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어머니들의 삶 뒤에는 가난이 그림자처럼 늘 따라 붙는다.
결코 많지 않은 논밭전지를 평생 일구면서 제대로 쉬어보지도 못하고, 왜소한 몸집으로 낡은 신발을 신고 세상 풍파를 온전히 겪으며 쫓아다녀도 고생한 만큼 소득이 없었던 우리 어머니들.
시부모 봉양에, 남편 수발에, 자식들 뒷바라지에 단 한번도 편히 앉아 쉬거나 제대로 된 식사 한끼를 챙겨먹지 못했던 우리 어머니들.
삶의 굽이굽이마다 끈질긴 가난과 어둠이 항상 따라 다녔어도, 우리 어머니들은 소금에 푹 절인 생선보다도 맵짠 살림살이 솜씨와 감히 그 깊이를 헤아리기 힘든 인내를 발휘하면서 누구보다도 강한 여성으로 살아왔다.
얼기설기 실타래처럼 바쁘게 엉킨 산골의 일상들 속에 비단결 같던 고운 손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 터져도, 우리 어머니들은 그토록 긴 세월을 조건 없이 참고 견디며 살아왔다.
그런 우리 어머니들이 일평생 겪어왔던 고단한 삶의 무게감이 얼마나 힘겨웠을지는 미루어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어쩌면 그래서 그 삶이 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수줍은 주름살을 간직한 우리네 가난한 어머니들이 모질게 건너온 세월의 강은 어떤 신앙보다도 거룩하고 숭고하다.
언제까지나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은 우리의 말없는 위로자로, 또 안식처로 자리하는 그들을 우리는 어머니라 부른다.
“한글이 참 매정스럽지요. 겨우 앞에 있는 글자 읽을 정도니까”
온정면에서도 한참이나 더 자동차로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깊은 산골마을, 외선미 1리에 살고 있는 김상출(여, 79세)씨는 평해읍 학곡1리가 고향이다.
“평해 학곡1리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친정집은 학곡에서 농사를 지었지요. 친정아버지는 김씨 성에 덕자 봉자를 썼습니다. 친정 엄마는 제 나이 열일곱살에 앞서 세상을 떠났고, 친정아버지는 제가 결혼하고 난 다음에 돌아가셨니더. 친정집의 형제자매는 5남매였습니다. 위로 김양백과 김부출이라는 오빠가 두분 있고, 김상금이라는 언니 한분이 계셨지요. 그리고 밑으로 김칠백이라는 남동생이 하나 있고요. 제 위로 오빠 두분과 언니 한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은 저와 아래 남동생만 세상에 덜렁 남겨져 있지요. 남동생 칠백이는 지금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 오빠 두분은 학곡에서 살다가 다른 동네로 옮겨가서도 살다가 하면서 어릴 때 배운 게 농사다보니 평생 땅을 일구었어요. 학교는 평해국민학교를 일년 다니다가 해방이 되면서 그만 두었지요. 어릴 때 친정아버지와 엄마에게 제발 학교 좀 넣어달라고 사정사정하고 싸워서 겨우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마 그래 됐니더. 지금도 한글이 참 매정스럽지요. 겨우 앞에 있는 글자 읽을 정도니까요. 한문은 제 이름 석자만 겨우 쓸 줄 알고요.”
평해 학곡에서 온정 외선미 손씨 집안 맏며느리로…쉴 새 없는 농사와 길쌈
평해 학곡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김상출씨는 나이 18살에 온정면 외선미로 시집을 왔다.
김상출씨의 남편 손동영씨, 김씨는 18살에 시고모부의 중매로 평해 학곡에서 온정 외선미로 시집을 왔다
“친정 엄마가 열일곱살에 돌아가시고 난 이듬해인 열여덟살에 이곳 외선미로 시집을 왔어요. 어머니는 시집오기 일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작은 딸이 시집가는 것도 보지 못했지요. 당시에 시고모부가 중매를 해서 결혼을 했는데, 시고모부도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계십니다. 남편은 손동영이라는 사람이었어요. 저는 열여덟 살이었고 남편은 스무살 때 결혼했으니, 영감과는 두살 차이가 나네요.”
김씨는 나이 18살에 평해 학곡보다 훨씬 더 궁벽하고 외진 산골 마을인 외선미로 시집을 왔을 당시에 시댁에는 시조부님을 비롯해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계셨다고 전해준다.
“그때만 해도 차도 없이 걸어 다닐 때였는데, 평해 학곡에서 이곳 온정 외선미까지 얼마나 멀어요? 학곡에서 살다가 외선미로 시집을 왔던 처음에는 도저히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부터 앞서더군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니 너무나 답답했지요. 이곳에 비하면 그래도 평해 학곡이야 앞이라도 툭 터져 있지. 시집올 때 평해 학곡에서 가마를 타고 이른 새벽에 출발을 했는데, 외선미 시집에 도착해보니까 벌써 날이 저물어서 어두웠어요. 시집올 당시에 혼수는 시조부님 도포와 시부모님 수의를 해 왔지요. 시댁이 될 집에서 사돈집으로 예단삼아 삼베를 보내 온 것을 친정집 식구들이 옷을 지었고, 그것을 혼수로 들고 시댁으로 들어왔습니다. 시댁에는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계셨습니다. 제 남편이 그 집안의 맏이였고, 아래 시누가 열한살, 그 밑의 시동생 두명이 여덟살, 다섯살이었어요. 끝으로 막내 시동생은 제가 시집오던 해에 시어머니가 낳았는데, 올해 벌써 예순한살로 환갑이네요. 제가 음력 섣달 열엿새에 시집을 왔는데, 막내 시동생이 그 다음해의 이월 초이튿날에 태어났으니... 지금 시댁식구는 시누가 서울로 올라가서 살고 있고, 시동생 한명은 부산, 또 한명은 경남 양산에 살고 있어요. 시누는 처음에 평해 오곡으로 시집을 갔는데, 그 뒤에 서울로 이사를 올라갔습니다.”
18살에 평해 학곡에서 온정 외선미 산골로 시집을 오게 된 김상출씨는 1년 만에 맏딸을 낳는다.
“시집와서 일년 만에 맏딸을 낳았는데, 조금 앞서서 시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막내 시동생도 큰형수인 제 젖을 먹고 컸습니다. 시어머니가 당장 일하러 논밭으로 나가야 하니까 어쩌겠어요? 시동생이 배고파서 보채면 당장 급한 대로 제 젖을 물리고, 그러다가 제 딸에게도 젖을 물리고 할 수밖에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그런 경우가 흔하게 있었습니다. 삼촌과 조카가 한 젖을 먹고 함께 커가는 그런 일이.”
벽항궁촌 외선미의 손씨 집안 맏며느리로 시집을 왔지만, 그래도 시댁이 그나마 먹고사는 일은 괜찮았었다고 김씨는 말한다.
“산골에서 풍족하다고 한들 얼마나 넘치겠습니까만, 당장 먹고 사는 일은 별 걱정이 없었어요. 그래도 그때 시집을 오니까 시댁은 논만 해도 열마지기고, 밭은 스무마지기나 됐으니, 산골 마을에서는 제법 부자소리를 들을 만 했지요. 살아오면서 스무 마지기 되는 밭은 시부모님들 살아생전에 거의 다 팔았어요. 시조부님은 일흔아홉까지 살다가 돌아가셨지요. 제 나이 마흔이 채 안되었을 때요. 시어머니는 제가 마흔 대여섯살때 돌아가셨고, 시아버지는 일흔여덟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쉰 가까이 됐을 때였지요. 시조부님이나 시부모님, 그리고 우리 영감까지 모두 다 깨끗하게 살다가 돌아가서 그것으로 고생한 것은 없네요.”
외선미 산골 마을에서 부자 소리를 듣던 시댁이었지만, ‘시골부자 일부자’라고 오히려 그래서 평생 더 힘들게 몸까지 다 상해가면서 일만 했던 팔자였다고 김씨는 전해준다.
“시골부자 일부자라고 뒤도 안돌아보고 참 열심히 일만 했습니다. 농사철이면 하루 왠종일 논밭에 나가서 모를 심고, 김을 매고, 잡초도 뽑고, 밤이면 베옷을 만들어 입어야 하니까 삼을 삼고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아궁이에 넣을 땔감 하러 산으로 다니면서 나무를 잔뜩 이고 집으로 나르고, 급하면 아쉬운 대로 장작도 패고 그렇게 살았니더. 예전에는 다들 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살 때이기도 했지만, 남자가 해야 할 일들을 약한 여자가 감당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임에는 틀림없지요. 영감요? 영감은 그런 일 안했어요.”
김상출씨는 농사짓는 틈틈이 길쌈도 해야 했다고 말한다.
“그 시절 산골 마을에 어디 일하는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었나요? 농사짓고, 바쁘면 산에 가서 나뭇단도 해다가 집으로 나르고, 애들 키우고, 그 와중에도 질쌈(길쌈)을 했어요. 어릴 적 평해 학곡 친정집에서도 질쌈은 했지만, 친정 엄마가 어리다고 저에게는 질쌈도 가르치지 않았었지요. 그러다가 친정 엄마가 저 세상으로 떠나고 나서 1년 만에 시집이라고 왔으니 질쌈 일을 처음부터 배울 수밖에요. 그래서 시집와서는 꼬박 1년 동안 시어머니로부터 질쌈을 배워야 했지요. 베질쌈, 미영(면-목화)질쌈, 명주(비단-누에)질쌈까지 안 해 본게 없어요. 시어머니는 베를 삼고 거기다가 풀을 먹여 주고, 저는 주로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했지요. 삼도 밭에다 직접 갈아서 때가 되면 베어내서 찌고 삼 껍질을 벗기고, 목화도 밭에다 직접 심어서 따고, 뽕나무 밭에 나가 뽕잎을 따서 누에를 키워 실을 뽑아내고... 그때만 해도 집집마다 모두 직접 다 했지요. 이제야 나이 들고 눈이 어둡지만 그래도 질쌈은 마음만 먹으면 다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랫동안 해 와서 손에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일이니까요. 삼은 집집마다 따로 자기네 밭에다 심어서 낫으로 베어 냈는데, 삼 껍질을 벗기기 위해 삼을 찌는 산굿이라는 작업은 동네 몇 집이 어울려서 함께 하고는 했습니다.”
20년여 군 생활을 한 남편은 중사로 제대…월급날이면 광주까지 돈 타러 오고가
김씨의 남편 손동영씨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군대를 가서 20년여 동안 군 생활을 하다가 중사로 군을 제대했다
김씨의 남편 손동영씨는 결혼한 지 1년 만에 군대를 가서 20년여 동안 군 생활을 하다가 중사로 군을 제대했다.
김씨의 남편 손동영씨는 최전방에서 40년여 군 생활을 장기 복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가 되었고, 현재 김씨는 매달 9만원의 유족연금을 받고 있다
“우리 영감은 남들에게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참 매정했던 사람이었어요. 일정때 온정국민학교를 나왔는데, 제가 열여덟살 되던 해 섣달에 이집으로 시집을 오고 그 이듬해 열아홉살 되던 해 섣달에 영감이 군대를 갔어요. 저와 결혼하고 일년 만에 군대를 갔다가, 이십년 넘게 군 생활을 하고 난 다음에 중사로 제대했지요. 영감은 5사단 27연대 1대대 중사 출신이었습니다. 당연히 6.25사변 전에 군대를 갔지요. 아, 6.25사변 얘기가 나오니까 말인데, 전쟁 중에도 이 마을 주민들은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나지 않고 밤에는 인근 산에 숨어 있다가 낮이 되면 마을로 다시 내려오고 그러면서 지냈어요. 이 동네에서 원남면 갈면으로 연결되는 비포장 길은 빨갱이 길이었습니다. 6.25사변 때는 온통 빨갱이 천지였는데도, 다행히 마을 사람들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지요. 영감은 처음에는 국민병으로 군대를 갔습니다. 그리고 일년 정도 지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와서 잠시 동안 있다가 다시 군에 입대했지요. 그런데 군대를 간 남편이 스물아홉살이 될 때까지 칠팔년 동안 외선미 집으로 딱 한번 휴가를 나왔어요. 이미 군대에 가기 전에 생긴 애들 두명을 낳아서 키우고 있었지,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시조부님과 남편이 있는 부대를 수소문해서 면회를 한번 갔다가 돌아왔지요. 그런 다음에는 집에서 여전히 시부모님을 모시고 애들 키우고, 농사짓고 그러다가 또 일년이 지난 다음에 저 혼자 애들 데리고 남편 부대를 찾아가서 한 일년 함께 살다가 시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 당시에 영감은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에서 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한 일년 살다 보니까 후방인 전라도 광주로 발령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전 애들 두명을 데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김씨는 남편 손동영씨가 전라도 광주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에는 매달 월급 때마다 직접 광주까지 내려가서 월급 가운데 일부를 집안 생활비로 받아왔었다고 전해준다.
“식구들이 다들 뼈 빠지게 일한 덕분에 시댁이 그나마 외선미에서는 그럭저럭 먹고 살만 했다고 하지만, 산중에 살다보니 항상 현찰이 귀하잖아요? 그리고 남편에게도 최소한 집안 가족들을 부양하는 책임 정도는 부담을 지워야 된다고 시부모님들도 말씀하시고, 그래서 남편 월급날에 맞춰서 항상 제가 전라도 광주까지 직접 돈을 타러 내려갔습니다. 그때는 요즘처럼 농협 같은 곳에서 손쉽게 통장으로 돈을 부치고 받고 할 그런 방법이 없을 때였지요. 월급날 영감을 만나러 광주로 내려가는 날은 아침을 일찍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곳 외선미에서 저 앞에 보이는 한티재를 넘어 평해까지 무작정 걸어갔지요. 지금 외선미에서 자동차로 온정을 나갈 때 마지막 높은 재는 더티재고요, 한티재는 저 앞에 보이는 저 재인데, 도로가 뚫리지 않아서 지금도 자동차는 못 다녀요. 외선미에서 평해까지 걸어가면 점심 아래 도착합니다. 그러면 평해에서 곧장 버스를 타고 대전까지 가지요. 그때는 대구까지도 비포장 도로였고, 교통이 불편할 때다 보니까 대전에 도착하면 늘상 밤이 이슥하고는 했어요. 그러면 대전에서 다시 밤기차를 타고 광주로 가는데, 광주에 도착하고 나면 어느새 이튿날 아침이 되고는 했지요.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면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영감이 근무하고 있는 군부대까지 찾아갔습니다. 대전에서 플랫폼을 잘못 찾아서 엉뚱한 기차를 타면 멀리 서울까지 간다는 얘기를 듣고는 항상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이틀이 걸려서 남편을 만나고, 월급에서 생활비를 타고 나면 다시 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외선미 시댁으로 돌아왔어요.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아득하고 고단한 시절이었네요.”
“영감은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 한 가지도 자기 손으로 아궁이에 넣지 않았던 사람이지요”
스무살에 결혼하고 스무 한살에 군대를 갔던 김씨의 남편 손동영씨는 마흔이 넘어 군을 제대하고 외선미 집으로 돌아왔다.
“나이 마흔 중반이 되니까 영감이 군을 제대하고 외선미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한 십년 더 살다가 쉰일곱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제 나이는 쉰다섯이었지요. 영감은 군을 제대하고 난 다음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저 술이나 마시고 집에서 놀다가, 심심하면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놀고, 또 술을 마시고 그랬지요, 뭐. 어쩌면 시조부님에게 문제가 있었지요. 시조부님이 당신의 맏손자인 우리 영감을 어릴 때부터 조선 천지에 내 아이만 있는 줄 알고 그렇게 귀하게 키웠답니다.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집안 일 거들 줄도 모르고 또 일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어요. 일도 반, 글도 반이라고 거의 반건달로 지냈어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까지 모두 다 새벽부터 열심히 논밭에서 일하는데도, 이상하게 우리 영감에게는 일도 안 시키고 그 덕분에 저만 더 죽도록 일했지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논밭에 나가서 일하는데, 영감이 논다고 저까지 덩달아서 놀 수는 없잖아요? 어른들이 일하는데 여자고 며느리인 제가 안 따라 다닐 수는 없고, 정말 영감 때문에 죽도록 고생만 했지요. 불을 땔 나무를 한다고 저는 가까운 산을 다니면서 잔가지들을 꺾고 주워 모아서 머리에 이고 내려오고, 시아버지는 좀 더 먼 산으로 가서 장작으로 쓸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데도, 우리 영감은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 한 가지도 아궁이에 자기 손으로 넣지 않았던 사람이지요. 영감이 군대를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 마을에 술파는 가게가 있었는데, 날마다 친구들과 그 집에서 먹고 마시고 놀고 그게 일이었니더. 온정 22개 부락에 우리 영감 손동영이라는 이름 석자 모르는 사람이 없었어요. 쉰일곱살에 저 세상으로 떠났는데, 술을 끊어야겠다 작심을 못해서 죽었지요, 뭐. 그때만 해도 온 동네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 다니는 사람이 좀 많았니껴? 요새야 몸 어디에 나쁘네 좋네 하니까 그런 사람들 구경하기도 힘들지만요.”
김상출씨는 군에서 20년여 생활한 남편과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다.
“맏딸이 옥화라고 올해 예순한살인데 경남 양산에 살고 있어요. 그리고 그 다음으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마흔일곱살에 몹쓸 병인 암으로 죽었지요. 살아 있었으면 금년에 쉰아홉살이 되었을 텐데... 그 밑으로 딸 셋을 두었니더. 둘째딸 옥기가 쉰여섯살인데 천안에 살고 있고, 셋째딸 옥주가 마흔여섯살인데 평해에 살고 있고, 넷째딸 금란이가 마흔두살인데 천안에서 살고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내가 아들인데 병관이라고 마흔살이고 천안에서 살다가 자기가 다니던 회사를 따라서 중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결혼했습니다. 영감이 군대에 가기 전에 위로 두명을 낳았고, 군에 간지 칠팔년 만에 집에 딱 한번 왔을 때 한명 낳고, 나머지는 군을 제대하고 난 다음에 낳았어요. 그렇게 낳았는데, 영감은 살아생전에 맏딸과 맏아들만 결혼시켜놓고 세상을 떠났고 저 혼자 나머지 자식을 다 치웠어요. 그러니 여자 혼자서 그간 겪었던 고생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니껴?”
살아생전에 부부간의 살뜰한 정도 없고 살림살이도 제대로 돌보지 않았던 남편이었지만, 그래도 김씨의 남편은 군에서 장기간 복무하면서 훈장을 탔다.
그 훈장 덕분에 김씨는 지금까지 국가유공자 유족으로 매달 일정액의 연금을 받고 있는데, 실제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라고 전해준다.
“영감은 전방에서 군 생활을 열심히 했다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을 탔어요. 그 훈장으로 우리 집은 국가유공자의 집이 됐고, 유가족인 저는 매월 9만원씩 유족 연금을 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달에 8만원씩 나오다가 언제 1만원 올라서 지금은 9만원씩 받고 있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영세민 혜택도 못보고 있습니다. 영감의 군 생활 공로 때문에 한달에 겨우 9만원씩 받고 있고, 그것으로는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영세민 혜택을 못 본다는 게 말이나 돼요? 저번에는 경주 원호청 서기가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그때 제가 이런 딱한 사정을 얘기했더니 원호대상자 위로금은 영세민 혜택 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니더. 논밭이 조금 남아 있지만 그것조차 제 앞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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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선미에서 한티재를 넘어 왕복 60리길을 걸어 다녔던 평해 5일장
시집올 당시만 해도 시댁이 외선미에서는 꽤 부자 소리를 들었지만 살아오면서 점점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시동생들과 자식들은 공부를 많이 못시켰다고 담담하게 전해주는 김상출씨다.
“옛날 촌에서 논 10마지기를 가지고 있으면 괜찮다는 얘기를 들었니더. 토종 벌통도 스무통 정도 됐으니 꿀을 떠서 팔았고, 가끔 소가 산지(송아지)를 낳기라도 하면 시장에 내다 팔았지요. 그렇게 살았으니 산골 마을에서는 괜찮게 산거지요. 그런데 토종벌도 없어지려니까 어느 순간에 다 없어지고, 영감이 살아 있을 때 시동생들 살림 내주면서 논밭전지를 조금씩 팔고 갈라주고 그러다 보니까 이제는 논 닷마지기에 밭 너댓마지기가 남아 있어요. 시동생들에게 갈라준 논은 시동생들이 밖으로 나가 살면서 다 팔아 버리고 이제는 없습니다. 그러면서 시동생들과 자식들 공부를 많이 시키지 못했어요. 겨우 중학교나 고등학교만 나왔지요. 딸들은 국민학교를 나와서 시집가기도 했고요. 막내아들은 포항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형이 있는 부산 남일고등학교로 전학을 갔고, 제 딴에는 큰 기대를 했었는데도 대학 졸업한 사람들만큼 열심히 살겠다고 하더니 대학을 포기하고 말더라고요. 그 아들이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중국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결혼했지요. 막내딸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으로 내려가서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했고요.”
김씨는 예전에는 온정면 외선미에서 평해까지 왕복 60리길을 걸어서 평해 5일장을 보러 다녔었다고 전한다.
“그때만 해도 차가 어디 있었나요? 죽으나 사나 걸어 다녔지. 외선미에서 평해를 가려면 저 앞으로 보이는 한티재를 넘어야 했습니다. 오가는 길이 자그마치 왕복 60리 길이지요. 그래도 그때는 별로 멀다는 생각도 없이 5일장에 내다 팔 농산물을 잔뜩 머리에 이고도 그냥 걸어 다녔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온정에는 5일장이 없어요. 들리는 말로는 예전부터 평해 사람들이 온정면에 5일장이 서는 것을 반대해서 그렇다는데, 글쎄요 그거야 정확히는 모를 일이지요. 집에서 식구들이 논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은 쌀, 좁쌀, 서숙, 보리 같은 것에다 이따금씩은 삼베 같은 것을 주로 이고 5일장에 팔러 나갔지요. 그때는 곡식 값도 없을 때였는데, 그래도 산골에서 평해 5일장에 내다팔 물건이 딱히 신통한 게 있어야지요. 지금은 가끔씩 차를 가지고 이곳 외선미까지 생선장사라도 들어오니 불편한 다리로 시장을 오가지 않아도 되고 한결 편하게 사는 거지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온정 호텔 청소부로, 또 파출부로 15년 동안 일 다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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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한번 더 우려먹을 요량으로 잘게 부수어 말리고 있는 노루뼈를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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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8년 동안은 집에서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어요. 영감 병수발을 8년 동안 하면서도 저 혼자 농사를 모두 짓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누가 뭐래도 여자가 죽으나 사나 고생이지. 영감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15년 동안은 온정을 오가며 호텔에서 청소도 하고, 남의 집 파출부로 들어가서 청소도 하고 그렇게 돈을 벌었습니다. 영감이 살아 있을 때는 자존심 때문에 절대 그런 일을 못하게 했었지요. 15년 동안 안 쓰고 모으니까 천만원정도 모아 지더군요. 그런데 대전에서 회사를 다니던 막내아들이 사장 차를 빌려서 볼일을 보러 가다가 사고를 냈어요. 그때 제가 15년 동안 모았던 돈 천만원에다가 이자 비싼 사채까지 오백만원 더 얻어서 아들 사고를 해결했지요. 그 후에 다시 벌어서 사채까지 다 갚았는데, 엄머 무세라, 두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니더.”
온정 외선미의 손씨 집안 맏며느리로 들어가서 일평생 일에 치이면서 고생해온 김씨는 요즘은 매일 마을회관에 나와서 마을 사람들과 두런두런 얘기도 나누고, 민화투도 치고 그러면서 소일하고 있다.
“수년전부터는 그나마 얼마 안남은 논밭전지를 논밭을 부치겠다는 남에게 다 주고 집안 텃밭에 고추나 조금씩 심어먹고 그렇게 지내니더. 마을회관에 나와서 마을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그러면서요. 제가 예전에 외선미 1리로 시집올 때만 해도 이 동네에 70가구가 넘게 살았었는데, 해마다 한집씩 두집씩 뜯기고 빈집도 생기고 하면서 이제는 50가구가 채 안되게 남았어요. 제가 지금 살고 있는 이집도 사람이 사니까 집이라고 하지, 모 이게 집이래요? 몇 해 전부터는 무릎이 영 좋지 않아서 늘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니는데, 그래도 서서 걸어 다니려면 힘에 겨워요. 얼마 전에는 누가 관절에 좋다면서 노루뼈를 구해 주었는데, 솥에다 한번 울궈먹고 그냥 내다 버리기가 아까워서 망치로 잘게 부수어서 지금 다시 말리고 있는 중입니다. 한번 더 울궈먹어야지요. 노루뼈를 때려 먹어서 그런지 요새는 무릎 관절이 좀 좋아진 거 같니더. 어디 노루뼈를 더 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쉽게 구해지는 물건이니껴?”
‘촌부자가 일부자였지요’라며 자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는 김상출씨.
눈만 뜨면 눈앞에는 항상 논밭전지에서 생겨나는 갖가지 농사일과 땔감 준비, 시조부와 시부모 공양, 자식들 돌보는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자신의 노동을 원했고, 몸이 녹초가 되어 자리에 누울라치면 밀린 빨래며, 길쌈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김씨다.
열여덟살, 꽃 같은 나이에 평해 학곡 친정집을 떠나 사방이 숨 돌릴 틈도 없이 꼭꼭 산으로 둘러싸여 막혀있는 산골 마을인 온정 외선미 1리로 시집을 올 당시에 김씨의 그런 지난한 여정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시도 쉴 틈 없이 우직하게 쟁기를 끄는 소와 같은 느낌으로 79년 평생을 일만 해왔다고 푸념하는 김씨지만, 집 옆에 딸린 작은 따비밭을 부치는 틈틈이 마을회관에서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년을 보내는 그의 모습은 비록 쓸쓸하지만 자족하듯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으로, 또 다른 여운으로 다가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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