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유(75세, 서면 쌍전1리)
우리는 예전에 초가지붕 밑에서 살고 있었다.
옛 농촌은 농우(農牛)가 있어야 농경을 할 수 있었고, 좋은 농경지를 가질 수가 없었기에,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살 수 있고 화전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정하여 집을 짓고 살았다.
연중 가을이 되면 지붕을 덮는 사업이 큰일 중의 하나가 된다. 지붕은 가을에 한번 덮게 되면 1년을 경과하면서 비가 집 안이나 벽으로 새지 말아야 한다. 짚은 논이 많지 않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설령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소를 사육하여야 농사를 지을 수 있고, 연중 송아지를 낳게 되면 중요한 농가 소득원이 되기 때문에 짚이 귀했다. 또 소를 사육하면 퇴비가 생산되므로 가축은 재산 증식의 근원이 된다.
그리고 지게가 농가의 두번째 농기구가 된다. 운반수단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게는 지게 작대기를 짚고 산악이나 비탈길, 산골길의 주위에 나 있는 나무나 잡초를 낫으로 베기만 하면 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남녀를 불문하고 운반수단으로 널리 쓰였다. 식구가 많으면 지게 또한 많아야 운반수단이 용이했다.
나는 황혼기가 되어서 책을 정리하다가 책 사이에 1972년도 12월 29일부터 73년 5월 18일까지 6개월간 대봉전반과 임전반이 합동하여 ‘마을 안길 넣기 새마을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을 당시의 새마을 사업추진 출역 명부를 보았다.
그 당시의 생활은 각종 농산물을 지게로 36번 국도변까지 운반하여야 곡물 상인이 차량을 이용하여 시장으로 출하할 수 있던 시대였다. 50년여 전에는 비료 생산량이 적어서 12km가 넘는 면소재지까지 지게로 비료를 운반하여 전답에 시비하던 시대였다. 이러한 지게운반 수단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을 안길 넣기 새마을사업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에 새마을사업운동과 출역 명부를 작성하는 총무 역할을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37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그 당시에 대봉전반과 임전반이 출역할 수 있는 농가호수는 27호였다. 지금은 그 때 새마을사업에 참여한 5호가 거주하고 있으며, 5호는 고령으로 고인이 되었고, 17호는 타처로 퇴거하여 생사를 알 수 없고 약간의 귀농 호수가 자리매김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을 안길 넣기 새마을사업은 1972년 11월 15일에 대봉전반과 임전반이 새마을회장 남계문씨 집에 모여 마을 안길을 개설하기로 협의를 하고, 농로개설에 소요되는 농경지는 무상 양여키로 하고 인부 출역에 대한 규정을 세웠다. 중식 식사는 개별적으로 가지고 오기로 결정하고 막걸리는 농주로 새마을사업 참여 농가가 27호가 되므로 명단 순위에 따라 1두식 출품하기로 했다. 총원 27호가 출력시에는 2두씩 출품하고 안주는 김치나 채소 등으로 동참하기로 정하였다.
새마을사업 안길 거리는 2km 정도로 정했는데, 하천 암거는 4군데나 되었다. 철근과 시멘트는 지원을 받기로 하고, 노면 확장에 암반이 출두하거나 암벽 지역이 많아 발파를 하지 않으면 농로가 불가능한 지역이 많아 암반이나 암벽을 발파하기 위하여 광업소 지역에 노미를 매입하거나 구입해야 되므로 친소를 통하여 구입토록 하였다.
매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길고 짧은 것이 도합 20여개 수집되었다. 노미를 사용하기 위하여 불미간을 만들고 기술자를 선정하여 노미를 배리게 하니 담금질도 잘되었고, 암벽지역은 전기발파를 하게 되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농로는 과거에 인도로 이용하던 곳을 주로 사용하고, 곡선이나 올라가야 되는 길은 토지주에게 승인을 얻어 직선으로 농로를 개설하기로 합의를 하고, 농로 개설지역을 측정하였다.
묘지 위토 지역이 3군데 있어 그곳의 승인을 얻지 않으면 농로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김영 김씨 위답, 서면 사씨 위답, 평해 황씨 위전 등 3곳을 무상으로 설득하여 승인을 얻어 농로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새마을사업 추진은 1972년 12월 20일부터 암거 놓을 재료 수집인 자갈 채취사업이 시작되어 지게와 발이 동원되어 2일간에 암거 재료 작업이 완료되었다. 송판과 받침목 자재는 지원을 받지 못하여 자체 경비가 요구되었고, 암거는 해빙이 되고 따뜻한 봄이 되어야 진행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농로 확장 사업과 발파사업은 계속할 수가 있어서 1972년 12월 20일부터 시작하여 29일까지 총동원되어 많은 진척이 있었고, 송년 휴일을 보내고 1973년 1월 3일부터 다시 새마을사업에 출역하기로 하였다.
인원 동원은 순조로운 편이었으나 그 당시는 리 단위로 예비군 소대가 있어 근무를 해야 했고, 농가에서는 화목을 이용하여 난방을 하고 소를 사육하는 실정이니 총동원에 애로가 생기게 됨으로 인원을 반으로 갈라서 1조 작업반과 2조 작업조로 나누어 작업을 진행하기로 하고 막걸리는 일일 1두씩 호당 순번에 따라 김치와 같이 가지고 오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산골 다락논을 많이 경작하는 관계로 하천에 개구리가 많아서 불을 놓고 구워서 소금에 찍어 막걸리 안주로 이용하게 되니, 입 주변에 검정이 묻어 서로 보고 웃으며 즐거운 새마을사업이 진행되었다.
1차 농로 새마을사업은 73년 5월 18일까지 약 2km 거리를 농로로 확장 개설하였다. 인원은 1,053명이 동원되었고 암벽 2개 지역을 경유하지 않으면 농로를 개설할 수 없어서 천여발의 발파가 소요되었다. 농로를 개설한 지 10년이 경과한 후 밭 기반 사업으로 책정되어 6억원 공사비로 4m폭으로 확·포장하였다.
2차 새마을사업은 대봉전반에서 임전반 진입로 사업인데, 이곳 역시 암반이 많고 암벽이 인도로 된 노면이어서 이곳 인도를 이용하지 않으면 농로가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농로 확장 사업을 위하여 50만원을 지원 받았고, 발파 비용과 인건비는 일당 천원으로 정하여 작업을 진행하니, 난(難)공사 100m 거리를 농로로 확장할 수 있었다.
그 당시는 ‘포크레인’과 같은 중장비는 볼 수 없었고, 오직 우리 마을 농로를 개설해야겠다는 새마을 정신 뿐이었다. 추후에 정부 지원으로 도로 포장 업자가 선정되어 시멘트로 포장되었는데, 포장비용이 약하여 차량이 오가게 되니 노면이 파손되어 재포장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차후에 30% 새마을 자부담으로 공사를 하게 되어 주민은 무상 인력 지원으로 30% 새마을사업 명칭으로 공사를 하게 되니, 자재가 충분히 투입되지 못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파손되어 재공사 하는 일이 생기는 실정이 되었다.
새마을사업은 무임금 시대이고 자력으로 마을 가꾸기 시대였다. 지금은 무임금 사업은 없는 시대로 변모하였다. 40년여 전만 하더라도 산촌 생활상은 부역시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36번 국도는 돌축이 무너진 곳이 많아 나무를 베어다가 산도를 놓은 곳이 많아 나무가 썩어 무너질 우려가 있으면 다시 산도를 놓아야 차량이 오갈 수 있는 도로였다. 36번 국도는 휴전이 된 후에 목재운반 차량이 많아짐에 따라 비가 오게 되면 파이는 곳이 많아 부역으로 모래나 자갈을 채워 주어야 차량이 오갈 수 있었다.
영암선 철도가 개통하게 되니 광업소 갱내에 사용되는 목재운반과 건축용 목재, 사과 상자용 목재, 고기 상자용 목재 운반으로 도로는 파이는 곳이 많아졌고, 개인 소유권 산에도 벌채가 성행하고 국유림에도 벌채가 성행하니 벌채된 곳에 나무를 심기 위하여 지정 사업을 해야 되고 봄이 되면 식재사업을 하게 되니 주민이 동원되어야 했다.
인건비는 백미 1승에 불과한 금액을 받게 된다. 여름이 되면 묘목을 식재한 곳에 풀베기 사업을 하여야 함으로 또 다시 주민이 동원되어야 한다. 동원되지 않는 농가는 겨울철 화목에 영향을 받는 일도 있었다. 이러한 고통으로 인하여 산골을 떠나는 농민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은 75세 노인이 쓰레기를 주워도 백미 2kg에 6,500원 이상 임금을 받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골짜기에 사는 노인도 전등불 밑에 칼라 TV를 보며, 자가용 승용차, ‘쓰래스’ 짐차까지 갖고 있는 농가가 많으며, 집 앞까지 포장 공사가 된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50년여 전에 우리가 살아온 발자취는 기쁨, 슬픔, 눈물도 많이 흘리고 살아왔으며, 6.25 동란으로 100만 이산가족은 백발노인이 되어 남과 북에 가족을 두고 그리움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해방의 기쁨은 간 곳 없고 38선을 남겨놓고 동족상잔에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수백만의 사상자만 남긴 채 휴전으로 38선은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50년여 전의 생활상을 회고해 보면 새마을사업이 있기 전에 화장실은 가옥으로부터 20m 이상 떨어져 있으며, ‘나무 우덕이’로 둘러 있고 송판이나 나무로 걸쳐 놓아 만든 화장실에 까마귀나 쥐들이 분뇨를 먹고 살던 시절이었고, 새마을사업으로 인하여 흙벽돌이나 시멘트로 만들 수 있는 ‘랜가틀’이나 ‘부로커틀’을 보급하여 변소 개량, 울타리 개량 등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어 지붕개량은 함석이나 ‘스렛트’로 개량되는 새마을사업이 진행되었다.
임금 없는 부역을 싫다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왔는데, 지금은 임금 없는 부역은 하나도 없는 시대로 변하였고, 생활은 향상되어 승용차나 ‘쓰래스’ 차량이 많이 보이는 농가로 변신하였다.
지금은 부유한 생활 속에 살고 있는데, 그래도 인정은 초근목피 식생활 하던 시절이 좋았다. 이웃 간에 오순도순 상부상조하던 시절이 그리워진다.
우리 마을 27호가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1,053명이 동원되어 2km 거리 농로가 개설되고, 암거 4개 곳이 놓아졌고, 마을 회관 건립과 휴게정 건립 등 이것이 진정한 새마을정신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국가 지원 사업으로 농로가 확·포장되고 있음으로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정신이 살아나게 되었다.
새마을운동 출역 일지
NEWS TOP 3
추천뉴스
정치/행정/의회
more +-
제293회 울진군의회(임시회) 의사일정안
-
울진군, 지방도917호선∙군도20호선 4차로 확장 추진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울진읍 시가지의 교통혼잡을 완화하고 원활한 교통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방... -
왕피천공원서 펼쳐지는 '2026 야(夜) 울진' 호러 퍼레이드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오는 8월 1일 왕피천공원 물결광장에서 '202... -
울진군 지역자원 창업의 기회로! ‘2026 울진군 창업아카데미’ 첫 문 열어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지난 30일 환동해산업연구원에서 지역 예비‧초기창업자를 대상으로 ‘2026...
사회/경제/교육
more +-
울진국유림관리소, 지자체와 더불어 하천·계곡 불법행위 합동 점검 실시
울진국유림관리소(소장 김기한)에서는 울진군청 산림과와 함께 최근 여름철 관광객 방문이 급증하는 ... -
국립울진해양과학관, ‘제1회 KOSM 국민안전점검단 모집’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울진해양과학관(관장 김외철, 이하 해양과학관)은 오는 8월 3일부터 21... -
후포초, ‘한수원 2026년 울진군 초등학생 방학 중 점심도시락 바우처 지원 사업’으로 시원한 방학 선물
후포초등학교(교장 김은희)는 이번 방학 동안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 본부의 지원으로 추진... -
울진산림항공관리소, 산림·소방 산불대응 협력 강화 위한 소통 간담회 개최
산림청 울진산림항공관리소(소장 안성철)는 7월 28일 관리소에서 산림·소방 유관기관 간 산불 ...
원자력소식
more +-
한울본부, 2027년도 한수원지원사업 공모 시행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오는 7월 31일(금)부터 8월 31... -
한울본부, 울진 소상공인 최대 5천만 원 금융지원
한울원자력본부가 경기침체와 소비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울진지역 소상공인의 경영 안정을 ... -
한울본부, 신한울3·4호기 건설현장 용접사 양성 하반기 교육생 모집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한수원, 울진군, 현대 컨소시엄이... -
고준위 방폐장 공모만 해도 ‘30억원’…정부, 파격 지원 검토
정부가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 부지 공모에 참여하는 지방자치단체에 30억원 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