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아직 이팔청춘인데, 인생은 벌써 서산녘 흰머리 갈밭. 황혼에 함께 익은 노을빛처럼 되었다. 우리들에게도 젊음이 있었건만 푸른 세월 언제 지나가 버리고 흰머리 세는 오늘. 우리는 오늘 이렇게 자리를 같이 했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가버린 세월이 꿈결인 듯 지난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굽이굽이 이는 연호의 학생 시절 그리움뿐이다...」
계절의 변화처럼, 인생 또한 살다보면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황혼이라 불리는 노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 계절의 초입에서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간당거리다가 어느새 떨어져 나가는 낙엽처럼 지난 시간들이 흰머리와 잔주름으로 켜켜이 쌓여가는 나이, 노년.
아름다운 노년이란 무엇일까? 삶을 간결하고 소박하게 이어가는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자기 삶에 대한 긍지가 일종의 신앙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간결하고 소박한 것이란 무엇인가 모자라는 삶이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취하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은 자꾸 버리면서 줄이는 것이다.
굳이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명료하고 담백함이 묻어나는 노년이란 신앙보다도 더 돋보이는 삶이 아닐는지.
진정으로 행복하려면 삶을 단순화하라고 했던가? 웃음과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세월에 순응하면서 한가닥 자존심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노년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로마에서 제일가는 웅변가이며 문장가로 이름을 남긴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는 적지 않은 풍파를 겪은 뒤 노년에 이르러 쓴 책『노년에 대해서』를 통해 늙음을 걱정하는 젊은이들에게“인생은 각 단계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다. 청년은 저돌적이고, 장년은 위엄이 있으며, 노년은 원숙한데, 이런 자질들은 제철이 되어야만 수확할 수 있는 자연의 열매와도 같은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원숙함과 자존심을 잃지 않는 노년은 예로부터 제철이 되어야만 거둬들일 수 있는 튼실한 자연의 열매로 비유될 만큼 소중하고 지혜로운 것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답다.
근남면 수산리 대밑마을… 영암당임성대종사(暎岩堂任性大宗師)
|
박종원씨의 아버지 박기준(朴淇駿)씨와 , 어머니 고(故) 장두칙씨. 박기준씨는 새끼를 꼬고 대추를 말려 시장에 내다 팔아 가족들을 부양하고, 남동생을 일본 유학까지 시켰다 |
대한시조협회 울진군지회장을 맡고 있는 박종원(朴鍾元. 73세. 근남면 수산리)씨는 근남면 수산리 대밑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우리 선친 고향은 울산 언양입니다. 그런데 먼저 어떻게 울진으로 이사를 와서 터전을 잡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네요. 아버지 바로 아래의 남동생이 영암당임성대종사(暎岩堂任性大宗師)입니다. 저에게는 삼촌이 되는 거지요. 속가 이름이 박기종이었던 영암스님은 울진 근남 수산이 고향으로, 양산 통도사에 있다가 불영사에 오게 되었어요. 그 당시 불영사는 규모가 형편없이 쇠락해 있었다고 합니다. 불영사 주지로 취임한 영암스님은 불영사를 중흥시킬 묘안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금강산에 있을 때 알게 된 돈 많은 처사를 불러 불영사를 구경시킵니다. 불영사를 찬찬히 둘러본 그 처사는 원산 인근에서 부자로 널리 알려진 이설운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설운은 불영사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원산까지 되돌아가서 배에 엽전을 가득히 싣고 죽변항에 도착했어요. 이설운은 죽변항에서 사람들을 사서 바소쿠리 가득히 엽전을 지고 불영사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 법당 등의 건물을 중수하거나 보수하게 되지요. 그런데 울산에 계시던 우리 할머니, 그러니까 영암스님의 어머니가 아들 스님이 보고 싶어서 목탄차를 타다가 걷다가 하면서 먼 길을 마다않고 불영사에 도착합니다. 서면 하원리에 숙소를 정한 영암스님의 어머니는 밭에 콩을 가꾸고 수확하여 콩나물도 키우고 해서 절에도 갖다 주고, 또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아들 곁에 머물게 됩니다. 이전에 문화원이 있던 울진군민회관이 그 당시에는 유명한‘요다여관’이라는 곳이었는데, 그 주변에 흩어져 살던 일본인들에게 콩나물을 주로 팔았습니다. 그렇게 영암스님의 어머니는 콩나물을 키워서 내다 팔아서 먹고 살고 불영사에 기부도 하면서, 서면 하원과 울산 언양 먼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내게 되는 거지요. 아들 스님 걱정에 먼 길을 마다않고 불영사와 울산 언양을 왔다 갔다 하니까, 보다 못한 우리 아버지가 ‘저러다가는 나이든 어머니가 타고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겠다’싶어서 가족들이 모두 다 울진으로 올라오게 됩니다. 그때 올라온 가족들이 우리 할머니, 아버지, 작은 삼촌, 고모 3분이지요. 제일 막내 고모가 박현주라는 분인데, 18살 때부터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해서 평해국민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채웠어요. 울진 최초로 배출된 여성교장이지요. 그 당시에 울산 율동에서 배를 타고 울진으로 올라온 가족들은 그나마 울진읍내도 가깝고 불영사도 가까운 이곳 근남면 수산리에 터를 잡게 된 것이지요. 전에는 수산에서 불영사까지 70리길이라고 했는데, 다른 지역에서 불영사를 찾아가는 길손들의 이정표가 되는 곳이 이곳 근남면 수산이었어요.”
영암스님의 불영사 중건에 자금을 대던 원산부자 이설운은 영암스님의 가족들을 위해 집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전답까지 마련해준다.
“불영사에 반해서 원산으로 올라가 엽전까지 가득히 배에 싣고 불영사로 내려온 이설운씨는 불영사를 위해서 영암스님은 있어야 하지, 그러다 보니까 울산 언양에서 올라온 영암스님의 가족들을 위해 집하고 논을 사주게 됩니다. 그래서 왕피천 인근의 대밑마을에 집과 집 뒤의 가산을 사주고, 수산 솔섬논까지 사주게 되는 거지요. 수산 솔섬논은 현재 엑스포 공원 안에 있었는데, 객토도 하고 배수도 잘되고 해서 인근에서는 땅심 좋기로 알아주던 논이었어요. 솔섬논이라고 하면 울진 일대에서는 제일 비싼 땅이었지요. 대밑마을에서 살다가 제가 4살 때 지금 살고 있는 이집 근처로 이사를 내려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이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지금까지 죽 살고 있는 거지요.”
울산 언양 씨름장사 출신 아버지… 새끼 꼬는 기계…대추 장사
박종원씨의 아버지 박기준(朴淇駿)씨는 원남면으로 장가를 들어서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다.
“아버지는 매화 기양1리에 살던 장필하씨의 따님을 얻어 결혼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장씨 성에 두(斗)자, 칙(側)자를 썼고요. 그래서 태어난 게 저지요. 제 밑으로 병원, 여동생 명복, 끝으로 남동생 상원이가 있습니다. 바로 아래 남동생 병원이는 전에 새마을중앙연수원장을 지냈는데 지금은 서예가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요. 서울 인사동 덕원갤러리에서 개인전도 하고 대한민국 서예대전과 미술대전에서 수차례 수상을 했고, ‘정경뉴스’라는 월간잡지에 1년 동안 문인화를 연재하기도 했어요. 요즘은 또 사진 찍는 일에 빠져 있다고 하네요. 끝에 남동생은 태성건설 회장으로 있습니다. 여동생은 대구에 살다가 천안으로 옮겨 갔고요. 여동생 아들이 과기대를 나와서 박사로 SK연구단지에 근무하고 있거든요.”
박종원씨는 아버지 박기준씨가 젊었던 시절에는 울산에서도 알아주는 장사였다고 전해준다.
“아버지는 원래 울산에서 알아주는 씨름 장사였어요. 청년시절에 울산에서 박기준이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힘이 좋고 기술도 좋은 씨름 장사였습니다. 울진으로 올라오고 나서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참 고생도 많이 한 분이었지요. 영암스님의 도움으로 이설운씨가 대밑마을에 집과 가산을 사주고 솔섬논 세마지기도 사 주었지만, 논 세마지를 부쳐서는 가족들이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웠지요. 그래서 짚으로 새끼를 꼬는 기계를 한 대 사서 새끼를 꼬고 그걸 내다 팔아서 먹고 살았습니다. 일명 ‘산내끼틀’이라고 불리는 새끼 꼬는 기계에 매달려서 밤새 새끼를 꼬고 나면, 이튿날 아침에는 그 새끼를 지게에 가득히 지고 시장에 내다 팔거나 주문한 곳으로 배달을 다녔어요. 그 당시에는 동해안 바닷가 곳곳에 정어리기름을 짜는 공장이 많았는데, 정어리 공장에서 새끼를 많이 필요로 했지요. 또 대추를 사다가 말려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어릴 때 기억에 봉당에 대추를 가득히 널어서 말리는데, 팔아야 할 물건이다 보니 절대 먹지 못하게 했지요. 그때야 다들 배가 고픈 시절이었으니 어린 마음에 그 대추가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그렇게 아버지는 대추 장사를 겸해 새끼를 꼬아 내다 팔아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습니다.”
남대천 얼음물 속으로 빠진 아버지… 일본으로 유학 떠났던 삼촌
박종원씨는 새끼를 내다 팔던 아버지와의 사이에 애틋하고 가슴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다.
박종원씨의 어린 시절(왼쪽), 오른쪽이 새마을중앙연수원장을 역임하고 서예가로 활동중인 박씨의 동생 병원씨이다
“어린 시절 어느 겨울이었어요. 아버지가 밤중에 새끼 타래를 가득 지게에 지고 가는데, 저보고 앞에서 불을 밝히고 가자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짚단을 새끼로 질끈 동여 싸서 거기에다 불을 붙이고 횃불로 사용했습니다. 그리 밝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요. 횃불이야 밝고 오래가는 소나무 ‘소까지’가 제일 좋지만, 일정시대에는 ‘소까지’에서 기름을 짜내 전쟁용 기름으로 쓴다고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했지요. 학생들도 툭하면 산으로 ‘소까지’를 주우러 다니고, 일반 가정집에서는 정어리기름으로 불을 밝히고는 했으니까요. 야밤에 짚단에 횃불을 붙여서 대충 더듬기도 하면서 저는 앞서가고, 아버지는 뒤에서 따라오면서 말루쪽 정어리기름 공장으로 새끼를 팔러 나섰는데, 남대천에 이르렀어요. 한겨울 밤중이라 남대천에 얼음이 꽁꽁 얼었는데, 저야 어리니까 몸이 가벼워서 아무 탈 없이 얼음 위를 걸어갈 수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지게 가득히 새끼를 지고 뒤따라오던 아버지가 얼음이 깨지면서 물속으로 풍덩 빠져 버린 겁니다. 당시만 해도 남대천 물의 수량이 지금과는 달리 참 풍부했어요. 지게를 진채 물속으로 빠진 아버지의 가슴께까지 겨울 한밤중의 얼음물이 차 올라왔는데, 그 와중에서도 새끼를 가득 진 지게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쓰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참, 너나 나나 힘들게 먹고 살았던 시절이었어요.”
박종원씨의 아버지는 새끼를 꼬고, 대추를 말려 시장에 내다 팔아 가족들을 부양하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남동생을 일본으로 유학까지 시키게 된다.
“아버지는 새끼 꼬고, 대추 말려 내다 팔고...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도 박기택이라는 남동생을 일본으로 유학까지 시켰습니다. 그때는 울진군 전체를 통틀어도 일본으로 유학을 나간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말루 유부자 아들을 포함해서 사각모자를 쓴 사람은 서너명 안팎이었습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삼촌은 성정도 대단했어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울진으로 돌아온 삼촌은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끌려갈 때, 일제는 울진국민학교 4학년 이상 된 학생들과 주민들을 도로변에 죽 세워서 환호하게 했어요. 강제로 끌려가는 거였지만, 왜인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지식인이 자원해서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선전해댄 거였지요. 그 모습이 하도 가당찮아 보인 삼촌은 ‘요다여관’앞에서 담배를 비스듬히 빼어 물고 피우면서 그런 일본인들을 비웃었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일본 경찰이 학도병에 자원한 학생이 무슨 담배냐니까, ‘니놈들 나라를 위해 학도병에 끌려가는데 담배 하나도 피지 못하냐’면서 따지고 달려들었다고 들었어요. 또 삼촌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도 하게 되었는데, 성씨를 ‘우산(宇山-우야마)’으로 개명했어요. 일본 놈들이 ‘소두벵이(솥뚜껑)’로 우리를 눌러서 할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다고 통렬하게 비웃은거지요. 어쨌든 삼촌은 억지춘양격인 울진군민의 환영식을 뒤로 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죽음의 전쟁터인 남양군도로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해방이 되고 나자,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채 이름 석자가 적힌 잿봉지만 집으로 되돌아 왔어요. 그렇게 삼촌은 이국만리 머나 먼 땅에서 외로운 고혼이 된 거지요.”
노음국민학교…울진중학교…6.25 사변… 뒤늦게 입학한 울진고등학교
박종원씨는 폐교된 제동중학교 자리에 노음국민학교가 있을 당시에 제8회로 졸업했다
가난하게 어린 시절을 보낸 박종원씨는 7살 되던 해에 노음국민학교에 입학한다.
1951년 4월 8일, 울진중학교 제1회 졸업기념
“수년전에 학생 수가 적어서 폐교된 제동중학교 자리가 원래 노음국민학교 교사가 위치해 있던 곳입니다. 현재의 노음국민학교는 1959년에 사라호 태풍으로 제동중학교 자리에 있던 학교가 다 떠내려가자 지금 위치로 옮겨서 새로 지은 것이지요. 일정시대에는 국민학교도 간단하게 면접시험을 보고 입학했어요. 한 학년이 2반까지 있었는데, 일본어로 면접을 봐서 일본어가 통과되면 1반, 통과를 하지 못하면 2반으로 배정되었습니다. 저는 어쨌든 1반에 배정되었어요. 제가 노음국민학교에 다닐 때 별명이 ‘콩’이었습니다. 콩처럼 또굴또굴 굴러다닌다고 별명이‘콩’이었는데, 축구라도 할 때면 이리저리 또굴또굴 굴러다니다가 키 큰 친구들이 점프를 하면 그 밑에 엎드려 있다가 떨어지는 친구를 골탕 먹이고는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노음국민학교를 8회로 졸업했어요.”
노음국민학교 8회로 졸업한 박종원씨는 울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시험을 쳐서 울진중학교에 입학했어요. 현재의 울진향교 자리가 울진중학교 자리였습니다. 제가 2학년 때 현재 연호정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서 울진중학교를 새로 지었어요. 그때 우리가 심어놓은 나무들이 지금은 아름드리가 다 되었지요. 제동학교는 애초에 울진향교를 교사로 사용하다가 후에 월변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현재 월변농협 자리가 제동학교를 옮긴 자리입니다. 그때 그곳에는 규모가 큰 잠사 공장이 있었어요.”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중학교에 입학한 박종원씨는 중학교 3학년 때 6.25사변을 맞는다.
“중3때 6.25사변이 터졌어요. 6.25전쟁 첫해에 한동안 근남면 왕피천 일대에서는 국군과 인민군이 강을 사이에 두고 끝없이 밀고 밀리면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습니다. 참 그 전투는 대단했습니다. 그때 우리 집이 지금 이집 옆 인근에 있었는데, 남의 눈에 쉽게 띄지 말라고 굴참나무를 마주 보고 산 쪽으로 방공호를 파고, 가족이 모두 그 안에 숨을 죽이고 3개월 동안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에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막내 고모만 피난을 떠났었고요. 방공호에 숨어사는데 어느 날이던가, 쿵하고 천지를 요동치면서 포탄이 떨어져서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정신을 차려보니까 함께 방공호에 피신해있던 큰고모 치마에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더군요. 그 순간에 아버지가 안에서 죽으나 밖에서 죽으나 똑같으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막 밖으로 나서는데 총구 대여섯개가 불쑥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더군요.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족들을 대신해서 총구 대여섯개를 가슴으로 막고 밀면서 성큼 밖으로 나섰지요. 대여섯명이 인민군 복장을 하고 총구를 겨누고 있었어요. 이 자리에서 다 죽었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국군 특공대가 인민군 복장을 하고 나타난 거였어요. 그래서 살았지요. 방공호 밖으로 나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집 2채가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고, 집에서 키우던 소도 불타서 없어지고, 뒷산 곳곳에는 총탄에 맞아 죽은 인민군 시체가 나뒹굴고... 정말 지옥이 따로 없었지요.”
중학교 3학년 때 6.25전쟁을 맞은 박종원씨는 2년 동안 집안일을 돕다가 뒤늦게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전쟁 통에 모든 것을 다 잃었는데 학교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아버지에게 집도 새로 짓고, 우선은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봐야 하니까,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당분간 집안일을 돕겠다고 얘기했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고등학교에 2년 늦게 들어갔어요. 이 왼쪽 종아리에 아직까지 흉터로 남아 있는 상처 한번 보세요. 중학교 3학년 때 강제로 인민군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제 손으로 직접 낫을 들고 찍은 상처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뒷산에 올라가서 먼저 낫으로 나무를 한번 찍어보면서 위치를 대충 잡고 나서, 두눈 질끈 감고 낫으로 제 종아리를 사정없이 내려쳤지요. 그때 울진에도 병원이 있기는 했는데,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했어요. 치료해서 상처가 아물면 인민군에 끌려 갈수 있었으니까요. 그냥 그대로 집에서 절뚝거리고 다니면서 버텼더니 상처 난 부위가 곪아서 덧나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거지요.”
울진고등학교에 재학할 당시, 규율부원으로 활동하며(앞줄 왼쪽)
6.25 전쟁으로 인해 남들보다 2년 늦게 울진고등학교에 진학한 박종원씨는 학교 내에서 웅변선수와 배구선수로 활동한다.
1954년 울진고등학교 2학년생들 행군도중 망향에서
“웅변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했는데, 어느 대회든지 나가면 1등을 했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웅변을 계속 했고, 배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학예부장과 규율부원을 맡아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뒤늦게 고등학교에 입학한 만큼 공부도 꽤 열심히 했는데 울진고등학교 임과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지요. 저는 특히 웅변에 자신이 있었는데, 그때 얻은 별명이‘울진의 안토니오’입니다. 로마시대의 유명한 웅변가였던 안토니오의 이름을 제 별명으로 붙여준 것이지요. 그때 김기영선생님이라는 분이 근남 수산리 대밑마을에 살았는데, 그분이 웅변 원고를 자주 써 주었어요. 그런데 밤에 그 집까지 원고를 청탁하거나 받으러 가자면 어린 마음에 무섭기도 하고, 때로는 선생님이 바빠서 원고를 받기도 힘들고 해서 결국은 제 손으로 직접 원고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1천600자에 이르는 긴 원고를 하룻밤 만에 외우고는 했었어요.”
대학교 재학시의 웅변…선거 유세원…대구 육군 부관학교에서의 웅변·
울진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종원씨는 경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에 입학해서 집을 떠나게 된다.
“대학에 입학해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4년 동안 마산 시내에서 자취생활을 했어요. 대학 2학년 때 ‘개천예술제’에서 웅변을 해서 전국 2등을 했습니다. 그때는 자유당 말기였는데 제가 했던 웅변 제목이 경상도 말로 직접 쓴 ‘왜 이카노?’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웅변대회가 끝나고 난 다음에 곧장 경찰서로 묶여서 끌려가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제가 직접 쓴 웅변의 내용이 문제가 됐는데, 서설 퍼렇던 자유당 말기에 ‘장춘당 테러 사건’과 ‘박영춘 시계 밀수사건’을 비유해서 시종일관 자유당 정권을 비꼬는 내용이 문제가 된 거지요. 웅변대회에 앞서서 사전 원고 검열을 할 때는 다른 원고를 제출했는데, 막상 웅변 내용은 엉뚱한 거였으니까요. 경찰이 어젯밤에 어디서 잤냐면서 집에 가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제 장준택 판사 댁에서 잤다고 대답했지요. 장준택 판사는 근남면 출신으로 그 당시에 진주지방법원장을 지내고 있었어요. 결국 장준택판사와 연락이 되고, 장판사가 직접 저를 보증한다고 해서 풀려나게 되었지요.”
‘장춘당 테러사건’은 1957년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대회를, 그 당시 주먹 건달들을 동원해서 무력으로 해산시키며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박종원씨는 대학에 다니면서 각종 선거에서 선거 유세 운동원으로 활동하기도 한다.
“군에 갔다 와서 대학 3학년에 복학하고 나서는 마산 시장을 돌면서 선거 유세원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선거 유세를 하면 일당으로 5천400원을 받았는데, 학생들의 한달 하숙비가 5천200원 할 때였으니 대단한 거금이었던 셈이지요. 또 그때는 학생들이 밀수꾼들의 심부름 아르바이트도 꽤나 자주 하고는 했어요. 저도 두어번 해본 적이 있었는데, 우선 술 한잔 사주고는 밀수 물건을 주면서 마산 양키시장까지 배달해 달라고 합니다. 심부름을 하러 올 때는 꼭 책을 끼고 오라고 했는데, 학생들은 경찰이 불심검문을 잘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했던 거지요. 그렇게 밀수품을 배달하고 나면 ‘우데나 쭈쭈’라고 부르던 ‘구리모’ 화장품을 몇 통씩 챙겨 주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우데나 쭈쭈 구리모’를 받으면 집에 계시는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가져다주었지요. 어머니나 여동생은 농사를 지어 나락을 까불 때 곡식을 조금씩 따로 모아서 구리모를 사서, 아끼고 또 아끼면서 조금씩 얼굴에 찍어 바를 때였으니까 너무 좋아하고는 했었어요.”
박종원씨의 웅변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군대에 가서도 이어진다.
육군 5사단 사령부 3819부대 부관 참모부에 배속되어 근무하던 시절(오른쪽)
“대학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가게 되었지요. 논산훈련소 26연대에 소속되어 훈련을 받았는데, 계급이 대령이던 임현철 연대장이 이북서 살다가 왔지만 울진이 고향인 사람이었어요. 그 덕을 참 많이 봤지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대구시에 있는 육군 부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어요. 울진 서면 출신인 장상태씨라는 분이 육군본부 부관감실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분 덕이었지요. 대구시 육군 부관학교 타자반을 나왔는데, 당시 ‘공병우 타자기’와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가 군대에 막 보급되기 시작할 때였지요. ‘공병우 타자기’는 그 당시만 해도 구형취급을 받았고, 미국에서 원조 받은 ‘스미스 코로나 타자기’가 신형이었습니다. 대구 부관학교 교육을 마치고 나서 육군 5사단 사령부 3819부대 부관 참모부에 배속되었어요. 그곳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대학 재학 중에 입대한 병사들에게 군 생활을 단축시켜주는 학보병제 혜택을 받아서 1년 6개월 만에 군을 제대 했습니다. 군에 근무할 때 울진 출신 장기복역자들 30여명을 제대시켜준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군에 평생 남겠다고, 일명 말뚝을 박은 사람들이 제대를 희망해서 제대 시켜준 것이지요. 그 업무를 육군 사령부 부관 참모부에서 했으니, 시쳇말로 힘을 좀 썼던 거지요. 얘기가 조금 빗나갔는데, 대구 육군 부관학교에서 교육받을 때였어요. 각 중대별 웅변대회가 있었는데, 우리 중대 대표로 제가 선발되었습니다. 장교와 사병들 6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원고도 없이 즉석에서 웅변을 하게 되었는데, 장교들을 가리켜서 당신들이 달고 있는 계급장이 군대 건빵이나 담요를 훔쳐서 단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부하들을 아끼라고 말했어요. 또 작금에‘도둑질은 군대에서 배운다’고 흔히들 말하는데, 당신들이 달고 있는 계급장과 푸른 군복의 명예를 지켜달라는 내용의 웅변을 했지요. 장교와 사병들이 따로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각각 300여명씩 앉아 있었는데, 사병들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는데, 반대편에 앉아 있는 장교들은 조용하더라고요. 10여 분간의 웅변을 끝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는데, 심사 결과 발표가 늦어지더군요.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이 제가 제일 잘했다고 상을 주려 하는데, 다른 심사위원들이 웅변 내용에 문제가 많다면서 튼 거지요. 결국 우리 중대의 오치성 중대장이 항의하고 해서 제가 일등상을 받았어요. 1등 상품으로 지포 라이터를 받았습니다. 중대장님에게 고맙다며 지포 라이터를 드렸더니, 기념품인데 잘 간직하라면서 돌려주었습니다. 오치성중대장은 후에 군을 전역하고 국회의원을 지낸 분입니다.”
울진영림서 아르바이트…굴구지 산판…옥방광산
대학 3학년부터 4학년까지 2년 동안 방학 때마다 박종원씨는 울진영림서에서 아르바이트로 사회 경험을 하게 된다. 어쩌면 박씨가 농협직원으로 근무하지 않았다면 영림서 직원으로 근무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때의 아르바이트가 그 이유이다.
“대학 3학년 때 집에 와서 어느 날 아침 늦게 목에 수건을 두르고 앞도랑에 세수하러 갔는데, 아버지가 아침 일찍부터 밭에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참 미안하더라고요. 그래서 동생과 동생 친구에게 어디 삼척탄광이라도 가서 세상 구경도 하고 돈도 벌어 오자고 제안했어요. 그런데 부구까지 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멀리 삼척탄광까지 갈게 아니라 지금 덕구온천 유황탕 바로 위에 댐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사람을 많이 구한다고 전해 주더군요. 3명이 덕구의 저수지를 막는 댐공사 현장으로 가서, 한밭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하다가 1주일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어요. 너무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던 중에 어떤 아는 사람을 또 만났는데, 멀리서 일자리를 찾을게 아니라 영림서 소장을 만나서 순시원 자리라도 하나 부탁해 보라고 권하더군요. 일도 하고 책도 읽을 수 있다면서요. 자유당 말기이던 그때 울진영림서 소장이 박성갑이라는 사람이었어요. 무턱대고 영림서 소장을 찾아가서 ‘대학생인데, 일자리 좀 만들어주소’하고 매달렸지요. 결국 영림서에서 저와 친분이 있는 사람도 좋게 얘기하고 해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어요. 그러나 출근이라고 했는데 보름동안 아무 일도 시키지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이일 저 일을 눈치껏 찾아서 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영림서 소장이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습니다. 아는 사람보고 소장이 왜 저렇게 기분이 좋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사냥을 나가서 꿩을 한 마리 잡아서 좋아한다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우연히 영림서 인근에서 꿩 한마리를 보게 되었지요. 소장은 평소 사냥을 좋아해서 엽총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영림서 소장 사모님에게 빨리 엽총 좀 빌려 달라고 해서, 그 꿩을 명중시켜 잡은 다음에 소장에게 선물로 주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영림서 소장이 저를 사냥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곳저곳으로 데리고 다니더군요.”
영림서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박종원씨는 근남면 굴구지 산판(山坂)으로 자리를 옮겨서 근무하게 된다.
“영림서 소장이 제가 학생이고 하니까 편리를 봐줘서 굴구지 산판 현장으로 보내 주었어요. 당시에 울진군 곳곳에서는 산판이 한창이었는데, 굴구지 산판은 죽변면에 살던 전무호씨가 업자였습니다. 영림서 소장이 전무호씨에게 부탁해서 저를 편한 곳으로 보내 주었는데, 산판 현장에 가니까 소금 2포와 장갑,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어요. 학생인 저를 전무호씨가 최대한 배려해서 그곳에서 먹고 자면서 책도 읽고 그러라는 거였지요. 산판에 있으면서 왕피리까지 산불감시도 다니고 그렇게 생활했어요. 그때만 해도 참 어두운 시절이었어요. 어느 날은 산판 현장에서 노루를 발견해서 잡았는데, 울진 읍내의 ‘연호관’이라는 술집으로 다들 몰려갔어요. ‘연호관’은 ‘연호옥’으로도 불리던 유명한 술집이었는데, 영림서 직원들은 날마다 산판 업자를 따라 다니며 술 얻어먹고 그랬던 때였습니다. 또 업자들은 영림서 직원들에게 술을 대접하고 나면 그 대가로 영림서에서 5입방 영수증을 끊어서 20입방, 30입방씩 해먹던 시절이었어요. 5입방은 산판 트럭 한대분 나무인데, 술대접하고 실제 계약한 것보다 네다섯배씩 많은 나무를 베어내서 팔아먹었던 거지요.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산판업자 전무호씨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방학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데 등록금을 대 주었어요.”
울진영림서에서 아르바이트한 인연으로 박종원씨는 대학 4학년 방학기간에도 울진영림서에서 일을 하게 된다.
“방학을 해서 집에 올라왔는데 영림서에서 불러서 가보니까, 옥방광산의 부정 임산물 단속을 하는 일을 맡기더군요. 부정 임산물 벌목이나 채취는 우선적으로 옥방지서에서 경찰이 단속해야 하는데, 현지를 가보니까 옥방지서에서는 하라는 단속은 하지 않고,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임산물을 싣고 오가는 트럭에서 조수가 내려 돈 봉투 하나만 집어주면 그대로 통과시키고 그러더라고요. 수도 없이 목재를 실은 트럭 조수가 봉투를 들고 들어갔다가 나오면 바리케이드가 올라가고... 하는 수 없이 어느 날 큰 돌을 하나 들고 가서 옥방지서에서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깨서 부수고 거칠게 항의를 했지요. 또 한번은 옥방광산 굴속까지 확인하면서 부정으로 베어내서 사용하고 있는 목재 단속도 했어요. 광산에서는 굴을 파가면서 무너지지 않게끔 받치는‘항목’을 사용하는데, 당시 옥방광산에서는 이 ‘항목’을 불법으로 베어내서 많이 사용했던 거지요. 결국 산간수 완장을 차고 직접‘칸델라’불을 머리에 달고 굴속까지 들어가서 불법으로 베어낸 낙엽송을 확인했는데, 다음부터는 절대로 부정목으로 ‘항목’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끝냈어요. 그때 제가 묵던 숙소가 ‘울진여관’이었는데, 옥방광산에서 쌀 두가마니를 보내왔다고 여관주인이 일러 주었습니다. 바로 옥방광산 소장을 찾아가기도 하면서 쌀을 되돌려주려고 했지만, 끝내 그 쌀을 ‘울진여관’에 묵고 있던 우리 일행이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을 졸업한 박종원씨는 한때 울진영림서에 근무해달라는 부탁을 받기도 한다.
박종원씨는 노음초, 울진중·고를 거쳐 경남대학교 상경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영림서 아르바이트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런데 영림서에서 연락이 와서 영림서에 근무할 생각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땐가 당시 산림국에서 단속을 나왔는데, 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도벌을 다 막지 못하냐고 윽박지르더군요. 그래서 제가 나서서 어디 소나무가 한두그루 있는 것도 아니고,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아 있어도 톱날이 들어오는 형편이라고 따지면서 항의했어요. 그런데 후일 들어보니 그날 따지고 달려든 제 호기를 그 산림국 직원이 눈여겨봤던 모양입니다. 농림부 산림국에서 울진영림서에 연락을 해서 저를 직원으로 채용하라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영림서 직원으로 취업했다면 아마 농협이 아니라 산림청 직원으로 정년퇴직하게 되었겠지요.”
시국 강연회 연사…국회의원 3선 지낸 김광준씨와의 특별한 인연
중학교 2학년부터 시작한 박종원씨의 웅변실력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이어지면서 유감없이 빛을 발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한동안 집에서 지낼 때 울진으로 놀러 나갔더니, 울진장날에 울진극장 앞에서 시국 강연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당의 노영호 조직부장이 그날의 연설을 맡은 연사라고 했어요. 그런데 마침 그날 연사가 피치 못한 일로 참석하지 못하게 됐다면서 어떤 아는 사람이 저보고 연설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연단으로 올라갔지요. 그때만 해도 일제 도요타 차량에 마이크와 스피커를 연결시켜 확성기로 사용했는데, 저는 그냥 육성으로 연설을 시작했어요. 연설 내용의 대부분이 그 당시의 자유당 비리를 폭로하는 것이었는데, 장날에 가득 모인 사람들이 제 웅변을 듣고 속이 시원했던지 박수를 치면서 환호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박종원씨는 꾸준히 갈고닦은 웅변 실력을 인정받아서 제헌국회의원과 2대, 5대 국회의원 등 3선을 지낸 김광준(金光俊)씨와도 특별한 인연을 맺는다.
“어느 날 제헌국회의원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광준씨가 집으로 저를 찾아왔어요. 그때 우리 집 식구들은 보릿단을 손으로 들고 벽에다 두들기면서 보리타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김광준씨가 아버지에게 아들 품값을 줄 테니 선거 유세 운동원으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각 읍면을 돌면서 자그마치 136번이나 선거 연설을 했습니다. 결국 그 덕분인지 김광준씨는 민주당 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3선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지요.”
28살에 결혼…농협 입사…시멘트와 소금 보급…화폐 개혁
|
|
박종원씨는 28살에 농협에 근무할 당시에 중매로 결혼한다.
“농협에 근무할 때 아저씨뻘 되는 임선필씨와, 1년 선배이던 장영국씨, 후배 이상동 등이 함께 중매를 했어요. 다들 입을 모아 지금의 아내 유춘홍이 참 좋은 아가씨라고 해서 결혼하게 되었지요. 현재 울진시장 안 축협자리에 있던 읍민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울진극장도 있던 자리였는데, 그때는 다들 그곳을 읍민관이라고 불렀지요. 학교 교장까지 지냈던 방병주씨 주례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신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어요. 결혼식 후에 백암온천으로 1박2일간 신혼여행을 다녀왔습니다.‘하꼬가다’라고 요즘 지프차같이 전체적으로 뭉툭하게 생긴 택시를 타고 백암으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당시에는 대단한 신혼여행을 다녀온 셈입니다.”
박종원씨는 당시 국회의원 김광준씨의 배려로 조달청에 잠깐 근무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조달청을 관두고 내려온 박씨는 울진농협에 입사하게 된다.
“김광준 국회의원이 소개를 해서 조달청에 잠깐 근무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박정희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개혁 운운하면서 시끄럽기에 집으로 내려왔지요. 집에 내려와서는 한동안 수산다리 밑에서 비올 때 쓰는 우장을 뒤집어쓰고 이것저것 책을 읽으며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감기가 들어 울진 읍내로 약을 사러 나갔는데, 누가 농협 입사 시험이 있다고 함께 치러 가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울진농협에 들렀는데, 내일 오후 5시까지 춘천농협에 원서를 제출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울진군은 강원도에 소속되어 있었고, 당연히 각종 시험은 도청소재지가 있는 춘천의 각 기관에 원서를 접수시켜야 했던 거지요. 어떻게 할까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데, 그 당시 김진팔이라는 울진농협 전무가 ‘그런 정신머리를 가지고 무슨 시험을 치려고 하느냐’며 핀잔을 주었어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당신이야 회전의자 돌리면서 신문이라도 보니까 알지, 우리 같은 촌사람이 농협 시험이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느냐’고요. 그리고 김진팔 전무가 보는 앞에서 농협 전화를 빌려서 당시 춘천농협 금융과에 근무하던 울진 출신 송종백씨에게 전화를 걸어서 내일 늦게 도착하더라도 원서를 받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또 시험 원서를 접수할 때 호적등본과 병적 증명서가 필요하다기에 근남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서 서류를 좀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때는 각종 서류를 컴퓨터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작성할 때였으니까 그게 가능했지요. 그리고 춘천까지 올라가서 시험을 봤고, 응시자가 1만4천명이나 됐는데 1차 시험 합격자 197명 속에 제가 낀 것입니다. 울진만 하더라도 그때 200여명이나 그 시험에 응시를 했었지요. 춘천에서 ‘농업 개론’과 ‘일반상식’등의 시험을 치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되돌아오는 차안에서 신문을 통해 제가 1차 시험에 합격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얼마 후에 2차 시험을 보러 갔어요. 2차 시험에 앞서 신체검사가 아주 엄격했었고, 2차 시험은 면접과 논문 1편을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2차 시험 결과, 1차 시험 합격자 197명 가운데 145명이 최종 합격했어요.”
|
|
“1개월간 서울 연수원에서 교육을 마치고 나오는데, 방송과 신문마다 ‘새나라 새일꾼 나간다’고 대서특필하고 기념품으로 그때는 귀하던 자전거 한 대를 받았습니다. 서울 청량리에서 분천역까지 기차에 자전거를 싣고, 분천에서는 울진으로 자전거를 타고 오다가 중간에 지나가는 산판 제무시 차량을 얻어 타고 자전거를 싣고 근남 수산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울진농협 김진팔 전무 밑에 지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지요. 한달 전에 농협 입사 시험을 치러갈 때 서로가 첫인상이 별로 유쾌하지 못했던 두 사람이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으니, 그건 또 무슨 인연이었던지.”
현재 울진농협중앙회 청사를 지을 당시에 박종원씨는 울진농협에 근무하면서 건물 신축과 관련한 업무를 도맡아 했었다고 전해준다.
“울진농협에서 근무하던 도중에 울진 농협 청사를 짓게 됐는데, 제가 그 일을 맡아서 했던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때 울진농협은 꽤나 많은 일을 했어요. 당시에는 시멘트가 귀할 때였는데, 삼척까지 가서 시멘트를 구해서 배에다 2천포대씩 가득 싣고 죽변항과 후포항에 시멘트를 풀어서 일반인들에게 보급했고, 소금도 귀할 때여서 전라도 신안까지 가서 소금을 배에 싣고 와서 보급하기도 했어요. 또 당시에는 시골 대부분의 농가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해서 무거운 짐을 날랐는데, 울진농협에서 리어카를 대량으로 구매해 와서 울진 지역에 보급하기 시작했지요.”
박종원씨는 현재의 농업협동조합은 일제 강점기에 ‘금융조합’이었던 것이 해방 후에 ‘농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뀌고, 5.16 혁명 후에 ‘농업은행’과 ‘구 농업협동조합’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농업협동조합’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일평생 농협중앙회에서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한 박종원씨는 울진농협에 근무할 당시에 박정희정권에서 실시한 화폐개혁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다.
“1962년 6월 10일을 기해 박정희정권이 ‘긴급통화조치법’에 의해 화폐개혁을 단행합니다. 돈의 단위가 ‘환’에서 ‘원’으로 바뀌고 통화단위가 10분의 1로 절하된 것이지요. 그때 울진 돈을 다 모아서 춘천까지 옮기는 일을 제가 맡아서 했어요. 군인 트럭에 타고 춘천까지 가서 새로 발행된 돈으로 바꿔 오는데, 울진군에서 모은 돈이 5억4천만환이나 됐어요. 군인 트럭에 헌병 두명이 총을 들고 지키고, 저는 혹시 돈을 잃어 버릴까봐 뒤쪽 짐칸에 혼자 탄 채로 춘천까지 덜컥거리는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고생도 하고, 저녁에 춘천에 도착해서 헌병 도움을 받아가면서 돈 자루를 옮겼어요. 한자루에 대충 2천환씩 들어가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참 고생 많이 했어요. 동전은 그냥 저울에 달아서 계산을 하더라고요.”
전화위복이 된 30년간의 악연, 공화당 오준석 국회의원
울진농협에서 근무하던 박종원씨는 8년 만에 경주시로 자리를 옮겨서 근무하게 된다.
“당시 오준석국회의원과의 악연으로 울진에서 경주로 자리를 옮기게 됐지요. 울진 지역에서는 근남농협이 제일 먼저 각 마을별로 흩어져 있던 이동조합을 통합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근남농협조합장을 뽑는 선거에서 오준석국회의원의 지역구인 울진 공화당에서 밀었던 조합장 후보자가 참패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때 저는 전혀 근남농협장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없었는데 울진 공화당 사람들이 저에게 선거 참패의 덤터기를 씌웠고, 결국 오준석국회의원의 농간으로 경주까지 가게 된 거지요. 그러나 결국 경주까지 갔던 것이 길게 볼 때 잘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1969년부터 1980년까지 농협중앙회 경주시 지부에 상무로 11년 근무했고 경북도지회 감사와 자재과장등을 거쳐, 1급으로 승진한 후에는 농협중앙회 연구위원까지 지내다가 퇴직할 수 있었으니까요. 정년을 마치고 퇴직한 후에는‘대세포장 주식회사’라는 박스공장의 전무이사와‘한영주식회사’부사장까지 지냈습니다. 오준석국회의원과는 그 일 이후에 30년 동안 말을 않고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30년이 지난 시점에 우연히 울진버스터미널 앞에서 마주치게 되었는데, 먼저 인사하면서 사과를 하기에 악수하면서 그 악연을 훌훌 털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악연이 시간이 흐르고 보니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박종원씨는 경상북도 민방위 강사, 사단법인 박약회 울진군 지부장, 신라오릉보존회 총본부 감사 등을 역임했고, 현재 신라 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 경상북도 본부장, 대한시조협회 울진군지회장, 울진문화원 부원장 등의 중책을 맡고 있다.
|
|
노년에 어떤 이는 불행하게 살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멋진 취미를 가지고 활발하게 사회활동까지 겸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누구든지 늙지 않고 영원히 젊게 살기를 꿈꾸지만 그것은 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영원히 늙지 않고 살게 된다면 우리 인간들은 또 얼마만큼 교만해지고 방자해 질 것인가?
늙어 감을 받아들이는 전제조건 속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노년은 관조하는 여유로움을 던져주고, 그래서 바라보는 이들에게 더욱 튼실한 아름다움으로 다가든다.
‘영암당임성대종사(暎岩堂任性大宗師)’를 삼촌으로 둔 탓인지 유독 불교 교리에 심취하면서 살아왔다는 박종원씨는, 지금까지 별다른 굴곡이나 큰 무리 없이 집안일들이 다 잘 풀린 것도 영암스님의 은덕을 입은 것 같다고 말한다.
|
부인 유춘홍씨와 유럽 여행중에
|
한평생 일에 치여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여행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 것이 영 맘에 걸려서, 일년에 한번씩은 부인과 함께 국내 여행은 물론 중국으로, 유럽으로 장기간 여행을 다녀오고 있다는 박종원씨는 당당하다.
그 당당함은 지난 평생을 최선을 다해 가족과 사회에 바쳤다는 자부심과 헌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안다.
때로는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면서 삶의 존재 가치를 키워 나가고, 또 때로는 변화와 유행에서 해방되어 책을 읽고, 한시를 짓고, 시조를 읊고, 부인과 여행을 하면서 새삼 사물을 깨달아가는 기쁨을 행복의 바이러스처럼 옆 사람에게 전파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박종원씨의 삶은, 그래서 진정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자연에 순응하는 것으로 비친다.
NEWS TOP 3
추천뉴스
정치/행정/의회
more +-
제293회 울진군의회(임시회) 의사일정안
-
울진군, 지방도917호선∙군도20호선 4차로 확장 추진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울진읍 시가지의 교통혼잡을 완화하고 원활한 교통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방... -
왕피천공원서 펼쳐지는 '2026 야(夜) 울진' 호러 퍼레이드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오는 8월 1일 왕피천공원 물결광장에서 '202... -
울진군 지역자원 창업의 기회로! ‘2026 울진군 창업아카데미’ 첫 문 열어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지난 30일 환동해산업연구원에서 지역 예비‧초기창업자를 대상으로 ‘2026...
사회/경제/교육
more +-
울진국유림관리소, 지자체와 더불어 하천·계곡 불법행위 합동 점검 실시
울진국유림관리소(소장 김기한)에서는 울진군청 산림과와 함께 최근 여름철 관광객 방문이 급증하는 ... -
국립울진해양과학관, ‘제1회 KOSM 국민안전점검단 모집’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울진해양과학관(관장 김외철, 이하 해양과학관)은 오는 8월 3일부터 21... -
후포초, ‘한수원 2026년 울진군 초등학생 방학 중 점심도시락 바우처 지원 사업’으로 시원한 방학 선물
후포초등학교(교장 김은희)는 이번 방학 동안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 본부의 지원으로 추진... -
울진산림항공관리소, 산림·소방 산불대응 협력 강화 위한 소통 간담회 개최
산림청 울진산림항공관리소(소장 안성철)는 7월 28일 관리소에서 산림·소방 유관기관 간 산불 ...
원자력소식
more +-
한울본부, 2027년도 한수원지원사업 공모 시행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오는 7월 31일(금)부터 8월 31... -
한울본부, 울진 소상공인 최대 5천만 원 금융지원
한울원자력본부가 경기침체와 소비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울진지역 소상공인의 경영 안정을 ... -
한울본부, 신한울3·4호기 건설현장 용접사 양성 하반기 교육생 모집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한수원, 울진군, 현대 컨소시엄이... -
고준위 방폐장 공모만 해도 ‘30억원’…정부, 파격 지원 검토
정부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 부지 공모에 참여하는 지방자치단체에 30억원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