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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면에서 ‘담뱃집 할매’로 불리는 김옥연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9.02.11 18:09
  • 글자크기설정

 

‘야야~ 담배 한갑 사오너라!’
지금은 애들이 담배를 사러 가면 법적으로 제재를 받기 때문에, 시키는 사람도 파는 사람도 거의 없어졌지만, 담배 심부름은 당연히 애들 몫이던 그런 때가 있었다. 

 

담배를 사다 주면서 ‘도대체 어떤 맛이 있기에 이걸 필까?’ 궁금해 하면서도, 어른들이 피던 그 지독스럽게 매운 담배 연기에 연신 콜록거리면서 기침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도 애들은 어른들 말씀에 담배 심부름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예전의 일도 아니다.
동네 골목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던 담뱃집 할아버지, 할머니가 담배를 사고 남은 잔돈을 느린 셈과 굼뜬 동작으로 헤아려 주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신문지와 같은 종이에 똘똘 말아서 피던 봉초인 풍년초와 학을 비롯해서 샘, 태양, 환희, 승리, 사슴, 나비, 금잔디, 샛별, 화랑, 백조, 건설, 파랑새, 백양, 금관, 탑, 상록수, 단오, 한강, 도라지, 백자, 새마을, 청자, 수정, 아리랑, 마라도, 장미, 한라산, 하나로, 거북선, 솔, 은하수, 한산도 등의 담배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나마 정겹던 담배 이름도 라일락(Lilac), 디스(THIS), 타임(TIME), 시즌(SEASONS), 비젼(VISION), 겟투(GET2), 레종(RAISON), 에쎄(ESSE), 클라우드 9(CLOUD 9), 시마(CIMA), 심플(Simple), 리치(RICH), 본(VONN), 마운트(MOUNT), 블랙잭(BlackJack), 보헴(BOHEM), 제스트(ZEST), 크럭스 엠(LO CRUX M) 등 이제는 외우기조차 어려운 외국 이름 일색으로 변했다.

 

담배 이름이 곧바로 의미를 알기도 힘든 외국식 이름으로 바뀌는 동안, 대부분 동네 골목 어귀에 위치해서 담배를 팔던 담뱃가게도 이제는 슈퍼나 편의점으로 바뀌었다.
시간의 흐름은 도저히 거부하려야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람도, 건물도, 세태도, 정서도 모든 것을 변하게 한다.


원남면 오산리의 정어리기름 공장을 하던 집에서 태어나 
기성면에서 ‘담뱃집 할매’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 남편이 군에 간 사이에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담뱃집을 시작한지 벌써 50여년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기성면 기성리에서 수십년째 담뱃가게를 겸한 구멍가게를 열고 있는 김옥연(여. 80세)씨는 원남면 오산3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산3리 동정항 인근에서 태어났지요. 친정아버지는 김씨 성에 봉자 일자를 썼고, 친정어머니는 장씨 성에 경자 분자를 사용했어요. 아버지는 제가 시집도 오기 전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90을 넘겨서 7~8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맏딸로 태어났고 밑으로 남동생 셋이 있습니다. 바로 밑의 남동생 영규는 울진에 살고 있고, 둘째 동생 영해는 마산, 막내 동생 창평이는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나이가 들다 보니까 동생들도 자주 못 만나지요. 저들도 우리 집에 자주 안 오고, 저도 저들 집에 자주 못가니... 형제들이란 서로 자주 오고 가고 해야 인정도 새삼스럽게 생기는 것인데, 이래저래 살다 가는 날이 제날이지요 뭐.”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태어나서 6.25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온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김옥연씨의 어린 시절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김씨의 친정아버지는 한때 원남면 오산리에 정어리기름 짜는 공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먹고 사는 것이야, 그 당시를 살았던 다른 사람들처럼 항상 어려웠지요. 그래도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그나마 먹고 살만했어요. 어릴 때 우리 친정집은 농사도 조금 지었고, 친정아버지는 원남 오산리에서 정어리기름 짜는 공장을 했습니다. 정어리기름 공장을 하면서, 정어리를 잡는 고깃배도 몇 척이나 가지고 있었으니 인근에서는 알부자 소리를 듣기도 했었지요. 아버지는 타고난 머리가 좋아서 정어리에서 기름을 짜내는 기술자를 따로 쓰지 않고 직접 기름을 짜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한번은 만주로 가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5촌 친척이 만주에서 무슨 공장을 세웠는데, 서무를 볼 사람이 없다고 해서 아버지가 몇 년 동안 만주로 건너가서 일한 거지요. 그런데 만주로 갔다가 몸이 아파서 다시 울진 원남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는 다시 정어리 공장을 계속 했는데, 어느 날은 정어리기름을 짜서 공장 한쪽에 가득 재 놓았는데 불이 난겁니다. 정어리기름에 불이 붙었으니 쉽게 꺼지지도 않고 삽시간에 공장을 거의 다 태웠지요. 결국 그 화병으로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다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어요. 그때가 제 나이 15살 되던 해인가, 그 다음해인가 됐었습니다.”
 

34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매화국민학교 졸업 

원남면 오산리에 살고 있던 김씨의 친정어머니와 외삼촌. 김씨의 친정어머니는 34살에 남편을 잃고 혼자가 되어 시부모 공양에 시동생 넷을 부양하며 힘들게 자식 4남매를 키웠다
김옥연씨는 지금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며, 아버지 생각만 하면 가슴 한쪽이 저려온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에 ‘지금까지 다들 힘들게 살아왔고, 아들이야 힘들어도 데리고 살면 되지만, 부모 성씨 하나 따서 딴 집으로 옮겨가서 살아야 하는 딸은 부디 곱게 키워서 시집을 보내라’고 어머니에게 유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따로 하나하나 불러서 유언을 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버지 같은 분이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버지 생각을 할 때마다 가슴부터 아프고 저리는 거야 말해서 무엇 하겠어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바로 밑에 남동생이 맏상주라고 섰는데, 조그마한 애가 상주를 했으니 무엇을 알았겠어요? 그건 또 얼마나 가슴 아팠던지... 상갓집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걸 보면서 또 울었지요.”    

 

김씨의 친정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김씨의 어머니 혼자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몸을 써 움직이면서 곤궁한 살림을 꾸려가야 했다.
“34살 젊은 나이에 친정어머니가 혼자되었지요. 집안에 우리 형제 4남매밖에 없었다면 그나마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가기가 수월했겠지요. 예전에는 한집에 3, 4대가 함께 모여 살았잖아요? 우리 4남매뿐만 아니라, 시동생 넷에다가 시아버지, 시어머니까지 한집에 살았으니 집안 살림을 도맡아서 이끌어가야 하는 어머니의 그 고단한 심사야 얼마나 갑갑했겠어요? 또 시동생이라고 있어서 장가를 보내 놓으면 얼마 못살고 여자가 집을 나가 버리지, 어머니 속 썩어 빠지는 일이야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요.” 

 

그래도 김옥연씨는 어린 시절에는 성실하게 농사도 짓고, 정어리기름 공장도 하던 아버지 밑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옛날에도 아버지는 ‘여자라도 제 이름 석자는 쓸 줄 알아야 한다’면서 저를 국민학교에 입학시켰어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특히 여학생들은 나이도 들고 다 커서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는 했는데, 저는 여덟살 제 나이에 매화국민학교에 입학했지요. 그리고 매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매화농민여중학교에 입학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요. 농민여중학교는 매화 시내 ‘안촌’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 무렵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겁니다. 끝내 농민여중학교는 입학하지 못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만족하고 살아야 했지요. 그래도 제 이름 석자 쓸 줄 알고, 간단한 셈은 배웠으니 그것으로 가게도 하면서 평생 먹고 살아온 거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는 농민여중학교 가기도 틀렸고, 저 혼자서 만주에 계신다는 친척 아저씨 공장으로 일하러 가려고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옷감으로 쓸 천이 귀할 때였는데, 무명으로 우와끼(상의 외투)도 짓고 준비는 다 끝냈는데 결국 만주로 떠나지는 못했지요. 남동생 셋도 국민학교만 졸업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중 한명은 중학교를 나왔던 거 같기도 하고, 그것도 오래된 일이라서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20살에 외가 친척 중매로 결혼…기성수협에 근무하던 남편 

김옥연씨의 남편 신수규씨. 김씨는 남편과 60년이나 부부로 살았지만 부부의 정이 뭔지를 모르고 살았다고 말한다
매화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매화농민여중학교를 입학하려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진학을 못하고, 한때는 만주로 떠날 준비까지 하다가 포기한 김옥연씨는 한동안 집에서 살림을 거들다가 20살에 기성면에서 수협에 다니던 신수규씨에게 시집을 오게 된다.
“친정어머니 친척 중에 한분이 중매를 했어요. 남편 되는 사람은 저보다 두 살 위였는데, 신수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원남 오산에서 기성으로 시집을 올 때,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차를 타고 왔어요. 남편은 그때 기성수협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성수협에서 직원이 장가든다고 특별하게 차를 한 대 내준 거지요. 그 차를 타고 이집까지 시집을 왔어요. 기성수협은 지금 기성중학교 자리에 있었는데,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이제는 드물 겁니다.” 

 

시집이라고 왔지만 시댁 살림이라고는 다 닳아서 얇아질 대로 얇아진 숟가락만 달랑 3개일 정도로 너무나 가난했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결혼해서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는 수가 많은 친정집 식구들과 아버지가 운영하던 정어리 공장의 인부들 뒷수발을 한다고 바빴지요. 그 많은 사람들의 밥이며, 빨래며 뒷수발하는 일에 몸서리가 났습니다. 그런 고생을 보다 못한 어머니가 시집을 가서라도 편하게 살라고 식구가 단출한 이 집으로 시집을 보낸 거지요. 식구가 적으면 고생을 덜할 거라고 하면서요. 그런데 시집이라고 와보니 그렇게도 가난하게 살수가 없었어요. 시집에는 시어머니, 신랑, 시누이 이렇게 3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딸린 농사도 하나도 없었어요. 부엌살림이라고는 닳아빠지고 때가 꼬질꼬질한 그릇 몇 개에 숟가락도 달랑 3개밖에 없고, 그것조차 얼마나 오래 써서 닳은 것인지 얇아질 대로 얇아져서 구멍이 날 정도였어요. 세상에 사람이 없이 살아도 어떻게 이 정도로 없이 사나 싶더라고요. 나중에 애를 낳아서 등에 업고 지붕이 낮은 오두막을 들락거리면 애 머리가 이리 부딪히고, 또 저리 부딪히고... 그때부터 한숨을 쉬기 시작한 것이, 이날 이때까지도 한숨 쉬고 삽니다. 참 죽도록 고생만 하면서 이날 이때까지 살아 왔니더.”

 

김옥연씨의 시어머니와 김씨의 손녀. 김씨의 시어머니는 93살에 세상을 떠났다
김옥연씨가 시집을 왔을 당시에 시아버지는 이미 나그네처럼 집을 떠나 이리저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시집을 와서 처음에는 시아버지가 안계신가 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살아계셨는데, 이미 한량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고 집에는 통 들어오지를 않았던 것이지요. 언젠가는 시아버지가 밖에서 딴 여자와 눈이 맞아서 바람을 피워 애기를 낳았는데, 제 자식보다도 나이가 적더라고요. 부전자전이라고 말들 하지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점은 우리 남편도 어찌나 빼다 박았는지, 남편의 행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당시에 수협 다닌다는 거 빼면, 가정도 전혀 돌보지 않았고, 자기 각시라고 예뻐할 줄도 모르고 그랬어요.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그런 우리 남편에게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하면‘야야, 너거 아버지도 그렇게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데, 너라도 정신 차리고 가정에 좀 충실해라’그럴 법도 한데, 단 한마디도 아들을 꾸짖거나 하지 않았지요. 풋각시때부터 그런 형편을 보지 않으려 해도 안 볼 수 없었으니 날마다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이고, 아들을 한마디도 꾸짖지 않는 시어머니에게조차 야속한 마음만 생기고... 그래도 결혼이라고 해서 살다보니 자식은 2남2녀를 두었습니다. 다들 출가해서 서울로 올라가서 살고 있지요.”  

 

6.25때 죽을 고비를 넘긴 남편…남편이 군에 간 뒤에 담배 장사 시작 

김씨의 남편 신수규씨는 기성수협에 다니던 도중에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고, 김씨는 전한다.
“남편이 기성수협에 다닐 당시에 6.25가 터졌지요. 그때 우리 남편은 기성수협에서 재무를 맡아서 보고 있었는데, 울진 지역이 인민군에게 함락되었어요. 인민군이 울진 지역에 미처 들어오기 직전에 기성수협의 재무를 맡아보던 남편은 피난을 떠나면서 기성수협의 금고를 함께 옮겨가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금고를 싣고 피난을 떠나던 남편이 인민군이 바짝 뒤따라오자 몸도 마음도 너무 다급했던지, 금고속의 돈은 엉뚱한 사람들에게 거저 나눠주다시피 하고 도망을 친 거지요. 그 일로 인민군들에게 된통 당했습니다. 그때는 수협 직원들도 공무원 대접을 받을 때였는데, 금고 속의 돈을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처음에는 기성면 다천이라는 곳에 숨어 지냈어요. 산꼭대기 으슥한 곳에 큰 단지를 묻어놓고 그 속에 숨어 지냈던 겁니다. 그때는 인민군들이 왜 그렇게도 공무원이라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지 모르겠어요. 6.25 전쟁 초기에 저는 원남면 오산리 친정집으로 잠깐 피난을 떠났다가 시댁으로 되돌아와서 죽 생활했어요. 친정집으로 피난을 떠났다가 돌아오니까 남편이 이미 다천에 숨어 지내더라고요. 아이고, 그때 인민군들은 어떤 공무원 한사람을 잡아와서 주민들이 보는데서 매달아 놓고 때리고 마구 패고, 정말 전쟁 때는 모든 사람들이 욕도 숱한 욕을 봤니더. 울진 지역에 밀고 내려온 인민군들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선 손을 검사했어요. 손바닥과 손등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손이 깨끗하거나 펜대를 오래 잡고 일 해온 손 같아 보이면 따로 불러내서 공무원인가 아닌가를 캐묻고는 했습니다. 공무원들은 대부분 펜대를 잡고 일하니까, 펜대를 오래 잡고 일한 공무원들 같으면 가운데 안쪽 손가락 마디에 굳은살이 박이고 그러잖아요?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은 공무원으로 분류되어 호되게 당하는 거지요. 남편은 6.25전쟁이 끝나자 말자 기성수협을 관두었습니다.” 

 

김씨의 남편 신수규씨는 서른살이 넘은 뒤늦은 나이에 해병대에 입대해서 4년 동안 군 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남편을 군에 징집하고서도 외동아들이라고 자꾸만 보류되고는 하더니, 결국은 해병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해병대 훈련을 끝마치고 경남 진해에서 잠깐 근무하다가 연평도에서 해병대 생활을 했지요. 남편은 4년 뒤에 군을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가정적이지는 못한 남편이었지만 수협에 근무하면서 주산을 제대로 배웠고, 원체 글씨 필체가 좋은 양반이어서 군에서는 인정을 받았었다고 하더라고요.” 

 

김씨는 남편 신수규씨가 군대에 간 사이에 처음으로 담배장사를 시작했다.
“신랑은 군에 늦게 갔다가 늦게 제대를 했지, 당장 먹고 살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다 쓰러져가는 시댁의 오두막 한쪽에서 담배장사를 시작했어요. 담배를 종류별로 진열하는 진열장도 하나 없이 그냥 방 한구석에다 담배를 쭉 펼쳐놓고 팔았어요. 처음에는 담배 정가에다가 몇푼씩 더 얹어서 팔고는 했었는데,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앞뒤 사정을 헤아려서 이해해 주었습니다. 고마운 일이지요. 산목숨이라 죽을 수는 없고, 그렇게 힘들게 먹고 살았어요. 그때 시댁 오두막은 아궁이에 나무를 때는 집이었지요. 시집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생전 나무라고는 해보지 않은 제가, 산에서 나무를 하고 그 나뭇단을 이고 집까지 나르기를 반복했더니, 어느 해던가 가운데 머리가 홀랑 벗겨지더군요. 나뭇단을 제대로 묶을 줄도 모르고, 대충 묶어서 져 날랐으니 나뭇단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머리가 벗겨져 나간 거지요. 당시만 해도 담배는 울진에서 짐꾼들이 져 나르면서 배달해 주었어요. 울진에서 담배를 등에 지고 출발해서 각 마을마다 배달해주는 짐꾼들은 마침 날이 저물 때 들리는 담뱃집이 잠을 자는 집이었어요. ‘니꾸사꾸’라고 불렀는데 요즘 배낭 같은 것에다 담배를 가득 넣어서 걸어 다니며 배달을 하는데, 우리 집에 식구가 적다고 배달 일꾼들이 자주 자고는 했었지요.”

머구리배…미역·오징어 건조, 모심기, 날품팔이… “배도 숱한 배 곯았니더” 

김옥연씨의 큰아들 신익한씨의 결혼식.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중권씨가 주례를 섰다
남편이 해병대에 가서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 담뱃가게를 시작한 김씨는, 남편이 군을 제대해서 집으로 돌아오자 머구리배를 운영하기 시작한다.
“해병대에 간 남편이 4년 만에 군을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머구리배를 시작했지요. 그러나 제가 머구리배를 시작할 때는 이미 울진군에서 머구리배 허가가 다 나간 뒤여서 무허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기성 앞마다의 짬을 일부 사서 머구리배를 운영하는데, 허가 있는 다른 머구리배들이 우리 배가 무허가인걸 알고는 자꾸만 우리 짬으로 밀고 들어오고는 했어요. 참 그런 배들과도 많이 싸웠습니다. 머구리배를 하면서는 돈도 참 많이 벌었어요. 벌기도 많이 벌었지만, 결국은 그 머구리배에 번 돈을 다 들이 밀었지요. 머구리배를 하면서부터는 오두막에 차려놓은 담뱃가게는 시어머니가 한동안 맡아서 했어요. 시어머니가 담뱃가게를 지키는 동안에 우리는 바다에 나가서 살고요. 눈만 뜨면 바다로 나가서 일을 하는데, 굶기를 정말 밥 먹듯이 하면서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요. 주로 전복, 해삼, 문어, 미역을 했어요. 설사 집에 음식이 있어도 바다에 나가서는 굶을 수밖에 없었으니, 배곯는 일이야 일도 아니었지요. 참 배도 숱한 배 곯았니더. 또 머구리들은 얼마나 성질이 까다롭니껴? 그때 우리 배에는 머구리 선원들이 8명 정도 일하고 있었는데, 머구리 한사람 다루기가 얼마나 힘이 들든지... 툭하면 보따리 싸서 간다고 하지를 않나... 머구리배를 시작한 첫해에는 돈도 많이 벌어서 논도 일곱 마지기를 샀어요. 자유당때 머구리배 허가권 때문에 입막음한다고 논 일곱 마지기를 홀라당 털어 넣기는 했지만요. 어떤 때는 무허가로 기성리 앞바다서 머구리배를 하기에는 눈치가 보이니까, 봉산리쪽 재너머까지 피해 다니면서 머구리배를 했었지요.” 

 

늦게 시작해서 허가도 없이 머구리배를 운영하면서 그래도 돈은 벌었다고 말하는 김옥연씨다.
“돈은 많이 벌었지요. 무허가로 하다 보니까, 걸핏하면 허가 있는 머구리배 사람들한테 싫은 소리도 듣고, 압력도 많이 받고는 했지만 돈은 벌었어요. 무허가로 하다보니까 울진군 수산과 직원들에게도 한번씩 돈 몇 푼씩 집어주고 그러면서... 그때는 그랬어요. 당시에 울진군청에 근무하던 수산과 직원들이야 지금 거의 죽고 없지요. 처음 머구리배를 할 때는 헌배 한척을 사서 하다가, 뒤에 새 배를 한척 따로 건조해서 또 했어요. 어쨌든 그럭저럭 한 10년 정도 머구리배를 했던 것 같네요. 그래도 머구리배를 하면서 돈을 좀 벌어서 35년 전쯤에 다 자빠져가는 오두막을 깨끗하게 헐고 이집을 새로 지었지요.” 

 

김옥연씨는 머구리배 이외에도 눈앞에 닥치는 대로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일을 하면서 가족들을 부양했다.
“머구리배를 하면서도 뱃일 말고도 부산에서 올라오는 미역을 받아서 발에 널어 말려서 팔고, 일꾼들 뒷수발하고 그랬지요. 아이고, 고생한 거 다 얘기하려면 몇날 몇일밤 새도 모자라니까 말도 하지 마소. 밤낮이 따로 없었어요. 머구리배에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돌아오면 밥해먹고, 꼬박 밤을 새워서 다시 미역을 한올 한올 펴서 발에다 널어 말리고는 했으니까. 그렇게 뼈 빠지게 일하면서 잘살아보려고 했는데, 잘 살아지지는 않고 자꾸 희한하고 엉뚱한 일들만 생기고는 하더라고요. 어디, 머구리배에 미역 건조뿐이던가요? 이웃동네 모심기며, 바느질도 수도 없이 했어요. 농사철이면 어김없이 이웃으로 모심기를 다녔고, 시어머니가 밤새 다듬이를 하면 저는 옆에서 바느질을 해서 품삯을 받고는 했습니다. 요즘이야 하루 일하면 일한만큼 일당으로 몇 만원을 쳐서 주잖아요? 그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모심기나 바느질을 해주면 좁쌀 반종지, 보리쌀 반되씩 그렇게 품삯을 쳐 주고는 했는데, 그것도 살기 어려우니 그저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남의 오징어와 미역 건조, 날품팔이, 모심기, 바느질, 어느 것 하나 안 해본 게 없네요. 정말이지 지금까지 단 한시도 놀아 본적이 없습니다. 참말 안 해본일 없고, 남자가 할 일까지 다했고... 그렇게 몸뚱이를 힘들게 굴리며 세상을 살아오다 보니 결국 무릎관절은 다 닳아 없어지고, 사지육신 안 아픈데 없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요.”
 

김옥연씨의 친정어머니 칠순잔치에 모인 친정 식구들

 

“꼬박 60년이나 부부로 살았지만, 부부의 정이 뭔지를 모르고 살았어요”
김씨는 수년전에 무릎 관절 수술만 3번이나 했다.
“무릎 관절이 아파서 서울 큰 병원에서 수술만 3번이나 했어요. 심장이 약하다고 마취를 함부로 할 수가 없어서 한꺼번에 양쪽 무릎 관절을 다 수술하지 못하고, 이쪽저쪽 3번에 걸쳐 나누어서 한 거지요. 저도 제 몸이 그렇게까지 망가진 줄은 몰랐는데, 영감이 몸이 아파서 서울병원에 있을 때 저도 몸이 안 좋은걸 알게 되었지요. 우리 영감은 당뇨병에 췌장에 속병을 말도 못하게 앓아서 자식들이 살고 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 올라가서 처음에는 응급실에 20일 정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고, 또 입원했다가 퇴원하고를 2년 동안이나 반복했지요. 서울 병원서 2년이나 삐대다가 결국 포기하고 내려왔지요. 병원에 있을 때 제가 영감에게 얘기했어요. 당신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나는 지금 죽으면 한이 많다’고요. 그때 병원 간호사들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할아버지가 할머니 고생을 많이 시킨 모양입니다’그랬지요. 그때 우리 영감이 한마디 어렵게 한마디 한 것이 지금도 생생합니다.‘그래, 한평생 당신이 참 고생 많이 했다’고요. 그래도 영감은 안 됩니다. 평생 영감은 그만큼 저를 고생만 시켰어요. 영감이 입원해 있는 동안 저도 다리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만큼 엄청시리 아팠는데, 병원에 검사하러 가서 심장을 포함해서 몸 어디랄 것도 없이 장기가 모두 다 약해진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영감은 지난 3월 달에 저 세상으로 앞서 갔어요.” 

 

둘째아들 결혼식 폐백식에 나란히 앉은 김옥연씨 부부
김씨는 살아생전에 남편이 하도 속을 많이 썩여서 세상을 떠날 때조차도 울지 않았다고 전해준다.
“아, 영감이 죽었는데 울기는 왜 울어요? 입관할 때 내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묘도 안 쓰고 화장했어요. 영감이 저 세상으로 앞서 가는데, 뭐가 유달리 안타까워서 모시고 있는교? 화장하고 말았지. 영감하고는 지난 3월에 돌아갈 때까지 꼬박 60년 동안이나 부부로 살았었지만, 부부의 정이 뭔지를 모르고 살았어요. 남보다도 오히려 더 멀게 살았지요. 영감은 살아생전에 돈만 생기면 마작 같은 노름판으로 쫓아다니고, 저하고는 남 보듯이 했어요. ‘집안 살림과 애들은 니가 맡아서 하고, 나는 나대로 산다’, 뭐 그렇게 평생 살다가 갔지요. 우리 영감은 어디서 함께 일하다가도 배가 고파오면 저에게 같이 밥 먹고 하자’는 말 한마디도 안했어요. 그냥 자기 혼자 들어가서 밥 먹고 나왔지. 그 모양으로 살았으니 무슨 새삼스런 부부의 정이 있었겠니껴?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게 살았지.” 

 

김옥연씨는 자신의 나이 15~16살 때 아버지 대신 차라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더라면, 평생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살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어떤 때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 못할 말로 제 나이 열대여섯 살 때 아버지 대신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다면 비록 새엄마 밑에서 자라더라도 이런 곳에 시집을 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요. 누구보다도 끔찍이 외동딸이던 저를 아껴주던 아버지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한순간에 가세가 기울어서 제가 이렇게 지지리도 못사는 집으로 시집을 와서 평생 동안 고생하며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는 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더라면 그래도 아버지가 돈을 잘 벌었으니 우리 집 형편도 기울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요. 그랬다면 시집도 좀 더 여유 있는 집으로 갈수 있었을 테고, 고생도 덜할 수 있었겠지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서 할 말은 아니지만 얼마나 죽어라고 고생만 하고 살아왔으면 가끔씩 이런 생각을 다했겠어요? 어릴 적에 딸은 친정 성씨를 하나 따가는 것이니까, 곱게 키워서 시집을 보내야 한다’고 늘상 얘기하던 아버지를 보다가, 우리 영감 같은 사람과 평생 살아왔으니 기분이 어떻겠니껴...? 우리 영감은 여자들도 숱한 다른 여자들을 보고는 했어요. 밖에 나가면 대우를 받았지만, 집안에서는 절대 대우를 못 받았지요. 그래도 영감이 체격도 커고 잘 생기기도 했어요.”

 

자유당때 십여년 기성면 부녀회장 맡아…선거운동의 압력 

김옥연씨의 갑장 친구 한응랑씨. 김씨와 이웃해 살면서 오랜 세월 말동무로 지내오고 있다
김옥연씨는 김광준씨와 전만중씨가 국회의원을 할 당시에 기성면 부녀회장을 십여년 맡아서 일했었다고 전해준다.
“김광준씨와 전만중씨가 국회의원을 했던 자유당때 기성면 부녀회장을 십년정도 맡아서 했습니다. 당시에는 각 마을 부녀회장은 당연히 자유당의 선거운동원으로도 활동했지요. 전만중씨가 자유당을 타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을 지냈잖아요? 선거를 앞두고서는 부녀회장이 매일 선거운동을 나가지 않으면 곳곳에서 억압과 협박이 들어오고 대단했었지요. 어느 해인가 선거가 한창이던 때에 맏이를 낳았는데 홍역으로 열이 펄펄 나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데도, 선거운동 안 나온다고 하도 족쳐서 홍역 앓는 애를 집에 놔두고 선거운동을 다닌 적도 있어요. 개코도, 지나고 나면 아무 득도 못 보면서 그러고 다녔니더. 항상 압력에 눌려서 선거 운동을 했고, 또 모두들 힘들게 권력에 눌려서 숨죽이고 살았던 시절이었습니다. 너무 힘들게 살아 온 것은 죽어도 안 잊히지요. 그때 울진군 각 읍면에는 자유당 읍면단위 위원장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가 머구리배를 무허가로 하는 것을 알고는, 머구리배를 계속 하고 싶냐 느니, 그만두고 싶냐 느니 항상 그런 식으로 치사하게 압력을 넣고는 했지요. 자유당 정권 때는 울진군 자유당 위원장의 위세가 정말 대단했지요. 어떤 때는 울진군 위원장이 제가 선거운동에 비협조적이라면서, 울진군이나 기성면에서 저에게 날아오는 각종 공문들까지 다 중간에 가로채 가고는 했어요. 자기네 말을 잘 듣지 않는다면서요. 그 당시는 자유당이 힘을 쓸 때라서 울진군수도 자유당 위원장에게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군수야 관선 군수고, 자유당 울진군 위원장은 국회의원이 골라 쓰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위세가 참 대단했지요. 한평생 죽도록 고생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억압에 눌려서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걸 장사라고, 바랗코 진종일 앉아 있으니 골치가 아프니더” 

수년전부터 울진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는데, 작은 시골마을인 기성면의 경우는 인구 하한 폭이 더욱 심각하다.
“작은 마을 골목 한 귀퉁이에서 담배와 음료수, 과자 조금씩 가져다 놓고 파는 이런 구멍가게들은 조만간 전부 사라질 겁니다. 하루 진종일 이 골목을 지키고 앉아 있어봐야 사람 구경하기가 힘이 들 정도니까요. 원래 기성리에는 20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100여 가구 정도 살 겁니다. 빈집이 수두룩하고요. 골목길을 가끔씩 지나다니는 것은 고양이뿐이지요. 하루 종일 이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어봐야 담배 한갑, 과자 한 봉지 팔기 힘들지요. 사람이 없어요. 애들은 더욱이 구경조차 할 수가 없고요. 뭐한다고 한때 산아제한을 시켜서... 지금이야 정부에서 더 낳으라고 한다고 젊은 사람들이 애를 막 낳니껴? 이 구멍가게도 제가 가면 같이 가는 거지. 어느 때부턴가 기성면은 빈집이 점점 늘어나고, 집안에 노인들밖에 없으니 누가 밖에서 불러도 빨리 못나갈 형편이 됐지요. 늙은 사람들이 집밖에서 누가 부른다고 빨리 나설 수 있어야지요. 아이고, 이것저것 자세히 적고 쓰지 마소. 다 지난 일인데요, 뭐. 지금 와서 쓴다고 뭐하겠니껴?” 

 

 김옥연씨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담뱃가게가 한때는 기성면의 종로’였다며 웃는다.어요. 예전에는 이곳 앞쪽의 바닷가에 비해, 이곳이 땅값도 제일 많이 갔고, 집값도 월등히 높았습니다. 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가게가 기성의 종로다 보니 마을회관이 생기기 전만 해도 오가는 사람들이 이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낮이나 밤이나 많이도 모여 들었지요. 지금이야 누가 이런 집을 사겠어요? 제가 죽으면 같이 끝나는 거지. 보소, 손님이 있는지...? 이걸 장사라고 바랗코 진종일 이래 앉아 있으니, 골치가 아프니더.”


기성면에서 ‘담뱃집 할매’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김옥연씨.  
지금까지 80여년 살아온 삶이 늘 고단하고 힘들었지만, 김옥연씨는 그나마 자식들이 엄마에게 잘해서 살맛을 잃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이제는 다 커서 나이든 자식들이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새벽 6시가 되면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간밤에 아무 일이 없었냐?’며 안부를 묻고는 한다고 전해준다.
“자식들이야 물론이고, 며느리며 사위들도 저에게는 너무 잘하지요. 자랑 같지만, 기성면 인근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요. 남의 자식들은 이렇네 저렇네 하며 온갖 얘기를 다 듣고 살지만, 우리 자식들 같이 엄마에게 정성껏 잘하는 애들도 찾아보기가 힘들어요. 남편 복이 없으면 자식복도 없다고 다들 말하지만 저는 다행스럽게도 예외지요.” 

 

그렇더라도 사람이 80평생을 살아오다 보니까, 세상만사 모든 일이 마음 먹은 대로만은 되지 않더라는 김옥연씨.
이미 세상을 떠난 영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들이라도 벌여놓은 사업이 잘되면 좋으련만 꼭 그렇지만도 못하다고 오늘도 한숨을 내쉬는 김옥연씨다.

 
기성리 삼거리에 위치한 김옥연씨의 담뱃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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