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전부터 전국적으로 한자(漢字)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한자 열풍을 증명이라도 하듯 서점에서는 한자 교재가 인기리에 팔리고 있고, 모 신문은 한자를 익힐 수 있는 별도의 코너를 마련해 독자들에게 서비스하기도 한다.
초·중·고생은 물론 대학생,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한자어문학회, 한자교육진흥회, 대한검정회 등의 기관에서 주관하는 한자 능력 검정 시험에 응시해서 한자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 상종가를 치고 있고, 방학 동안에는 각급 기관과 단체에서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문 교실을 열어 인기를 끌고 있다. 이미 지역 내 초등학교에서도 자습시간이나 방과 후에 한자를 지도하는 광경을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왜 또 다시 한자가 우리의 주목을 끄는가? 한자를 아는 것이 70% 이상이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는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수년전부터 밀어닥치고 있는 한자 열풍은 한자 문화권의 경우에는 한자를 통해야만 모든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 또한 상당히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자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국어는 물론,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수학, 과학, 사회에 이르기까지 한자를 통해 학력 신장의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실천적인 주장들 또한 합당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최근 들어서는 취업시장에 동북아 한자 문화권의‘한류(漢流)’바람이 몰아치면서 국내 대기업들의 한자에 대한 기대 반영으로 인해, 인력 채용시에 한자 활용 능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뉴스에서는 취업 시장에서 한자 시험이 큰 인기를 끌면서 해마다 한자 시험 응시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참고하더라도, 한자를 모른다고 해서 당장 우리의 실생활이 불편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남들에 비해 한자를 모른다고 해서 밥을 굶는 것도 아니고, 신문을 읽을 수 없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 대화할 때 수준이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대한민국에서 살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자를 등한시하는 교육체계 밑에서 교육을 받아 왔거나, 입시 위주의 학교 교육을 통해 한자를 무시하는 타성에 일찍부터 길들여져 왔기가 십상이다.
그렇더라도 한자는 분명 우리가 읽고 말하고 이해하는 국어의 근본이요, 모태임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것 또한 사실이다.
가장 기초적인 한자를 모르는 점으로 인해 국어 맞춤법 하나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면서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 그도 아니면 또 다른 낯선 외국어 실력을 앞세우면서 남들 앞에 자랑을 늘어놓는 부류는 우리를 얼마나 당황스럽게 만드는가?
근남면 굴구지에서 3남1녀의 맏아들로 태어나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로부터 한자를 익힌 이래 86세인 지금까지 쉼 없이 한문을 익히면서 한시(漢詩)를 짓고, 남에게 한자와 한시의 효용을 알리는데 여념이 없는 임무승(林武承. 86세. 울진 읍내리)씨가 태어난 곳은 근남면 구산3리 일명 굴구지 마을이다.
집 오른쪽 편에 서 있는 수령 수백년의 소나무는 한학자 임무승씨의 이미지와 많이 닮아 있다
“근남면 구산3리, 다들 굴구지라고 부르는 산촌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선' 자 '우'자를 썼고, 어머니는 '전'씨 성에 '금'자 '옥'자를 사용했지요. 3남 1녀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래로 창승(81세), 경승(78세)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둘 있는데 둘 다 울진 읍내에 살고 있고요. 여동생 정옥(75세)이는 현재 속초시에 살고 있어요.”
굴구지 산촌에서 거주하는 만큼 어린 시절의 살림살이는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다고 임무승씨는 기억한다.
“촌에서 뭐 할게 있겠어요? 그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았지. 가난하기는 했어도 우리 집은 울진 임씨의 차종(次宗) 종갓집입니다.
울진 임씨의 큰 종갓집인 대종(大宗) 종갓집은 지금 서울에 있지요. 울진 임씨(蔚珍 林氏)의 입향조가 울진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은 지는 한 8백년 정도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예전에는 울진을 비롯해서 울릉도, 삼척 원덕면 호산리, 영양 수비면, 봉화 소천면 등을 다 합쳐서 울진군이었는데, 울진 임씨는 울릉군(蔚陵君) 임우(林祐)를 시조로 하고 있어요. 그는 본래 평택 임씨(平澤 林氏)로서 고려시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중부상서(中部尙書)를 지냈는데, 울릉군(蔚陵君)이라는 관직을 하사받고 울진 지방에 내려와서 울진 임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합니다.”
임씨의 조상 가운데 임제(林悌)는 고려가 망하고 난후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원주(原州)로 유폐시켰다가 옛 신하들의 복위 모의에 따라 간성(杆城)으로 보내고 다시 삼척군(三陟郡) 근덕면(近德面) 궁촌리(宮村里) 고돌치(高突峙)에 유폐시킨 이후에 최복하(崔卜河), 전생(田生), 장천영(張天永) 등이 공모하여 공양왕을 복벽(復?)시키려고 의거를 일으킬 당시에 그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다.
“고려가 망하고 이씨 조선이 들어서고 난 다음에 울진에서 고려 복벽 운동이 일어나잖아요? 울진 임씨의 선조인 임제 어른이 그 당시에 최복하, 전씨 등과 함께 공양왕 복벽 운동을 주도했던 분입니다. 고려 복벽 운동은 사전에 발각당해서 실패로 돌아갔고, 그 후에 울진은 이씨 조선에서 반역 지역으로 낙인찍히게 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울진군은 현(縣)으로 강등 당했고, 원래 울진군에 속해 있던 원덕면 호산리는 삼척군에, 봉화군 소천면은 봉화군에, 영양군 수비면은 영양군으로 편입된 거지요. 당연히 반역 지역으로 찍힌 울진군은 그 당시에 각종 군대 조직도 전혀 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울진 임씨의 시조인 임우 할아버지의 관직명인 울릉군(蔚陵君)이 없어진 건 물론이고요.”
일평생 한학자로 살아온 임씨는 울진 지역의 고대(古代) 성씨(姓氏)는 당초에 울진 임(林)씨, 울진 장(張)씨, 울진 방(方)씨였다고 말한다.
“울진의 고대 성씨는 원래 임씨, 장씨, 방씨입니다. 전(田)씨 주(朱)씨, 남(南)씨 성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울진 지역의 대표 성씨로 부각된 것이지요. 특히 울진 방씨는 지금 울진군에 단 한명도 없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어요.
수십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울진경찰서에서 경찰로 근무하던 울진 방씨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무슨 일로 중간에 경찰을 관두고 울진 읍내를 돌면서 엿장수를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죽었고, 그의 아들은 한국을 떠나서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풍문으로 전해 들었어요. 그 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고 난 다음에는 울진에 울진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된 거지요. 그러나 또 모르지요. 제가 미처 알지 못하는 울진 방씨 성을 가진 사람이 어디 살고 있을지도... 조선조 초기에 고려 복벽운동을 해서 반역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짓눌려 살았던 울진 임씨는 조선 숙종 대에 와서 비로소 모든 권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고려 복벽운동을 함께 주도했던 최씨는 복권 이후에 북면 소야(소곡리)에 터를 잡고 살다가 다시 북면 덕천리 마분동으로 나와서 살게 되고요.”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익혀
임무승씨는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께 한자를 배워 익혔다.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께 하늘천 따지 하면서 천자문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집안에는 증조할아버지부터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계셨는데 다들 글을 잘 하셨지요. 증조부님은 '정'자에 '하'자를 사용했고, 할아버지는 '우'자에 '현'자를 사용했어요. 증조할아버지는 제가 17살 때 86세로 돌아가셨어요. 할아버지는 제가 마흔쯤 되었을 때 89세로 세상을 떠나셨고요.”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께 한자를 배워 익히기 시작한 임무승씨는 나이 8살 때 통감 8권을 읽었다고 말해준다.
“8살 때 통감 8권을 읽었어요. 통감은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8살 때 통감 8권을 읽으니까 증조할아버지께서 '이제는 혼자서도 읽을 수 있으니까 그만 읽어라'고 하시더군요.”
임씨는 어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우면서 할아버지나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했었다고 기억한다.
“굴구지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우리 집에 모여서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아버지로부터 한자를 배웠습니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그저 글을 하시니까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한자를 가르친 것인데, 아버지 때부터는 동네에서 서당을 하셨지요. 동네 다른 아이들 수십명과 함께 한자를 배우니까 자연스레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보고도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밖에요.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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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아버지를 선생님으로 부르면서 한자를 익혀온 임씨는 아버지께 나만큼 많이 맞은 자식도 없을 거라면서 웃는다.
“아버지한테 저만큼 많이 맞으면서 글을 배운 사람도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겁니다. 물론 자식 잘 되라고 그렇게 혹독하게 매를 때리면서 글을 가르친 거겠지만... 하긴 어쩌면 저도 아버지께 맞을 짓을 골라서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8살 무렵부터 한문을 익히다가 '도(道)’나 '덕(德)’을 배우게 되면, '도’는 길이라고 하는데 손바닥만 합니까? 앞마당만 합니까? 거랑(개울가)만 합니까? 울진 읍내만 합니까? 하면서 아버지께 물어보기가 일쑤였습니다. 또 '덕’이 나오면 '덕’은 제 주먹만 합니까? 제 머리만 합니까? 집 앞의 짚가리만 합니까? 난두산만 합니까? 하고 물었지요. 그 뿐이겠습니까? 사람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리를 말하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배우면서는 ‘인’은 몇 발이나 됩니까? 한발이나 됩니까? 두발이나 됩니까? 하면서 따져 묻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런 질문은 공자님이 현세에 나타나도 선뜻 대답해주기 힘든 질문 아닙니까? 사실 아버지께 글을 배우면서 8살 무렵부터 이미 선생님인 아버지를 깔보기 시작한 거지요. 그러니 아버지께서 가만 계셨겠습니까? 회초리를 들고 그렇게 엉뚱한 질문을 하는 저를 때리고는 하셨지요. 제가 그런 엉뚱한 질문을 한 잘못으로 아버지께 회초리를 맞을 때면 증조할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배우는 학생이 묻는데 대답은 못해주면서 학생에게 회초리를 때린다’고 난리였고... 그렇게 한학을 배웠습니다.”
‘서면 굴구지’를 ‘근남면 굴구지’로 바꾼 고조할아버지
임씨는 애초 행정구역상 서면에 속해있던 굴구지가 근남면으로 넘어오게 된 사연을 고조부의 일화와 곁들여서 얘기해준다.
“원래 근남면 굴구지는 서면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고조부인 '시'자 '봉'자 어른께서 스무살 때 서면에 속해서 살기가 싫다고 울진군청으로 쫓아가서 따지고 하면서 근남면으로 넘어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반 강제로 서면 굴구지를 근남면 굴구지로 떼어다 붙인 거지요. 행정구역상 굴구지가 서면에 속해 있었을 때는 `구곡동'으로 불렸는데, 근남면으로 넘어오면서 '구고동'으로 바뀌게 됩니다. 서면 굴구지가 근남면 굴구지가 된 것과 관련해서는 현 전인식 울진문화원장과도 얽혀 있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전인식 원장이 전에 울진군의원을 할 때 문화원 사무국장을 함께 겸하고 있었는데, 그때 제가 서면 굴구지가 근남면 굴구지로 바뀌게 된 얘기를 했더니, `그런 근거 없는 얘기나 하니까 신용이 없다고 하는 거 아니냐'면서 대놓고 면박을 주더군요. 그때 전인식 문화원장과 대판 했습니다. 서로 언성을 높여 싸우면서 울진군에 가서 확인을 해보면 그 사정을 알 수 있을 거라고 제가 말했지요. 그 후에 앞뒤 사정을 확실하게 알게 된 전인식 당시 군의원 겸 문화원 사무국장이 저에게 미처 몰라서 경솔하게 얘기했는데 정말 미안하게 되었다고 사과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가 다시 웃게 되었어요.”
‘근남심상소학교’ 졸업 후 일제에 의해 강제 징병
5살 때부터 증조할아버지로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한 임씨는 열대여섯 살 되던 해에 '근남심상소학교(近南尋常小學校)'가 개교하면서 근남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하게 된다. 심상소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현재의 초등교육을 담당하던 학교이다.
“집에서 한문 공부를 하다 보니까 근남심상소학교가 생겼어요. 나이도 있고 해서 4학년에 곧바로 입학했지요. 학교 수업 가운데 습자 시간이면 제일로 신이 났습니다. 습자 시간에 제가 글만 쓰면 대충 쓴 글이라도 다른 아이들 것을 제치고 벽보판에 제 글씨가 붙고는 했거든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우면서 당연히 글씨 쓰는 연습도 함께 해 왔으니, 교장선생님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선생님들 글씨보다 제 글씨가 나았던 거지요. 붓글씨라는 것이 어디 하루아침에 되는 겁니까? 어느 날 갑자기 시작해서 아무리 열심히 써 본들 절대 짧은 시일 안에 되지 않는 것이 붓글씨거든요.”
열대여섯 살 늦은 나이에 근남심상소학교 4학년에 입학해서 3년을 다닌 뒤 졸업한 임씨는 일제에 강제로 징병되어 군대에 끌려가게 된다.
“호적이 1년 늦게 되는 바람에 강제로 군대에 징병되어 끌려가게 되었어요. 일제 강제 징병 1기로 일본 군대에 가게 된 거지요. 울진경찰서에서 징병 대상자로 연락이 와서 일단 동네 징병 대상자들 전부가 근남면에 모여 울진까지 와서 경찰서에서 제공하는 차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다음에 서울 용산으로 가서 경찰이 군으로 인계하고, 이북 함경북도 나남(청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부대에 배속되었습니다.
근남심상소학교를 마쳤을 당시에 이미 각 마을별로 청년들을 모아서 요즘의 예비군훈련 비슷한 군사훈련을 시켜왔기 때문에 군에 입대했다고 해서 특별한 훈련을 따로 받을 일도 없었지요. 나남에 주둔해 있던 군부대에 몇 달 동안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 본토로 건너가서 나고야에서 200리 종점이 위치한 혼슈 지방에 있는 '기후현'의 기후초등학교 한반을 비우고 우리 부대가 주둔하게 되었어요. 제가 소속되어 있던 군부대는 `농경대(農耕隊)'였습니다. 말 그대로 농사를 담당하는 군부대였지요. 우리 부대는 그곳 '기후현'에서 산지 75만평을 개간해서 전부 고구마를 심어서 가꾸었습니다. 말이 75만평이지, 산지를 개간해서 75만평 밭을 일구어 놓으니까 그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했어요. 당시 일본은 고구마를 키운 다음에 그 고구마에서 기름을 짜서 비행기 연료 등으로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으로 강제 징용을 끌려가서 군 생활을 하던 임무승씨는 1945년 8월 일제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이후인 9월 15일 제대해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난 다음인 9월 15일 군대를 제대하고 일본에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건너왔습니다. 부산에서 하룻밤, 포항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울진 집으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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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남매 집안의 맏딸과 결혼 전정희씨 사이에 3남3녀 두어
임씨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병되어 가기 전인 20살에 전정희(84세)씨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처고모부 되는 윤두규씨라는 분이 매화리 큰마(윤촌)에 살았는데 그분 역시 한학을 하던 분이어서 평소에 우리 아버지와 친분이 아주 두터웠어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혼담이 오갔고, 북면 신화리 화동마을에 살던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하게 됐지요.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11남매를 두었는데 제가 그 집안의 맏딸과 결혼한 것입니다. 제가 장가를 들고 난 다음에도 장모님께서 아래로 자식을 3명이나 더 보셨지요. 장인어른까지 3대 독자로 내려오다가 장인어른 대에 와서 다행히 자식을 많이 두게 된 겁니다. 제가 산골에서 태어나서 그렇지, 장인어른이 '전'씨 성에 '성'자 '배'자를 쓰시는데 전씨 집안의 제일 맏종손입니다. 만은공파의 종손이지요. 제가 20살 때고 아내가 18살 때 결혼했는데 일제 시대였던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 여자들이 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하니까 조혼을 시킨 것이기도 하고, 그때만 해도 여자 나이 19살만 넘어도 많다고 할 때였어요.”
20살에 결혼한 임씨는 부인 전정희씨와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임임(64. 대구시), 임삼(58. 경주시. 학교 서무과장), 임경(54세. 경주시 교육청 장학사)씨 형제와 임연(61. 부산시), 임남(50. 부산시), 임순(46. 북면 부구리)씨 자매가 그들이다.
“결혼할 때 구산3리 굴구지에서 북면 신화리 화동까지 70리 길을 보교를 타고 앞서고, 뒤에는 아버지가 역시 보교를 타고 뒤따르고 그렇게 처가를 갔어요. 보교꾼들도 힘이 들어 70리 길을 계속 보교를 타고 갈수는 없으니까 마을을 지날 때는 보교를 타고 가다가, 외진 길에서는 보교에서 내려 걸어가고 그랬지요.
결혼식을 올리고 첫날과 이튿날은 처가에서 자고, 3일째 되는 날은 다른 집에서 자고, 4일째는 다시 처가에서 자고 5일째 되는 날에 보교를 타고 다시 굴구지 집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5일 퇴상이라고 해서 그때는 결혼할 때 다들 그런 복잡한 절차를 지켰어요. 그렇게 혼자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해가 바뀌고 나면 결혼한 신부가 시집으로 들어왔습니다. 18살 시월달에 결혼식을 올린 아내가 그 다음해 동짓달에 시댁으로 들어 왔으니까요. 그 당시에도 아주 없이 사는 사람은 격식을 미처 차릴 것도 없이 결혼하고 5일째 되는 날에 신부를 데리고 곧장 시댁으로 들어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일년이 지난 다음에 신부를 본가로 데리고 들어왔지요. 결혼식을 올리고 일년이 지나서 아내가 시댁으로 들어올 때도 가마를 타고 신화리 화동에서 굴구지까지 왔어요. 시댁까지 70리 먼 길이다보니 가마꾼 4명이 조를 나누어 2명씩 번갈아 메면서 굴구지까지 왔습니다. 이른 새벽에 친정집을 출발한 신부가 굴구지 시댁에 도착했을 때는 깜깜한 한밤중이었어요. 결혼하고 미처 신혼생활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다음해 겨울에 저는 일제 징병으로 군에 끌려갔습니다.”
당시 군수의 편지글 시험 통과하며 22살부터 공무원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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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고 울진 집으로 돌아오고 얼마 뒤부터 이곳저곳 각 마을별로 좌익이 살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나이는 젊지, 가만히 돌아가는 판세를 보아하니 몸뚱이 하나 성하게 부지하기가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마음을 다잡아먹고 당시 울진군수를 찾아갔어요. 그때 이태영이라는 군수는 고향이 북면 부구리였습니다. 울진 군수를 두번이나 역임했던 분이지요. 공일날 식전을 택해서 군수 관사를 찾아갔어요. 그때만 해도 군수 관사는 일반 가정집과는 달리 규모가 아주 크고 웅장했는데, 누구냐고 묻기에 굴구지 마을 사는 임무승이라고 했지요. 들어오라고 하더군요. 군수에게 찾아온 이유를 얘기했습니다.
'지금 울진 곳곳에서 좌익이 살살 일고 있는데, 젊다 보니까 아무래도 목숨 부지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군수님을 찾아왔다. 군수님 곁에서 담배 심부름이라도 하면서 몸뚱이라도 보전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이태영 군수가 공부는 얼마나 했냐고 묻더군요. 소학교를 3년 다녔다고 말하고, 집에서 어릴 때부터 한학을 배웠다고 했지요.
군수는 한문과 글씨에 아주 조예가 깊은 분이었는데, 현재 망양정에 걸려있는 망양정 현판이 당시 이태영 군수가 직접 쓴 것입니다. 딱 하나 남아 있는 것이지요. 어쨌든 글씨를 좀 쓸 줄 아느냐면서 친구에게 편지를 쓸 일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대신 써 달라고 하더군요. 일종의 자격시험이 시작된 거지요.”
그 당시 임무승씨가 군수 대신 쓴 편지는 이태영 군수가 친구인 당시 울진경찰서 김진구 서장에게 보내는 일종의 안부 편지였다.
“이태영 군수나 김진구 경찰서장이나 둘 다 북면 부구 3리 출신입니다. 서로 친구사이고요. 이건 좀 다른 얘기인데 부구 3리는 산세가 좋아서 큰 인물이 나기도 하지만, 부구 1, 2리는 산세가 나빠서 큰 인물이 나지 않아요. 어쨌든 이태영군수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해서 종이를 앞에 두고 붓을 들어서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때 붓통에는 큰붓, 중간붓, 작은붓 이렇게 세 개의 붓이 있었는데, 적당한 중간 붓을 골랐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대신 써 달라고 한 군수는 먹은 자신이 직접 갈겠다고 하면서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하더군요. 잠시 생각을 하다가 편지 서두를 썼습니다. '유안규춘(柳眼窺春)하고 도시농일(桃?弄日)이라'고 썼어요. ‘버드나무 눈은 봄을 엿보고, 복숭아나무는 뺨을 희롱하는구나’ 뭐 그런 뜻이지요. 이렇게 편지글 서두를 썼더니 이태영군수가 깜짝 놀라면서 '자네가 서두를 아는가?'하고 묻더군요. 그리고 편지글을 다 쓰고 난 다음에는 끝에 이태영군수 이름을 정자로 썼더니, 왜 편지글은 초서로 쓰면서 자신의 이름은 정자로 쓰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래서 군수님과 경찰서장님이 친구간이라기에 편지글은 친근하게 초서체를 썼지만, 어른들 말씀이 부모님께서 지어준 이름만은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정자로 써야 한다고 배웠기에 그렇게 했다고 대답했지요. 물론 글씨도 힘이 있게 썼어요. 옛 선인들이 말하기를 붓글씨 한획 긋는 것은 황소 열 마리가 당기는 힘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군수의 편지글을 대신 써 주고는 아침밥까지 얻어먹고 관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데, 뒤에서 군수님이 내일 아침 8시30분에 울진군청으로 들어와서 인사행정 참사를 찾아서 만나 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튿날 울진군 인사행정 참사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서무계 차석자리를 내 주었어요. 요즘이야 모두 어려운 경쟁을 뚫고 시험을 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군청에 근무하는 공무원 채용은 군수 마음대로 할 수가 있을 때였습니다. 누구든지 군수가 추천하면 당장 공무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이 당시의 관행이었지요.
어쨌거나 군수 앞에서 글씨를 잘 쓴 바람에 저는 22살 되던 해에 울진군청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사회계장, 지방세계장, 산업행정계장, 양정계장을 거친 후에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되기 전인 1960년 초반에 강원 고 성군으로 전출을 나가서 사회계장과 지방세 계장을 거치는 등 2년 2개월을 고성군에서 보내고, 다시 울진으로 되돌아왔어요. 울진군에서 또 행정계장, 산업행정계장, 보건소장 직무대리, 양정계장, 공보실장, 산업과장 직무서리를 거친 후에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공무원을 관두고 나왔습니다.”
한학(漢學)은 무엇보다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지어봐야
울진군 공무원 생활을 접은 임씨는 그 후 축산업협동조합 울진군 조합장을 역임하는 한편 각종 사회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축협 울진군 조합장으로 82년 선출된 이후에 8년 정도 근무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에 유도회 울진군 지부장, 경상북도 유도회 본부 부회장, 성균관 전의, 유도회 총본부 상임위원, 충효예 실천 운동 본부 고문, 경상북도 유림 한시협의회 회장, 울진성류한시회장을 맡고 있지요.”
임무승씨의 한자와 한시에 대한 애정은 지극하고도 각별하다.
“지난 2006년부터 울진문화원의 도움을 얻어 한시 강좌를 개설했습니다. 처음에는 수강생이 십여명 남짓 됐는데 어느 순간부터 수강생이 점점 줄더니 결국 폐강됐습니다. 울진에서는 한문을 조금 가르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평해로 한시 강좌를 옮겨서 개설했는데, 지금도 평해 향교에서 지도하는 한시 강좌에는 열두어명의 수강생들이 열심히 한시 작법 등의 강의를 듣고 있어요. 평해 수강생들은 정말 알뜰히 배우려고 합니다.
현재 평해 향교에서 한시를 강의하고 있는데, 원래 향교 공간은 아무에게나 빌려주는 게 아니지만 한시 강좌를 위해 향교를 빌려 쓰고 있으니 공자님인들 이해하시겠지요. 울진과 평해를 비교하는 것 같아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끝내 울진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평해는 잘 되는데 울진은 왜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어느 순간에 `울진은 돈이 필요하지, 글이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들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있지, 학문을 익히는 데는 게으르고 소홀하다는 얘기지요. 울진에서와는 달리 평해 향교에서의 한시 강좌가 잘 운영되고 있으니, 내년 평해단오제에서는 한시대회를 열어 보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천생 한학자일수밖에 없어 보이는 임무승씨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한두 마디만 물어보면 당장 그 사람의 한학 수준과 실력을 알아볼 수가 있다고 한다.
“한문은 고저가 있어요. 실제 우리들이 널리 사용하고 있는 인명과 지명의 90%는 한문이잖아요? 누구를 만나서 잠깐 얘기만 나눠보면 한문을 아는지 모르는지 당장 알 수 있지요. 한두 마디 끝에 저 사람이 한학을 모른다 싶으면 곧장 무시해 버립니다. 물론 그 무시는 제 시각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는 거지만요. 한학은 대학 아니라 대학 할애비를 나와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기회가 주어지면 공짜로라도 학생들을 포함해서 한학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 싶어요.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임씨는 국내에서는 한자 1800자를 기본으로 잡고 있지만, 일본만 하더라도 3000자를 기본으로 친다고 전해준다.
“국내에서는 1800자 한자를 익히기에도 바쁜데, 일본은 3000자를 배웁니다. 사실 한문은 3000자를 완전히 익혀도 부족합니다. 그런 데 1800자를 안다고 해서 뭐 하겠어요?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어디 한문 1800자인들 다 읽고 쓸 수 있어요? 1800자라도 온전히 알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어쩌면 울진 지역의 마지막 한학자인 임무승씨는 한문 잘하는 비법은 우선 재주를 타고 나야 하고, 그 다음은 고서를 많이 읽고 꾸준하게 글을 지어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문 잘하는 비법요? 첫째 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한문은 타고난 재주로 글 읽는 송재니 글 짓는 서재니 여러 가지로 분류합니다. 한문을 깊이 있게 익히려면 우선은 고서를 많이 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해하면서 봐야지요. 그 다음에는 글을 외우면서 동시에 글을 자꾸 지어보아야 하지요. 한학은 한자를 이용해서 글을 지어보지 않으면 아무리 공부하더라도 절대 실력이 늘지 않습니다. 한학은 무엇보다 글을 많이 읽고 많이 지어봐야 됩니다. 그래야 차츰차츰 글이 늘어가는 거지요.”
한학은 무조건 많이 읽고 한자를 사용해서 글을 많이 지어봐야 실력이 쌓인다고 거듭 강조하는 임씨는 글을 배울 때는 타박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글을 배울 때는 타박을 많이 받아야 해요. 예전에 어른들이 공부를 시키면서 회초리 치는 것은 일리가 있지요. 어디 미워서 회초리를 치겠어요? 지금이라도 한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을 직접 가르치면 늦어도 일년 안에는 한자를 읽고 글까지 짓게 해줄 수 있어요. 한학은 글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짓는 방법을 함께 병행해야 합니다. 한자를 무조건 달달 외운다고 한들 얼마나 오래 기억에 남아 있겠어요? 그렇게 힘들게 외워봤자 돌아서면 금세 잊어버리고 말지요.”
빨갱이들 총에 맞아 돌아가신 숙부님과 아버지
임씨의 부친은 6.25 전쟁이 발발하기 2~3년 전에 지역에 출몰하던 빨갱이들 총에 맞아서 결국 수년 뒤에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세상을 작별하고 만다.
“아버지는 61세 되던 해에 환갑도 못 보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수년전부터 울진 지역에서는 곳곳에 빨갱이가 천지였어요. 구산 3리에 살 때 빨갱이들 총에 맞았는데 당시에 총알이 아버지의 폐를 관통했고, 지금 이 집에서 몇 년 모시고 살다가 결국 폐를 관통한 총알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으시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과다한 출혈 등이 원인이었어요. 할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인 제 아버지를 먼저 앞세우고 난 다음인 4년 뒤에 돌아가셨지요. 6.25 전쟁이 발발하기 2~3년 전에 동네 주민들 대부분이 빨갱이였는데, 어느 날 아버지와 숙부님을 끌고 동네 어귀로 가서 빨갱이들이 칼빈총으로 두 형제를 묶어세우고는 총을 갈긴 겁니다. 그때 숙부님은 심장을 관통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아버지는 폐를 관통해서 겨우 목숨만은 건진 것입니다. 당시에 저는 울진군청 공무원으로 군청 안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다음날에 그렇게 참담한 소식을 듣게 되었지요. 그 사건을 겪은 날이 또 공교롭게도 음력으로 6월 25일이었습니다.”
임씨는 6.25전쟁이 끝나고 아군이 울진 지역으로 들어와서 주둔할 때만 하더라도 근남면 구산3리 굴구지 마을 96호 가운데 94호가 빨갱이 사상에 물든 집이었다고 말한다.
“전쟁이 끝나고 아군이 울진에 들어왔을 때도 굴구지 96호 중에 94호가 빨갱이였습니다. 우리 집과 숙부님댁 빼고는 전부 빨갱이였던 셈이지요. 6.25 전쟁 전에 빨갱이들에게 아버지와 숙부님이 총에 맞아 당한 생각을 하면 당장 빨갱이들을 국군들에게 발고하여 복수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끝까지 참았습니다. 발고하여 빨갱이들이 당하는 꼴을 보면 당장 속이야 후련했겠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부르기만 할 뿐이라는 사실을 안거지요. 아마 그 당시에 빨갱이들을 발고했더라면 굴구지 마을에서 열대여섯명은 목숨을 잃어야 했을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더라도 그때 잘 참아낸 것 같아요. 그때 발고했더라면 두고두고 그 집안이나 자식들에게 제가 원수라면서 욕먹고 손가락질 받았을 거 아닙니까? 자기들 잘못은 생각지도 못했을 테고. 세상은 그렇게 용서하며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김삿갓이 오더라도 강냉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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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 사이에 한시 댓구로 얽힌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공보실장을 할 때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르니까 때마침 아이들이 마당에서 강냉이를 까고 있었어요.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도중에 한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한시 한 구절을 지어놓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퇴근해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댓구를 맞춰달라고 하고는 다시 군청으로 들어갔어요. 퇴근해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그 댓구를 맞추지 못하고 계셨고, 끝내 댓구를 맞추지 못하고 두분 다 돌아가셨지요. 그때 제가 지었던 한시 한 구절이 ‘백수청랑(白首靑囊)에 장옥치(藏玉齒)라'는 거였어요. 옥수수를 보고 '흰 머리에 푸른 주머니에 옹니를 감춰 놨다'고 한 거지요. 끝까지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댓구를 못 맞추시기에 제가 댓구를 맞추었어요. '황비환실(黃?丸室)에 작소방(作巢房)이라'. '누런 비에 둥근 집에 소반을 지어 놨다'고 한 겁니다. 강냉이에 대한 댓구를 해 바라기로 맞춘 거지요. 앞뒤 댓구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그 한시를 보여 드리고 아버지께 생전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어요.‘김삿갓이 오더라도 강냉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 것’이라면서요. 저는 그때 지은 한시 제목을 '옥촉서(玉蜀黍-옥수수)'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5살부터 증조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운 이래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 두루 거치면서 한학을 배워 익힌 임무승씨는 비문(碑文)만 하더라도 수십개가 넘게 지었다.
울진 임씨 집안에서 세우는 각종 비문을 비롯해서 최근에는 울진문화원사 기공식 축문에 이어 상량문을 손수 지었고, 문화원사 준공식 축문까지 준비하고 있다.
한평생 한학을 벗해 살아오면서 틈틈이 지은 한시만 하더라도 수백수가 넘는다는 임씨는, 올 겨울에 눈이라도 내려 바깥출입이 뜸해지면 지금까지 지은 한시를 이것저것 추려서 책 한권을 묶을 계획이라고 전한다.
수년전만 하더라도 자신이 지은 시는 전부 다 외우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 간다는 울진 지역에서 단연 독보적인 한학자인 임무승씨.
임씨는 예로부터 울진을 일러 문향의 고장이라고 했는데, 이젠 한학을 하는 분들이 다들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혼자 남아 한시라고 짓고 있으니 그저 죄송하기가 짝이 없다고 말한다. 그가 항상 건강하기를 기원하며, 한시 창작 활동 또한 보다 활발해질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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