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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접시의 은총

  • 페인트 최 기자
  • 입력 2009.01.28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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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로 이사하고 며칠 지난 어느 날, 2층 계단에서 조그마한 아줌마를 만나 서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누었다.
3층에 살고 있다고 했기 때문에, 바로 우리 집 위에 사는 이웃임을 알게 되었다. 깨끗한 피부와 사근사근한 말투는 달콤하고 상큼한 사과같이 예쁘다는 느낌이 전해졌다. 

 

그 뒤로 한두번 더 마주쳤고, 앳돼 보이는 얼굴과 몸매로는 상상을 할 수도 없는데 벌써 네 남매의 엄마라는 말에 놀랐고. 예술을 좋아해서 큰 아이 이름이 예본이, 둘째가 예닯이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이 그녀를 기억해야만 할일을 그녀가 시작했다는 사실을 그 때는 몰랐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외출했다 집에 들어섰는데 주방 옆 조그만 상위에 먹음직스럽게 잘 익은 홍시가 내가 못 보던 하얀 접시에 담겨 올려져 있다.
딸아이에게 웬 거냐고 물으니, 3층 네 남매 엄마가 주셨단다.
‘친정아버지께서 먹으라고 부치셨는데 나누어 먹어요.’라고 쓴 메모지를 하얀 접시 한 쪽에서 발견했다. 

 

감나무를 가꾸는 아버지도 없고, 감나무가 있어도 마음 쓰는 친척도 별로 없는 나는, 그래서 딸을 위해 흐뭇하게 감을 따 담았을 그녀의 아버지 사랑을 나누어 먹게 되었다. 

 

빈 하얀 접시에 시장에서 사온 귤을 담아 딸아이 편으로 3층에 올려 보냈다.
‘맛있게 잘 먹었어요. 예본이 엄마’라는 메모지를 접시 한 쪽에 붙여서.
그 며칠 뒤, 하얀 접시에 사과가 담겨서 우리 집에 다시 왔고, 나는 마침 집에 있는 바나나 한송이를 반으로 나누어 담아 딸아이에게 들려 보냈다. 

 

하루는, 비어있던 우리 집 현관에 ‘재은이 학생, 우리 집에 잠깐 들려요’라는 메모지가 붙여져 있는걸 보았다.
무슨 일이 있나 싶어 뛰어올라간 재은이 손에, 세상에! 커다란 시장바구니 한가득 친정아버지가 해마다 딸 먹으라고 농사지은 호박으로 즙을 짜서 보내시는데, 너무 많고 해마다 먹어 그 효과를 본 즉, 우리 모녀가 먹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호박 즙을 그렇게 들려 보냈다. 

 

고맙다는 마음도 크지만, 왠지 부담스러운 마음도 슬슬 자리를 잡았다.

‘난 어쩌라고...’
답장을 즐거이 쓰고 싶은 편지 같은, 잔잔한 접시 릴레이였는데...
갑자기 그 하얀 접시의 범위를 훌쩍 넘어 버리면 뻥튀기 과자라도 사서 보낼까? 부피로야 맞먹겠지만, 그 엄청난 무게를 이길만한 답은 어디서 구한다냐.  
고민 같지 않은 고민이 슬그머니 피어오를 때 마다 그저 웃음이 났다.
그녀의 예쁜 마음과 손길이 듬뿍 담긴 정성의 무게를, 속물의 무게로만 계산하려는 나를 비웃는 나의 웃음. 

 

어제 저녁, 친정엄마가 오셔서 팥죽을 끓였는데 맛보라면서 그 하얀 접시에 받쳐서 한 그릇의 동지 팥죽을 가져왔다. 팥죽도 넙죽 감사했지만, 우리의 릴레이 접시를 보는 순간 내 마음이 더 환해 졌다는 걸 그 누가 알 것인가? 

 

그녀는 항상 미소를 머금었는데, 그 미소에서는 로즈마리 민트 같은 향기가 퍼졌으며 그 향기는 크기와 무게를 초월해서 충만해지는 무엇이 분명히 있었다.
조그만 상위에서 머리를 맞대고 딸아이와 팥죽을 먹었다. 

 

그때, 엄마 3층 아줌마는 요즘 보기 힘든 사람 같아. 자기 식구만 아는 세상에 항상 맛있는 걸 나누어 먹으려 하잖아. 우리만 해도 이웃을 생각하면서 뭔가를 나누는 일은 없잖아. 그렇지?     

 

대답을 길게 늘이며 머리를 굴려, 혹시 한번이라도 내가 다가간 이웃이 있나 기억해 보려 해도 없다.
사실 잘 모르는 이들의 문을 두드려 인정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조차 멀었다. 내 이웃에 불쑥 문을 두드리지 않는 것이 도리어 요즘시대의 미덕이려니... 그랬다.
엄마 우리 저렇게 살자, 나만 내 식구만 눈에 보이듯이 살지 말고 이웃과 나누어 먹으려는 마음 갖고 말이야
그, 그래... 

 

배우고 익히고 느끼고 실천하는 삶을 위해서 만권의 책 속에 있으려나, 만번의 말씀에 있으려나... 한 순간에 흡수되는 이 배움은 그저 먼저 나눔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나누는 순간,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 크고 맛있고 따뜻하고 행복하게 마음을 채우는 그런 것이 된다는 사실이고. 그런 즐거움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 특권을 재은이가 알았단 말이지.
기특한 놈, 예쁜 놈.
둘이 손가락 걸고, ‘우리 저렇게만 살자’ 약속하는 순간 내 눈에 들어 온 하얀 접시가 없는 이웃 사랑의 마음을 품게 하는 은총을 주시다니.
바로 하얀 접시가 우리의 하나님 이다.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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