 생각이었는데, 어떤 사정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옥방에서 생활했어요. 물론 동생 ‘한촉’이도 어머니와 함께 옥방에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게 된 거지요. 막내 동생은거기서 다 컸어요. 막내 ‘한촉’이는 옥방에서 자라고 결혼해서 계속 생활하다가 2년 전에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요. 어머니와 생이별한 후에는 걸어서 가더라도 불과 얼마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서너번 왔다 갔다 한 것이 전부였어요. 사람이 살아오면서 부모자식간의 정이라는 것도 그저 그렇게 뜸하게 되더군요.”
10살 무렵에 겪은 6.25전쟁 그리고 3살 아래 남동생의 실종
전내리 할아버지댁에서 생활한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방한덕씨는 6.25 전쟁을 겪게 된다.
1950년에 발발해서 1953년 후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만 3년 동안 곳곳에서 죽고 죽이는 무차별 살육과 까닭 없는 약탈행위가 계속 이어지던 6.25 전쟁은 방한덕씨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10살 무렵에 6.25 전쟁이 터졌어요. 그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전내마을 깊은 산골짜기에 살던 우리도 매 순간순간이 불안하고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만 3년 이상을 지루하게 끌었던 6.25 사변동안에는 저에게도 개인적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많이 발생했습니다. 6.25 사변이 나던 해 음력 9월달에 3살 아래 동생인‘한석’이가 실종되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 후로도 ‘한석’이 소식은 단 한번도 듣지 못했고 그렇게 영영 이 세상에서 실종됐어요. 4살 먹었을 때 3살 더 먹은 저와 함께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할아버지댁으로 옮겨와서 살던 ‘한석’이는 7살에 그렇게 이 세상과 영 소식이 끊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가슴 깊은 한구석에 상처로 자리를 잡고 시간이 지나도 영 쉽게 아물지를 않네요.”
6.25 전쟁이 시작되던 해에 7살 난 동생 ‘한석’이를 잃은 방한덕씨는 다음해인 1951년에 할아버지와도 사별하고 만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도 생이별하고 나서 가엾게 품으로 찾아든 7살, 4살 난 손자를 따스하게 보다듬어 주던 할아버지였다.
“6.25 사변이 일어난 다음해에 할아버지도 돌아가셨어요. 손자들에게 엄하면서도 자상한 면이 있던 할아버지셨는데...”
나무를 져 나르며 하루 일당으로 쌀 한됫박 벌어서 조카를 키워준 큰아버지
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먼 길을 떠나고 난 다음에 방씨는 인근에 살던 백부님댁으로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
“6.25 사변이 나던 해에 동생이 실종되어 연락이 끊기더니, 다음해에는 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어쩌겠어요? 혼자 벌어먹을 나이는 아직 되지 않았지, 같은 마을에 살던 백부님댁으로 들어갔어요.”
그 당시의 여느 집들처럼 가난해서 먹고 살기 어렵기는 백부님댁도 매한가지였지만, 백부님은 말없이 조카인 자신을 거둬주었다고 방씨는 전한다.
“그때 백부님은 산판에서 일했어요. 산판에서 직접 일꾼으로 생활한 것도 아니고, 일꾼들이 켜놓은 나무를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곳으로 져 나르는 단순 노동을 했지요. 소광리에 가면 ‘평밭거리’라는 곳이 있습니다. 백부님은 산판의 다른 일꾼들이 큰 아름드리 소나무를 켜 놓으면 그 나무를 지게에 가득히 지고‘평밭거리’에서 산돌배나무가 있는 ‘쌍전리’까지 옮기는 일을 했지요. 지게 가득 짐을 지고 걷기에는 참 먼 거립니다. 어둠이 채 걷히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출근해서 나무를 져 날랐는데, 아무리 열심히 걸음을 옮겨 내 딛어도 지게 가득히 나무를 지고서는 하루 종일 한번 오가기도 힘든 거리였어요.
그렇게 왠종일 ‘평밭거리’에서 ‘쌍전리’까지 나무 한짐을 날라주면 쌀 한되를 주었습니다. 말이 쌀 한되지, 요즘 사용하는 큰되도 아니고 옛날에 쓰던 작은되로 그나마 위를 깎아서 평두로 주는 한됫박 쌀이야 얼마나 되겠어요? 백부님은 그렇게 지독히도 고생해가면서 어린 조카인 저를 군말 없이 키워 주었어요. 고맙지요. 그 고마움이야 두말해서 무엇 합니까... 큰 걱정 없이 얻어먹고 살았는데요.”
7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가, 11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백부님댁으로 들어가서 생활하던 방씨는 16살에 몸과 마음을 의지하던 백부님조차 잃고 만다.
“백부님도 일찍 돌아가셨어요. 고생만 죽도록 하시다가 돌아가신 거지요. 우리 집안은 대대로 손이 귀한 집입니다. 예전에는 자식을 얻으려고 절이나 유명한 산에서 공을 들이고 했잖아요? 선조 분이 불공을 드려서 고조부님이 태어났고, 고조부님도 불공을 드려 증조부님을 얻었고, 증조부님도 불공을 드려 할아버지를 보셨고, 그렇게 죽 외동아들로 대를 이어온 게 우리 집안 내력입니다. 그리고 조상님들 모두 다 별로 오래 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런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 백부님도 별다른 병도 없었는데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이어 16살에 백부님조차 여의게 된 방한덕씨는 그때부터 할머니와 큰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된다.
“16살이 되니까 장정 노릇 한몫을 할 만한 나이가 된 거지요. 할머니와 큰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이웃 사람들의 논밭일도 거들고, 산으로 올라가서 더덕도 캐고 그러면서 내손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게 된 겁니다. 어릴 때부터 깊은 산중에서 살다보니까, 10살 될 무렵부터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작은 지게를 지고 산으로 들어가서 나무도 해오고 그러면서 산골에서의 생활에 자연스럽게 적응해 온 거지요. 어렵고 고단하게 살다보니 학교는 꿈도 못 꾸었습니다. 학교가 다 무업니까? 당장 먹고 살기도 힘에 부치는데.”
전곡리 원곡마을로 옮겨와서 50여년 26살에 9살 연하의 배필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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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에 전곡리로 와서 전내 ‘풀밭골(초전)’에 살다가 16살에 원곡으로 옮겨 왔어요. 원곡으로 옮겨와서는 봉화군 원곡마을에도 살다가 울진군 원곡마을로 다시 건너와서 두어군데 옮겨 다니다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 터를 잡고 지금까지 쭉 살고 있는 거지요. 서면 전곡리는 원 마을격인 원곡과 옆 동네인 전내를 합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원곡도 강 건너 마을인 봉화군에 속하는 원곡이 있고, 이곳 울진군 원곡이 있지요. 울진 원곡은 열대여섯 집이 살고 있고, 봉화 원곡은 이곳보다 마을 규모가 작아서 대여섯 집이 모여 살고 있어요.”
16살에 할머니와 큰 어머니를 모시고 원곡으로 옮겨온 방씨는 10여년이 지난 26살에 중매를 통해 9살 연하의 노명자라는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연애는 무슨... 중매로 장가를 들었지요. 집안의 먼 고모뻘 되는 분이 중매를 했어요. 그 당시에 고모 되는 분도 원곡 같은 마을에 살았는데, 처백부 되는 분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까끄미’라는 곳에 살면서 고모님과 친분이 있었어요. 그런 인연으로 그 두분 사이에 중매가 자연스레 오고갔고 영양군 문암리가 고향인 집사람과 만나게 됐어요. 결혼할 때 제 나이는 26살이었고, 집사람은 17살이었어요.”
방한덕씨는 부인 노명자씨와 설을 3일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전해주며 웃는다.
“요즘이야 일가친척들이 모이기 편한대로 보통 휴일을 결혼식 날로 잡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이곳저곳 물어서 좋은 길일을 택해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좋은 날을 고르고 고르다 보니까 설을 3일 앞두고 결혼식을 올렸어요. 3일 뒤면 1살씩 더 먹게 되는 거니까 저는 27살, 집사람은 18살에 결혼을 하게 된 거나 마찬가지지요. 집에서 조촐하게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는데, 산골에서 워낙 없이 살다보니까 결혼식 사진 한 장 없네요. 그때는 이런 촌 동네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진 한 장 찍을 수도 없을 때였지요. 결혼하고 나서는 할머니와 큰 어머니는 다른 집을 얻어 나가서 사셨고,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 우리집에서 돌아가셨어요.”
방한덕씨는 부인 노명자씨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두었다.
“결혼해서 살면서 아들 셋, 딸 둘을 두었습니다. 애들은 모두 인근 광회분교를 졸업하고 옥방중학교를 다니다가 영주시로 옮겨가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도 다니고 그렇게 공부했어요. 지금은 다들 학교를 졸업하고 영주에도 살고 서울에도 올라가서 살고 온 사방에 흩어져서 열심히들 살고 있어요. 애들 공부시킨다고 영주시에 작은 집도 그때 힘들게 장만했고요. 영주에 집을 장만한 다음에는 집사람은 주로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애들 밥해주고 빨래해주면서 공부하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고, 저는 주로 이곳 원곡에서 생활하면서 약초도 캐고, 토종벌도 치면서 그렇게 살아 왔지요. 집사람은 지금도 이곳과 영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생활하고 있고요.”
비싼 값에 팔리는 산작약과 천마 화전(火田) 안하니까 천마는 보기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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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나서 농사는 아주 조금 지었고 주로 산을 오르내리며 약초를 캐서 살림을 꾸려왔어요. 약초 캐는 일이 온전한 직업이 된 거지요. 약초 가운데서는 석이를 많이 땄어요. 석이를 다 따면 복령도 캤고, 산에서 채취할 수 있는 약초는 모두 캐서 내다 팔고 그것으로 먹고 살고 애들도 키우고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논농사는 원래부터 짓는 방법도 제대로 알지 못해서 하지 않았고, 밭농사를 조금 짓기는 했지만 그것도 농사를 지었다고 하기에는 쑥스러울 정도로 작은 규모였어요. 남의 밭을 조금 얻어서 도지(賭地)를 주고 그저 우리 식구들이 먹을 곡식과 채소 정도를 심고 가꾸어 거둬들이고 했으니까요.”
앞뒤를 둘러봐도 온통 산뿐인 깊은 산중에서 산과 들을 놀이터삼아 생업의 터전삼아,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온 방씨는 깊은 산속에서 자생하는 몸에 이로운 약초는 굳이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 이름이며 성질을 저절로 익히게 되더라고 전한다.
“어릴 때부터 산골에서 살면서 산을 자주 오르다보니까 몸에 이로운 약초가 무엇인지, 몸에 해가 되는 약초는 무엇인지 이름까지 저절로 알게 되더군요. 주변의 어른들을 통해 들어서도 알고 어떤 약초는 경험으로 알게 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도회지에서 생활하면서 어쩌다 등산삼아 산을 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산골에서 태어나고 또 자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겠지요.”
국산 토종 약초 가운데서는 산작약(山芍藥)과 천마(天麻)가 다른 약초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값에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방씨는 말해준다.
“예나 지금이나 산속의 나무 밑에서 자라는 산작약이 비싸게 팔리지요. 산작약은 뿌리를 약재로 사용하는데, 봄에는 어린 산작약 잎을 나물로 무쳐서 먹기도 합니다. 진통과 해열효과가 뛰어나고 복통이나 위통에 잘 듣는데, 집에서 기르는 작약의 약효와는 비교가 안 되지요. 하지만 산작약은 비싸게 팔리는 만큼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요. 수가 적으니 비싸게 팔리는 거겠지만요. 산작약과 함께 천마가 또 비싸게 팔려요. 천마는 옛날에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어서 먹고 살 때, 그 화전밭 일구었던 곳에서 자연산 천마가 많이 자라나고는 했었어요. 참나무나 굴참나무, 자작나무 같은 걸 베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그 뿌리 부분에서 천마가 올라오고는 합니다. 그나마 요즘은 화전을 안 하니까 산에 가더라도 천마를 보기는 쉽지가 않지요.”
죽은 소나무가 만들어내는 복령, 밧줄 타고 암벽에서 따야 하는 석이(石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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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령은 원래 죽은 소나무에서 생겨납니다. 소나무를 베어내거나 자연적으로 고사하고 난 다음에 4년 정도가 지나면 뿌리 부분에 혹처럼 생긴 복령이 커 나가기 시작하지요. 대체적으로 뿌리에 한번 생긴 복령은 60~70년은 가는데, 제대로 여물지 않은 것은 수년 만에 땅속에서 저절로 썩어 없어지기도 해요. 간혹 가다가 죽은 소나무가 아닌 산 소나무 밑에서 복령이 생기기도 하는데, 죽은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산 소나무의 뿌리를 감싸며 상처를 내서 복령으로 만들어지는 거지요. 그런 것을 복신이라고 부릅니다. 산판을 하면서 소나무를 한꺼번에 많이 베어낸 곳을 기억하고 있다가 4~5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런 곳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지요. 복령은 뇌를 맑게 하고 위장을 튼튼하게 한다는데, 산에 가면 복령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 쇠꼬챙이를 이용하여 땅속을 이곳저곳 쑤시다보면 쇠꼬챙이 끝에 복령이 찔리면서 감이 오지요. 그러면 그곳을 괭이로 파헤쳐서 복령을 채취하게 됩니다.”
산골 외진 마을에서 살아오면서 10살 무렵부터 이산 저산을 쫓아다니며 더덕, 도라지를 비롯해 온갖 약초를 캐온 방씨는 그래도 주로 채취해온 약초는 석이(石耳)라고 전한다.
고산지대의 깊은 산속 바위에 붙어서 서식하는 지의식물(地衣植物)인 석이는 사람들이 흔히들 버섯으로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며 옛날부터 고급 요리 재료로 사용되었다.
“약초꾼으로 살아오면서 주로 석이를 많이 따서 내다 팔았어요. 눈이나 비가 와서 바위를 타기가 미끄러운 날이 아니면 석이를 따러 다녔어요. 바위에 붙은 석이는 한번 따고 난 다음에도 몇 년이 지나면 다시 붙으니까 수년 뒤에는 다시 그 바위를 찾아가지요. 그런데 그 일도 젊은 시절에나 기능한 일입니다. 석이를 따기 위해서는 대부분 밧줄을 타고 암벽에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나이가 들면 근력이 약해져서 그 일을 못하게 되지요. 석이는 바위 가운데서도 청석에서는 거의 자라지 않고, 붉은 차돌이 박힌 암벽에서 주로 자라요. 돌옷의 한 종류라고 보면 되겠지요. 석이는 보통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만큼 그렇게 비싼 값에 거래되지는 않습니다. 요리 재료로 많이 쓰이는 곳도 없고요. 옛날에는 장례식에서 소상이나 대상을 치를 때 기전이라고 해서 그 위에 고명으로 얹는 재료로 자주 사용했어요. 또 석이는 김치를 담을 때 칼로 잘게 다져서 그 위에 얹어두면 김치가 쉽게 시어지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되는 성질이 있습니다. 요즘이야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많이 사용하지만, 예전에 시골에서 땅을 파고 김치를 묻어서 겨울 내내 보관할 때는 석이를 사용하는 집이 많았어요. 제가 주로 석이를 많이 채취했던 이유는 값도 값이지만, 우선 산을 며칠씩 다니며 약초를 채취하더라도 부피도 작고 무게도 가벼워서 집으로 가지고 오기가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복령 같은 종류는 얼마 캐지 않아도 금세 망태기나 배낭이 그득해지고 무게도 실해서 그것을 지고 산속을 다니기가 힘에 겨웠으니까요.”
울진군의 서쪽 맨 끝자락인 전곡리 원곡마을에서 일평생 약초꾼으로 살아온 방씨는 약초를 채취하면 춘양장으로 내다 팔았다.
“원곡 마을 앞의 저 다리를 건너면 곧장 봉화군입니다. 저 다리를 사이에 두고 울진군과 봉화군이 갈라져 있어요. 예전에는 산에서 약초를 캐면 지게에 가득 지고 봉화 춘양장까지 걸어가서 약초 도매상에게 넘겼어요. 차가 다니면서부터는 차를 타고 다니니까 그나마 수월했고요.”
토종벌은 동삼에 굶어 죽어도 양식으로 설탕과 양봉꿀은 절대 주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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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씨는 토종벌의 습성과 토종꿀의 효험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이 대단하다.
“토종벌을 키워오다 보니 지금 벌통 숫자는 한 50여개 정도 될 겁니다. 그중에는 빈 통도 있고, 벌이 들어찬 통도 있고 그렇지요. 토종벌이 차 있는 벌통은 어느 해는 30통도 됐다가 또 어느 해는 3~4통도 됐다가 대중이 없습니다. 지난해는 벌이 잘 안돼서 지금 벌이 들어찬 통이 절반, 빈 통이 절반쯤 될 겁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집 주위는 물론이고, 산에 가져다 둔 벌통들까지 일일이 확인을 좀 해 봐야지요. 봄이 되면서 산과 들에 온갖 꽃이 피어날 때쯤이면 따뜻한 곳을 골라서 바위 밑에 비어 있는 벌통을 가져다 둡니다. 그러면 산속의 썩은 고목나무 밑둥치 속에서 살던 자연산 토종벌이 분봉(分蜂)을 하고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빈 벌통 속으로 들어오기도 하는 거지요. 야생에서 살던 토종벌의 여왕벌이 산란해서 새 여왕벌이 생겨나면 일벌 무리 일부가 새 여왕벌을 쫓아서 딴 집을 찾아서 옮겨오게 되는 겁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연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일들은 항상 경이롭고 신기하기만 하지요.”
방한덕씨는 토종벌이 꿀을 많이 모으지 못한 해 겨울에 벌을 굶겨 죽이는 것보다는, 양봉꿀이나 설탕이라도 조금 넣어서 굶어 죽지 않고 긴 겨울을 살아남게 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사래부터 친다.
“어떤 해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벌들이 자기들 먹을 양식도 미처 마련하지 못해서 겨우내 굶어 죽는 벌통수가 30~40통에 이를 때도 있었어요. 그것을 뻔히 보면서도 저는 그 벌통에 양봉꿀이나 설탕 같은 양식을 절대로 넣어주지 않아요. 그런 것을 넣어주면 당장 벌이 굶어 죽는 일이야 면하겠지만, 다음해에 채취하는 토종꿀에 설탕이나 양봉꿀 일부가 섞이는 거야 뻔한 일 아닙니까? 설탕이 손톱만큼 첨가되어도 이미 순 토종꿀이 아닐 텐데, 그런 꿀을 제 양심만 믿고 찾아와서 사가는 사람들에게 어찌 떳떳하게 내 놓을 수 있겠어요? 그런 짓은 못합니다. 토종꿀을 파는 사람이나 사가는 사람이나 서로 간에 지키는 신용이 있어야지요.”
벌이 굶어 죽을지언정 가짜 꿀은 팔수 없다며 신용과 정직을 힘주어 강조하는 방씨는 토종벌꿀이 약으로서의 효험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특히 상한 음식을 먹고 생기는 식중독에는 어떤 약보다 뛰어난 특효약이라고 귀띔해준다.
“토종꿀은 식중독에 최고입니다. 식중독이 나서 복통을 일으키거나 설사할 때 토종꿀을 따스한 물에 타서 마시면 화장실을 두번 들락거리지 않을 만큼 뛰어나요. 즉효를 보는 것이지요. 그 효험에 대해서는 제가 직접 겪은 일이기도 한데, 언젠가 한번은 산에 갈 때 집사람이 통조림을 반찬으로 싸 주었는데 아껴 먹는다고 절반만 먹고 하루 뒤에 다시 그 통조림을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식중독을 일으켜서 정말 죽을 고생을 했지요. 영주에 나가 살며 애들 학교 뒷바라지를 하던 집사람이 이웃의 연락을 받고 급히 원곡까지 들어오고 했어요. 그러나 병원도 멀고 가기 싫은 고집도 있고, 집에 있는 꿀이라도 한번 타 마셔 보라고 집사람이 권해서 한 대접 마셨는데 즉시 효과를 봤어요. 가정에 한병쯤은 상비약으로 보관해두고 식중독이나 배탈은 물론이고 감기몸살로 목이 잠기거나 아플 때 토종꿀을 타 마시면 큰 효과를 봅니다. 한창 산에 다니면서 몸살이 들었을 때도 따뜻하게 한잔 타 마시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금세 몸이 거뜬해지고는 했으니까요.”
산골에서 본업삼아, 부업삼아 토종벌을 치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듯이 방한덕씨 또한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재래방식으로 손수 통나무 속을 파내고 다듬어서 벌통을 제작한다.
“벌통은 직접 통나무를 깎아서 만들어요. 자귀 같은 연장으로 통나무 한쪽을 찍어가며 먼저 파내고 난 다음에 끌을 이용하여 속을 마저 파내고, 긴 나무자루 끝에 낫을 둥그렇게 휘어서 붙인 호비칼로 통나무 속을 돌려 후벼가면서 다듬지요. 마지막으로 아랫부분에는 벌이 들락거릴 수 있는 구멍을 2군데 만들어주고요. 보통 생나무로 벌통을 만드는데 소나무는 힘이 없어서 피나무, 버드나무, 오동나무 같은 나무로 만들어요. 그중에 오동나무가 장소를 이동하기도 가볍고 물을 잘 안타서 밑 부분이 더디 썩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요. 바쁘게 손을 놀리면 하루에 벌통 하나는 만들 수 있어요.
토종벌은 원래부터 산속의 속이 썩은 고목나무에 들어가서 살았고, 수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그 토종벌의 습성을 따라서 나무속을 후벼 파서 벌통을 만들어 온 것일 겁니다. 지금도 산중 마을에서 토종벌을 키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전래되는 방식대로 재래식 벌통을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아마 이렇게 만들어지는 벌통이 토종벌에게는 가장 좋은 집일 테지요. 어떤 때는 산에 갔다가 고목 밑에 사는 야생벌을 발견해서 꿀을 딸 때도 있어요. 그렇게 채취하는 토종꿀은 정말 최상의 품질을 가지는 꿀입니다. 연장을 이용해서 고목나무를 베고 꿀을 떠오는데, 대개 그 벌들까지 살려내서 키우기는 힘이 들지요.”
현재 방씨가 키우는 토종벌로부터 채취해내는 토종꿀은 1되에 25만원에서 30만원 선으로 가격을 형성하면서 알음알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팔리고 있다.
“토종벌꿀은 1되에 25만원도 받고 30만원도 받고 그럽니다. 좀 친하게 지내거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사러오면 25만원쯤 받고 파는데, 보통 30만원 선에 거래가 되고는 하지요. 토종벌꿀도 대개는 한번 먹어본 사람들이 다시 찾아요. 전에 사먹어 봤더니 아침에 몸이 가볍고 피로도 확 풀리고 좋더라는 사람들부터, 가정에 한병쯤 비상 영양식으로 사놓아야겠다는 사람까지 토종꿀을 찾는 이유도 가지각색입니다. 어쨌든 해마다 잊지 않고 저를 찾아와서 토종꿀을 찾는 사람들은 저를 믿고 부탁하는 것이니만큼, 절대 꿀의 품질을 속이는 일 따위는 없지요.
토종꿀을 많이 뜨는 해는 30~40통도 뜨고, 어떤 해는 10통도 뜨기 힘들만큼 해마다 채취하는 꿀의 양이 들쭉날쭉해요. 토종벌이 잘 되려면 무엇보다 온도가 잘 맞아야 합니다. 벌이 꿀을 빨아오는 꽃인 밀원식물(蜜源植物)이 적당한 온도에서 꿀을 많이 만들어 내야 벌들도 꿀을 많이 채취하게 되고, 벌통속의 꿀도 양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다년간 토종벌을 치면서 깨친 사실입니다. 작년에는 온도가 맞지 않아서 꿀이 흉년이었어요.”
언제부턴가 중국 등지에서 한약재가 싼 값으로 마구 밀고 들어오면서 국내의 토종 약초는 점점 귀해지고 또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고 방씨는 걱정이다.
“예전에는 국산 약초가 비싼 값에 한약재로 팔려 나갔어요. 어떤 종류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한때는 토종 약초가 큰 인기를 누렸지요. 그러나 이제는 큰 재미가 없지요. 복령도 옛날에는 돈이 됐어요. 중국산이 수입되지 않을 때만 해도 생복령 1근에 그때 돈으로 5천원씩 받고는 했는데, 지금은 토종 생복령이 1근에 3천 7~8백원 정도밖에 하지 않아요. 그나마 중국산 복령은 생복령도 아니고 약재로 가공까지 해서 곧장 사용할 수 있도록 해서 1근에 2천5백원 정도에 판매되고 있으니 경쟁에서 처질 수밖에요. 이제는 모든 한약재가 저가 중국산에 밀리고 있어요. 그래도 중국산 저가 약재가 국산 토종약재의 효능을 따라오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예전에는 토종 한약재 1~2첩(貼. 한두 봉지) 먹어도 낫던 병이 이제는 1제(劑. 스무 봉지)를 먹어도 제대로 낫지 않잖아요? 그만큼 옛날에 국산 약초를 한약재로 사용할 때가 효과가 훨씬 좋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전내마을 골포동에서 강원 풍곡 덕품계곡까지, 영양 일월산도 수차례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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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점점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기력도 떨어지고 또 애들도 다 키웠고, 그러니 자연 산에 자주 오르지를 않아요. 한창 애들 키울 때만 하더라도 혼자 가기도 하고 두어명씩 동무를 해서 가기도 하고 거의 매일 산을 오르내렸지요. 오로지 산에서 약초를 캐서 먹고 살고 애들 키우고 그랬으니까요. 산에서 자기도 많이 잤고... 산에서 여러 날을 잘 때는 한 일주일씩도 자고 그랬어요. 젊은 시절에 비닐이 생산되기 전만 해도 그냥 산에서 밤이슬정도나 피해가면서 바위 밑에서 웅크리고 자기도 했는데, 비닐이 나오고부터는 비닐을 준비해서 다녔습니다. 크기가 작은 나뭇가지를 베다가 두 개를 세워서 그 끝을 서로 묶고 그 위에 비닐을 천막처럼 치고, 또 비닐로 몸을 감아서 덮고 밤이슬과 한기를 피하며 잠을 잤어요. 텐트나 천막은 무거워서 약초를 캐면서 지고 다닐 수가 없어서 짐만 되니까 궁여지책으로 약초꾼들은 그렇게 산속에서 비닐을 덮고 깔고 밤을 새는 거지요. 비닐 덮어쓰고 자고 일어나면 집에서 가지고 간 쌀로 밥해서 고추장에 비벼먹고... 자식들은 그런 세세한 사정을 자세히 몰라요. 아버지가 산속에서 여러 날 잠까지 자가며 고생한다는 내색도 안했고, 그런 고생 얘기해서 애들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마음 아프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저 아버지가 약초 캐러 집을 나서면 산에서 먹고 자고 한다는 사실이나 어렴풋이 기억할까...”
젊은 시절 방한덕씨는 전곡리 전내 ‘골포동’에서 산을 타기 시작하면 약초를 찾아서 강원도 풍곡의 ‘덕품계곡’ 용소골까지를 여러 차례 왕복하기도 했다. 영양 일월산도 수차례 올랐다.
“전내‘골포동’에서 산에 들어 약초를 캐면서 가다보면 ‘덕품’ 용소골에 이르게 되지요. 여러번 그 길을 오고갔어요. 약초꾼들은 주로 산 능선을 타고 이동하는데 능선을 따라서 약초를 찾으면서 걷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저 아래 먼발치로 덕구온천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고는 했습니다. 능선을 따라서 이동하다가 날이 저물면 자리를 잡고 계곡물로 밥을 해먹고 자고 또 일어나서는 다시 이동하고... 영양 일월산도 자주 다녔고 인근의 어지간한 산은 다 다녀보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거 같네요. 다녀 본 곳 중에서는 덕품계곡의 경치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폭포도 여러 군데 있고, 사시사철 그 풍경이 아주 뛰어난 곳이지요. 제가 다녀본 인근 산 중에서는 누가 뭐라고 해도 경치가 단연 으뜸입니다.”
볼펜 굵기의 산삼은 캐봐야 약도 안 되고 귀한 물건 종자만 없애버리는 꼴
근래 들어 방한덕씨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약초를 구하거나 행운을 부를만한 길몽을 꾸게 되는 날에만 산을 찾아간다.
“요즘은 산에 자주 안 다녀요. 집에서 달여 먹을 갖가지 나무껍질을 구할 때나 간밤에 좋은 꿈을 꾸었을 때나 산에 오르지요. 자식들 다 키우고부터는 산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올랐습니다. 사실은 증조할아버님께서 평생 심마니로 사셨는데, 그런 이유로 저는 젊을 시절에는 산삼을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다가 뒤늦게 산삼을 캐기 시작했어요. 요즘은 주로 산삼을 보기 위해 산에 들지요. 지금까지 꽤 여러 뿌리를 캤는데 4~5백만원이 나가는 산삼도 캐봤고, 천만원을 호가하는 산삼을 캐 본적도 있습니다. 산에서 캐는 산삼은 크기가 문제가 아니지요. 우선 잘 생겨야 제값을 받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산에서 산삼을 만나도 볼펜 굵기 정도의 산삼은 캐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두고 내려옵니다. 장소를 기억하고 있다가 다음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서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가 캐더라도 어느 정도 굵어져서 약이 될 때 캐야 된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미처 자라지 않은 산삼을 캐 먹어봐야 약도 안 되고 괜히 그 귀한 물건을 종자만 없애버리는 거 아닙니까? 약초꾼이라면 크기나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각종 약초를 무분별하게 채취하는 그런 짓은 하지 않습니다.”
일평생 약초꾼으로 살아온 방한덕씨도 한때 그것만으로는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어 산판으로 가서 일도 하고, 송이도 채취하고 했다고 전해준다.
“한때는 산판도 여러 차례 따라 다녔어요. 강릉에서 대관령으로 가다가 중간에 샛길로 빠지면‘대기리’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동네사람들과 어울려 산판일을 떼 가서 그곳에서 한달도 일하고 두달도 일하고 그랬지요. 또 가을이면 남의 산을 몇 년씩 빌려서 송이도 따고 그렇게 먹고 살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그때만 하더라도 너도나도 다들 그렇게 어렵게 살았지요. 시절이 그랬으니까요.”
약초꾼들은 약초가 온 천지 사방에 널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약이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은 어쩌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자연의 심오한 법칙을 오랫동안 꿰뚫어본 혜안으로 지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태곳적부터 하늘이 경작한 신성한 농사를 자연에서 거두어들이는 약초꾼, 그들은 ‘꾼’으로 불리지만 낚시꾼이나 사냥꾼처럼 뭇 생명에 위협을 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죽어가는 생명에 한줄기 희망을 안겨주는 활인(活人)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도 나이가 들어 현역에서 물러났거나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고, 곱게 다듬어진 값싼 중국산 약초가 무분별하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더 이상 돈 안 되는 고된 일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를 거스르지 못하고 또 하나의 토종 전래 직업인 약초꾼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수도 없이 이산 저산 고개를 넘고 능선과 바위를 타며 약초를 채취하고 석이를 따면서 날이 저물면 산속에서 오롯이 밤을 새우던 그들만의 이야기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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