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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쟁도 없이 친선을 잃다

  • 페인트 최
  • 입력 2008.08.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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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이 해외여행을 갔다 온 기념으로 타원형의 동글동글한 미용비누 한 세트를 선물로 주었다.
그래서 향기도 아주 좋고 모양도 예쁜 하얀색의 그 비누를 쓰는데, 쓰다보면 매번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지곤 한다.

 

아무리 ‘이번에는 떨어뜨리지 않고 써야지’ 조심을 해도 타원형의 동글한 그 비누는 살아있는 미꾸라지처럼 미끌미끌 손에서 빠져나가곤 한다.
어느 한 군데 모가 나지 않았음이, 너무 순하고 아름다운 매끄러움이, 손쉽게 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무엇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내가 무던히도 소원했던 전원으로의 길이 차단되었으며, 그렇다고 주저앉기는 죽기보다 싫었건만.
어딘가로 움직일 힘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슬픈 얼굴로 한달.
나는 오후 다섯시에 출근해서 오전 다섯시에 퇴근하는 식당에서 일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오전에 시화 지점 지에스 마켓 문화센터에서 유화반을 맡았기 때문에 주간일 보다는 야간 일을 찾았고, 나는 내 머릿속에서 파생되는 복잡하고 별로 근사하지 못한 생각들을 잠재우는 방법으로 나의 심신을 심하게 학대하고 싶기도 했다. 

 

밤을 새우며 일하는 그 한달 동안 한번도 졸리거나 피곤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을 곧잘 적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나보다 먼저 식당에 자리를 잡은 여자들의 텃세(?)인 사람을 갈굼?  그런, 이때까지 내가 못 본 색다른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내 친구, 내 아이들, 내 친척들께도 다 하지 못한 나의 신상 내지는 환경 조사를 하고 싶어 매일매일 안달이었으며, 그들의 마음에 드는 비밀스럽고 불행한 이야기를 어서 풀어놓으라는 듯 맹렬하게 묻고 또 물어왔다. 

 

그러나 벙어리처럼 대답이 없음을 탓할 시간도 없이, 활발하게 자기들 삶의 보따리를 풀어놓기 바쁠 때도 많았다.
듣다보면 나는 참 엄살쟁이에 어리석고 패배의식에 잠식당한 게으름뱅이... 딱 그런 기분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평생 건강을 잃고 병원에서 지내는 남편 대신 아이들 학비와 생활비를 번다는 명순씨.
실직한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서 등산이나 가라고 등을 떼밀고 나온다는 정수언니. 

 

그들은 그냥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가 억세어져 버린, 다소 인생이 비단 바닥 같지 않을지라도 진솔한 언행으로 세파를 헤치고 가는 사람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그들의 목소리로 힘을 얻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충만하지 않고 조금은 갈라 터져도 그들은 크게 웃는다. 

 

내 마음과는 달리 점점 힘들어지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그 식당을 그만두었지만, 우리 여자 셋은 일주일에 한번씩 산에도 가고 점심도 먹고 산책도 한다.
결속력 있는 친선이 자랑스러워지고 있다.
어림짐작만으로 내 빈곤을 나보다 더 공포스럽게 느끼고 있는 매끄럽고 아름다운 비누 같은 친구들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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