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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노인(Santiago)’의 열정으로 노년을 사는 김재윤씨 이야기

  • 이명동기자 기자
  • 입력 2009.03.11 16:25
  • 글자크기설정

 

우리가 지금 몸담아 살고 있는 사회는 가벼운 말다툼 끝이라도 항상 “당신, 나이가 몇 살이야?”, “도대체 위아래도 없네!”, “새파란 녀석이, 너는 형님과 부모도 없나?”하며 따져 묻기가 일쑤이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를 꼬치꼬치 캐묻고, 종국에는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나이순으로 위와 아래를 계산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찬물마저 위아래가 있다고 강요당해온 예의바른 우리나라가 아닌가?
그렇지만 또 누구나 알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든지 먹게 되는 나이보다는 제대로 나이 먹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결국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평생 보람 있는 일 한가지도 못해보고 빈둥거리면서 세월 따라 먹어온 나이는 자랑스러운 것도 유별난 감투도 아닌 것을.
한살, 두살 점점 늘어나는 나이와 함께 지난 세월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연륜, 그 경험과 지혜, 부드러움과 너그러움이 그 사람의 외양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풍겨 나올 때 우리는 어른들을 원만하게 받들게 되고 존경하게 된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의 그런 존경과 공경은 금세 어른들의 자연스러운 권위로 연결되면서 다시 한번 우러러보게 만든다. 

 

일평생 지속된 치열한 노동으로 하얗게 센 머리와 군데군데 얼룩진 검버섯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한없이 자애롭고 너그러운 어른을 대하면‘나도 저렇게 늙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한다.
결국 어떤 한 사람이 맞닥뜨리게 되는 노년의 모습은 다른 사람을 탓할 수 없는 자기 삶의 결과물이며 흔적에 다름 아니다. 

 

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
바다에 나간 지 84일 동안 단 한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다가 85일 만에 걸프만에 도착한 산티아고(Santiago) 노인이 큰 청새치를 잡게 되지만, 결국 모두 다 상어들에게 빼앗기고 허망하게 실패와 좌절을 맛보면서도 또 다시 아프리카 해변의 사자들 꿈을 꾸는...    젊은 시절 각자의 일을 쫓아서 열심히 살고,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또 다른 꿈을 꾸면서 열심히 살아가는 노인. 

 

그런 어른들을 대하면 끝없는 실패와 좌절을 맛보면서도 결코 열정의 끈을 놓지 않는 산티아고(Santiago) 노인이 생각난다.
그가 마지막으로 꿈꾼 아프리카의 포효하는 사자들이 생각난다.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히게 되는 실패와 그에 따른 좌절 앞에 힘없이 금방 무너지고 마는 요즘 세태를 대하면, 우직하기만 한 산티아고 노인이 그리워진다. 

 

제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놀라서 비명을 지르거나 피하지 않고 묵묵하게 고통을 참고 인내하는 삶의 태도, 그것이 우리가 이 시대에 노인을 그리워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일제강점기 삼척에서 태어나… 삼척공립보통학교…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 

1935년 김씨의 부친 김리원(金利元)씨가 삼척군 삼척읍 삼척공립보통학교에 재직할 당시

1944년 8월 어느날, 7형제가 근남면 수산리 집앞에 나란히 서서
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울진읍 월변에서 바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김재윤(金在潤. 82세)씨는 삼척에서 태어났다.
“삼척읍 성북리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정시대에 부친께서 강원 도립 사범이던 춘천사범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어요. 지금이야 삼척시가 되었지만, 삼척시가 삼척읍일 당시에 부친이 그곳에서 근무했지요. 당연히 울진군도 행정구역상 강원도에 속해 있을 때였고요. 삼척에서 태어난 저는 삼척에서 삼척공립보통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부친이 교장으로 승진을 해서 인제군 창촌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겨가게 되었어요. 아버지를 따라 저도 인제군 창촌으로 옮겨가서 4학년은 창촌보통학교를 다녔어요. 그러다가 다시 아버지가 평창군 봉평보통학교로 전임되어 갔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 전부 다 울진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편제도 아주 복잡했어요. 보통학교는 일반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가 있었는데, 갑종과 을종으로 분류되어서 갑종은 5년제였고, 을종은 3년제였지요.” 

 

울진으로 내려온 김재윤씨는 울진공립보통학교에 전학해서 5, 6학년을 마치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아버지가 평창군 봉평보통학교 교장으로 전임되고 난 다음에 우리 가족은 모두 울진으로 내려왔습니다. 저는 울진보통학교에 5학년으로 전학했지요. 울진보통학교는 제가 5학년 때 전학했을 때는 울진공립보통학교였다가, 6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에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어요.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는 현재의 울진초등학교인데, 그때는 울진군청 앞 예전의 울진교육청 자리가 남소학교로써 일본 애들이 다니던 학교였고,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는 조선아이들만 학생으로 다녔지요.” 

 

김씨의 원래 고향은 근남면 수산리이다.

“제가 태어나기는 삼척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원래 고향은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입니다. 선친들 고향이 근남면 수산리이고, 수산리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포함해 일가 친척 분들이 모두 터전을 일구며 살고 있었거든요. 울진으로 내려온 저는 근남면 수산리에서 울진보통학교로 통학을 했습니다. 자갈이 잔뜩 깔려서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따라서 그렇게 통학을 했어요. 그때 함께 학교를 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서너명밖에 되지 않아요. 작년 한해만 하더라도 두명이나 운명을 달리 했으니까요.” 

 

일제강점기에 춘천사범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일평생 교직에 근무했던 김씨의 아버지는 김리원(金利元)씨다.
“아버지 함자는 김씨(金氏) 성에 리(利)자 원(元)자를 썼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기억이 없습니다. 너무 사적인 일이어서 사실 썩 내키지 않는 얘기기도 한데, 어머니는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얼굴도 모르고 사진 한장 남아 있지를 않아요. 그래도 한때 사진이 있기는 했던 모양이든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아버지가 다 불태워버린 모양입니다. 저와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잃고 계모(繼母)손에서 컸습니다. 그래도 우리들의 의붓어머니는 여느 계모들과는 달리 훌륭한 분이었어요. 그 속이야 모르지만, 눈앞에 보이기에는 배다른 자식들 간의 차별도 없었고, 우리들에게도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를 빼고 계모인 어머니와 함께 근남면 수산리 본가로 형제들이 모두 다 내려오고 나서부터는 부모님보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어느 집안이든지 마찬가지겠지만, 저희 할머니와 할아버지께서도 손주들 사랑이 지극했습니다. 용돈을 한두푼씩 타 쓰더라도 꼭 할아버지에게 얻어 쓰고는 했지요.”

 

1944년 12월 22일 춘천공립농업학교 졸업… 시시때때로 바뀌던 학교 편제 

춘천공립농업학교의 울진 출신 재학생들(1941.12.21)

김씨는 1944년 12월 22일 춘천공립농업학교를 졸업했다
울진군 근남면 수산리로 내려와서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춘천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근남면 수산리로 내려와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울진동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춘천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춘천농업학교에 진학할 당시의 입학시험 경쟁률이 4.6대 1이었는데, 울진군 출신중에서는 저 혼자 시험에 합격해서 입학하게 되었어요. 그 당시에 형님이 춘천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다니고 있었지요. 춘천농업학교는 조선조 말 고종황제 때 세운 학교였는데, 학교의 각종 시설이 당시로서는 최신식으로 갖추어져 있었어요. 그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의 강원도 도지사격이던 도장관이 춘천농업학교 교장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춘천농업학교 3학년까지는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4, 5학년은 학교 밖으로 나와서 하숙집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학교생활은 온갖 규율이 엄청날 정도로 엄격했어요. 기숙사에는 실장 제도가 있었습니다. 기숙사 각 방의 실장은 4학년이 맡고 있었고, 기숙사 전체에‘료(りょう, 寮)’라는 단위가 있었는데, 춘천농업학교 기숙사는 전체가 5료로 나뉘어져 있었고,‘료장’은 5학년이 맡았습니다. 당시 춘천농업학교는 일반적으로 3학년까지는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4, 5학년이 되면 하숙집을 얻어 나와서 생활하고는 했어요. 실장과 료장이 4학년과 5학년이다 보니까, 4, 5학년이 계속 기숙사에 남아 있게 되면, 같은 학년이 통제함에 따라서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그렇게 되면 학교 기숙사의 규율과 위계질서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단점이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어쨌든 저는 춘천농업학교의 기숙사 생활 3년을 통해 인생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배웠습니다. 선후배들 간의 질서와 존중과 함께 무엇보다 진한 친구들과의 값진 우정을 배울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일정하게 짜인 틀 속에서 오는 안정감과 질서정연한 규칙을 통해 얻게 되는 여유와 편안함은 덤으로 얻을 수 있었지요.” 

 

일제강점기에는 학교의 각종 조직과 편제가 시시때때로 바뀌게 된다.
“춘천농업학교도 제가 다닐 때까지는 5학년제로 운영되다가 졸업하면서 4년제로 바뀌게 되었어요. 1년이 단축된 거지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그대로 두면 저희 동기생들이 1년 후배들과 같이 졸업하게 되는데요. 그래서 저희 동기생들은 원래는 다음해 3월에 졸업해야 하는데, 그 전해의 12월로 앞당겨서 졸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다음해 3월에 저희 1년 후배들이 또 졸업을 하게 되었고요. 3개월 만에 한 학교에서 졸업식을 두 번 하게 된 거지요. 저희 동기생들은 1944년 12월 22일에 졸업을 했습니다.”


울진군청 산림주사로 근무… 논 한마지기 100원, 소 한마리 40원 할 때 초봉 45원 받아 

1944년 12월에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한 김재윤씨는 산림주사 시험을 거쳐 한동안 울진군청에서 산림주사로 근무하게 된다.
“그때는 너나 할 것 없이 한 집안의 모든 것이 장남을 위주로 계획되고 또 돌아갔어요.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아버지께서 부르시더니, ‘더 이상 너를 상급학교에 진학시킬 생각이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너는 장남이 아니니까,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한 것을 끝으로 사회에 나가서 스스로 살아가라는 의미였지요. 어쨌든 저는 그때 아버지 얘기를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때마침 1944년 12월 22일에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산림주사 시험이 있어서 그 시험에 응시했는데 합격했어요. 그때가 졸업하고 며칠 뒤인 12월 10일인가, 11일인가 그랬지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니까 곧장 발령이 나더군요. 고향인 울진군청 권업과 산림계로 발령이 났어요. 권업과는 지금의 산업과와 같은 업무를 보는 곳이었습니다. 처음에 지방주사보로 시작했는데, 일정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주사가 되었지요. 산림주사 시험에 합격하고 난 다음에 울진군청에서 산림주사보로 근무하면서 첫 월급으로 45원을 받았습니다. 45원은 그 당시에 엄청난 거금이었어요. 그때는 보통 초봉이 중학교를 나오면 38원, 사범학교를 졸업한 초임 교사가 42원 정도 받을 수 있었고, 일반 면서기 초봉이 20원 전후 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받은 초봉 45원이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래봐야 제 나이가 겨우 18~19살이었을 때니까. 당시에는 춘천농업학교를 그만큼 알아주었다는 얘기지요. 일단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졸업생 전원이 취직할 수 있을 만큼, 절대로 취업걱정은 없었던 학교였으니까요. 얼마쯤의 시간이 흘러서 주사보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주사가 되고 나니까 월급이 70원으로 올랐습니다. 그때는 논 한마지기가 100원 정도 했고, 소 한마리 값이 40원씩 했었습니다. 산림주사 한달 월급 70원이면 소를 한 마리 사고도 남았고, 조금만 더 보태면 논 한마지기를 살 수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는 월급을 받아도 마땅히 쓸 곳도 없었지요. 그 당시에 울진군청에 함께 근무했던 정규직 직원 가운데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산림주사 시험을 거쳐 울진군청 권업과 산림계 주사로 근무하던 김씨는 8.15 해방 후에 울진군청 공무원을 그만두게 된다.  
“월급은 많이 받았지만 산림주사 업무가 도무지 제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직업에 대한 성취감이나 보람도 별다르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 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오면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변함없이‘남들에게 항상 후하게 대해라. 후한 끝에 열매 맺는다’는 말씀을 하고는 했어요. 지금은 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당시의 산림주사는 사법권이 있어서 무단 벌채나 벌목을 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체포해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과 힘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항상 그런 점을 염려했던 모양입니다.”

 

산림주사 시절의 인연, 제동학교 설립자 장성업씨…백암온천장을 운영하던 일본인 ‘야자끼 다께오’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의 울진군청 산림주사 일이었지만, 그래도 당시가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다고 김씨는 전한다.
“일제시대에 운행하던 자동차는 모두 목탄차(木炭車)였습니다. 차체 한쪽에다 숯불을 피우고 그 숯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로 달리는 목탄차였습니다. 그 목탄차에서 피우는 숯을 제조하고 공급하는 일이 산림주사인 제 소관이었지요. 그러니 자연히 산림주사 권한이 셀 수밖에요. 울진군내에서 길을 가다가 아무 목탄차나 세우면 서지 않는 차가 없었어요. 당시에 산림주사는 1911년 조선총독부 제령 제10호로 발동된 ‘조선산림령’이라는 법에 따라 산림을 보호하고, 각종 산림정책을 추진하고는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울진군청 산림주사로 근무했던 김씨는 근남 제동학교의 설립자인 고(故) 장성업씨와의 특별한 인연도 전해준다.
“울진군청에 근무할 당시에는 군청에서 지정해놓은 목상(木商, 재목상)이 6명 있었어요. 그중 한사람이 사병룡이라는 목상이었습니다. 사병룡씨는 아주 큰 목상이었는데, 그 목상 밑에서 장성업씨가 일하고 있었지요. 목상들은 국유림을 제외한 사유림과 공유림을 허가받아서 대량으로 벌채를 하고는 했는데, 그 허가가 제 손을 거쳐서 나가다 보니까 항상 저는 목상들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는 입장에 설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 울진 시장 안에는 ‘천향관’이라고 아주 유명한 요정이 있었는데, 목상들이 아주 귀찮을 정도로 저를 그곳으로 불러내서 대접하고는 했어요. 가끔 사병룡씨 초대를 받아서‘천향관’에 가는 날이면, 사병룡씨와 저는 방으로 들어가서 음식과 술판을 벌이고는 했어요. 그때 장성업씨가 그런 일을 주선해주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장성업씨와는 참 가깝게 지냈습니다. 제가 결코 우쭐대거나 잘난 체하지도 않았고, 괜히 으스댈 이유도 없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참 오래된 얘기네요.” 

 

김씨는 울진군청에서 산림주사로 근무할 당시의 목상 사병룡씨 이야기 외에 일본인 목상 ‘야자끼 다께오’씨에 관한 얘기 한 토막도 들려준다.
“일본인 목상 중에 야자끼 다께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목상을 하면서 백암온천에서 온천장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백암온천에는 온천장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대여섯평 되는 온천탕에서 몸을 씻을 때면 수질이 너무 뛰어나서 계란이 썩는 듯 한 유황냄새가 심하게 코를 찔러 욕탕 안에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지요. 지금이야 백암온천 수질도 많이 떨어졌지만요. 야자끼 다께오라는 목상은 온천탕과 여관을 지어서 함께 영업을 했지요. 당시에는 전기도 없었을 때니까 밤이 되면 남폿불을 밝히고 영업을 했는데, 지금과는 달리 그것도 나름대로 온천으로서의 별난 운치가 있었어요.”

 

해방 후 문맹자들에게 야학(夜學) 가르쳐… 고(故) 산해(山海) 전영경(田永璟) 선생과의 인연 

고(故) 산해(山海) 전영경(田永璟) 선생이 김씨에게 보낸 엽서, 김씨는 근남면 수산리에서 야학을 할 당시에 산해선생과 인연을 맺었다
해방 후에 울진군청을 그만 둔 김씨는 한동안 근남면 동사(동네 마을회관)에서 문맹자들에게 야학(夜學)을 통해 글을 가르치게 된다.
“해방이 되고 울진군청 산림주사를 그만 두었지요. 뭐, 그때는 사표고 뭐고 없었습니다. 해방 후라서 전국이 한창 어수선할 때였으니 사표도 없이 출근을 안 하면 그만이었지요. 산림주사 일이 생리에도 안 맞고 해서 그만 두게 된 거지요.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한 뒤 산림주사 시험을 치고 직장을 잡아서 그냥 한동안 열심히 일했다는 거, 그것뿐이었어요. 울진군청을 관두고서 한동안 동네 동사에다 문
맹자들을 모아서 야학 수업을 하면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저보다 나이든 사람들도 있었고, 동갑내기나 나이 어린 사람들도 있었지요. 남녀노소 합해서 한 30~40명 쯤 가르쳤던 거 같습니다.” 

 

김재윤씨는 울진군청 공무원을 관두고 근남면 수산리에서 야학을 하면서 고(故) 산해(山海) 전영경(田永璟) 선생과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된다.
“산해선생의 후학양성을 위한 교육에 대한 애정은 남달랐습니다. 제가 야학을 한지 얼마 안돼서 산해 전영경 선생을 뵙게 되었지요. 젊은 사람이 고향땅에서 야학을 한다고 고생이 많다며 격려도 해주고, 저를 아껴 주었습니다. 산해 선생이 저에게 보내준 엽서를 지금까지 잘 보관하고 있어요. 이 엽서에 얽힌 단상은 올해 안으로 발간될 예정인 산해선생 유집에 기고될 계획입니다. 산해선생과는 젊은 시절 야학을 하면서 알게 된 이후 근 30여 년간 그 인연이 지속되었습니다.”  

 

애국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故) 산해(山海) 전영경(田永璟) 선생은 1896년 울진읍 고성리 가원에서 출생했고, 1919년 원산 장날의 3.1만세 항일운동, 우리 동맹 희사금(同盟 喜捨金), 고려혁명당(高麗 革命黨) 사건, 조선공작당(朝鮮工作黨) 사건 등에 연류 되면서 5년여 간의 옥고를 치르는 등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는 울진에 거주하면서 백운 주진수(白雲 朱鎭洙) 선생의 기념비 건립, 실록 발간(1959년) 사업,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의 기념비 건립 사업 등을 주도했고, 울진중학교와 울진문화원 설립에도 깊이 참여하는 한편, 1971년도에는 울진군지를 발간하는 등 지역사회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이와 관련해서 지역의 명망 있는 원로 60여명은 담양 전씨(潭陽 田氏) 종중(宗中)을 중심으로 지난해 4월 16일「산해 전영경 선생 유집 발간 추진위원회」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있고, 올해 안으로 유집(遺集)을 발간할 예정이다.

 

노음초등학교 교사… 국립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부에 입학 

국립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부에 재학할 당시에 교문옆에서

울진군청 산림주사를 관두고 근남 수산에서 1년 6개월여 야학을 가르치던 김씨는 노음국민학교 교사로 취직한다.
“아무래도 야학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야학을 하는 틈틈이 책보를 메고 학교로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왕 가르칠 거면 제대로 한번 가르쳐보자 싶더군요. 그래서 노음초등학교 교사로 들어갔지요. 5년제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했으니 교사 자격은 이미 충분히 갖추었고요. 따로 시험을 거치지는 않았고, 당시가 미국 군정기였고 강원도지사 발령으로 교사가 되었어요. 그 당시에 노음국민학교 교장이 김병성씨였는데, 전 경북도부지사를 지낸 김정규씨의 부친입니다. 김병성교장은 참으로 훌륭하고 존경받을만한 분이었지요. 제가 존경하는 교육자가 세명 있어요. 김병성 교장, 방병주교장, 이시백교장이지요. 방병주 교장은 울진군 장학사와 교육감을 거쳐 제동중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던 분입니다. 또 경성 법정학교 법과를 졸업한 이시백교장은 1970년에 행은(杏隱) 장성업(張聖業)씨가 사재를 희사해서 제동실업학교를 설립한 다음에 초대 교장을 지냈던 분입니다. 이 세분은 아무리 존경해도 결코 넘침이 없는 분들입니다. 노음국민학교에서 4학년 담임을 맡아서 1년 정도 교사생활을 했습니다.” 

 

노음국민학교 교사로 1년여를 재직한 김재윤씨는 일년치 월급을 모아서 서울로 상경한다.
“월급을 꼬박꼬박 모아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춘천농업학교를 졸업한 동기생들은 이미 대부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친구들이‘재윤아, 시골서 선생을 하느니 빨리 서울로 올라와서 대학을 가라’며 많이들 권유했습니다. 제 딴에는 꽤나 고심을 했는데, 좀 더 많이 배워서 학생들을 가르치자 싶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올라갔던지 학교에 사표도 제출하지 못했고, 가르치던 아이들과 인사도 없이 내빼다시피 서울로 올라갔어요. 당시만 해도 대학을 가려면 5년제 학교가 아닌 6년제 학교를 나와야 입학 자격이 주어지던 때라서, 일단 과학과를 2년 수료한 다음에 자격을 갖추어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임학부에 입학했지요. 당시 서울대의 정확한 명칭은 ‘국립서울대학교’입니다.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아주 귀할 때여서 대학생이라면 알아주었고, 특히 서울대학교라면 더 알아주었지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서 대학을 다니게 된 김씨는 동두천과 의정부 등지에서 고무신과 백열전구 등 남한에서 판매되는 물건을 떼다가 3.8선 부근에서 북한산 어류인 명태와 오징어 등으로 바꾸어 와서 되파는 식으로 대학 학자금과 용돈을 벌어 쓴다.
“그때만 해도 미군부대가 모여 있던 동두천과 의정부는 아주 한촌이었어요. 때마침 이북서 넘어왔던 춘천공립농업학교 동기생인 ‘노준호’라는 친구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업경제학부에 다니고 있었지요. 그 친구와 3.8선까지 올라가서 이북서 넘어온 북한산 명태와 동태, 오징어 등의 어류와 남한서 배낭에 넣어서 가지고 간 미국 웨스팅하우스제 백열전구, 금강표 고무신을 물물교환해서 남대문 시장등지에서 되파는 방법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학교에 다니면서요. 어떤 때는 수건을 몇 백 장씩 찍어서 각 학교별 체육 대회 때 팔기도 하고, 그렇게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사가 생각보다는 이문이 많이 남았어요. 학교에 다니면서 한번씩 근남 수산리 집으로 내려올 때의 왕복차비도 제가 직접 번 돈으로 충당하고는 했으니까요. 노음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에 서울로 올라갈 때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겠다면서 부모님께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상태였고, 그때 마침 아버지는 동생 재숙이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보내고 있을 때여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저는 말 그대로 고학을 한 셈입니다.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함께 장사도 하고 했던 노준호와 최재석이라는 친구는 목숨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남들이 얘기하는 친구사이의 우정에 관해서는 한번도 부러워 해본 적이 없습니다.”

 

동갑내기 유순희씨와 결혼... 대학3학년 때 발발한 6.25전쟁... 인민의용군 강제 징집

1949년 11월 24일 동갑내기 유순희씨와의 결혼식, 김씨와 유씨는 노음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만났다
김씨는 대학에 재학할 당시에 동갑내기 유순희씨를 만나서 결혼한다.
“내자는 흔히들 말루 유부자라고 알고 있는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여고를 나왔어요. 유부자라는 명성을 쌓은 유문종(劉文鍾)씨가 내자의 친조부가 되고 유영숙(劉永淑)씨가 친아버지입니다. 제가 울진군청 산림주사를 관두고 한동안 근남 수산에서 야학을 가르치다가 노음국민학교 교사로 취직해서 근무할 당시에, 내자도 노음초등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했습니다. 젊은 시절, 서로가 좋아서 만나 교제를 시작했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결혼을 한 셈이지요. 내자가 말루에서 근남 수산으로 시집을 올 때 서울대 동기생이던 친구 두 녀석이 서울대학교 학생복을 입고 모자를 쓰고 가마꾼을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중에 한명이 춘천농업학교와 서울대 동기생이었다가 6.25전쟁에서 사망한 노준호라는 친구입니다. 구식으로 혼례를 올렸지요. 내자도 일찍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대학까지 나왔을 텐데, 그런 점은 조금 아쉽기도 하지요. 내자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었습니다. 다들 결혼해서 타지에 나가서 살고 있지요.” 

 

김재윤씨가 서울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다.
“서울대학교 학부 3학년일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전쟁이 터졌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정부에서 당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이 위치해 있던 ‘수원이 임시수도가 된다며, 국민들은 절대 동요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방송을 믿고 학교에 계속 머물러 있었지요. 6월 28일에 당시 울진 출신 국회의원이던 김광준 국회의원과 조병옥씨를 학장실 앞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후 4시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기다렸지만 결국 자기 혼자 대전으로 내빼고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곧 인민군 군관을 태운 사이드카가 학교 내로 진입해왔고, 방송을 믿고 학교 내에 남아 있던 학생들과 교수들은 모두 수원 공설운동장으로 끌려갔어요.”

 

김씨가 수원 공설운동장으로 끌려가니까 이미 그곳에는 서울대 문리대와 농대, 세브란스의대, 성균관대,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포함한 많은 젊은이들이 끌려와 있었다.
“수원 공설 운동장에 도착하니까 이미 많은 젊은이들이 집결해 있더군요. 레닌모를 쓴 어떤 자가 단상에 올라가서 ‘조국과 인민의 해방을 위해 인민군 의용군에 나가자’고 소리쳤고, 이미 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다수 학생과 젊은이들이 군데군데서 옳소 하며 박수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바로 즉석에서 인민 의용군 부대가 편성되었지요. 의용군이 편성되고 난 다음에 서울 효제국민학교로 다시 집결했습니다. 인민 의용군 군복이 지급되고 북한산 농구화가 군화로 지급되었어요. 곧바로 소대장과 분대장이 임명되었는데, 그나마 춘천공립농업학교 동기이자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동기이기도 했던 노준호라는 친구가 같은 소대, 같은 분대에 편성된 것은 큰 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소련식 군사훈련이 시작되고 인민군들이 부르는 군가도 익히고 바빴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날이 갈수록 점점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동료들이 비판을 통해 ‘김재윤 동무는 아직까지 인텔리 근성이 남아 있다’는 얘기를 자주 듣게 되는 등 사상적 위험이 한계수위에 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도 강하게 받게 되었지요. 그래서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보가 되는 길뿐이라고 판단하고 바보처럼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각각 2개씩 지급되던 소대원 30명의 주먹밥을 타서 배달해야 할 일이 있으면 일부러 손가락을 꼽아가면서 숫자를 계산하여 60개를 타는 그런 식으로 조금 모자라는 행세를 하기 시작했지요. 서울서 소련식 기본 군사훈련을 받은 우리는 경기도 양수리를 지나서 남으로 내려갔어요. 행군하는 틈틈이 시간만 나면 소련식 군사훈련을 받으면서요. 행군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UN군 비행기가 공중을 날아가면서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고, 일행 중에 먼저 비행기를 발견한 누군가가‘항공’이라고 외치면 길 양쪽으로 흩어져 피했고, 그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는 했습니다. 공습을 피하느라고 늘 산 능선을 타고 갔고, 공습이 무서워서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늘 생쌀을 씹으면서 고통스럽게 행군을 했습니다.”

 

대구 팔공산 전투…포숙아(鮑叔牙) 노준호의 죽음…아식보총으로 자해(自害)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스런 행군 끝에 김씨가 소속되어 있던 인민 의용군 부대는 충주와 단양을 지나고 조령을 넘어 문경과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때 이미 안동은 잿더미가 되어 있더군요. 거기서 제가 소속되어 있던 인민 의용군부대는 군위 방면으로 행군했고, 이때부터 정규 인민군에 편입됐고 총신이 긴 소련제 아식보총과 소련군이 전쟁터에서 독일군들부터 노획한 철모가 지급되었습니다. 낮에는 숨어서 휴식을 취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걷기를 반복하면서 대구 팔공산에 도착했어요. 그곳에서 우리는 인민군 제1사단 14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당시에 인민군들은 8.15행사를 대구에서 하겠다는 목표로 주공격선인 팔공산을 하루빨리 함락시켜야 한다며 한창 전투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지요. 가장 친한 친구 노준호와 저는 계속 같은 분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마침내 더 이상 피할 곳조차 없는 전장의 최전선에 서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국군의 박격포와 105mm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강제로 인민 의용군에 소속된 저는 차마 동족인 국군을 향해 총을 쏘지 못했습니다. 당시에 제 동생 재철이가 육군 강릉 8사단 10연대 제262부대의 일등 중사로 전장에 투입되어 있기도 했으니 어떻게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생지옥과 같았던 팔공산 전투에서 춘천공립농업학교부터 서울대까지 동기생으로 지냈던 친구 노준호를 읽게 됩니다. 국군을 향해 마주 총을 쏘면서 응사하다가 국군이 쏜 총에 맞아 죽었어요. 실로 아비규환일수밖에 없는 전쟁터에서 죽는다는 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입니다. 노준호를 얼싸안고 넋을 놓고 있다가 그의 머리카락을 한줌 뽑아서 챙겼습니다. 그 머리카락은 뒤에 서울 장충동에서 된장과 간장 같은 장류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그의 삼촌에게 전해 주었지요. 그동안 노준호의 삼촌에게 신세도 참 많이 졌는데, 삼촌 또한 더없이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어요.” 

 

망설임 없이 자신의 포숙아(鮑叔牙)라고 일컫는 친구 노준호의 죽음을 대하면서 김씨는 평소 생각하고 있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몸을 자해하여 전쟁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상당히 위험한 방법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아 남을 수 없겠다고 판단했지요. 아식보총을 제 왼쪽 팔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순식간에 살이 터져서 피가 펑펑 쏟아지는데, 급히 친구 준호의 옷을 찢어서 팔을 감싸고 국군과 인민군이 대치하고 있던 능선에서 인민군이 있는 쪽으로 데굴데굴 굴렀어요. 인민군 군관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뚝을 감싼 저를 보더니 전투에서 입은 부상인줄 알고 ‘인민군 제18육군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난 다음에 다시 부대로 복귀하라’는 지시서를 한장 써 주더군요. 자해한 팔뚝에서는 계속 피가 흘렀고, 그 몸으로 영주를 거쳐서 기차를 얻어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은 이미 완전히 파괴되어 죽음의 그늘만이 감돌고 있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인민군 제18병원에 도착해서 군의관에게 상처를 내 보였지요. 군의관이 상처를 살피더니 아무래도 국군이 쏜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일이 묘하게 꼬인다 싶었지요. 그런데 직업이 뭐냐고 물어서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징집됐다고 하니까, 서울대학교의 문영현교수를 아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잘 알고 있다면서 상세하게 답변을 해 주었더니 더 이상 따지지 않고 친절하게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빨갱이로 몰려 수원비행장으로… 목숨을 구해준 서울대 학생증… 농대 학도호국단장이었던 친구

인민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자해하고 응급치료를 받은 김씨는 인민군 제18병원을 탈출해서 수원에 숨어 살면서 경성대학 의학부 출신인 함용주선생으로부터 치료를 받게 된다. 이들은 50여년만에 연락이 닿아서 서신을 교환한다. 사진은 함용주선생이 김씨에게 보낸 편지 

김재윤씨의 국립서울대학교 학생증 앞면, 김씨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구해준 학생증이라 여겨 지금까지도 부적처럼 늘 간직하고 있다
인민군 제18병원에서 자해한 상처에 응급치료를 받은 김재윤씨는 그 길로 밤을 이용하여 수원으로 도망을 친다.
“어둠을 틈타서 수원으로 내뺐지요. 수원에 숨어 지내면서 너무도 다행스럽게 현 농촌진흥청인 중앙농업시험장의 의무실장으로 근무하던 함용주 선생에게 상처 난 팔을 치료받았습니다. 저와 평소에 안면이 있던 경성대학 의학부 출신인 함선생은 강요에 의해 낮에는 인민군 군의관으로 불려 다녔는데, 당시에는 너무도 귀했던 페니실린 같은 약품을 쓰면서 목숨을 걸고 저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함선생과는 그 뒤로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가 50여년이 지난 1990년대 후반에 정말 우연찮게 연락이 다시 닿았어요. 1996년도인가 제가 관상동맥 수술을 하기 위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는데, 2인용 병실에서 서울대 의대 교수출신인 옆자리 환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함용주 선생을 안다는 얘기를 듣고 주소를 물어서 연락을 하게 된 겁니다. 6.25전쟁 때 큰 은혜를 입은 누구누구입니다 하면서 설명을 하고 미역을 선물했는데, 함선생도 너무 기쁘다면서 답장을 보내 왔더군요.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지요. 수십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연락이 닿아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김재윤씨가 인민군 제18병원을 탈출해서 수원으로 피신했을 무렵에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9월 중순경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인천과 수원이 수복되었습니다. 인민군 탱크가 후퇴하고 국군 탱크가 수원 중앙농업시험장 앞으로 지나가기에 환영하겠다고 나섰다가 이번에는 국군에게 잡혀서 끌려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전쟁 통에 젊은 사람이 징집에 끌려가지 않고 수원시내에 보인다는 것은 필경 빨갱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거지요. 수원비행장으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인민군 포로와 민간인들 상당수가 먼저 끌려와 있더군요. 때마침 그곳에는 인민군 부대에서 쏘는 포탄이 쉴 새 없이 비행장에 떨어지고 있었고, 모두 다 숨기 바쁜 그 혼란한 틈을 놓치지 않고 저는 그곳을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벗어나서 돌아오던 도중에 이번에는 또 순경에게 붙들려서 수원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수원경찰서는 미군이 경찰서장이었고, 한국인 경찰도 상당수 있었지만 UN경찰 3명이 일본인이었습니다. 다행히 일본인 조사관을 만나게 되었는데, 유창한 일본어로 학생이라고 밝히고 서울대학교 학생증을 보여주면서 선처를 바랬지요. 그때 수원경찰서에서 서울대 농대 학도호국단에 연락을 취했던 것을 뒤에 알았고, 당시 학도호국단 단장이었던 제 친구 박민식이 보증을 서주어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박민식이를 만났는데, ‘니가 6.25 전쟁 초기에 뭘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니가 내 친구이기 때문에 보증을 서준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참 고마운 친구였지요. 결국 그 친구와 서울대 학생증이 제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곧 수원경찰서 서장이 저를 풀어주라고 명령을 하달했고, 그때서야 제가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서울대 학생증을 부적처럼 늘 수첩에 꽂아서 몸에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물론 지금도 수첩에 휴대하고 다니지요.” 

 

고향 울진으로…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으로 위촉되어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

김씨는 1989년 9월 12일부터 23일까지 중등교원 해외연수 제39단 단장으로 홍콩, 중국, 일본 등 3개국을 다녀왔다. 사진은 윤봉길의사의 항거 장소인 중국 흥구공원 앞
6.25전쟁 통에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김재윤씨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 울진으로 내려온다.
“한동안 너무도 고단한 심신을 추스르며 그렇게 근남면 수산 집에서 생활했어요. 그리고 몇해가 지난 후에 서울대학교에 복학하려고 찾아갔지요. 그런데 학교에서는 학칙과 규칙 등을 장황하게 따지면서 복학은 교수회의를 거쳐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특수한 전시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학칙만 따지냐며 항의하고 난 다음에 다시 울진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 일로 끝내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받지 못했습니다. 신입생을 모집하는 데는 혈안이 돼 있으면서도 전쟁 통에 학생들의 생사도 확인하지 않았던 학교가 뒤늦게 학칙을 따지면서 복학생으로 받아주지 않는 것이 미웠습니다. 전후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학칙만 따지면서 복학이 불가하다고 최종 결정하는 학교를 지금까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서울대 복학의 길은 포기하고 대구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8회로 졸업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3학년까지 다녔다고 하니까 그냥 학점만 채우고 논문만 써서 제출하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대구대학교를 졸업했어요.” 

 

6.25전쟁 중에 근남면 수산리 집으로 내려온 김씨는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가 울진농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된다.
“처음에는 원주농업고등학교로 발령이 났었는데, 울진농업고등학교가 막 설립되면서 거주지가 가까운 울진농고의 첫 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울진농고 초대교장이 어모교장이었는데, 당시 어교장이 기성 회장이던 주모씨와 짜고서 돈을 받고 결원이 생기면 성적이 안 되는 학생도 입학을 허가해주고 그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정말 쥐새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지요. 이래서는 도저히 막 설립된 학교 꼴이 안 되겠다 싶어서 당시 동료 교사였던 오해석씨, 전노수씨 등과 함께 논의해서 교장을 학교에서 쫓아내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오해석씨와 전노수씨는 얼마 못가서 교장 편으로 회유되고 말았어요. 당시 강원도 학무국의 학무과장이 저까지 회유시키려고 설득했지만 저는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고, 그래서 울진군에서 쫓겨나서 삼척중학교 원덕분교로 발령이 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씁쓸한 일이지요. 원덕분교에서 일년 근무하다가 원주농업고등학교로 옮겨가서 10개월 정도 근무하고 대구농림고등학교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15년을 대구농림고등학교에 근무했습니다. 도 교위의 동일교 5년 이상, 동일 지역 7년 이상 근무하지 못한다는 규정에 따라 인근 자인중농고에 갔다가 다시 대구농림고등학교에 돌아와서 15년을 근무한 겁니다. 임업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을 지도했는데, 제가 직접 지은 책으로 가르쳤어요. 대구농림고등학교에 근무하던 1968년도에 제가 실업고등학교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국정교과서 편찬에 참여했었으니까요.” 

 

15년 이상 타지의 고등학교를 떠돌면서 학생들을 교육하던 김재윤씨는 대구농림고등학교 교사를 거친 다음에 교감으로 승진해서 울진농업고등학교 겸 울진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다.
김씨는 울진종고에서 근무할 당시에 축구부 후원문제로 얽혔던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준다.
“대구농림고등학교를 거쳐 교감으로 승진했고, 울진농고 겸 울진중 교감으로 부임하게 되었지요. 울진농고 겸 울진중학교 교감을 거친 후에는 울진교육청 장학사로 2년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문교부 중앙교육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겨서 일선 학교 교장들을 대상으로 교육하는 한편, 재일교포 2세 학생들을 지도했지요. 그 다음에 안동농림고등학교 교감으로 1년 근무하고 난 뒤에 교장으로 승진하여 기성중학교 초임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기성중학교 다음에 울진종고 겸 울진중학교 교장으로 자리를 옮겨서 3년을 더 근무했어요. 울진종고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얘기를 하나 들려 드리지요. 2008년에 울진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전동양선생이 그 당시에 울진종고 체육교사였습니다. 경제적 사정이 어려웠던 울진종고에서 축구부를 육성하고 후원하기 위해 재학생들에게서 500원씩 돈을 거뒀던 적이 있었는데, 마침 그때 울진종고 교사로 근무하던 윤모 교사와 김모 교사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 싸움을 전동양 체육교사가 뜯어 말리게 되었는데, 김모 교사가 전동양선생이 지방 사람인 윤모 교사 편을 든다고 여기고, 축구부를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학생들에게서 돈을 거뒀다며 홧김에 상부기관과 신문기자들에게 투서와 제보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서슬 퍼렇던 전두환 정권 때니까 까딱 잘못되면 교사들이 모두 다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마침 대구매일신문의 박영수기자가 저와 친분이 있던 사람이었고, 그의 앞뒤 사정을 헤아린 설명과 설득으로 다른 기자들 또한 기사는 쓰지 않고 겨우 무마가 되었어요. 그러나 교육청 감사는 피해갈수 없었지요. 결국 감사 결과에 따라서 제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의성군 가음중학교 교장으로 좌천되어 갔습니다. 중·고등학교 합쳐 31학급 교장에서 중학교 9학급 교장으로 좌천되어 간 거지요. 교장인 제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좌천되어 이동함으로써 다른 교사들은 전혀 다치지 않았습니다.”

 


울진여중·고 교장으로 정년 채워… 부친 비롯해 3형제가 교장으로 정년퇴임 

울진종고 축구부 육성을 위해 재학생들로부터 후원금 명목으로 500원씩 갹출(醵出)한 사건으로 인해 의성군 가음중학교로 좌천되어 간 김씨는 다시 예천농고 교장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예천농고는 예천군 관내에서는 꽤 명성이 있는 학교입니다. 일정 때에 세워진 학교인데, 그 당시에 예천군수와 8개읍면 면장이 모두 다 예천농고 출신이어서 아주 관심을 끌었지요. 특히 경상북도내의 4대 농고하면 안동, 성주, 김천, 예천농고를 꼽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예천농고에서는 아주 특이한 교육방식을 한가지 시도했었습니다. 예천농고는 재학생 600여 명 중 70%가 넘는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농고의 특성상 각종 농기계에 사용하는 기름과 건초더미가 곳곳에 적재되어 있어서 항상 화재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학교 뒷산이 의성김씨 문중산이어서 만약에 학생들의 담뱃불 실화로 화재라도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될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학교 내에 낙서실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일종의 흡연실인 셈인데, 바닥에 독을 몇 개 묻어두고 담뱃재와 꽁초는 반드시 그곳에 버리도록 유도하고, 학생들 각자가 오늘 피운 담배 개피를 스스로 알아서 기록하도록 했어요. 그 방식은 학생들의 흡연율을 낮추고 줄이는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고, 당시 월간조선 1985년 11월호에 다분히 실험적인 그런 교육방식이 획기적이라며 기사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교육방식은 전국에서도 아주 드문 선례로 남아 있지요.” 

 

김재윤씨는 예천농고를 거쳐 다시 영해중·고등학교, 후포중·고, 울진여중·고 교장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2년 2월 29일에 울진여중·고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을 채우고 퇴직했다.
김재윤씨의 집안은 울진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전형적인 교육자 집안이다.
“일정시대에 강원 도립 사범이던 춘천사범과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부친은 아래로 7형제를 두었습니다. 김재호라는 저의 맏형은 춘천중학교와 중등교원 양성소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평해공고 교장을 거쳐 기성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어요. 특히 형님은 울진중·고등학교의 교가를 작사한 인물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울진중·고 교가의 작곡은 서울음악전문학교 학장이었던 김재훈씨가 맡았었습니다. 그 형은 저보다 4살 위인데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제가 둘째고, 저보다 두살 아래인 동생 재철이는 6.25전쟁 때 국군중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했지요. 다음 동생 재숙이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문리과를 졸업하고 대구고등학교 교사로 8년 동안 근무하는 등 계속 교직에 몸담고 있다가 평해여중·고 교장으로 정년퇴임하고 지금 노후를 보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재면이는 육군사관학교 15기 졸업생으로 월남전에 파병되어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면서 훈장도 많이 받고 했었는데, 소령시절에 순직했습니다. 현재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어요. 그 밑의 동생 재극이는 경북대학교 농과대를 졸업하고 농촌진흥청에 근무하다가 퇴직했습니다. 막내 동생 재관이는 군대에 가서 사고사로 죽었어요. 아버지는 물론이고 7형제 가운데 맏형과 저, 동생 재숙이까지 한평생 교직에 몸담았었고 또 다들 교장으로 정년퇴직했지요. 그런데 저희 7형제 가운데 동생인 재철, 재면, 재관이 세명이 모두 군에서 죽었으니 그런 것을 떠올리면 또 한편으로는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퇴임 전에는 ‘현장장학교육위원회 위원장’, ‘사회정화위원회 위원장’, ‘울진군체육회 이사’, ‘울진군사격연맹 이사’, ‘울진군축구협회 이사’, ‘경북요트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던 김재윤씨는 퇴임 후에도 ‘울진사랑운동협의회 회장’, ‘울진군선거관리위원’, ‘울진군민방위소양교육 강사’, ‘울진군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울진군교우회 회장’, ‘울진군지 편찬위원’ 등을 역임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왔다. 

 

뿐만 아니라 김씨는 지난 1999년 6월에 서면 쌍전리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산돌배나무를 일본에 소개하면서 일본에서 자라고 있는 돌배나무와의 상호 연관관계를 증명해보려 애쓰기도 했다.

 

김씨는 일본 돗토리현의 돗토리시가 주최하는 ‘세계 게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생산량 등을 따져 볼 때, 대한민국 동해에서 잡히는 게는 영덕대게라는 이름이 아니라 울진대게로 명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은 논문을 발표하는 김재윤씨

 

또 애초 “망양정에 게첩 되어 있던 숙종대왕의 어제(御製) 현판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슈등정부(수등정부, 須藤政夫)’가 가져갔다”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발견하고, 지난 2006년 일본 돗토리현에 문서를 보내서 어제 현판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는 일도 자청했었다.
원래 우리 것인데 찾아보지도 않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말하는 김씨는, 숙종 어제 현판을 찾는 일은 개인이 도맡아하기에는 벅차고 지금이라도 울진군 차원에서 의지를 가지고 일본에 협조를 요청하는 등의 각종 노력을 거듭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씨는 또 일본 돗토리현의 돗토리시가 주최하는 ‘세계 게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생산량 등을 따져 볼 때, 대한민국 동해에서 잡히는 게는 영덕대게라는 이름이 아니라 울진대게로 명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본 NHK 방송에서 주장하였다.
‘세계 게 페스티벌’당시에 그의 이런 주장은 행사 주관사인 NHK 방송을 타고 일본 전역에 방송되었다. 

 

김재윤씨는 교장을 정년퇴직하고 난 다음인 1994년에 일본 본국에서 주최하고 각국 대사관에서 주관한 일본어 능력시험을 통해 1급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정년 후에 무엇인가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싶은 욕심에서 일본어 능력시험에 응시했었다”고 전해준다. 

 

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인 1989년 9월 12일부터 23일까지 홍콩, 중국, 일본으로 국외시찰단을 이끌고 단장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중등교원 해외연수 제39단을 이끌고 단장으로 홍콩, 중국, 일본 등 3개국을 다녀왔습니다. 11박12일간의 연수 기간 동안에 10일 동안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와 정식 수교도 되지 않은 중국에서 보낼 수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중국이 공산권 국가라고 중앙정보부 요원이 함께 동행을 했었지요. 중국에 머무르는 동안 윤봉길의사의 항거 장소인 흥구공원과 김구선생의 흔적을 살펴봤던 일은 참으로 의미가 컸던 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김재윤씨는 교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늘 ‘학생은 배우는 사람이고 선생님은 가르치는 사람이며, 학교 교장은 학생들이 잘 배울 수 있고 선생님들이 잘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교육 신조로 학생들을 칭찬 위주로 지도했고, 사소한 일이라도 학생들이 착한 일을 했을 때는 학교명이 새겨진 볼펜 한자루씩을 상품으로 주면서 격려했다.   

 

또한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직업을 가지게 되면 호구지책인 생업으로 일을 갖지 말고, 천직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해라. 그래야 무슨 일이든지 즐기면서 할 수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다’, ‘인생은 자연, 또는 인간 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투쟁의 연속이다. 특히 끝없는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 힘써라’ 등을 항상 강조했었다고 전한다. 

 

특히 김재윤 전 교장은 울진중·종고 교장 시절에는 체조와 축구부 육성, 예천농고에서는 양궁과 사이클을, 후포고등학교에서는 요트, 울진여고에서는 사격부(공기소총)를 교기로써 중점 지도했다. 

 

그리고 안보교육, 과학교육, 새마을교육, 기술교육 등 문교부와 도교위 연구학교로 지정되어 열심히 일했던 점등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전했다. 일제강점기에 춘천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울진군청 산림주사로 잠깐 근무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한평생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후학을 가르치고 또 인재를 키워온 김재윤 전 교장을 대하고 있으면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인 산티아고(Santiago) 노인이 떠오른다.

나이를 잊은 채 끊임없이 아프리카 해변의 사자들 꿈을 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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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노인(Santiago)’의 열정으로 노년을 사는 김재윤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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