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남면 진복리 김순영씨 이야기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세월의 상징인 주름살은 인간의 존재감조차 점점 감금해 들어간다.
세월이 그리는 나이테인 주름살을 없애기 위해 많은 여성들은 성형외과를 찾아 안면주름 성형수술을 받거나 보톡스를 맞기도 하고, 값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마사지 기구를 이용해서 주름살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한다.
탄력 있는 피부를 간직하고 싶은 욕망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의 변함없는 소망이다.
오죽했으면 절대 권력자였던 네로황제의 아내인 포페아는 화장을 시중드는 노예를 수백명씩 거느리고 있었고, 당나귀의 젖으로 세수하고 목욕하여 피부가 마치 진주처럼 매끄러웠던 것으로 전해질까.
포페아가 여행을 떠날 때면 목욕과 화장에 필요한 당나귀의 젖을 조달하기 위해 반드시 500마리의 당나귀를 몰고 다녔다고 하니, 주름살을 없애서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인들의 욕망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인생의 계급장’이라고 불리는 주름살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이것을 달가워하는 사람은 없다.
주름살은 한 인간이 살아오면서 겪은 고생한 흔적의 대명사로 인식되는데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보다도 관상이나 첫인상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의 풍토에서 주름살이 있는 얼굴은 긍정적인 측면보다 부정적인 측면이 훨씬 더 크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름살을 예방하거나 제거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수술을 하거나 매일 피부 관리를 한들 주름살을 조금 늦출 수 있을 뿐, 주름에서 영영 도망칠 수는 없다.
어느 누구라도 나이듦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얼굴 가득히 주름살이 짜글짜글하거나, 검버섯이 많이 낀 노인들을 만나면 ‘무엇인가 많은 얘기를 간직하고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런 노인들은 탱탱하고 빛나는 얼굴 대신에 대부분 한결 여유 있고 넉넉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외면적인 젊음에 집착하는 대부분의 요즘 세인들과는 달리 연륜이 주는 주름살을 훈장으로 간직한 채 80이면 80살, 90이면 90살의 억지스럽지 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도리어 돈을 들여 잘 가꾸고 주름살 수술이라도 해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억지스러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말씨와 행동, 표정 등이 세련되고 조화롭지 못한 일부 세인들과는 달리 세월의 연륜에 걸맞은 무게를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년의 두려움도, 나이에 대한 위축감도 느낄 여유가 없이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예닐곱 마지기 밭에 직접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수확하고 있는 김순영씨를 만났다.
근남면 도촌(島村)에서 약국집 7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나
92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기억력으로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런두런 풀어놓는 김순영(金順英. 92세. 근남면 진복리)씨는 근남면 산포1리 도촌(島村)에서 태어났다.
“도촌이 태를 묻은 안태고향이지요. 예전에는 그곳을 섬이라고 불렀어요. 아버지는 의성 김씨에 윤자, 하자를 썼고, 어머니는 이름은 기억을 못하겠고 그냥 박씨 성만 기억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울진 선내가 고향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는 7남매였어요. 위로 오빠 2명에, 언니가 3명 있고, 아래로 남동생이 1명 있습니다. 다들 세상을 떠났고, 언니 1명이 살아 있었는데, 그마저 올해 세상을 떴고 이제는 저 혼자 세상에 남게 되었네요.”
김씨의 아버지는 근남면 도촌에서 약국도 하고 침도 놓으며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는 그 당시에 근남면 일대에서 병 잘 고치는 명의(名醫)로 소문난 사람이었습니다. 약국도 하고 침도 놓으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분이지요.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무척이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어요. 제가 여자 중에서는 제일 막내다 보니까 아버지는 곧잘 약을 지을 때 무슨 약 무슨 약을 싸라고 했는데, 그중에 한가지 약을 잘못 싸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혼을 내고는 했습니다. 약을 잘못 싸는 날이면 초당으로 불러 들였어요. 어릴 때 우리 집은 인근에서도 꽤 규모가 큰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약도 짓고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침도 놓고는 하던 작은 초당이 한쪽에 붙어 있었지요. 그곳으로 불러들이면 저는 지레 겁을 먹고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또 약을 잘못 쌌다고 부르시는데 어찌해야 할까요?’하고 묻고는 했어요. 그때마다 어머니 또한 변함없이 ‘아버지가 부르시면 이유 없이 냉큼 건너가야지’하고는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저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초당으로 들어갔고, 아버지는 저에게 회초리를 치고는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분이었지요. 우리 집은 농사도 조금 짓고, 길쌈도 하고, 아버지는 약국과 침술을 겸하고 있던 그런 집이었습니다.”
인근에서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소문을 듣고 환자들과 손님들이 매일같이 김순영씨네 집을 찾아오는 바람에, 김씨 또한 어릴 때부터 밥 짓는 일에는 이골이 나있었다고 술회한다.
“우리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 무지 많았습니다. 어떤 날이고 점심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손님을 치루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어디 요즘처럼 밥 짓는 일이 편하기나 할 때였어요? 큰 가마솥에 아궁이 가득 나무를 때서 밥을 할 때였으니까, 그 고생이야 새삼스럽게 말해서 무엇 하겠어요? 막내딸로 태어나다 보니까, 시집을 올 때까지 그 뒷바라지를 저 혼자 오롯이 도맡아서 할 수밖에 없었지요. 어릴 때부터 손이 참 야무지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어요. 어릴 때 아버지는 출타하면서 맹건(網巾. 망건)을 머리에 두를 때마다 저에게 직접 시키고는 했는데, 상투를 틀고 맹건을 둘러주면 거울을 보면서 ‘아이고 야야, 니가 어떻게 이렇게 머리를 잘 땋았노?’하면서 칭찬해주고는 했지요. 제가 시집을 갈 때는 ‘너는 손끝이 모자람이 없으니, 시집을 가도 잘 살 것이다’하면서 힘을 주는 따뜻한 말씀도 해주셨어요.”
김순영씨는 어릴 때 글을 배우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읽고 쓸 줄을 모른다.
“왜정때 여자로 태어나서 학교를 다니기가 힘들었지요. 지금도 어디서 편지라도 한 장 받으면 이웃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야 하니까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한은 아직까지도 가심(가슴) 속에 깊은 한으로 자리하고 있어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글을 읽지 못하고 쓸 줄 모르는 한보다 더 큰 한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빠들은 그 당시에도 학교는 안 다녔지만, 인근 마을에 있던 서당에 다니면서 구학문을 배워서 한문도 알고 한글도 알고 했어요. 제일 막내인 남동생은 학교도 조금 다녔었고요.”
김씨의 집은 근남면 일원에서도 규모가 큰 집이었다.
“친정집은 당시로서는 아주 컸어요. 비록 초가집이기는 했어도 초당이 딸려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초당방 앞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는 동마루가 있었는데, 집 전체가 한군데 붙어 있기는 했어도 인근에서 부러워하던 큰 집이었어요. 그런데 을축년 개락때 큰물에 그 큰집이 모두 다 씻겨 내려갔어요. 도촌에 있던 집이 을축년 개락에 떠내려가자 아버지는 물가에 사는 건 위험하다면서 도촌 건너편의‘댓골’이라는 곳에 새집을 지었습니다. 그 당시에 댓골에 우리 집 밭이 10마지기 있었거든요.”
일제강점기이던 1925년에 발생했던 을축년 대홍수는 현대사에서 가장 큰 홍수로 기록되고 있다.
김씨의 남편 고(故) 박성동씨. 박씨는 젊은 시절 울릉도에서의 뗏마 어업을 비롯해 진복리에서 후리배와 머구리배를 운영했다. 수년전에 촬영한 김순영씨의 사진. 이 사진은 안방벽 위쪽에 남편 고(故) 박성동씨의 사진과 나란히 걸려 있다
망양리 둔산(屯山)의 시댁 고모부 중매로 고단한 시집살이를 시작
김순영씨는 20살 되던 해에 망양 둔산(屯山)에 살던 시댁 고모부가 중매를 해서 현재 살고 있는 진복리로 시집을 오게 된다.
“부모님께서 막내딸이라고 집에 오래 붙들어 두다 보니까, 그 당시로 보면 꽤나 늦은 나이였던 20살에 시집을 왔어요. 그러고 보니까 시집을 온지 벌써 72년이 지나 버린 거네요. 그때 시고모부님이 근남면 망양리 둔산에 살고 있었는데, 그분이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찾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가 기거하던 초당에 군불을 넣다 보면 방안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데, 지나고 보니까 자신의 조카와 중매를 하는 이야기를 나누던 거였어요. 초당에 불을 넣다보면 그분이 저를 유심히 이리저리 살피기도 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것이 다 중매를 하기 위해서였던 거지요.”
김씨가 20살에 시집올 당시 남편 박성동씨는 김씨보다 1~2살 위였다.
“남편은 박성동이라고 하는데, 마을에서는 박주철이라고 불렀어요. 결혼할 때 21살인가, 22살인가 됐을 겁니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결혼할 때 친정집 마당에 차일을 치고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바로 그날 곧장 저는 가마를 타고 진복 시댁으로 들어왔어요. 그때 남편은 지붕만 가려져 있는 가마를 타고 결혼식 후에 시댁으로 함께 돌아왔고요. 남편은 6년 전에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났습니다.”
김순영씨의 시어머니. 김씨는 집안에 제사, 김장을 비롯해 장을 담을 때조차도 시어머니는 절대 일하는 것을 돌아보지 않았었다고 전한다
김순영씨는 시집올 당시에는 이미 시댁의 가세가 기울고 있는 중이어서 당장 먹고 살기조차 힘에 겨웠었다고 말한다.
김순영씨의 맏시숙. 김씨의 맏시숙은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해방이 되어도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일본에 눌러 살며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고 한다
“시댁이 한때는 떵떵거리면서 잘 살았던 집이었답니다. 시댁 식구들이나 마을 사람들은 저희 시댁이 진복리 촌에서 99마지기 논을 부쳤었다고 말하더라고요. 일꾼들 서너명씩 들여놓고 논을 부쳤으니 그 가세가 한때는 오죽했겠어요? 그런데 제가 시집오니까 이미 가세는 기울만큼 기울어 있었지요. 시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셨지만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에 시어머니가 계셨어요. 맏시숙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는데, 시댁에는 우리 영감 밑으로 시아재비가 막내까지 3명이 더 있었어요. 또 시누(시누이)도 2명 있었지요. 집안은 먹고 살기가 힘든데 시할아버지, 시할머니, 시어머니에 시아재비 3명, 시누 2명까지 있었으니... 아이고, 그때부터 고생했던 거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지요. 제가 결혼해 와서 시아재비 3명에 시누 2명까지 다 치웠어요. 맏시누는 울진읍 군발로 시집을 갔고, 둘째 시누는 근남면 수산으로 시집가고, 막내 시아재비는 울진읍으로 장가보내고...”
20살에 김씨가 진복으로 시집을 왔을 때는 한때 99마지기나 되었다던 시댁 논은 이미 모두 다 빚에 잡혀 있었다.
“옛날에 아무리 잘 살았다고 해도 시댁 식구들이 별다른 일없이 놀고먹는데 어땠겠어요? 이미 가진 논밭은 남에게 얻어다 쓴 빚 때문에 다 잡혀있었으니, 밤낮으로 죽어라고 일만 했지요. 얼마 안남아 있는 논밭에서 농사짓고, 처녀 때 친정집에서 배운 길쌈을 했어요. 친정에서 길쌈을 곱게 배워서 명주길쌈도 잘하고 베길쌈도 잘하고 했는데, 언제부턴가 눈이 침침해지면서 더 이상 못하게 돼버렸지요. 시집오는 날부터 그렇게 힘들고 바쁘게 살았는데도 시어머니는 절대 안돌아봤어요. 김장김치를 할 때나 장을 담글 때조차도 시어머니는 그저 담뱃대나 두드리고 앉아 있지, 모든 일에 고개를 돌리고 있었지요. 숱한 집안 제사 때도 시어머니는 일을 거들어 주는 법이 없었어요. 하이고, 제사는 또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2월달에는 한달에 제사만 3번이었는데, 박씨들 맏종가집에 시집을 왔으니 당연하기도 했던 거지요. 하도 집안에 제사가 많아서 어느 해에 마지막으로 조상들에게 알리고 오래된 제사를 다 없애 버렸어요. 원래 우리 영감이 맏아들도 아닌데, 맏시숙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여자를 얻어 결혼을 했으니 집안 제사가 다 우리 차지가 돼버린 거지요. 맏시숙은 해방이 된 후에도 국내로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일본에 눌러 살았는데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고 하는 소리를 전해 들었어요. 그전에는 맏시숙이 고향 집이라고 한번씩 일본에서 들어와서 진복리 집에도 들리고 했는데, 이젠 연락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어요. 이쪽에서도 연락을 안하고, 그쪽에서도 연락이 없다 보니까 저절로 소식이 끊어져 버린 겁니다.”
울릉도에서 뗏마를 탔던 남편… 밀불과 명이나물… 고등어죽
김순영씨는 딸 둘을 낳았을 무렵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워서 울릉도로 건너가서 몇 년 살았었다고 말한다.
“시집이라고 오긴 했는데, 있던 재산은 이미 남의 손에 다 넘어간 뒤여서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울릉도에 시고모부가 살고 있었는데, 시고모부가 우리 영감에게‘이 사람아, 아무 말도 말고 뗏마 하나 살돈만 만들어서 울릉도로 들어오게. 식구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살수는 있으니까’해서, 이웃에서 뗏마 한척 살돈을 빌려서 딸 둘을 데리고 울릉도로 들어갔지요. 영감 혼자 바다로 뗏마를 저어서 나가면, 고등어와 꽁치 같은 생선을 가득가득 곧잘 잡아 들어오더라고요. 그렇게 잡아온 생선을 배도 따지 않고 수협에다 넘기고 나서는 전표를 받아 왔어요. 집에 들어올 때는 두 딸들과 반찬 할 고등어나 한두마리 손에 들고 들어왔습니다.”
김씨는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은 무렵에 남편과 울릉도로 건너가서 4년 정도를 살았다.
“울릉도로 건너가서도 여전히 먹고 살기는 힘들었어요. 울릉도에 가면 모시개(저동)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는 나무에 달리는 열매인 ‘밀불’이 참 많았어요. ‘밀불’은 이곳에도 깊은 산속에 가면 간혹 따먹을 수 있는데, 울릉도 ‘밀불’은 크기도 큽니다. 낮에 모시개로 ‘밀불’을 따러 가면 혹시 그 사이에 영감의 배가 들어올까 싶어서 퍼뜩 따 가지고는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지요. 울릉도에서는 날이면 날마다 ‘밀불’과 ‘명이나물’을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2년 정도나 지났을 무렵에 육지에서 울릉도로 들어온 젊은 사람들을 일제 강제 노무자로 끌고 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어요. 일본 노무자로 끌려간다는 소문에 영감은 그동안 수협에서 받았던 전표를 한꺼번에 현찰로 바꿔서 큰딸 하나만을 데리고 근남면 진복으로 되돌아왔지요. 영감이 울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저는 한동안 울릉도에서 작은딸을 데리고 살았어요. 이웃에 시고모부네가 있었으니 그나마 안심하고 살 수 있었던 거지요. 그렇게 작은 딸과 울릉도에서 2년 정도를 더 살다가 저도 근남 진복으로 되돌아왔어요. 저는 지금도 고등어를 먹지 않습니다. 울릉도에서 살 때 하도 고등어죽만 먹고 살아서 고등어에 물려버린 거지요.”
김순영씨는 그나마 울릉도에서 고생했던 바람에 울진으로 되돌아와서 남에게 넘어갔던 땅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었다고 전한다.
“제가 시집올 때 시댁에 딸린 논이 세마지기 있었는데, 시할아버지 노름빚으로 말루에 살던 유씨라는 사람에게 그 논이 넘어가 버렸어요. 우리 영감이 울릉도에서 뗏마를 타면서 어렵게 고기 잡아 번 돈으로 다행히 그 논 세마지기는 되찾을 수 있었지요. 시집와서 한 20년 정도나 살았을까, 어느 해에 태풍으로 시댁 집이 쓸려가서 지금 살고 있는 이 자리에 집을 지어서 오기도 했고요. 처음에는 시댁이 요 아래에 있었지요. 초가집이기는 해도 참 큰 집이었는데. 원래 우리 영감은 일도 안하고 곱게 먹고 살던 사람이었어요. 예전에 일꾼을 들여놓고 99마지기 논을 부치며 살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고생을 모르고 컸던 거지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들이 얼마나 곱게 키웠겠어요? 제대로 일할 줄도 몰랐고요. 제가 이렇게 키가 작고 덩치도 없지만은 평생 동안 일도 참 많이 했고, 숱한 골탕 먹었어요. 원래 지금 살고 있는 이집도 시댁 밭이었는데, 이 밭에다 삼을 갈아서 삼베옷 짜 입고, 누에 키워서 명주 짜서 내다팔고, 또 남으면 식구들 옷 해 입히고는 했지요. 시아재비 장가갈 때는 명주옷 해 입히고, 명주 1필은 딸려 보내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식 8남매… 6.25 전쟁 때 피난을 떠났던 불미골
김순영씨는 20살에 만난 남편 박성동씨와의 사이에 8남매를 두었다.
“옥화(여. 부산), 옥자(여. 죽변), 광순(남. 서울), 경술(남. 부산), 옥순(여. 충남), 옥연(여. 밀양), 섭섭이(여. 김해), 순옥(여. 부산)을 낳았어요. 순옥이 밑에 막내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은 나이 세살 먹었을 때 죽어서 가슴 한편에 묻었어요.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이런 자식도 있고 저런 자식도 있고 그렇지요, 뭐.”
1950년 6.25전쟁 때 김씨는 진복리 인근 불미골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었다고 기억한다.
“6.25전쟁이 터졌을 때는 진복리 재 너머에 불미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으로 피난을 떠났어요. 시할아버지, 시할머니와 시어머니는 집에 남아 있고, 젊은 사람들만 불미골로 피난을 갔는데, 우리식구가 도착해보니 이미 그곳에는 이불을 싸들고 피난 온 사람들도 있고, 집에서 키우던 소를 끌고 온 사람들도 있고 했어요. 그런데 그곳은 피난 갈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니까 수산 왕피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총질을 하면서 싸우고 있는 것이 훤히 내려다 보였어요. 이쪽에서 잘 보이니까 당연히 저쪽에서도 불미골이 훤히 올려다 보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이고, 그냥 집에 있을걸, 죽으려고 이곳까지 올라왔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하룻밤을 겨우 그곳에서 보내고 이튿날 집으로 돌아왔지요.”
진복리의 정어리 기름공장… 남편의 머구리배
한때 근남면 진복리에는 정어리에서 기름을 짜내는 큰 공장이 있었다.
“해방을 전후해서 울진 지방에서는 정어리가 참 많이도 잡혔습니다. 그때 진복에도 큰 정어리 처리공장이 있었어요. 인근 바다에서 정어리를 잡은 배는 다 진복 정어리 공장으로 몰려들었지요. 기름기가 많은 정어리에서 짜낸 기름은 식용이 아니라 양초나 비누를 만드는 원료로 사용되었어요. 밤낮없이 정어리기름을 짜내기에 바빴지요. 저도 덩달아 바빴지요. 정어리기름 공장에서 일하느라고 바빴던 게 아니라, 정어리에서 기름을 짤 때 흘러나오는 물을 퍼다가 논밭을 걸군다고 바빴던 거지요. 지독하게 비린 냄새가 나는 그 물을 날마다 논밭으로 이고 져 날랐습니다. 정어리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라지는 불앞(백사장)에 쭉 내다 펴고 말리고 부서뜨려서 사료로 내다 팔았고, 거기서 나오는 물만 동네 사람들이 퍼갈 수 있게 해 주었어요. 매일 몇 동이씩 가까운 밭으로 퍼다 날랐어요. 진복으로 시집을 와서 풋각시때 한 7~8년 정도 했는데, 더 이상 울진 앞바다에서 정어리가 나지 않으면서 정어리 공장도 문을 닫고 말았지요.”
김순영씨의 시댁은 한때 진복리에서 멸치 후리배와 머구리배를 운영했었다.
“진복에서는 멸치도 참 많이 잡혔어요. 요즘과는 달리 예전에는 바다에서 고기가 참 많이 잡혔었는데, 이제는 씨가 말라 버린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시댁은 멸치 후리를 했어요. 진복 앞바다로 멸치가 몰려 들어오면 동네의 노인네들이 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웃옷을 벗어들고 흔들면서‘여~여~’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동네 아래에까지 들리면 큰 목선 하나가 멸치잡이 그물을 싣고 바다로 나가서 양쪽 끝이 백사장에 닿게끔 그물을 치는 거지요. 그물을 다 치고 나면 온 동네 청장년들이 모두 나와서 양쪽 그물로 갈라져서 그물을 힘껏 불앞으로 당깁니다. 한쪽에서 그물을 당기면 한쪽에서는 펄펄 뛰는 멸치를 퍼내기에 바빴고... 눈에 선하네요.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잡은 멸치는 온 동네에서 나눠 가졌어요. 우리 영감은 머구리배도 했었지요. 미역방구(바위)를 세내서 한 15년 정도 관리하면서 머구리배를 했는데, 지금이야 해녀들이 바닷속 바위에 붙은 미역 같은 해초를 직접 뜯어내지만, 예전에는 머구리가 모두 그 일을 했어요. 영감이 끌던 배는 우리 시댁에서 배짓는 대목(목수)을 들여서 재우고 밥해 먹이면서 불앞에서 지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목선이었지요. 그 배를 끌면서 머구리를 데려다가 미역도 따고 고기도 잡았어요. 고기를 잡으면 제가 직접 머리에 이고 딸진개를 넘어서 울진 시장에 내다 팔았고요. 울진시장에 좌판을 펴고 앉아 다행히 일찍 고기를 다 팔면 일찍 집으로 돌아오고, 늦게 팔리면 또 늦게 돌아왔지요. 어떤 때는 고기가 일찍 팔리지 않아 날이 다 저물어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고요. 그래도 영감이 바다로 일을 나가서 고기를 많이 잡아 만선으로 돌아올 때 영감 배위에 갈매기가 허옇게 붙어 있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지요. 저절로 어깨춤이 덩실덩실 나오고는 했어요. 영감이 끌던 배는 주로 고등어와 명태를 많이 잡았어요.”
“올해 고추 200근을 땄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농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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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영씨는 92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도록 지금도 혼자 힘으로 밭 예닐곱 마지기를 부치고 있다.
“땅을 묵힐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그저 집에서 빈둥빈둥 놀면 또 뭐하니껴? 해마다 밭 두마지기에 차나락을 심고 있어요. 그리고 또 다른 밭 대여섯 마지기에는 고구마도 심고, 배추, 무, 고추도 심어 가꾸고요. 밭이 전부 다 빈달(비탈)이 져서 경운기 같은 기계로는 농사를 못 지어요.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땅바닥에 꾸부리고 앉아서 호메이(호미) 하나만 가지고 그 농사를 다 짓는 거지요. 호메이만 갖고 농사를 지으니까 일년에 호메이를 꼭 한가락(자루)씩 사니더. 일년 동안 호메이를 한가락씩 다 닳굿는 거지요. 올해 고구마 농사는 멧돼지 때문에 망쳤어요. 아니면 고구마도 개락이 났을 텐데... 차나락을 밭에 심고 난 다음에 가뭄이라도 들면 옆쪽에 파놓은 샘에서 물을 길어다가 두마지기 밭에 골고루 뿌립니다. 예전에 차나락 밭 인근에 동네에서 공동으로 쓰던 웅굴(우물)이 있었는데, 언젠가 개락에 그 우물이 땅속으로 묻혀 버렸습니다. 그런데 영감이 살아 있을 때 농사를 지으면서 옛날 웅굴 있던 곳을 자꾸 파다보니까 밭둑 밑에서 그 우물로 연결되어 있는 물이 나왔어요. 일년에 그 웅굴 청소만 대여섯번 이상 합니다. 남들이 하루에 끝낼 일을 제가 하면 삼사일씩 걸려요. 차나락을 벨 때면 이삼일 걸려서 낫으로 혼자 차나락을 베고, 밭에 푹 주저앉아서 또 삼사일씩 그 차나락을 신우대 가지를 젓가락 모양으로 만든 것으로 일일이 훑어 내지요. 그리고는 그날그날 훑은 차나락을 집으로 옮겨 옵니다. 유모차에 싣고 옮겨 오는데, 나이가 들면서 다리에 힘이 없어져서 유모차가 없으면 그냥 걸어 다니기도 힘에 부칩니다. 유모차가 없으면 농사도 못 짓고 걸어 다니기도 힘들고 아무것도 못하지요. 그러다가 유모차가 고장 나면 또 누구에게 부탁해서 중고 유모차를 하나 구하고요. 겨울에도 쉬는 날은 별로 없어요. 남들이야 밭을 경운기로 로터리 한번 치면 끝날 일인데, 저는 차나락 뿌리를 겨울동안 다 일일이 호미로 캐내야 하거든요. 호메이로 뿌리를 다 캐내고, 다음해에 또 차나락을 심고 그러지요.” 일일이 호미로 캐내야 하거든요. 호메이로 뿌리를 다 캐내고, 다음해에 또 차나락을 심고 그러지요.”
김순영씨는 타지에 나가서 흩어져 사는 자식들이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집으로 내려와서 겨우내 먹을 김장을 직접 해가지고 올라간다고 전해준다.
“해마다 배추, 무우도 많이 하고 고추도 많이 합니다. 올해는 고추도 200근이나 땄어요. 그렇게 농사를 지어 놓으면 아들딸들이 찾아와서 저희 먹을 김장을 해가지고 가지요. 자식들이야 이미 오래전부터 ‘이제는 고생스러운 농사는 그만 짓고 집에서 편히 지내라’고 하지만, 놀면 뭐하니껴? 그저 실실 놀면서 밭으로 왔다 갔다 하는 거지요. 지난주에도 서울 사는 아들네 식구가 내려와서 제가 지은 배추와 고추로 저희들이 겨울동안 먹을 김장을 해가지고 올라갔어요. 아들이 직접 바닷물을 퍼 날라서 배추 숨도 죽이고... 바닷물을 퍼 날라서 배추 숨을 죽이면 소금도 적게 들고 맛도 한결 좋아지잖아요? 올라가면서 ‘엄마, 연세도 많은데 이제는 재발 농사를 그만 지으소. 이제는 편하게 노소’하더라고요. 그래, 제가 그랬지요.‘이 사람아, 놀면 뭐하는고? 움직여야지.’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농사짓고 있으니 건강한거지요. 자식들이 제가 직접 농사지은 고추, 배추로 김장이라도 담아 먹으니 그것도 마음에 좋고... 제가 겨울동안 먹을 김장은 딸들이 찾아오면 해주고 올라갑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이 바빠서 미처 집에 내려오지 못하면 김장을 담가서 택배로 부쳐주기도 해요. 지금이야 택배가 얼마나 좋아요? 예전에 아들이 서울서 학교 다닐 때는 김장김치 하나 가져갈 때도 분천까지 올라가서 기차를 타고 가고 그렇게 했는데.”
깊게 패인 우리들 어머니의 주름살은 숱한 인고의 세월을 겪어온 흔적이다.
20살 어린 나이에 빈한했던 박씨 종갓집 며느리로 시집온 이래, 속으로만 감내해야 했든 고생스러웠던 김순영씨의 이야기는 밖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서너 시간 이상의 얘기를 나누었는데도 김씨는 아직 못다 드러낸 속내가 많아 보였다.
근남면 ‘도촌’에서 7남매 가운데 막내딸로 태어나 곱게 커오다가 20살 앳된 나이에 박씨 집안의 풋각시가 되어, 그녀의 표현대로 숱한 골탕을 먹으면서 인내해온 70여년의 세월을 누구에겐들 속 시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래도 변함없이 자식들에게 쏟아내는 김순영씨의 헌신적 사랑이 깊게 패인 주름살 가득히, 또 쪼그라들어 더욱 투박하게 보이는 굵은 손가락 뼈마디 하나하나에 무르녹아 깊은 골을 이루면서 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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