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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③ / 역사 앞에서(한 경찰관의 6.25 일기)

  • 신상구 펀집인 기자
  • 입력 2010.03.04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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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25 전쟁 당시에 울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정종화(1924~1987) 경찰관의 일기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시의 상황이 너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일기를 뛰어넘어 시간대별로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보고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자의 명문이나 한 줄의 기록이 전해주는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간대별로 기록을 남긴 정신은 대단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귀한 기록을 남긴 것은 개인의 일기를 넘어 하나의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특히 구주령, 백암산, 형제봉, 외선미, 광품, 선구리, 통고산, 수비, 발리, 본신, 입암, 창수, 영양읍까지의 험준한 산악을 타고 수시로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과정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쓴 글이지만 당시의 급박하고 처절했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간간이 문학의 서정적인 표현도 있어서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글이다.

 

정종화씨의 6.25 일기는 국한문 혼용체로서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단어도 많이 보이고, 일반적인 표기법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싣고, 내용상의 무리가 없다면 현대문으로 표기했다. 원문에서 판독이 불분명한 것은 무리하게 옮기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날짜에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아마 현장에서 메모 형태로 기록했던 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차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상의 원문은 앞부분 일부와 뒷부분 일부가 손실되어 있다.

 

정종화씨가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여간 기록한 일기를 본지에 연재한다.                                                           
[역주. 신상구 편집인]

 

<지난호에 이어>  

 

나는 부득이 손을 들었으나 손은 천근 이상의 중량 같이 좀처럼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자 4명의 청년은 나의 양손과 전신을 포박하자 20여명의 청년이 방안으로 들어오는데, 그때야 그 청년들이 인민군이 아니고 울진군내 출신으로서 소위 자위대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순간 몹시 고달팠다.
그것은 그 자들의 총구가 나의 복부에 닿을 때마다 극도로 생에 대한 애착과 공포심이 전신을 떨게 함에 있었다.   

그 자들은 큰 성공이나 한 듯이 만세를 부른다.   

 

1960년대 후반 기성면 지서

 

나는 30여명의 자위대에 포위당한 채 소위 온정 분주소(分駐所)에 왔다.
분주소장과 부소장은 선북(線北-북한) 출신이고, 지방출신 20여명은 사변(6.25 전쟁)전 에 내가 가장 친애하던 한청원(韓靑員-한국 청년단원)이었다.   

분주소장은 출동원들에게 성공하였다는 뜻으로 자극을 주어서 위안을 한 후, 취조가 시작된다.   

 

나는 모든 것을 부인하였더니, 지방청년으로서 소위 온정면 자위대장 김 모가 고문하기 시작하는데 하등의 요령도 없이 덮어놓고 때리는 데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나는 약 30분간 졸도하여 아무 정신도 없었다.   

 

그러는 차에 누구인지 나의 몸을 어루만지는 사람이 있다.
내가 눈을 떠보았을 때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국민회 울진군 부지부장 김수근 씨였으며, 내가 있는 곳은 소위 ‘교화장(敎化場)’이라는 구금장이다.

 

나는 전신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것을 억제하고 김수근씨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김수근씨는 나의 양 가슴에 손을 대고 뜨거운 눈물을 한 없이 흘린다.
김수근씨와 나는 약 1주일간 매일 같이 고문을 당하면서 취조를 받았다.   

 

나는 취조를 받는 동안 인민군 6명을 사살한 것과 한청원으로 하여 야경(夜警-야간 경비)을 시킨 사실을 고백하지 않고 견딜 도리가 없을 듯 보였다.   

 

8월 24일 18시경 김수근씨와 나는 소위 부소장과 자위대원 4명의 경계로서 울진 내무서로 이송되었더니, 내무서에서는 소위 정치보위부로 이송한다.   

 

정치보위부에서 간단한 조사를 마치고 내무서 교화장에 구금되니 또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사변 전 청년운동과 국민운동에 열렬하였던 동지 10여명이 구금당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교화장의 간수는 과거 우익이었던 지방 청년이었으니 가장 냉철하게 우리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들로서 제일 고달픈 것은 배고픔이었다.
하루 2식 밖에 주지 않는 식사였다.
우리들은 약 15일 후에야 처음으로 교화장에서 불려나가 정치보위에서 제1차 심사를 받는데 자수로서 고백서를 쓰라고 한다.   

 

고백서의 내용은 출신 성분과 나이까지 모든 경력과 인민에 대한 죄상을 하나 빠짐없이 상세히 기입하라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는 사실은 부득이 쓰지 않을 수 없고 기타는 쓰지 않았으며, 가장 나에게 유리한 말만 조언(造言-말을 만듦) 기재한 후, 반드시 이 고백서를 근거하여 간단히 나의 양팔에다 암기해두었다.   

 

그 후 약 3일 후인 9월 10일경부터 매일 같이 심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는 교화장에 수감되고 있는 동지는 80여명이었다.
나는 팔에 암기해두었던 고백서 내용을 잘 기억해두었기에 조금도 서슴지 않고 심문에 답변하였다.   

나는 5차 심사까지는 심한 고통은 받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근남면 지서

 

9월 18일경 교화장에서 불려나가니 정치보위부장실로 인도한다.
부장실에는 내무서 감찰계장, 예심계장, 정치보위부장 취조 책임자와 울진군 당위원장인 K모가 있었다.   

 

취조 책임자가 “정종화는 이승만 정부에 대하여 충성을 다함으로써 남한 일대에 크게 보도된 사실이 없는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단기 4282년(1949년) 12월 8일자 서울신문에 토벌 상황과 전과가 게재된 것이 문득 생각나 공포심에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나는 답하기를 “1개 경사가 무슨 큰 공적이 있어 남한 일대에서 유명하겠소. 그러한 일은 전혀 없다.”고 부인하였더니 예심계장이라는 자가 또 묻는다.
나는 절대 없다고 또 부인하였다.   

 

소위 정치보위부장이라는 자가 말하기를 “우리 인민공화국은 모든 취조에 있어 물적 증거를 먼저 수집한 후에 취조를 개시하기 때문에 부인하여도 쓸데없으니 양심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가장 피고에게 유리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하는 방식과 같이 고문을 가하겠다.”고 협박을 가한다.   

 

나는 잠시 생각하니, 만약 이것이 발각되는 날이면 나는 즉시 총살당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최후 사선(死線-죽음)까지 부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말하기를 “만약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동무들에게 총살당하여도 감수하겠다. 그러한 보고서가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감정을 가진 자가 중상한 것이 틀림없으니 재차 조사해주기 바란다.” 하였더니, 그제야 책상 의자를 다 치우고 집중 난타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죽고 싶었다. 심한 고문에는 요령도 없고 사정도 없다. 그러나 최후까지 의식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예심계장의 군화 신은 발로 흉부를 수차례 차일 때 나는 의식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그 후 약 30분이 지나 정신이 돌아와 그 자리에 누운 채 있었다.   

 

한 사람이 주사기를 들고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아 나는 주사를 맞고 겨우 정신이 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보위부장은 그래도 양심대로 고백하지 못하겠는가 하고 또 묻는다. 나는 죽어도 없다고 강력하게 부인하였다.
그러자 감찰계장이라는 자가 “야! 이 자식. 끝까지 부인하려면 하라”고 하면서 책보자기를 풀더니 신문 2매를 꺼내 나에게 주면서 읽어보라고 하였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신문은 단기 4282년(1949년) 12월 8일자의 서울신문인데, 한편에 붉은 잉크로 괄호를 쳐놓은 부분을 읽으라는 것이다.  

 

내가 놀란 것은 2년 전의 신문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것과, 그 신문에는 내가 공비 토벌에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고 게재되어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신문에는『울진경찰서 광회지서주임 경사 정종화는 하월(何月-어느 달) 하일(何日-어느 날) 지서원 11명을 대동하고 솔선, 공비 토벌에 출동하여 경북 봉화군 소천면 석포리에서 공비 아지트를 발견, 사살 6명, 마포(麻布) 5필, 식량 1가마니, 기타 다수의 전리품을 회득하고 아군 피해가 전무한 울진에서 처음 보는 대전과를 올렸다』고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낙심천만이다. 이제는 살 길이 없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죽음을 깊이 각오하고 이제는 바른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신부동이 된 나는 보위부원 두 사람에게 껴 안겨서 교화장으로 들어갔다.   

 

1960년대 후반 죽변면 파출소

 

그 후 9월 21일경 어두운 밤에 재감 인원 82명 중 22명을 불러내더니 춘천으로 간다는 것을 말하고 자동차에 태운다.
우리들은 최후의 죽음을 각오하고 쳐다본 즉, 마침 달빛이 우리들의 얼굴을 비추었을 때 우연히 눈물이 나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우리 국군의 북진을 또 한 번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정치보위부장은 우리들 22명에 대하여 한 사람 한 사람 공작(孔雀-당시 담배 이름) 1개씩을 배부해준다.   

우리는 담배를 피우는데, 그 연기는 마치 우리들의 생명을 재촉하는 듯하였다. 

 

그때 자동차 엔진 소리가 나고 화물차 한 대가 내무서로 들어온다.
그 시간은 9월 17일 22시경이었다. 우리들은 정치보위부장의 지휘에 의하여 22명이 승차하였다.   

 

마침 소위 괴뢰군의 영관 후보생이 역시 우리가 승차한 차로 춘천까지 간다하며 약 30명이 오자, 보위부장과 군관 후보생 상호간에 이 차를 전용하겠다고 언쟁이 시작된다.
우리들은 군관 인솔자가 전용할 수 있도록 마음 속 크게 빌었다.   

 

삼척으로 전화하더니 군관 후보생을 이 차로 보내고 내무서에서는 뒤차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하차의 명령을 받고 한없이 기뻤다.   

우리는 재차 교화장에 입감되어 하룻밤을 새우면서 자동차 소리만 나면 마음이 옴질거린다.   

 

9월 16일 이른 아침부터 함포 사격과 비행기 공습이 몹시 심하였다. 그날은 마침 음력 8월 15일(추석)이다.
21시경 갑자기 비상 신호 경적소리가 나더니 교화장 감수 근무자까지 전원집합이다. 그리고 내무서에는 한 놈의 내무서원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그날 밤에 아군이 들어올 줄 알고 학수고대하였으나, 콩 볶듯 하는 포성과 총성뿐이고 아군·경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러자 9월 27일의 태양은 바다를 뚫고 올라와 우리가 들어있는 교화장의 창문에 비추었다.   

 

우리 가슴속에서는 무엇인지 두근거림을 금치 못하였다.
울진중학교 노(盧)선생의 부인께서 포염탄우(砲炎彈雨-포 연기와 빗발치는 탄환)를 무릅쓰고 교화장으로 뛰어 들어와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군이 상륙하였습니다. 인민군은 전부 후퇴하고 있으니 이러한 기회에 탈옥하라고 권한다.  

 

우리는 일제히 교화장을 파괴하려고 부단히 노력해보았으나 좀처럼 문은 파괴되지 않았다.
우리들은 새삼스레 공포심이 약동함을 금치 못한다.   

 

그것은 만약 아군대가 조속히 들어오지 않으면 인민군이 후퇴할 때는 모조리 총살시킨다는 것을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복 바치는 마음을 억제하면서, 이렇게 되고 보니 우리들도 살 수 있는 시기가 오는가 보다 하고 괴롭고도 졸갑은 마음으로 보내던 중, 같은 날 16시경 울진면 읍내리 거주 이상억 동지가 뛰어 들어와 교화장의 문을 파괴한다.  감방 내에 있던 우리 동지들은 한꺼번에 뛰어나오니, 시내는 화염의 뜨거운 기운이 호흡을 방해함을 느꼈다.   

 

사방의 산봉우리에서 무수히 쏘는 인민군의 기관총 소리에 놀라서 우리들은 갈 바를 모른다.
각자 분산하여 정신없이 고성리를 지나 명도리 산고지에 가서 밤을 새우고 나니 아군이 울진에 들어왔다는 소식이다.   

 

나는 우리가 학수고대하던 기원에 하나님도 무심치 않아 승리의 날이 왔구나! 정의는 반드시 승리를 약속하는구나! 하고 혼자 반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너무나 무시시한 일을 당하고 나니 반신반의다.   

 

나는 또다시 첩자를 보내서 아군이 들어왔다는 것이 확실한지 파견하였더니, 첩자는 돌아와서 틀림없음을 고한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산봉에 올라갔다.   

 

아아, 1년이 경과한 지금도 내 눈 앞에 보이는 것과 같구나!
온양 일대에는 가가호호마다 태극기가 휘날리고, 해상에는 흰 돛을 단 고기잡이배가 바다에 가득하고, 태극기를 높이 꼽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북진하는 군용차.

 

나는 한없이 반가웠으며,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옷자락을 적신다.
내가 교화장에서 항상 공상적 희망으로 이러한 꿈을 몇 번이나 꾸고 잠을 깨고 나면, 생각지 않는 탄식이 나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날은 꿈이 아니다.
나는 그제야 본정신으로 돌아와 새로운 용기를 내어 떨리는 발을 조종해가면서 사변 전의 울진경찰서, 사변 후의 내무서로 달려가니 3개월 동안 그립던 경우(警友-경찰 동료)들이 내 얼굴을 보고 놀라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나의 손만 잡고 묵묵히 있더니 종화야! 너 살았더냐.
<끝>

 

※ 정종화(鄭鍾和)씨는 1924년에 태어나서 1987년에 작고했다. 1948년 경찰에 투신한 그는 6.25 전쟁 당시에 경사로 재직했다. 전쟁 당시의 공로 등을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2회 수여했고, 1960년 울진경찰서 사찰 주임(현재의 정보 과장)으로 정년퇴직한 그는 울진경찰서 경우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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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③ / 역사 앞에서(한 경찰관의 6.25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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