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자꾸만 앞으로 흘러가는데 추억은 과거를 향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변을 살펴보면 어느새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또는 사라진 기억을 더욱 구체적으로 떠올려주는 물건들이 있다.
어린 시절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종이딱지, 유리구슬, 학생들의 손때가 묻어나는 예전 교과서, 색 바랜 학창시절의 졸업앨범, 펜촉이 문드러져 더 이상 사용할 수가 없는 오래된 만년필, LP 레코드판,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되기도 하는 발재봉틀, 빛바랜 흑백사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디지털 제품 앞에 유행에 뒤떨어진 아날로그 제품들은 큰 맥을 추지 못하고 사라져 간다. 그런 만큼 디지털 제품은 아날로그 제품에 비해 사람들에게 귀중함도 애착도 덜 받는 불명예를 누리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가끔 해묵은 옛 물건을 만나게 되면 지난 시절, 그 어려웠던 시절로 잠시 동안이나마 되돌아갈 수 있다.
1975년에 현대자동차에서 최초의 국산 고유 모델로 국내 자동차 시장에 시판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포니를 베이스로 개발하여 1976년부터 생산해서 시판한 포니 픽업도 다양한 추억의 물건 가운데 하나이다.
1976년부터 일반에 시판되기 시작한 포니 픽업은 1982년 포니2 픽업으로 모델을 바꿔서 1988년까지 생산이 이어졌다.
포니2 픽업은 1439CC의 배기량에 92마력 엔진을 얹고, 승차정원 2명으로 최대 400kg까지의 화물 적재가 가능하다. 사물을 세밀하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사람이라면 울진 읍내에서도 탈 없이 도로 위를 굴러가는 포니2 픽업을 이따금씩 목격한 적이 있을 것이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는 전혀 다른 질감과 기억의 두께를 지니고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호월리 용제에서 3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포니의 생산이 중단되기 2년 전인 1986년 포니2 픽업을 구입한 이래 지금까지 22년 동안 포니2 픽업을 타고 있는 주태식(70세)씨의 고향은 울진읍 호월2리 용제이다. 호월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젊은 시절 10여 년간 타향을 떠돌기도 했었지만,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생활하고 있다.
“원래 이곳 호월리 용제에서 태어났어요. 엄밀하게 얘기하면 지금 살고 있는 이 집 뒤쪽의 둔덕 너머에서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 일찍 돌아가셨기에 얼굴조차 기억이 없고, 어머니는 제가 결혼하고 나서 돌아 가셨어요. 이미 돌아가신 분들 얘기는 하고 싶지 않네요. 자칫 잘못 전달되면 고인을 욕먹일 수도 있는 것이고, 굳이 돌아가신 분들 생각하며 가슴 저미고 싶지도 않고요.”
20여년 포니2 픽업을 타면서 알뜰하고 검소하게 살아온 주씨의 부모님은 슬하에 3남매를 두었다.
“위로 형님 한분과 누님 한분이 계시지요. 누나는 지금도 울진 읍내에서 생활하고 있고, 형님은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쟁터에서 전사했습니다. 제가 형님과는 14살 차이가 나는데 형님은 29살에 군 소집영장을 받아서 국군에 입대했어요. 그때는 6.25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는데, 뒤늦게 군에 입대해서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거지요. 전쟁 마지막 상황이야 뻔 하잖아요? 휴전을 앞두고 땅덩어리 한평을 서로 더 차지하기 위해 생떼 같은수많은 젊은 목숨들이 죽어나갈 때였으니까. 제 기억에 군 소집 영장을 받은 형님은 제주도로 건너가서 군사 훈련을 받은 후에 강릉 8사단에 배속되어 전쟁에 투입되었어요.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전쟁 막바지에 군에 입대해서 전사한거야 두고두고 아깝고 한스럽지만 당시의 시대 상황이 그러했으니 개인의 힘으로야 어찌할 수 없는 거지요”
신림국민학교 1년 반 다니고, 남의 집 머슴살이로
주씨는 호월리 용제에서 태어나서 신림국민학교를 1년 반 정도 다녔다.
“그때만 해도 호월리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울진이 아닌 신림국민학교를 다녔어요. 먼 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으니 11살 되던 해에 신림국민학교에 입학했지요. 학교를 통학하는 길이 힘들기는 했어도 1년 반 정도 다녔어요. 1년 반 정도 신림국민학교를 다니다가 6.25 전쟁이 나면서 그만 다녔지요. 글쎄요, 남들만큼 배웠더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잘살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큰 후회는 없어요. 한평생 묵묵하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았으니까 별 미련은 없지요. 6.25전쟁이 터졌지만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이 동네에 살면서 6.25 전쟁을 겪었어요.”
고향 호월리에서 6.25 전쟁을 고스란히 겪은 주씨는 전쟁이 끝난 후에 19살이 되던 해까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고단하게 생활한다.
“그냥 고향집에 남아서 전쟁을 겪었고 그 사이에 한분 계시던 형님도 전쟁터에서 잃고 남은 것은 상심뿐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사람이 산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고 당장 먹고 살아야 했지요. 그래도 이곳 호월리에서는 땅도 좀 가지고 있는 이웃집으로 머슴살이를 들어갔습니다. 잠은 집에서 자고 새벽 일찍 머슴살이 하는 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 논이며 밭에서 고된 일을 했지요.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형님도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 둘만 계셨으니 저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어요. 어머니와 누나도 그냥 놀고 지낼 수는 없었지요. 어머니와 누나, 저 모두 굶어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할 수 밖에요. 우리 집이야 원체 부쳐 먹을 논밭뙈기 한마지기도 없었으니 머슴살이라도 살아야 했지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요즘처럼 비료나 농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운기나 트랙터 같은 농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무조건 사람 손이 가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어요. 밭의 김도 매고 논의 피도 뽑고 산으로 지게를 지고 가서 풀을 한짐 해 와서 거름으로 논에 깔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5년쯤 이웃집에서 머슴을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중화요리 기술 배워
15살부터 19살을 온전히 채울 때까지 부쳐 먹을 농토가 있는 이웃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주태식씨는 20살이 되던 해에 훌쩍 고향 울진을 떠나 강릉으로 올라간다.
“집이 있는 고향을 무작정 떠났다고 하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그냥 도망치다시피 고향을 떠나 강릉으로 올라갔습니다. 세상에 배운 것도 없는 젊은 시절에 그래도 좀 더 큰 곳에서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하나를 붙잡고 강릉으로 간 거지요. 강릉으로 가서 중화요리 집에 취직을 했어요. 배달은 거의 하지 않고 처음부터 주방으로 들어가서 양파도 까고 이런저런 허드렛일도 거들어주면서 요리 기술을 배웠지요. 지금이야 울진읍내만 하더라도 중국집이 몇 군데나 되지만 그때는 강릉시 전체를 통틀어도 중화요리집이 3군데밖에 영업하지 않았어요. 당연히 요즘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중국집과는 질적으로도 많은 차이가 있었고요.
아마 지금 중국집을 하는 사람들은 그 당시의 정통 중화요리를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몰라도 만들 수도 없을 겁니다. 흉내를 낸다고 해서 그 당시와 같은 맛이 나는 것도 아닐 테고요. 그때 모든 면에서 도시에 비해서 한참이나 뒤떨어진 울진에서 올라간 저는 참으로 듣도 보도 못한 정통 중화요리를 많이 보고 또 만들어 보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한때는 중화요리를 제대로 잘 만든다는 소리까지 듣기도 했어요.”
강릉으로 올라간 다음에 중화요리 집에 취직해서 요리 기술을 배우던 주씨는 강릉을 떠나 또 다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다.
“집을 떠나서 처음에는 강릉으로 가서 중화요리 기술을 배우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갔어요. 서울서도 중화요리 집에 취직을 해서 요리 기술을 배웠습니다. 당시만 해도 서울 또한 어렵고 먹고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는데, 그래도 중화요리 집에 취직을 해서 생활하면 일단 먹고 자는 고민은 해결할 수 있었지요. 배운 기술도 농사 말고는 그것밖에 없었고요. 그때 서울도 전화국번이 2개밖에 없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왜 구식 전화기 있잖아요? 전화기 옆의 손잡이를 한참 돌리면 교환수가 나오고, 전화번호를 불러주면 상대방에게 전화를 연결해주던... 서울에도 전화 국번이 2개밖에 없을 때였으니까 제가 지금 하는 얘기가 얼마나 오래된 얘기입니까?
또 기억에 남는 것이 당시에 종로에서도 제일 비쌌던 집 한채 값이 지금 울진 월변의 집 한채 값도 되지 않았어요. 어쨌든 20살에 고향을 떠나서 근 10년간을 그렇게 강릉과 서울을 오가며 생활했나 봅니다. 서울서 다시 강릉으로 내려왔다가 10년 만에 고향인 호월리 용제로 돌아왔어요. 대도시에서 뭔가 해보자는 희망 하나를 붙들고 고향을 떠났었는데, 어느 순간 문득 중화요리 기술로 더 이상 희망을 꿈꿀 수는 없겠다 싶더군요.”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집은 주태식씨가 직접 벽돌을 찍고 쌓아 올려 만들었다
직접 벽돌 찍어 양계장 만들고, 개구리를 잡아 닭에게 삶아 먹이고
훌쩍 고향을 떠나서 객지를 떠돌아 다닌 지 10여년 만에 주씨는 고향 호월리로 돌아온다.
“제가 타향 땅을 떠돌 때 고향 집에는 어머니와 누나가 힘겹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매란 없는 삶을 살고 계셨던 거지요. 어렵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땅이라도 있는 사람들이야 밥이라도 먹고 살았지만, 땅 한평 없는 사람들은 땅 있는 사람들 집에서 일하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어요. 없는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 집에서 왠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품값이 어디 있어요? 그저 밥 한끼 얻어 먹는 게 고작이었지요. 그나마 밥 한끼 얻어먹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곳이라도 있으면 정말 행복했습니다. 일해주고 돈 벌 곳은 물론이고 밥 한끼 벌어 먹을 곳도 딱히 없었어요. 다행히 주변에 일할 곳이 있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일하고 나면 쌀 한되 벌기가 어렵던 그런 때였지요.”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먹고 살기가 막막했던 주태식씨는 토종닭 몇 마리를 사서 키우기 시작한다.
“처음에 주변에서 토종닭 1마리, 2마리를 구해서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봄이 되면 알을 품게 해서 병아리를 까고, 그러다보니 토종닭 숫자가 점차 늘기 시작했어요. 토종닭 3마리를 한해 키우니까 80마리가 되더군요. 1마리는 3배를 품고, 2마리는 2배를 품었던 거지요. 보통 어미닭이 22일 동안 계란을 품어야 병아리가 세상에 나오는데, 암탉 1마리를 둥지에 앉혀서 한해에 2~3번씩 알을 품게 하려면 영양가 있는 모이를 먹여야 하잖아요? 닭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쪼아 먹는 모이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지요. 그래서 머리를 썼지요. 요즘이야 잡는 것조차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근처 냇가 같은 곳을 뒤지면 개구리가 흔했습니다. 사람 몸에도 좋은데 닭에게도 좋겠다 싶어 냇가에 가서 개구리를 잡아다가 어미닭에게 먹이면서 알을 품게 했어요. 개구리를 많이 잡아다가 푹 삶아서 닭에게 먹이는 거지요. 그러면 암탉이 한달씩 알을 품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어요. 정말 남이 생각지도 못하는 온갖 일을 다 해봤습니다.
병아리도 금방 커서 알을 낳고, 그러면 그 계란을 울진 시장에 내다 팔고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계란을 지게에 지거나 손에 들고 울진 읍내 시장을 다녔어요, 이곳 호월리에서 울진시장을 가려면 물 다리를 3군데 건너야 되는데, 계란 120개를 손에 들고 울진 시장까지 가는데 40분 정도 걸렸어요. 당시만 해도 젊을 때였으니까 무거운 계란을 양손에 가득 들고서도 울진까지 빨리 간 거지요.”
고향으로 돌아와서 닭을 키우며 계란을 내다 팔던 주씨는 곧 돼지도 1~2마리씩 사다가 키우기 시작한다.
“닭을 키워서 계란을 시장에 내다 팔다 보니 어느 정도 재미도 붙고 내친 김에 돼지를 한두마리씩 구해다가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이곳에 있는 폐 양계장이나 돼지막도 그때 내 손으로 직접 다 지었어요. 가끔 인부를 사서 함께 일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벽돌 찍어내는 기계를 구입해서 직접 제 손으로 벽돌도 찍어내고 시멘트로 쌓아 올리면서 그렇게 지은 거지요. 지금 생활하는 집도 짓고, 돼지막도 만들고, 양계장도 벽돌로 쌓아 올리고, 담장도 쌓고, 참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하면서도 다행히 먹을 게 있으면 먹고, 또 없으면 하루 종일 굶어 가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눈만 뜨면 일하면서 한 10년쯤 생활하고 나니까 그나마 조금 먹고 살만해 지더군요. 고생했던 예전을 돌이켜 생각하니까 정말 가슴이 갑갑해 집니다. 객지에 나가서 10여년 살다가 나이 30살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10년이 지난 40살이 될 무렵부터 겨우 먹고 살만해졌어요. 그래도 빚이야 밑도 끝도 없이 깔려 있었지요. 농협 같은 곳에서야 제가 촌놈인데 무얼 믿고 돈을 꿔 주겠어요? 대부분 주변 사람들에게 사채를 얻어 썼어요.”
35살에 중매로 9살 연하의 아가씨와 결혼하고 가정 꾸려
호월리로 돌아와서 닭과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주태식씨는 35살에 동네사람이 중매해준 9살 연하의 아가씨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게 된다.
주씨집 인근에 심어져 있는 `섬바디(돼지풀)'
“이웃에 살던 어떤 분이 중매를 했습니다. 안사람은 근남면 잘미가 고향인데 그 당시에 울진 읍내에 살고 있었지요. 올해 61살이니까 저와는 나이 차이가 좀 벌어지는 편이지요. 그때만 해도 옛날인데 그래도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신식으로 했어요. 결혼식을 올린 예식장이 지금 울진시장안의 축협이 있는 자리쯤 되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당시에 사진도 한두장 찍었었는데 살아오면서 어쩌다 보니까 다 없어져 버리고, 지금은 그런 사진 한장 남아 있는 것이 없네요.”
35살에 9살 연하의 아가씨를 배필로 맞아들인 주태식씨는 부인 곽정희(61세)씨와의 사이에 아들 둘, 딸 둘 4남매를 두었다.
“4남매를 두었습니다. 큰 딸은 시집가서 살고 있고, 큰 아들은 추레라 운전기사를 하다가 지금 강원도 사북 어느 광산에서 25톤 트럭인가 하고 있지요. 작은 아들은 영덕군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고, 작은 딸은 울진읍내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글쎄요. 제가 어려서부터 너무 힘겹게 살아오다보니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크게 기를 살려 주지도 못하고 마냥 내놓고 키우지 못하고 안으로만 감싸고 돌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후회스럽기도 합니다. 큰아들만 하더라도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가 제일 편하고 좋다는데 장가도 가지 않고 있으니...”
대도시의 노숙자가 고생한다고요? 다 배부른 얘기지요
어릴 때부터 고생이 몸에 익숙해져서 당시와 비교하면 넘쳐날 정도로 풍족해진 지금까지도 무엇이든 아끼고 절제하는 검소함이 몸에 배여 있는 주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일 어려운 적은 없었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제일로 어려웠던 적은 없어요. 살아오면서 매순간 항상 어렵고 힘들기만 했으니까요. 힘들어 죽고 싶다는 사람은 그 자체로서 매정한 것 같지만, 뼈마디가 저릴 정도로 정말 어렵고 힘들면 죽고 싶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는 법이지요. 저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도 어려웠던 시절만 있어 왔기에 그 가난했던 아픔을 이겨 보려고 애써왔고, 그런 것을 돌이켜보면 제 자신이 스스로 측은하게 생각될 때도 있어요. 그나마 어떤 때 돈이라도 조금 손에 들어오면 그것으로 나름대로 작은 위안을 삼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 왔으니까요. 그 기분에 잠시 살 것 같기도 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요.”
무엇이든 과소비를 줄이고 아껴야 잘 살수 있다고 말하는 주태식씨는 인생이란 내일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내일을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지요. 지난 일이야 그 시절이 아무리 아팠다고 하더라도 지나고 보면 매 한가지입니다. 지금까지 돼지를 키워오면서 돼지 파동도 수차례 겪었어요. 돼지 파동을 겪으면서 돼지 값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칠 때면 정말 머리가 아득해지면서 당장 돌아버리는 것 같지요. 한평생 땀 흘리며 열심히 노력해 왔는데, 돼지 값이 추락하면서 부도라도 나게 되면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나 앉을 수밖에 없는 거니까요. 말 그대로 거지가 되는 건데 어떻게 머리가 돌지 않을 수 있겠어요? 글쎄요, 애초부터 재산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다가 어느 날부터 힘들어졌다면 부모님 원망이라도 조금 할 수 있었겠지만, 원체 없는 집에서 태어났고 또 어렵게 커 왔으니까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어요. 원래 부모님도 없는 집에서 힘들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이니 추호도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 없지요. 정말 저만큼 고생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가끔씩 언론에서 지하철역 같은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숙자 문제를 다루기도 하는데, 노숙자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돼요. 그게 무슨 고생입니까? 더럽고 힘들다고 일을 안 하려고 해서 그렇지, 지금 세상이야 벌어먹을 곳이 얼마나 많아요? 당장 막노동판에 나가서 하루만 벌어도 쌀 몇 말 살 수 있잖아요? 그거면 며칠 동안 먹을 걱정 안 해도 되고요. 제가 어릴 때는 정말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지금 대도시의 노숙자가 무슨 고생을 하는 겁니까? 다 배부른 얘기지요.”
울진 시내에서 만난 주씨의 포니2 픽업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무슨 일인들 열심히 하는데 당할 장사 있나요?
주태식씨는 현재 호월리 용제에서 돼지 200여 마리를 혼자서 키우고 있다.
지금은 200마리 정도의 돼지를 농장에서 키우고 있어요. 돼지는 새끼를 낳아서 6개월 정도 지나면 내다 팝니다. 팔 돼지가 있어서 연락을 하면 장사꾼이 와서 사가는 거지요. 차량 한 대에 40마리 정도를 싣고 가는데 40마리를 다 채우지 못하면 아까운 차비를 날리게 됩니다. 1마리를 팔거나 40마리를 팔거나 차비는 별도로 똑같이 계산해야 하니까요. 돼지 값이 덜 나갈 때는 차비로 돼지 두 마리 값이 먹히기도 하는데, 그걸 계산하면 200마리로 조금 부족해서 마릿수를 조금 더 늘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금 생활하고 있는 이 집에 딸린 돼지막에서 돼지를 키웠는데, 냄새가 난다고 이웃에서 싫어해서 20년 전쯤에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거신골’이라는 골짜기에 돼지막을 새로 지었어요. 한때는 소도 키워서 내다 팔았습니다. 그런데 소는 키우다가 내다 팔게 되면 돼지와는 다르게 항상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고 덜 좋아서 그만 두었지요. 지금 집에서 키우는 저 강아지도 3마리짼데 먼저 키우던 2마리도 그냥 저절로 죽을 때까지 키웠습니다. 개도 늙으니까 저절로 죽더군요. 소와 개는 오래 키우다보면 정이 들어서 돼지와는 또 다른 감정이 생겨요.”
주씨는 아직까지도 돼지고기 소비량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만큼 제대로 키우면 손해보다는 득이 많다고 말해준다.
“수입이니 뭐니 해도 돼지사육이 아직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열심히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요. 어떤 분야든 쉬운 일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요. 무슨 일인들 열심히 하는데 당할 장사 있나요? 저도 지금까지 30여년 돼지를 키워오면서 숱한 고생 다 겪었습니다. 한때는 툭하면 돼지 파동이다 뭐다 시끄러웠고, 그럴 때마다 밤잠 설쳐가면서 가슴 조려야 했지요. 제가 술은 조금 마시다가 몸에도 안 맞고 해서 완전히 끊었는데, 담배는 중간에 끊어 보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끊지를 못했습니다. 힘에 부치는 일을 겪거나 해서 화딱지가 나면 끊었다가도 다시 또 피우게 되니까요. 그저 무슨 일이든 열심히 달라붙어 악착같이 하면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다보면 돈은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거지요. 저라고 애초부터 돼지를 키울 팔자를 타고 태어났겠어요? 어릴 때부터 하도 가난하게 살다 보니까 돈을 벌겠다고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고, 앞만 보고 열심히 생활하다보니까 돈도 모이고 재산도 하나둘 늘어나고 그런 거지요.”
22년 전이던 1986년에 350만원을 주고 구입한 포니2 픽업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힘주어 말하는 주태식씨는 1986년 6월 30일에 포니2 픽업을 구입했다.
“당시만 해도 울진에 자동차 운전학원이 없어서 영덕까지 오가면서 운전학원을 다녔지요. 학원을 다닌 지 2주 만에 대구까지 가서 시험에 합격하고도 몇 년이 지나서 차를 구입했어요. 돼지 값도 좀 올랐고 마침 농장도 지금 사는 곳 저 위쪽 골짜기인 '거신골’에 새로 장만하고 했을 때였기에 짐도 조금 실을 수 있고 좁은 농로를 다닐 수 있는 작은 트럭이 필요해서 픽업을 구입한 거지요. 그때 포니2 픽업을 350만원 주고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350만원이 당시에는 꽤 큰 거금이었는데, 그때는 주변에 차를 소유한 사람도 드물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22년 동안 한결같이 쭉 같은 차를 타고 다닙니다.”
22년 전에 350만원을 주고 산 포니2 픽업이 정말 돈을 많이 벌어준 차라고 자랑하며, 몇 년 타지도 않고 다시 차를 바꾸는 요즘 세태를 주씨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지난 86년에 차를 사서 지금까지 이 차 한 대만 타고 있습니다. 고장이 나면 고쳐서 타면 되니까 굳이 중간에 차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더군요. 자동차라는 것이 운전하는 사람이 원하는 목적지까지 가주면 되는 거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차를 자주 바꾸잖아요? 아무리 봐도 멀쩡한데, 중고차라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느니, 유행에 뒤떨어졌다느니 하면서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차를 바꾸고는 하더라고요. 다 쓸데없는 낭비지요. 중고차라서 자주 고장이 나고 돈이 들어간다고 해서 새 차를 바꾸게 되면 그 차 할부금 내는 데는 돈이 안 들어갑니까? 또 모르지요, 돈이 많은 사람이 좋은 차를 구입해서 타고 다닌다면 이해하기가 쉽지만, 울진만 보더라도 자기 집 한칸 제대로 없는 사람들이 분수에도 맞지 않는 크고 비싼 차를 많이들 끌고 다니잖아요? 그런 걸 보고 있으면 남의 일이지만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고 웃음도 나고 그렇지요. 저는 평생 이 차 한대 타면서 돈을 많이 아끼고 벌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포니2 픽업은 생각보다 잔 고장 없이 지금까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뒤쪽에 짐칸이 있어 간단한 짐도 실을 수 있기에 농장 일을 하는데 무엇보다 편리하고요.”
언젠가 포니2 픽업을 운전해서 봉화를 다녀오는 도중에 아찔한 사고를 겪은 주씨는 그때부터 운전을 해오면서 절대 시속 60km 이상은 밟지 않는다고 전해준다.
포니2 픽업의 엔진룸과 운전석 내부
“전에 봉화에 돼지를 실으러 갈일이 있었는데 급한 마음에 이 차로 80km를 밟았던 적이 있어요.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속도가 너무 붙는다 싶어서 브레이크를 밟았더니 차가 미끄러지면서 한바퀴 휙 돌았습니다. 하늘이 돌본 거지요. 어느 한쪽 차선에서라도 마주 오는 차가 있었다면 아마 대형사고로 연결됐을 겁니다. 이 차는 다른 차보다 가벼운데, 미처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과속을 했던 거지요. 그 다음부터는 절대 60km 이상은 밟지 않습니다. 지금도 매일 이 차를 타고 집과 농장을 오가고 있고, 울진시내는 한달에 한두번 꼭 필요할 때 차를 끌고 나갑니다. 차를 끌고 시내에 나가면 지나가던 꼬마들이 꼬물차, 똥차 하면서 손가락질 하지만 저는 그것조차 즐거워요. 바꾸어 생각하면 제가 검소하게 살아가는걸 남들이 알아주는 거니까요.”
죽을 때 싸 가지고 가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들 펑펑 쓰면서 살아서는 더욱 안 된다고 말하는 주태식씨는 앞으로도 3년 정도는 포니2 픽업을 더 탈것 같다고 말한다.
“앞으로 3년 정도는 돼지를 더 키울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는 이 차를 계속 타야 되겠지요. 3년 뒤에도 차를 바꾸지는 않을 것 같네요. 그때 가서 무슨 차를 새로 사겠어요? 나가면 버스다, 택시다 천지로 깔려 있는데 그거 타고 다니면 되지요. 울진에서 주유소를 하는 어떤 친구는 제가 이 차를 끌고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에 들리면 바닥 더러워진다고 놀리기도 하고, 죽을 때 싸가지고 가나, 좀 쓰면서 살아라 합니다. 저도 알지요, 죽을 때 돈 싸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는 거. 그렇다고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열심히 일해서 힘들게 모은 돈을 막 쓰고 살다가 갈수는 없잖아요? 있을수록 더욱 아껴야지요. 그저 저는 남의 눈을 위해 살지 않을 뿐입니다. 생긴 대로 편하게 살면 되는 것이지, 무리해서 이것저것 사 모으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가끔 어떤 자리에 가게 될 때 남들이 눈살 찌푸리지 않을 만큼 있는 옷이라도 깨끗하게 손질해서 갖추어 입고 다니면 되는 거지요. 남들 눈에 있어 보여야 되는 그런 게 뭐 중요합니까? 누더기를 걸쳐 입고 다녀도 마음이 편해야 되고 또 실속이 있어야지.”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유행이 만들어지는 이 시대는 3년도 안된 멀쩡한 새차도 금세 구형취급을 받는다. 그런 만큼‘무조건 새것이 최고다’하는 생각이 우리들을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그렇지만 항상 새것은 무엇인가 조금 아쉽고 부족한 듯한 마음을 영 지울 수는 없기에, 오래되고 낡은 것에 이끌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겨난다.
무엇이든 아껴야 잘살 수 있다고 힘주어 강조하는 주태식씨와 평생을 함께해 온 골동품급 조랑말인 포니2 픽업은 한때 국내 도로 사정에 적합한 경제성과 튼튼한 내구성으로 인해 간단한 짐을 실을 적재함이 필요했던 자영업자들에게 가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명품 모델이다.
주씨는 비록 포니2 픽업의 외관은 낡았지만, 기계식 엔진의 성능 하나만큼은 요즘 차가 당하지 못한다며 자랑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낡고 고장 난 부분은 어렵게 부품을 구해서 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차를 점검하고, 단골 카센터에 들러 수리도 부지런히 받은 덕분에 주씨의 조랑말은 여전히 지금도 별 말썽 일으키지 않고 원하는 곳까지 달려준다.
지난 80년대에 인기리에 판매되던 포니 자동차는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주태식씨의 몸에 배인 절약 습관 덕분에 22년 동안 제대로 관리되어온 클래식카 포니2 픽업은 그래서 여전히 그 어떤 자동차보다 멋있고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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