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업사는 전통의약인 한약에서 한의사에 대비해 한약방을 경영하는 한약 전문인을 일컫는 말이다.
한약업사는 1913년 일제의「의생규칙」과「한약종상 규칙 제정」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의약이 명쾌하게 구분되지 않은 채로 관의(官醫)의 기능을 일부 보완하는 민간 의료의 한 축을 담당했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위가 단순한 상인으로 격하되어 한약종상(漢藥種商)으로 불리던 이들은 1971년부터 한약업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한약업사의 약사법상의 역할은 표준 한의약서 처방의 범위 안에서 여러 가지 한약재를 혼합하여 일반인들에게 소매하는 것이다.
한약도매상 제도가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던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한약업사들은 ‘건재 한약상’ 형태를 유지하면서 도매와 소매를 병행했었다.
의료시설이 태부족이던 시절, 한약업사들은 한약방 등을 통해 갖가지 한약재를 유통시킴으로써 주민들의 건강 증진과 전통 한방의료 전승에 일익을 담당해왔다.
한약업사들은 의약이 발달하지 못했던 지난 시절에 일부 대도시의 대규모 약령시를 중심으로 국내·외의 각종 한약재를 대량으로 매집하고 보급시켜 국민들의 보건과 경제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한약 유통이라는 고유의 업무와 관련이 있는 기능, 지식, 행위양식 등을 전승시키는 일 이외에도, 대를 거쳐 가업을 잇거나 도제방식(徒弟方式)의 인간관계를 형성해 가면서 한약 지식과 기능을 학습시키고 전수하는 독특한 전승양식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한의학 또한 일제의 치밀하고 끈질긴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주변부로 쫓겨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밀려난 한의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에도 양의학을 앞세우는 의료 정책에 따라 지속적인 계승과 발전을 위한 기반을 갖추고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와 함께 수백, 수천년 전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던 한의학의 전통 의약 지식과 기능의 전승과 생산, 유통을 포함하는 모든 것들이 맥을 이어가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한약 부문의 생산적인 활동은 양약과 양의, 한의 등 각종 의료 관련 단체의 이기적인 틈바구니에서 1983년 이후 한약업사 시험이 전격적으로 중단되면서 계승 인력 또한 완전히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현재 울진 지역에서 활동 중인 한약업사는 물론, 국내 대부분의 한약업사들은 고령의 나이다.
1983년 한약업사 시험이 중단되면서 더 이상 이를 계승할 인력 충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 활동 중인 한약업사들이 모두 고인이 되고 나면, 한약 생활문화의 맥 또한 끊기고 말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전통의약의 맥을 이어온 한약업사의 의료 민속, 생활 문화 등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의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학술 차원에서의 접근이 절실한 실정이다.
대한한약협회는 1983년 한약업사 시험이 마지막으로 실시된 후에 시험이 전면 중단된 상태에서 더 이상 한약업사의 충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해서, 정부 관계 부처에 한약업사 시험의 재시행을 지속적으로 건의하고 있는 중이다.
또한 한약업사들은 11개 기성한약서(방약합편, 동의보감, 향약집성방, 광제비급, 제중신편, 약성가, 사상의학, 의학입문, 경악전서, 동의수세보원, 본초강목)에 수재된 수만 가지에 이르는 처방을 다루는 한약업사의 업무범위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약업사의 업무 범위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약사법에 명시되어 있는 한약업사의 권한을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약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한약업사는 후진을 배출해내지 못하고 급속한 고령화로 인해 매년 그 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현재 경북도내에는 약 170여명의 한약업사만이 현역에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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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남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나… 몸이 약해 11살에 죽변국민학교 입학
1963년 한약업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이후 지금까지 45년간 지역에서 한약업사로 활동하고 있는 주극중(朱極中. 76세. 죽변면)씨는 죽변면 후정리 매정동에서 6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죽변면 후정2리 매정이라는 동네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주자에 진(鎭)자 달(達)자를 썼고, 어머니는 노(盧)자에 계(季)자 여(女)자를 썼습니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요. 매정동이야 논밭을 부칠 땅도 빤한 거지만, 그래도 농사를 열심히 지었으니 그저 식구들 밥을 굶지 않을 만큼은 됐던 것 같아요. 위로 옥순(여. 84세. 부산시), 형중(일명 하중. 남. 생존시 82세), 복순(여. 80세. 울산시)이라는 누님 두분과 형님이 한분 있고, 아래로는 명중(남. 생존시 73세. 사망), 원중(남. 생존시 70세. 사망), 학중(남. 생존시 69세. 사망), 광중(남. 61세. 인천시)이라는 남동생이 넷 있습니다.”
주극중씨는 어릴 때 몸이 약해서 취학기를 훨씬 지나서 죽변국민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또한 덧붙여서 국민학교에 다니면서 겪었던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준다.
“어릴 때는 왜 그리도 병약했던지, 자주 몸이 아파서 11살에 죽변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하고 얼마 다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족숙(族叔)이라고 하지요. 죽변면 후정리 인근에 살던 집안어른 가운데 주진욱(朱鎭煜)이라는 분이 계셨는데, 일제 강점기이던 당시에 울진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위해 결성됐던 창유계(暢幽契) 결성에 연루되어 울진경찰서에 구속되어 있을 때였지요. 그분에게 야학을 배웠다는 혐의로 저를 포함해서 우리 마을 매정동에 살던 사람들 5명이 울진경찰서로 불려 갔어요. 11살 되던 해 3월에 국민학교에 입학했고 7월 달에 울진경찰서에 불려 갔는데, 그 당시에 울진경찰서에서 고등계 형사로 근무하던 이광호라는 형사가 주진욱이라는 사람에게 조선 글을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를 묻더군요. 그때 제가 어린 나이에도 일본글은 일본 것이고 조선 글은 조선 것인데, 조선 사람이 조선말 배우고 조선 글 익힌 것이 왜 잘못이냐고 따지듯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광호라는 형사가 11살 먹은 어린 녀석이 당돌하고 맹랑하다 싶었던지, 그런 말을 누가 너에게 가르치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때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있으면서 항상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말했지요. 그 형사야 어린 국민학교 1학년 학생이 그런 말을 한 것이 분하기야 했겠지만, 저에게 그런 의식을 심어주었던 할아버지야 이미 돌아가신 뒤였으니 조사를 닦을 수도 없었지요. 그 후부터 울진경찰서 고등계 형사는 국민학교 어린 학생을 요시찰 인물로 다루었어요. 그런데 사실 저는 주진욱 아저씨에게서 야학을 전혀 배우지도 않았습니다.”
울진농민조합의 붕괴로 사회운동이 침체 국면에 빠져 있을 때 활동한 독립운동 조직체였던 창유계(暢幽契)는 일제 강점기이던 1939년 10월에 울진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결성된 계로써, 정기 계회를 매년 3월과 9월에 개최하는 등 1942년 5월경까지 64회에 걸쳐 집회를 개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울진군지(蔚珍郡誌)』에 따르면 창유계는 자체적인 모임으로 결속을 다지던 중, 1943년 3월 중경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같은 달 19일에 계원 장세전은 지방의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중경으로 출발하려 했으나 출발 전날 역시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만다.
이것을 계기로 일제는 창유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했고, 창유계원의 검거에 나선 일본인 울진경찰서장(中富)은 일본인 고등계 형사 여러 명과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계원인 최황순(崔晃淳)의 집에 있던 사진을 근거로 수색을 시작하여 근남면 수산천 도선장에서 통행하던 청년 1명을 검문하던 중 계회 집회 통지서를 발견하고 계회에 참석하여 계원들을 검거하게 된다. 일본 경찰은 창유계 관련자 102명을 검거하여 울진연무장에 수감하고 61명을 무혐의로 석방하는 한편 41명을 입건 구속시켰다.
주극중씨가 죽변국민학교 1학년에 재학할 당시의 일이었다면서 생생하게 육성으로 전해주는 집안 족숙인 주진욱(朱鎭煜)씨는 창유계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중 옥사(獄死)하고 만다.
가정형편으로 국민학교 4학년 자퇴… 한문 독학…20살에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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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국민학교 3학년 2학기 때 해방이 됐습니다. 해방 후에도 계속 학교를 다니다가 4학년 2학기 때 점점 궁핍해져가는 가정 형편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둘 수밖에 없었지요. 형제자매를 포함해서 식구는 많았지, 그나마 먹고 살만했던 가정 형편도 다들 가난할 수밖에 없었던 길고 암울했던 일정시대를 겪으면서 많이 기울어져 간 거지요. 11살에 죽변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같은 동네에 사는 어른들을 통해서 야학을 조금 배웠었어요. 국민학교를 4학년에 관두고는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밤에는 주로 한문 공부를 했습니다. 오로지 옥편 하나 붙들고 한문 공부를 독학했어요. 그때는 주변에서 한문을 가르쳐줄만한 사람도 마땅히 없었거든요. 계속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생활했지요. 농사도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럭저럭 남의 빚 안 얻어 쓰고 자급자족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20살부터 25살 되던 무렵까지는 후정리 매정에서 죽변 4구 후리께까지 오고 가면서 농사에 쓸 거름으로 똥물을 져 날랐어요. 그때는 똥물이나 거름 말고는 따로 비료로 사용할 만한 게 없었잖아요? 비료야 한참 지난 뒤에 나왔지요. 농사를 지을 철이면 매일 새벽같이 지게를 지고 집을 출발해서 후리께를 오가면서 하루에 두 번씩 똥물을 져 날라서 밭에 거름으로 사용했는데도, 그때 새벽에 동네에서 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정도였지요. 새벽 3시면 일어나서 매정에서 후리께를 오갔으니 누가 볼 수 있었겠어요? 농사 하는 철이 되면 하루에 두 번씩 하루도 안 빠지고 지게로 똥물을 져 날랐는데, 하도 부지런히 일하다 보니까 이웃 사람들이 논밭에 주극중이라는 이름이 쓰인 팻말만 꽂아놔도 곡식이 저절로 잘 될 것이라고들 입을 모아 말하고는 했어요. 비료가 없을 때는 똥물을 져 날라서 키운 논밭이 곡식이 아주 잘 됐습니다.”
형제자매들이 하나둘 성장하여 타향 객지로 돈 벌러 떠나고 난 다음에도 주극중씨는 죽변면 후정리 매정마을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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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나이가 차다 보니까 형제자매들은 하나둘 뿔뿔이 흩어져 객지 땅으로 떠나갔습니다. 당연히 집에 남은 제가 혼자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먹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장가를 가게 되었어요. 아내는 원남면 금매 2리 몽천마을이 고향입니다. 예전에 울진산림조합장을 했던 주석은씨가 아내의 외삼촌이 되지요. 장모님의 5촌 아저씨가 저와 아내를 중매해서 맺어준 겁니다. 당시에 다들 그렇게 했듯이 가마를 타고 후정리 매정에서 원남 금매리 몽천까지 가서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때 제가 20살, 아내가 19살이었어요.”
주극중씨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계속 후정리 매정동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지요. 부모님을 모시고 죽어라고 농사를 지었어요. 그렇게 죽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아버님은 18년 전에 87세로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71세에 세상을 떠나셨지요.”
20살에 1년 연하의 남정순씨를 만나 결혼한 주극중씨는 남씨와의 사이에 재헌(남. 54세. 경기도 안양), 영화(여. 52세. 대구시), 금덕(여.50세. 대구시), 재경(남. 47세. 대구시), 재훈(남. 44세. 화성시), 미경(여. 41세. 대구시) 등 3남 3녀를 두었다.
29살에 한약업사 자격증 취득… 오준석 국회의원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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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나니까 평생 농사를 지으면서 먹고 살수는 없을 것 같고 뭔가 자격증이 필요하겠다 싶었어요. 마침 한약업사 자격증 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돼서 집에서 농사를 지어가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구까지 올라가서 한약업사 시험을 봤는데 약성학, 처방학, 약사법, 약품 감별법 등 뭐, 그런 과목의 시험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 한약업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자 이상이었는데, 저는 국민학교 4학년 학력이 전부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제가 한약업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지역의 어떤 분이 힘을 써 주어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가짜 고등학교 졸업장을 만들어서 한약업사 시험에 응시했던 거지요. 그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많이들 그랬어요. 요즘 같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요. 뭐, 지금이야 그런 것까지 쓴다고 해도 별 상관이 있겠어요? 이미 수십년이나 지난 일이고, 또 세월은 얼마나 많이 흘렀는데.”
주극중씨는 한약업사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도 십수년간은 후정리 매정동에서 아는 사람들이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한약을 조금씩 지어 주면서 그렇게 생활했다.
“한약업사 자격증을 1963년에 취득하고 나서도 1981년까지는 계속 매정동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나 한약을 지어주고 그러면서요. 그러다가 1981년도에 죽변으로 나와서 가게를 열고 본격적으로 한약방을 하기 시작한 거지요. 죽변1리 농협 뒤쪽에 위치한 가정집 한쪽에 작은방을 얻어 ‘대동한약방’이라는 상호로 가게를 열고 한약을 짓기 시작했어요. 아침저녁으로는 매정마을에 들어가서 농사를 계속 지었고, 낮에는 한약방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한약을 지어 주고요. 농사는 한 20년까지만 해도 계속 지었던 것 같네요. 그러다가 힘이 부치면서 농사짓는 일은 그만두고 한약방만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극중씨는 공화당 시절에는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지냈던 오준석씨 운동도 많이 했고, 한약방을 운영하면서도 고향 매정마을을 위해 꽤나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공화당 때는 오준석 국회의원 일을 별 조건 없이 참 많이도 도왔습니다. 오준석의원은 원래 울진읍 연지리, 지금 울진고등학교 옆에서 태어났습니다. 오종석씨라는 분이 오준석의원 집안의 맏이인데, 죽변으로 제일 먼저 들어와서 배사업과 여관업을 하면서 자리를 잡았고, 뒤에는 죽변어업협동조합장과 울진군 초대 면의원도 지냈지요. 전 죽변면번영회 오개동씨의 부친이기도 하고요. 오준석 국회의원과의 친분으로 그의 형인 오종석씨에게는 개인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변에 내려와서 대동한약방을 열고나서도 매정마을을 위해 제돈 써가면서 꽤 일을 했어요. 한번은 매정마을에 화장장이 들어온다고 해서 제돈 써가면서 반대운동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마 그때가 1982년도쯤일 겁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 몇 명이 찾아와서 비록 죽변에서 한약방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지만 매정마을이 고향이니 도와달라고 부탁을 해왔어요. 어떻게 모른 체 할 수 있겠어요? 힘 자라는 데까지 도울 수밖에요.”
한약 값은 재료의 질에 따라 천차만별… 녹용은 러시아산이 최고
한약 1제(劑)는 20첩(貼)이다. 1제는 보통 열흘치 한약을 말하는데, 한약은 대개 하루에 2첩씩 복용한다.
예전에는 한약재를 작두로 쓸고 용량대로 흰 종이에 담은 뒤에 잘 싸서 줄줄이 묶어서 판매했지만, 요즘은 대부분 아예 한약을 달인 다음에 팩에 담아서 환자들에게 전달한다.
보통 2첩당 팩 3봉지 정도의 분량이 나오는데, 1제면 팩 30봉지 정도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기에 하루에 2~3봉지 복용하면 1제는 10~15일치 분량이 되는 것이다.
주극중씨는 한약 1제는 요즘 보통 15~20만원 정도에 판매된다고 전해준다.
“보통 한약 1제는 15만원에서 20만원 정도 합니다. 그러나 녹용 등 특수 한약재가 첨가되면 30만원에서 40만원까지도 받게 되지요. 녹용만 해도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아요. 일단 녹용은 추운 지방에서 키운 러시아산이나 중국산이 제일 좋습니다. 일반인들은 녹용도 그저 국산이 최고일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로부터 녹용은 추운 지방에서 자란 것을 최고로 쳤어요. 녹용만은 국산이 오히려 러시아나 중국산보다 약효가 뒤떨어지는 거지요. 옛날에는 백두산 인근의 녹용을 으뜸으로 쳤지만,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가 없으니 러시아산이나 중국산 녹용을 사용하는 겁니다. 추운 지방에서 방목하여 키운 사슴에서 채취한 녹용의 효능이 제일 뛰어나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녹용은 산지뿐만 아니라 뿔 부위에 따라서도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녹용은 뿔 위에서부터 상대, 중대, 하대로 분류하는데 사슴뿔의 윗부분인 상대의 약효가 가장 뛰어나다고 해서 상대부분이 가장 비싸게 팔립니다. 한마디로 한약을 짓는 값은 한약사의 재량에 따라 들쭉날쭉해 질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믿고 아는 곳을 찾아서 한약을 지어야 하는 거지요. 한약은 재료도 수백, 수천가지고, 재료들마다 종류 또한 수백, 수천가지니까요.”
6.25전쟁의 상처… 스스로 시아버지를 대신해서 희생당한 형수님 고(故) 전화숙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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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극중씨의 형수인 고(故) 전화숙씨. 주씨 부인은 `울진군지'를 비롯해서 `유인효열록(儒人孝烈錄)'과 중국의 `고정자양주씨(考亭紫陽朱氏) 종보 효열록'에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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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씨는 현재 6.25전쟁 발발 무렵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형님 형중(일명 하중. 생존시 82세)씨의 부인으로써, 6.25전쟁 당시에 시아버지를 대신해서 스스로 죽음을 맞았던 형수(兄嫂) 전화숙(田華淑)씨에 대한 효열부 국가 은전 포상을 의뢰할 준비를 거의 끝마쳤다.
전화숙씨는 현 울진문화원 전인식원장의 누나이기도 하다.
전씨 부인은 군지(郡誌)에도 기록되어 있는 인물로써,『울진군지(蔚珍郡誌)』는 “전씨(田氏)의 적(籍)은 담양(潭陽)이며 효자 전병겸(田炳謙)의 딸로 신안(新安) 주형중(朱衡中)의 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님의 가르침을 받아 매사에 지각이 있고, 성품이 곧으며 지조가 있었다. 출가하여서는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남편을 잘 받드니 이웃과 마을에서 부덕(婦德)이 있다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경인(庚寅)년 남북상쟁 때에 남편이 출타하여 돌아오지 않아 그 화가 시부(媤父)에게 돌아감에 전씨(田氏)는 그 화를 자신의 몸으로 막아 죽으니 시부 공경을 다함이라 하여 국중 선비가 지은 글과 시가 있고, 경제(絅齊) 정연국(鄭然國)이 말하기를 ‘남편의 목숨은 하늘에 빌고 도적에게 항거한 맑은 몸이니 열(烈)이요, 시부(媤父) 공경을 다 하여 몸을 바쳐 죽으니 효(孝)다’하였다. 주씨 부인 유인효열록(儒人孝烈錄)이 있고 중국의 고정자양주씨(考亭紫陽朱氏) 종보 효열록에도 등재되었다. 또한 1995년 7월 31일에 성균관장으로부터 표창장을 추서 받았으며 중국 주자학회장 양청(楊靑)이 정덕비명(旌德碑銘)을 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형님은 18살 때 죽변국민학교를 졸업한 후에 대구사범학교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낙방하고 일제의 강제 징용에 끌려갔습니다. 고목리에 살았던 형수님과 결혼하고 채 1년도 안돼서 징용에 끌려간 거지요. 일본 본토에 도착하자 말자 형님은 징용 대열에서 벗어나 도주를 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 후에 일본 형사로 가장을 해서 고향 후정리 매정동에서 강제 징용에 끌려간 일가친척 5명을 빼돌려서 개인탄광으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보통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강제 징용을 끌려가면 일이 수월한 개인 탄광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운영하는 강제 노역 탄광으로 끌려갔어요. 그 당시에 형님이 일본 형사로 가장해서 노동이 수월한 개인 탄광으로 빼돌린 우리 일족은 주철조, 주진성, 주흥중, 주진석 등 5명이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형님은 먼저 일본으로 강제 징용을 갔던 삼촌을 모시고 귀국했어요.”
일제에 강제 징용을 끌려갔던 주극중씨의 형님 주형중씨는 해방 후에 귀국하여 좌익운동에 몸담게 된다.
“해방 후 고향땅으로 돌아온 형님은 좌익운동에 몸담았고, 그 일로 인해 춘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어요. 그 이후에 울진경찰서에 정보원으로 임용되었습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울진으로 밀고 내려오자, 형님은 경찰 정보원으로 일한 경력이 문제가 될 것을 알고 울진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 가족들과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인민군이 죽변 땅에 들어오자, 아니나 다를까 형님의 경찰 정보원 경력을 문제 삼으며 우리 가족 전체를 반동으로 몰고 갔지요. 인민군 치하에서 반동으로 몰리며 고통을 당하던 중에 집안 어른들이 형수님에게 ‘가족들이 살려면 하는 수 없이 너라도 인민군에 가담하는 척 해야 한다’고 설득하게 됩니다. 결국 집안 어른들의 권고로 형수님은 부녀동맹위원장을 맡게 됩니다. 국군이 울진 땅을 수복하기 전까지 15일 동안 부녀동맹위원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울진 지역이 국군에 수복되자, 그래도 경찰은 한때 형님이 경찰 정보원을 했던 인연으로 형수님에게 북면 고목1리 친정집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줍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국군이 우리집으로 들이닥쳤어요. 인민군 치하에서 부녀동맹위원장을 지냈던 며느리를 찾아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협하면서 족치던 사람들은 형수님 대신에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가 버렸어요. 아버지를 끌고 간 그들은 며느리를 찾아내면 당신을 죽이지 않겠다고 끝없이 위협을 가하게 되지요. 며칠 뒤에 이런 소식을 북면 고목리 친정집으로 피신 가 있던 우리 형수님이 듣게 됩니다. 친정집 부모형제가 어차피 자수해봐야 죽을 테니 가지 말라고 형수님을 끝까지 만류하지만, 형수님은 그 당시에 시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하고 자신이 대신 죽변면 후정리 부둘골에서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게 됩니다. 앞뒤 정황을 가리고 따질만한 사실 규명도 없이 인민군에 협조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 죽변 후정리 부둘골에서 참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습니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민족들끼리의 전쟁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과는 또 달라요. 6.25 전쟁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금까지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깊은 한과 상처를 남겼습니다.”
6.25전쟁 당시에 시아버지를 대신해서 목숨을 버린 주극중씨의 형수 전화숙씨는, 그 이후 1995년 성균관장의 표창장, 1996년 신안주씨중앙종친회 표창장, 1998년 충·효·예실천운동본부 총재 표창장등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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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선생은 이 글에서「재앙의 바다가 도도(滔滔)하게 우리나라에 넘칠 때 효행과 열행의 높은 명성은 아름다운 풍속을 떨쳤다. 시부모를 섬김에는 창칼 아래에서 구출하여 살렸고, 남편을 따름에는 불과 끓인 물속에도 들어갔네. 법가(法家)에서 물들어진 행의는 어진 도리를 이루었고, 말세에도 의로운 공을 취하여 후세에 전하네. 성조(聖朝)에서 높이 갚아줄 날이 마침내 멀지 않으리니, 정려(旌閭)가 내리고 복호(復戶)가 되어 영원무궁토록 전하리라.」라고 극찬했다.
주극중씨는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려고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내던진 형수의 애틋한 진정을 기리고자, 현재 전화숙(田華淑)씨에 대한 효열부 국가 은전 포상을 의뢰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다.
“세상에 어떤 며느리가 시아버지 대신에 자기 자신의 목숨을 그렇게 버릴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는 한 집안에서 효자나 효부가 나면 그 집 앞에 홍살 삼문(三門)을 세워주고 효열정각(孝烈旌閣)을 세워주고는 했는데, 효부일 뿐만 아니라 열녀까지 겸한 형수님이야 두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현재 울진 지역 유력인사들의 서명을 받아서 대통령께 형수님의 효열부 국가 은전 포상을 상신할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빠르면 10월안으로 대통령께 형수님의 포상을 상신할 계획입니다. 사실 형수님의 효열각을 세우는 문제는 아주 오래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해 오고 있었던 일이지요.”
6.25전쟁 당시 주극중씨 또한 북한 의용군에 강제로 잡혀갔었다고 전해준다.
“6.25 전쟁 당시에 몸 편하게, 마음 편하게 살았던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6.25전쟁이 나고 얼마 안돼서 7월 초순에 저도 의용군에 강제로 잡혀갔어요. 인민군에게 잡혀서 이북 통천 협곡이라는 곳까지 올라갔지요. 알고 보니 그곳이 인민군을 훈련시키는 훈련소였어요. 훈련은 받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제 몸무게가 40킬로그램입니다. 체중미달로 인민군에 징집되지는 않았고, 대신에 노역장으로 이곳저곳 끌려 다녔어요. 그러던 중에 국군에 밀린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하면서 우리들을 고향 찾아 내려가라고 순순히 보내 주더군요. 노역을 하면서 임진강변까지 올라갔는데, 인민군에 끌려간 수백명이나 되는 우리 노역꾼들은 그곳에서 고향까지 다들 걸어왔어요. 맨발로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도 그 먼 길을 맨발로 걸어왔는데 고생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지요. 한달 가까이 계속 앞만 보고 걸어서 매정 집까지 되돌아왔어요. 7월 초순에 끌려갔는데, 집에 돌아오니 10월 달이더군요. 아마 그곳에서 집까지 900리는 족히 될 겁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후정리 매정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렇게 살았어요.”
무이산주자학술연구회(武夷山朱子學術硏究會)에서 얻은 직사(直士) 칭호와 근서장(謹書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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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중국 복건성 건양에서 열린 주자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했어요. 그곳에서 건양 고정 주자 후예들의 국제 간담회인 무이산주자학술연구회(武夷山朱子學術硏究會)에서 대효자(大孝子) 대효손(大孝孫)에게만 부여되는 영광스런 직함인 직사(直士) 칭호를 얻고 근서장(謹書狀)을 받았습니다. 근서장은 교지(敎旨)와 같은 것이지요. 직사라는 칭호는 중국 명나라 이후에 처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 1997년에는 중국 복건성 건양고정 주자묘문공사(朱子廟文公祠)의 건립추진후원회장을 맡아서 주자묘문공사를 완공하기도 했고요. 윗대 조상인 주부자 묘사(廟祠) 공사를 후원하는 회장을 맡아 열심히 중국을 오가며 보냈던 시간들은 개인적으로는 아주 뜻 깊고 의미 있는 일이었어요.”
이밖에도 주극중씨는 대동한약방을 운영하는 한편, 다양한 방면에서 각종 사회활동을 펼치며 새마을청소년 후원회 중앙대의원 경상북도 대표, 대한 한약협회 중앙대의원, 대한 한약협회 울진군 회장, 세계 주씨 연합회 이사, 아세아 학술 연구회 이사, 성균관 전의, 유도회 경상북도 본부 교화홍보국장 및 교화문화국장, 충·효·예 실천운동본부 중앙 상임위원, 중국 세계 대원문화학원 주희유가시서학회 고문, 중국 복건성 무이산(자양) 무이서원수복 중건행사 특빈 고문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간재(艮齋) 학술연구회 운영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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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주극중씨 집을 찾았을 때 주인보다 앞서서 은은하게 코를 자극해오는 독특한 한약재 냄새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에 그가 주로 사용하는 서재를 둘러보면서 울진에도 이처럼 다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개인이 있구나 하며 놀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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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스탠드가 놓여있는 서재의 책상에는 미처 정리를 다하지 못한 각종 자료들이 펼쳐져 있고, 한창 써내려가던 것으로 보이는 원고도 놓여 있다.
주극중씨는 개인 문집을 만들기 위해 일평생을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을 포함해 평생 남들과 주고받았던 각종 편지글들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두고 있다고 전해 주었다.
그는 직접 자필로 정성들여 쓴 개인 문집용 자료만 해도 이미 마흔대여섯권이 훌쩍 넘는다고 말한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세상에 태어나서 이제까지 삶을 이어온 사람들치고 고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만, 주극중씨 또한 예외 없이 당대의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모진 세파를 빠짐없이 오롯이 겪어왔고 또 기억하고 있다.
“원래 개인 문집은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지요. 죽고 나면 자식들이 어버이를 추억하면서 그 뜻을 받들어 문집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요즘은 자식들조차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죽기 전에 자기 손으로 문집을 만드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요. 앞으로 건강만 유지된다면 '고정후예한중친선회'를 유지 발전시키고, '회암주부자학술연구회'도 발전시키고 싶어요.”
그의 사후에 주극중씨 이름을 단 개인 문집이 발간된다면, 그것은 울진 지역의 역사서는 물론 철학적 깊이의 탁월함과 생의 진실성을 담담히 드러내 놓는 책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주극중씨의 주씨(朱氏) 문중과 가문, 족보에 대한 관심과 집착(?)에 가까운 애정이 진솔하게 담긴 문중사학의 또 다른 저력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발간이 될 것으로 점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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