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었다.
산골 마을의 구장(區長, 이장) 아저씨네 집은 마을의 위치 좋은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어 뜰 기와집처럼 번듯했고, 그 집에는 70년대 그 시절 흔하지 않던 수동식 전화기가 있었다.
첩첩산중 작은 산골 마을 분교의 개울 건너편 대나무밭으로 둘러싸여있던 이장 집은 어린 나이에 보기에는 누구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구중궁궐처럼 항상 담이 높았고, 마을 사람들 또한 이장님 앞에서는 항상 자세를 낮추어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고는 했었다.
다들 배움이 모자라 자식들이 태어나도 군청을 들락거리며 출생신고서 한장 제대로 작성할 수 없었던 그 당시에는 이장님은 마을 전체에서 가장 배움이 깊은 지식인이었고, 이장님의 말 한마디는 절대로 거짓이 있을 수 없는 진리 그 자체였다.
적어도 외부와 격리되어 생활하다시피 바쁘게 살아야 했던 산골마을에서는 국가에서 추진하는 각종 행정 사항들을 중간에서 전달해주는 특권을 지녔던 이장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 또한 불문율처럼 금기시되었다.
목을 뻣뻣하게 세운 채 산골마을의 촌티 풀풀 묻어나던 민원인을 벌레 보듯 하던 지체 높은 공무원들이 무섭고, 그만큼 희한한 별종들이 사는 곳처럼 담장도 높기만 했던 군청은 물론, 읍·면사무소 드나들기도 어려웠던 그 시절에 날이면 날마다 무시로 군청과 읍·면 사무소를 드나들던 이장님은 그만큼 우러러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장집에는 수동 자석식 전화기가 있었다.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서 교환에게 신호를 보내고, 저편에서 목소리만 들리던 교환에게 몇 국에 몇 번으로 연결시켜 달라고 해서 상대방과 통화를 시도했던 오래된 전화기가 있었다.
멀리 외지에 나가서 고단하게 돈을 벌던 아버지의 전화라도 오는 날이면 마을 구장이 전화가 왔다고 크게 소리쳐 알렸고,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구장집으로 들어가서 얌전하게 쪼그리고 앉아 전화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우체부가 읍내에서 서너시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산골마을까지 우편물 배달을 오면, 골골에 흩어져 있는 집집마다 찾아다니기가 힘들어서 마을 구장집에 우편물을 한꺼번에 배달해 놓았다.
마을 구장 아저씨네 집이 있는 곳에는 늘 국민학교 분교가 위치하고 있었고,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통해서 집집마다 우편물을 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멀리서 전해져 오는 기쁜 소식과 슬픈 소식도 일차로 구장집을 통해서 그렇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글을 못 읽는 사람들은 일부러 다시 구장집까지 쫓아가서 편지글을 읽어달라고 그렇게 부탁도 해가면서...
산골마을 각 가정에서 아이를 낳고 시간이 지나 출생신고를 할 때가 되면 구장님에게 부탁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우선 농사일이 바빠서 군청이나 읍·면사무소까지 찾아갈 시간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산골 사람들이 꽤나 복잡하고 어렵게 여겨지던 출생신고서 작성을 하기가 손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성격이 꼼꼼한 구장이라도 있는 마을이면 출생 신고가 제대로 되어 별탈이 없었지만, 술이라도 좋아하는 구장이 있는 마을이면 술 한잔 걸치고 마을 애들 출생 신고서를 작성하는 바람에 생일이 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이가 한두살 많게 또는 작게 되거나, 형이 동생으로, 동생이 형으로 뒤바뀌기도 했다.
심지어 남자아이가 여자 아이로, 여자 아이가 남자아이로 둔갑해버렸다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던 그때였다.
그래도 한마을의 구장은 항상 그 마을의 정신적 구심체로 자리하고 있었고, 그 마을 전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국가 행정조직의 일선에서 봉사하는 구장은 크든 작든 한 마을의 기쁜 일이나 궂은 일 등 온갖 대소사를 몸소 챙기고 갖가지 숙원사업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이자, 든든한 응원군이기도 했던 것이다.
호월1리 무월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나·····할아버지에게 한학 배우고 울진국민학교에 입학
1969년 35살의 젊은 나이에 처음으로 마을 이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41년째 현역으로 마을 전체의 이익을 위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울진읍 호월1리 무월동의 장일균(張一均. 76세)이장은 무월에서 출생하여 한평생 고향을 떠나보지 않고 한곳에서 땅을 일구며 살고 있다.
장씨의 어머니 고(故) 지엄정씨가 과일가게를 하던 딸네 집에 놀러가서 찍은 사진. 장일균씨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원래 이곳 호월1리 무월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님은 장씨 성에 수자 갑자를 썼고 어머님은 지씨 성에 음자 정자를 사용했어요.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세상을 떠난 지도 어느덧 34년이나 됐네요. 어머님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지 1년이 지나서 세상을 떠셨고요. 지금 맏아들이 마흔인데 맏아들이 여섯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지요. 부모님께서는 농사를 지었어요. 어릴 때 우리 집은 논 7마지기에 밭이 서너 마지기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남의 논밭을 해마다 대가를 쳐주고 얻어서 도지(소작)로 부쳐 먹기도 했고요. 논 한마지기가 150평이니까 그다지 잘 먹고 잘살았다고는 보기 어렵지요. 그때는 누구나 그랬듯이 죽도록 일해도 먹고 사는 일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논밭이라고 해봐야 기름지게 걸굴 거름조차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농사도 잘될 리가 만무했고요.”
부모님을 포함해서 장일균씨의 형제자매 오남매는 가족들이 모두 달라붙어 농사를 지을 만큼 땅이 충분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자기 일을 찾아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장씨는 기억한다.
“그저 남들처럼 그렇게 자기 일을 스스로 찾아 하면서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우리 형제자매 오남매 중에 제일 맏이고요. 아래로 진칠(75세. 울진읍 호월리)이라는 남동생이 있고, 그 밑으로 선랑(72세. 부산시)이라는 여동생과 남동생 진우(64세. 부산시)가 있어요. 그리고 막내가 남동생인데 진술(61세)이라고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 진술이는 원래 대구 달성군 화원교도소의 교도관으로 근무를 했었는데, 어느 날인가 미국으로 간다면서 사표를 내고 떠났어요. 미국에 건너간 남동생 진술이는 처음에 미국 우체국의 우체부로도 근무하고 또 사업을 하다가 실패도 하다가 하더니, 이제는 꽤 자리를 잡고 안정되게 사나 봅니다.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국제변호사도 하고 있고 뭐 그렇게 자식농사도 잘 지었고요. 막내 동생 진술이는 미국으로 건너간 지 31년만인 작년에 고향을 찾아서 이곳까지 한번 왔다가 갔어요.”
이장을 맡아서 41년째 일선에서 봉사하고 있는 장씨는 어린 시절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다가 울진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어릴 때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 같은 한학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돼서 울진국민학교에 들어갔지요. 울진국민학교를 33회로 졸업했어요. 그때 울진국민학교는 한 학년이 3반까지 있었는데, 1반을 마수구미, 2반을 다께구미, 3반을 우메구미라고 불렀어요. 한반이 50여명 됐으니까 졸업생이 150여명 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8살에 울진국민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때가 일정 때였는데, 일정 때는 학교에 들어가는 취학연령이 7살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8살에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나이가 7살이라고 속이고 학교에 들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14살에 울진국민학교를 졸업한 장씨는 시험을 봐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가정 형편상 꿈을 접고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지었다고 술회한다.
“당연히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가서 공부를 더하고 싶었지요. 그러나 안보면 모를까, 부모님께서 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딸린 여러 식구들 먹여 살리며 힘들게 살고, 제 아래로는 동생들이 또 올망졸망한데 어린 마음에도 제 욕심만 차릴 수는 없겠다 싶어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습니다. 어차피 중학교도 못갈 것인데 시험은 봐서 뭐하겠나 싶어서 시험도 보지 않고 꿈을 접었어요. 그리고 한동안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짓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지요.”
17살에 맞닥뜨린 6.25전쟁·····인민군에 끌려가서 참호 파다가 왼쪽 귀 고막을 영영 잃어·····방위군 지원해 경남 울주군 남창으로
8살에 울진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4살에 졸업한 후 집에서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짓던 장일균씨는 17살에 6.25전쟁과 맞닥뜨리게 된다.
6.25전쟁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북한 인민군은 울진까지 곧장 쳐내려왔고, 장씨는 근남면 수산리에서 왕피천을 사이에 두고 아군과 대치하던 인민군의 노무자로 동원되어 가서 참호(塹壕)를 파는 일을 하룻밤동안 하게 된다.
“밤중에 붙들러 가서 수산리에서 군인들 호파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한참 참호 구덩이를 파던 도중에 담배를 피우게 되었는데, 인민군 병사가 한명 다가오더니 누가 담배를 피웠냐고 묻더군요. 어둠속에서 국군과 대치하고 있는데 담뱃불이나 담배 냄새가 멀리까지 보이거나 퍼져 나가는 걸 염려했던 모양이지요. 또 밤에 비행기에서 담뱃불 빛을 보고 공격을 받거나 하는 그런 것을요. 그래서 제가 피웠다고 하니까 앞뒤 가릴 것 없이 오른손바닥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제 왼쪽 뺨을 때리더군요. 순간 눈앞에 불이 번쩍 나는데, 뺨이 아파서 얼얼하기는 했지만 호파는 일을 끝까지 다 마쳤지요. 밤새워 참호를 파고 이튿날 새벽에 돌려 보내줘서 집에 왔는데, 왼쪽 귀밑에 뭔가 계속 칠칠거리고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왼쪽 귀가 칠칠 거리는데 좀 봐주소’ 했더니, 어머니가 ‘귀속에서 계속 피가 나니까 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하더군요. 병원에 가서 보였더니 왼쪽 귀의 고막이 완전히 나갔다고 했습니다. 담배 한대 피우다가 인민군에게 뺨을 얻어맞아서 고막이 나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왼쪽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살아왔어요. 평생 왼쪽 귀는 전혀 쓰지 못하고, 전화를 받더라도 오른쪽 귀로만 받고 그렇게 지내 왔지요.”
6.25전쟁이 나던 초기에 왼쪽귀의 고막 파열로 청력을 영영 잃어버리는 우여곡절을 겪고 난 다음인, 그해 11월에 장씨는 가족 가운데 혼자 방위군에 입대해서 경남 울주군까지 피난을 떠난다.
“17살인가 됐을 때 6.25전쟁이 터졌어요. 사실 제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호월리 마을에서 구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와 아들인 제가 연이어 이장을 하고 있는 셈이네요. 그때는 마을 이장이라고 부르지 않고 구장이라고 불렀지요. 6.25전쟁이 터졌을 당시에도 아버지는 구장 일을 맡아보고 계셨는데, 6.25전쟁이 나던 해 초겨울 11월 달에 아버지가 저를 불러 앉히더니 방위군으로 지원을 해서 가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나중 일은 모르니까 맏이인 너 혼자라도 먼저 방위군으로 지원을 해서 남쪽으로 내려가라고 했어요. 마을 구장이다 보니까 다른 사람들보다는 정보에 좀 더 빨랐던 거지요. 그 당시 방위군이라고 하는 것이 정식으로 군대에 가서 군사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떼를 지어서 남쪽으로 내려간 거였지요. 그러다가 혹시 전쟁에 필요하면 국군 뒤에서 이것저것 수발도 들고 하는 보급대 역할을 겸하면서요. 그 당시에 방위군 사령부는 강릉시에 있었는데, 울진군 방위군 지대장은 장홍규씨라는 사람이었어요. 울진에서 방위군으로 지원한 사람은 수백명이 족히 넘었는데, 울진을 출발해서 경남 울주군 남창이라는 곳까지 줄곧 걸어서 내려갔지요. 울진에서 모인 방위군들 중에서는 제가 나이가 제일로 어렸어요. 그래서 나이가 어리다고 방위군 장교들 호위병으로 근무했습니다. 울주군 남창이라는 곳에 도착해서는 야영을 했어요. 야영을 하면서 나무를 주어다가 불을 피워서 추위를 면하고, 주먹밥으로 허기를 달래고, 시시때때로 모여서 반공 교육을 받고 그렇게 3개월간 지냈지요. 말이 좋아서 방위군이지, 일종의 피란병이었던 셈이지요. 울주군 남창이라는 곳은 울진군 방위군 피란민 집결지였고요. 그곳에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모였고, 나이 어린 사람들도 모였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저만 방위군으로 지원해서 울주군 남창까지 가서 세달간 머무르다가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호월리 무월 집으로 되돌아왔지요. 그나마 6.25 전쟁 초기의 제일 위험하던 시절에 마을 구장을 하던 아버지의 조언을 따라서 남창으로 떠났다가 무사히 집으로 되돌아온 겁니다.”
장일균씨의 아버지 장수갑씨는 장씨의 맏아들이 여섯 살 때 세상을 떴다. 사진은 장씨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꽃상여가 집을 나서면서
일제시대부터 6.25전쟁 당시까지 구장(區長)일을 맡아보던 아버지·····지방 빨갱이들에게 끌려가서 피칠갑하는 고초를 겪어
6.25 전쟁 초기의 화를 피해 방위군에 지원한 다음 울주군 남창까지 가서 3개월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장일균씨는, 6.25전쟁 당시 마을 구장을 지냈던 아버지가 지방 빨갱이들에게 끌려가서 큰 고초를 겪었던 일을 들려준다.
“일제시대에 마을에서 구장 일을 밭아보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터질 때까지 구장 일을 계속 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인민군이 울진까지 밀고 내려오자, 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지역에서 활동하던 빨갱이들이 득세하면서 구장이던 아버지를 경찰서로 끌고 갔어요. 그때는 경찰서를 내무서라고 불렀는데, 지금 울진군청 앞쪽에 울진내무서가 있었지요. 식전 댓바람에 총을 메고 우리 집으로 들이닥친 지역 빨갱이들은 아버지를 데리고 울진내무서로 끌고 가서 하루 종일 취조를 하고, 몽둥이로 패고 그랬나 봅니다. 그때가 여름이라서 아버지는 삼베옷차림으로 끌려갔는데, 집에 들어올 때 보니까 몸뚱이에 온통 피칠갑을 해서 기어서 들어오더라고요. 들리는 말로는 지역 빨갱이들이 각목에다 못을 촘촘하게 박아서 그것으로 사람을 취조하면서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사정없이 팼다고 합니다. 각목에다 못을 박아서 그 몽둥이로 사람을 패댔으니 삼베옷을 입은 힘없는 사람의 몸뚱어리가 어떻게 배겨 내겠어요? 지금도 아버지가 피칠갑을 해서 집으로 기어서 들어오던 그 생각을 하면 눈물이 납니다. 호월리에서도 아버지가 구장을 하다 보니까 제일 먼저 붙들러 갔고, 시간을 두고 하나둘씩 차례차례로 총을 멘 지역 빨갱이들에게 울진내무서로 붙들러 가서 취조를 받으며 몽둥이에 힘없이 두들겨 맞으면서 매찜질을 당하고 그랬지요. 사람 목숨조차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참으로 끔찍한 세월이었지요. 숨이라도 쉬고 있으니 산다고 하지,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라고 할 수 있겠어요?”
방위군에 자원해서 울주군 남창까지 갔다가 고향으로 되돌아오니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도망을 다니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장씨는 전한다.
“전쟁 나던 해 초겨울에 울주군 남창까지 피난을 떠났다가 호월리로 되돌아와 보니 북한 인민군들에게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끌려가지 않으려고 이곳저곳으로 도망을 다니다가 도저히 더 이상 숨을 방법이 없자 목을 매서 자살한 사람까지 있더군요. 그래도 동네가 전체적으로 변한 건 없었습니다. 논밭전지도 그대로 남아 있었고, 농사짓는 사람들은 농사철이 되면 논밭을 갈아서 씨를 뿌리고 추수하고, 그렇게 또 일상은 시간을 쫓아서 흘러갔지요. 그렇지만 겉으로는 평온한 듯 보였어도 모두들 길고 지루한 전쟁이 하루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17살에 장일균씨가 마주쳤던 6.25전쟁은 장씨의 나이 20살이 되던 해 7월에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끝나게 된다.
6.25 전쟁 끝나고 2년 후에 중매로 결혼·····부인 남순자씨와의 사이에 6남매 두어
6.25전쟁이 끝나고 2년 후,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23살 나이에 장씨는 중매를 통해 결혼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2년 뒤에 중매를 통해 결혼했어요. 을미년이니까 1955년 음력으로 삼월 초닷새에 결혼을 했네요. 그때 저는 23살이었고, 내자는 19살이었어요. 장필혁이라고 이 동네에 살던 분이 중매를 했는데 이제는 고인이 되었지요. 내자 이름은 남순자이고 울진읍 신림리가 고향입니다. 결혼을 할 때, 먼저 제가 신부 집이 있는 신림리로 올라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당일에 신부를 가마에 태워 이곳 호월리까지 데려왔어요. 결혼식을 올리고 당일에 시댁으로 신부를 데려오는 것을 ‘도신행’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결혼식을 올리고는 했습니다. 당시에는 호월리에서 신림까지 이 위쪽동네 높은들 건너편의 가라골 재를 타고 오갔는데, 신부를 가마에 태우고서 가라골 재를 넘어 오는데 가마가 아래로 쏠리면서 금방이라도 자빠질듯하고... 저는 신부를 태운 가마의 앞에 서서 걸어 왔지요. 그렇게 내자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요.”
장일균씨가 결혼 당시를 설명하는데, 장씨의 부인 남순자씨가 말을 거든다.
“시집을 오니까, 시부모님과 아직은 어리기만 한 시동생과 시누이들이 다 있더군요. 제가 이 집안으로 시집을 올 때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떠나서 살고 있는 막내 시동생이 여섯 살이었고, 시아버님이 마흔여섯살, 시어머님이 마흔일곱살이었어요. 시댁은 사는 모양이 얼마나 궁핍한지 옷을 만들 천 쪼가리가 없어서, 막내 시동생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저런 자투리 천 쪼가리를 자르고 서로 기워서 쓰봉을 만들어 입히고 그렇게 학교를 보냈지요. 신림 친정집을 떠나서 호월리 장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니까, 마침 시댁 논이 개락으로 흙에 잠겨서 한창 논의 흙을 퍼내고 있던 기억이 새롭네요. 저는 툭하면 신림 친정으로 올라가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한동안 지내기도 했고요. 저는 신림국민학교를 나왔어요. 우리 집안은 딸이 다섯이었는데, 위로 언니 둘은 학교를 다 못 다녔는데, 저만 친정엄마에게 친구들이 다 가는 학교를 보내 달라고 떼를 쓰고는 했지요. 친정엄마가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있으면 베작대기고 뭐고 다 감춰놓고 학교를 보내달라고 생떼를 쓰고는 했어요. 결국 저한테 지친 친정엄마가 초등학교를 보내주어서 겨우 신림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어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도중에도 학교를 그만 다니라고 교과서를 찢기라도 하면, 찢어진 반동가리 교과서를 들고서라도 학교에 등교하고 했으니까 그나마 국민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었던 거지요.”
장씨의 본가는 원래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호월리 동회관 뒤쪽의 산 밑에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우리 집은 동회관 뒤 산 밑에 있었어요. 그곳에서 살다가 33년 전에 이집으로 이사를 온 겁니다. 새마을운동을 부르짖던 시절에 지붕개량 사업이 한창이었는데, 그때 오래된 집의 지붕을 개량하느니 차라리 새로운 터를 잡아서 집을 다시 짓고 지붕도 새로 하자 싶어서 지금 이곳으로 이사를 온 거지요.”
장일균씨는 부인 남순자씨와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다.
“자식은 6남매를 두었어요. 맏딸 미순(49. 북면 하당리), 둘째딸 경숙(46. 인천시), 셋째딸 문예(43. 온양리), 맏아들 동윤(40. 울산시 울주군), 넷째딸 경연(37. 울진읍 연지리), 둘째아들 남윤(32. 수원시)이가 그들이지요.”
장씨의 부인 남순자씨의 친정 식구들이 울릉도 성인봉에 올라 찍은 사진. 장씨는 6.25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955년 중매를 통해 결혼했다
1969년부터 41년간 호월1리 무월 마을 이장으로 활동하고 있어·····새마을운동과 부역, 그리고 ‘궐’
지금까지 41년째 이장 일을 보고 있는 장일균씨는 1969년도에 처음으로 호월리 무월 마을 이장을 맡았다.
“1969년 3월 1일부터 호월1리 무월 마을 이장 일을 맡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이장을 처음 맡은 지 얼마 안돼서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하던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었어요. 정부에서 시골 각 마을마다 시멘트를 지원해주면서 이런저런 일들을 추진하라고 연일 공문과 지시사항이 하달되었고, 각 마을 이장들은 그 지시를 쫓아서 분주하게 쫓아다녔습니다. 당시에 호월1리에도 정부에서 시멘트 333포를 지원해주고 농토에 물을 끌어들이는 도수로 공사를 시행할 것을 지시했는데, 마을 주민들에게 그 취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주민들의 일손을 빌려서 도수로 공사를 끝마치기도 했어요. 당연히 그 시절에야 시멘트는 정부에서 지원해 주었지만, 일손은 집집마다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공사 현장에 불려 나와서 공짜 품을 팔아야 했지요. 그 당시에 호월1리 마을 가구 수가 50여호 됐었는데, 지금과 호수는 별다른 변동이 없어요. 50여호 각 집집마다 한명씩 부역에 동원되어 공사를 진행했고, 별다른 착오 없이 도수로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공사 장비라고는 남자들은 괭이나 삽, 리어카가 전부였고, 여자들은 대야를 머리에 이고 흙이나 돌멩이를 날라야 했으니 실로 대단한 일을 했던 거지요. 어떤 한가지 사업이 끝날 때마다 보람도 많이 느꼈습니다. 저 앞으로 보이는 무월동 논의 경지정리는 제가 이장을 맡아보기 전에 완료했어요. 그 당시에 울진군수가 배태민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호월리가 울진군에서 경지정리 시범부락으로 선정되어 사업을 추진했던 거지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우리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부역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공사현장으로 불려 다녔다.
“그때는 가뭄이 들면 행정에서 보유하고 있는 양수기를 빌려 주었어요. 보급이 시작되던 초창기에는 양수기도 워낙 고가이다 보니 요즘처럼 개인적으로 양수기를 보유하는 집은 거의 없었습니다. 마을 앞 도로를 뚫을 때나, 농사용 보를 만드는 부역이 있을 때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삽이나 괭이, 리어카와 대야를 들고, 이고, 끌고 공사 현장으로 모여 들었어요. 그때는 하는 일마다 전부 부역이었습니다. 한 가구에서 한명씩 부역 현장에 나오지 않으면 ‘궐(闕)’이라고 해서 벌금을 물어야 했지요. ‘궐을 물린다’고 하는데,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궐 액수도 별도로 조정했습니다. 일제 경지정리를 할 때는 자기 집 논이 없더라도 무조건 부역에 나와야 했는데, 자기 논이 없는데도 부역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궐 나온 것과 공동으로 조성해둔 마을기금에서 얼마씩 품값 비슷하게 지급하고는 했어요. 또 정부에서 잉여 농산물이라고 해서 외국에서 들어온 밀가루 같은 것을 마을마다 나눠주고는 했는데, 그것도 따로 지급하고는 했고요. 부역은 종류도 많았어요. 객토사업, 경지 정리, 도수로 정비, 퇴비 증산, 각 마을 간을 연결하는 도로... 호월리 무월 앞 도로도 한 20년 전쯤에 확·포장되었지요. 그전에는 이곳을 지나서 하당을 연결하는 도로가 길도 좁고 울퉁불퉁하고 정말 형편없었어요. 언젠가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정림3리 올미골이라는 곳에 가서 퇴비 증산운동에도 동참했었고... 그때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만 앞에 붙으면 안 되는 일도 없었고, 그렇게 사람들 마음이 곧잘 하나로 모아지고는 했습니다.”
장일균씨의 안방 벽에 걸려 있는 다양한 가족사진들
녹색혁명과 통일벼·····경지 정리 시범부락·····관내 최초로 방송설비 설치···친환경농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호월1리
박정희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주창하면서 모든 국민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내세웠다.
당대를 풍미했던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야 항상 엇갈리기 마련이지만, 어쨌든 나이든 사람들을 만나보면 박정희 대통령 때문에 더 이상 배를 곯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를 자주 전해 들을 수 있다.
“박정희대통령은 녹색혁명이라고 해서 통일벼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신품종 벼를 심을 것을 전국 농가에 적극 추천했어요. 통일벼는 울진군 관내에서 호월1리에 가장 먼저 보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고, 처음 시작할 때는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겠지만 통일벼를 처음 재배할 때도 농사짓는 사람들이 말들이 많았어요. 안 그렇겠어요? 벼농사가 일년 농사의 전부인데, 생전 처음 심어보는 통일벼가 큰 모험일수 있다면서 농민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대기가 일쑤였지요. 그때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설득도 하고, 사정도 하고, 마을회의도 몇번씩 거쳐 가면서 그렇게 울진군에서 처음으로 통일벼를 재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정부에서 권고하는 각종 사업을 추진하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박정희 대통령이 각 마을마다 보급한 통일벼 덕분에 우리가 배를 덜 곯고 먹고 살게 된 거지요. 그때는 이장 출무회의도 얼마나 잦았던지... 지금은 10일에 한번씩 출무회의를 하는데, 그것도 일이 있으면 좀 더 자주 하고, 없으면 건너뛰기도 하고 그럽니다.”
지난 시절에는 시골 동네 사람들이 아이를 출산하면 출생 신고서를 이장이 대신 작성해서 읍·면사무소에 신고해주는 일이 많았다.
“동네 사람들 출생신고도 많이 해 주었지요. 어디 출생 신고 뿐입니까? 호적등본, 제적등본 등 군청이나 읍·면사무소에서 발급해주는 증명 서류 심부름은 안해본게 없지요. 그때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서 서류를 발급할 때면 중간에 먹지를 깔고 그렇게 손으로 직접 수기 작성을 했어요.”
장일균씨는 울진군 지역에서 마을 방송 시설도 호월리에 처음으로 설치됐었다고 전한다.
또 수년전부터 울진군에서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 농업도 호월1리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었다고 자랑이다.
“지역에서는 호월리에 최초로 마을 방송 설비가 들어왔어요. 그때는 방송 시설이 귀할 때라서 울진국민학교에서 운동회를 할 때면 호월리의 방송 설비를 빌려가고는 했으니까요. 비료를 타가지고 와서 나눠줄 때도 방송을 이용해서 비료 값을 받았고, 온갖 행정 지도사항이나 전달 사항도 방송을 통해서 전달했고, 방송을 하면서부터는 많이 편해졌지요. 몇 년 전부터 울진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친환경농업도 무월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어요. 행정에서 호월1리를 지정하여 마을 전체 3ha 단지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역시 처음에는 다들 안한다고 해서 마을 전체 회의를 6번이나 했습니다. 아이고 말도 마소.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때가 어렵지, 한번 친환경 농업이 성공하고 나니까 그 다음해부터는 다들 아무 말도 없이 친환경 농법으로 농사를 짓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호월1리 무월은 통일벼를 관내에서 제일 먼저 재배한 마을, 경지정리 시범부락으로 농토를 구획 정리한 마을, 최초로 방송설비를 설치한 마을, 친환경 농사를 처음 시작한 마을 등 울진군 관내에서 첫 기록을 세운 게 꽤 많네요.”
41년 전 이장으로 근무를 시작하면서 수당으로 300원 받아·····공사 중인 마을회관이 준공되면 이장도 그만둘 계획
41년 이장 근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장씨는 1969년도에 처음 이장으로 근무할 당시에 수당으로 300원을 지급받았었다고 말해준다.
“지금은 이장 근무 수당으로 매월 24만원씩 지급됩니다. 그렇게 지급하기 시작한지 몇 년 안됐어요. 거기다가 집집마다 일년에 만원씩 모금해서 이장에게 전해 줍니다. 전에는 가구마다 만오천원씩 모금해서 주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다들 어렵다보니 만원씩 모금합니다. 동네 주민들 모금이야 줘도 그만, 안줘도 그만 아닙니까? 법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어느 누가 이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동네일을 보러 오토바이를 타고 읍내에도 자주 나가야 하고, 이장 수당이 보다 현실화되면 좋겠지요. 최소한 활동비는 되어야 누가 이장을 맡더라도 부담이 없이 맡을 테니까요. 제가 1969년도에 처음으로 이장을 맡았을 때는 수당으로 300원인가, 500원인가를 받았습니다. 그때 막걸리 한잔 값이 30원 할 때였는데, 막걸리 몇 잔 마시면 없어지는 보잘것없는 돈을 수당으로 받았던 거지요. 그리고 동네에서 거둬주는 모금이 일년에 집집마다 쌀 두되씩이었어요.”
장씨는 지난 1969년부터 호월1리 이장을 맡아서 이장직을 수행하는 동안 8개월간을 쉬었던 적이 있다.
“수년전에 우리 마을의 어떤 젊은 사람이 자기가 이장을 하겠다고 나섰어요. 결국 경선으로 이어졌고, 주민 투표를 통해서 제가 낙선을 했습니다. 이장에 당선된 그 젊은 사람이 3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해서 이장을 하더니, 그해 11월에 마을사람들에게 온다간다 말도 없이 서울로 달아나 버렸어요. 이장이 무슨 큰 벼슬이라도 되는 양 이 작은 마을에서 투표까지 하면서 이장을 맡더니, 힘도 들고 자신도 없으니까 그대로 서울로 올라가 버린 거지요. 그 후에 동네 주민들이 다시 저더러 이장을 맡아 달라고 해서 그때부터 다시 이장을 맡아서 지금까지 죽 일을 보고 다니지요. 그 젊은 사람 이름을 밝히기는 곤란하고, 어쨌든 그 덕분에 중간에 8개월을 쉬게 되었습니다.”
장일균씨는 현재 마무리 공사 중인 호월1리 마을회관이 준공되고 나면 더 이상 이장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한다.
“이젠 저도 나이도 많고, 지금 공사 중인 마을회관만 준공되고 나면 이장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좀 나이가 젊은 사람들이 맡아서 열심히 뛰어다녀야지요. 공사를 마무리중인 마을회관도 예산이 모자라서 울진군에 요청해 두었는데 큰일입니다. 아직까지도 호월리에는 드물기는 해도 젊은 사람들이 조금 있는데, 이제는 그 사람들이 이장을 맡아서 동네일을 보러 쫓아다녀야지요.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마을회의에도 잘 안 나오고, 더욱이 이장을 선출할 때가 되면 자기들에게 이장을 맡길까 싶어서 연락도 잘되지 않으니 큰 걱정입니다. 그래도 마을회관이 준공되고 나면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맡길 작정입니다. 아이고, 제 나이가 얼만데... 이젠 정말이지 그만하고 싶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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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이장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읍·면장 제도의 행정기관이 있었고, 그 아래에 읍·면장의 보조기관으로 구장(區長)이 있었다.
명예직이었던 구장은 읍·면의 사무에 대해 정(町)·동(洞)·리(里)에 관한 것을 보조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 지방자치법이 제정되어 리단위에 이장을 두었고, 주민이 직접 선거로 임기 2년의 이장을 선출했다.
그러다가 1961년도에는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되어 이장은 읍·면장이 임명하도록 했고, 1963년 지방공무원법이 제정되었을 때도 이장은 읍·면장이 임명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이장에게 지방자치단체의 규칙에서 정하는 일정한 보수를 지급할 수 있도록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5년 내무부장관의 지시에 의해 읍·면의 리에 반을 두고 그 기능을 보강하기 위해 시·군 조례인 통·반 설치조례를 전면적으로 개정했고, 이때부터 통·반 제도가 골격을 제대로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지방 행정구역 개편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1980년 후반부터 지방자치로의 복귀 움직임이 나타나서 1991년도에 지방의회가 구성됐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가 전면적으로 실시되기에 이른다. 행정의 말단 하부 단위인 리를 대표하여 일을 맡아보는 이장의 역사는 이처럼 오래되었다.
이들 이장들은 아직까지도 열악한 보수와 환경에 그대로 노출된 채, 한 마을을 대표하여 지역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행정기관에 전달하여 반영되도록 하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 자주적이고 자율적인 업무를 처리하고, 동네 주민들의 화합 단결과 이해의 조정을 위한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오롯이 감당하고 있다.
또한 지방세 납세고지서를 전달하고, 동네 주민들의 편의 증진과 봉사, 동향 보고, 반회보 등 행정기관의 각종 홍보물 전달과 시책 홍보, 각종 통계조사 등 행정의 보조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최일선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장들을 보면서, 그들이 지금 바쁘게 쫓아다니는 한걸음 한걸음이 끝내 그들의 자부심과 긍지로 고스란히 연결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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