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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성류굴 안내 - 울진군 교육과
// 우리고장 “울진”은 자고로「문향」이라는 외지에서의 칭송을 받아왔다. 그 이유의 하나가 고려와 이조중엽시대에 정변이 있을 때마다 조정 고위층에 있는 대위정가와 도학가들의 피신지가 되었고, 그 토록의 요소를 지닌 자연적인 지세 이였음에 거유의 속출로 소위「문향」으로서의 칭송을 받을 만큼 따라서 명승지(名勝地)도 적지는 아니하다.
그 중에서도 천고의 신비를 지닌「성류굴」! 군하(群下) 근남면 성류봉하에 있으면서 오랜 세월로 많은 탐승객을 방문케는 하였으나, 그의 정체 전부를 밝혀낸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오직 신비에 싸인 채로 방치되어 있음을 개탄(慨嘆)해 오던 중 이 고장의 억측과 낭설을 일축시킴과 아울러 관광자원과 지질학의 연구에 일조가 됨은 물론, 그의 정체를 백일(白日)하에 밝히고저 울진교육과직원이 주동을 한 팔 명의 대원으로 하여금 이차에 걸친 탐험으로 2지(池) 11광장(廣場)을 필두로 경북사대 산악반의 협조를 얻어 1광장 1지를 발견하여 | |
1960년 울진군 교육과에서 만든 천연기념물 155호인 성류굴 안내기이다.
당시 울진군청 교육과 직원들이 성류굴을 직접 탐험하고 난 후 먹을 먹인 원지위에 철필을 이용하여 내용을 일일이 쓰고 지도를 그린 다음 등사기에 밀어서 찍어낸 귀중한 자료로 청주의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입수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천고의 신비를 지닌 성류굴이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관광객이 찾아 왔으나 그들을 위해 성류굴 내부의 전모를 밝혀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던 점을 안타까이 여겨오다가, 성류굴의 관광자원화와 지질학 연구에 일조를 하고자 당시 울진군 교육과 직원 주도하에 8명의 대원이 2차에 걸친 탐험을 하게 된다.
탐험 결과 2지(池) 11광장을 필두로, 당시 총연장 400m, 3지(池) 20광장을 발견하게 된다.
이 보고서의 서문에 “국무사무처 공보국 영화과와 강원도 공보과의 영화촬영 및 각 신문지상을 통해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룩해놓은 지하금강을 널리 소개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간략한 안내기로 만든 것”으로 밝히고 있다.
내용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 날짜별 탐험경과와 지상보도, 영화상영 일정 등을 소개하고, 둘째 1광장에서 12광장에 이르는 굴의 형상과 탐험하면서 느낀 감흥을 기록하고, 셋째는 성류굴에 얽힌 갖갖지의 전설과 양주동 박사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고려조 이곡(李穀)의 성류굴기행인「관동유기」를 소개하고 있다. 부록으로 울진지역의 대표적 명승고적 몇 군데를 소개하고 있다.
보고서 내용에는 당시 사회문화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있다. 예컨대 당시 탐험 장비 목록 중에서 ‘싸치라이트(searchlight)’, ‘체크라이트’, ‘나침판’, ‘부’, ‘카메라’, ‘줄자(6척)’ 등과, 대원들이 오직 모험심과 용기에 의존했다고 하는 대목 등에서 직접 수영으로 굴 내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장시간 체온을 높여 탐사를 진행했던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일일이 굴 내부를 손으로 그린 보고서 원본을 보면서 천연의 신비로 가득찬 오염되기 전 성류굴의 원형을 보았던 그들을 부러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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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총장(總長) 400미(米) 3지 12광장을 발견했고, 국무사무처 공보국영화과와 강원도 공보과의 영화촬영 및 각 신문지상을 통해 기암괴석들이 장관을 이룩해놓은 지하금강을 널리 소개하고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 그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여기 간략한 안내기를 만든 것이다. 단기 4293(1960)년 10월6일 탐승일을 기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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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의 위치와 기타명승지
탐험경과 제1차 4293년 10.3 울진교육과 전직원일행 18명 3지 대광장 탐승 제2차 4293년 10.6 울진교육문화계원 및 교육연구소원일행 8명 3광장 추가발견(3지 9광장) 제3차 4293년 11.2 경북사대 지리 및 생물학반 교수 및 학생산악반 일행 23명 내굴(來屈)로 2광장 추가발견 및 인골발견(임진왜란시 피난민 유골) 제4차 4293년 11.21 문화계 및 연구소원일행 4명 성류사 유물 석불발견 제5차 4293년 11.23 건국대학교 문리대학 지리학회회원 23명, 해병대원 5명
성류굴 내부 안내도
국무원사무처 공보국영화과 3명 등 계 30명 굴내 조사 및 영화 촬영 제6차 4294년 6.20 교통부 및 강원도공보과 직원일행 내굴하여 탐사와 동시 영화촬영 제7차 4294년 부산대학교 지질학반 교수 및 학생일행 15명 탐사차 내굴 제8차 4294년 11.28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 및 문화재보존위원일행 15명 굴(屈) 내부조사차 내굴 ◆ 지상보도 제1차 4293년 10.25 조선일보 / 제2차 4293년 10. 경향신문
제3차 4293년 10.26 종합신문/ 제4차 4293년 11.1 교육신보 / 제5차 4293년 11.7 새나라신문 / 제6차 4293년 11.9 조선일보 / 제7차 4293년 11.27 강원일보 / 제8차 4293년 12월호 교육자료 / 제9차 4293년 12.10 조선일보 / 제10차 4294년 8.3 부산일보
◆탐험결과보고 제 1 차 4293.10.20 강원도 경유 문교부에 보고 제 2 차 4293.2.15 강원도 내무국 공보과에 보고 제 3 차 4294.3.2 천연기념물 지정상신(문교부) 제 4 차 4294.3.4 교통부장관에게 관광지선정상신
*제1광장-길이 20미, 건(巾) 15미, 높이 15미의 대광장, 향우측에 석간수(石間水). 양측벽과 천정에는 기묘한 요철(凹凸)의 석벽이 황홀하다. *중간 약 5미의 지로 *제2광장-길이 25미, 건15미, 건15미, 높이 10여미. 광장전역에 깊이 1미의 탁수, 향 좌측에 상승되는 약 10미 소혈 거기에 박쥐들의 적분탁수면은 점토로 대단히 미끄럽다. *중간 약 10미의 상승소로(小路), 우측엔 맑은 석천(石泉)이 있음 *제3광장-길이 10미, 건6,7미, 높이 15미. 여기부터 석주, 석탑 등이 보임 *제4광장-길이12미, 건7미, 높이 16미정도. 이곳에 높이 15미의 웅장한 석탑이 있고, 그 아래 석북이 있음(두드리면 소리가 남으로 속칭 석북이라함)
*중간 약 10미의 소로 5미지점부터 깊이 1미가량의 물, 이소로의 종점이 소위 본굴의 잿목 *제5광장-길이 20미, 건15미, 높이15미, 여기가 마의 심연, 그깊이 8미내지 10미 양측 피안등엔 수많은 기암괴석, 천년이 넘을 종유석, 석순이 절비해있다.(수영 또는 고무배 같은 것으로 도강해야함) *중간 꾀 넓은 통로 사이에 2층석계로 된 함정이 있어 위험지대, 기암괴석이 허다함 *제6광장-다기암 지대, 좌측소광장은 석회동 *제7광장-맑은 석천, 석종유, 석순, 여기는 석영지대 *함정 전방에서 우측으로 상승, 소혈을 죽죽 전진하는 사이 기기괴괴 *제8광장-귀공신력의 괴석, 사방에 소혈, 박쥐 허다함 *제9광장-석종유, 석순 본굴의 극락지
*제 10광장-제9광장에서 20미가량 전진하면 10광장이다. 여기는 석순 석종의 밀림지대를 뚫고 넘어 본굴, 크라이막스,를 이룬 곳으로 시간과 자아를 망각케하는 유또삐야임 *제11광장-10광장의 웅대 황홀경을 벗어나면 저방40미지점에 용궁을 연상케하는 휘황 황홀의 최종크라이막스를 이루고는 막바지인것이다. *제12광장-11광장에서 홀타구니에 들어서면 약 4미높이의 절벽위 천정에 구멍이 있어, 이를 넘어서면 상상이외의 큰광장이 눈앞에 나타나고(길이30미, 건20미,높이20미) 절벽을 내려서면 향우측에 심연이 있고 앞길은 막혔으며 이 광장 유사이래 인간의 발을 처음 디딘 곳이다.
1 ․ 2차탐험수기 -(4293년 10월 3일 6일, 2차탐험종합기록)- 1.소재지 강원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성류봉산하) 1.탐험일시 *1차 단기 4293년10월3일 자 11 시 지 13시 35분 *2차 단기 4293년10월3일 자 12 시 지 16시 40분 1.탐험주동..울진교육구 문화계, 울진교육연구소 1.탐험대원..1행 8명 1.기 록 *「싸치라이트」며「체크라이트」라침판, 부대, 카메라, 줄자(권척) 기록판, 사다리, 기타 음료수, 식료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우리 탐험대원일행8명은 4293년10월6일 하오 12시24분을 기하여 모험적이요 개척적인 결의와 더부러 용약입굴을 감행하였다. *입굴 3미지점에서 사다리에 몸을 의지하고 굴속으로 내려섰을 때는
벌써 여기부터가 천고로 볓을 보지못한 암굴의 시발지대이다. 임진왜란시 ***그림 설명 글자 :입구 경사지의 원한의 궤석*** 이굴속으로 피난해온 인근주민 500여명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왜군들의 잔학무도한 굴입구봉쇄석이 이제는 궤석으로 산적된 45도 경사지를 서서히 내려섰을 때는 다시금의 울분과 감회를 되살리게한다.
*이 경사지를 따라 10미지점에 이르면 첫 번째의 대광장에 서게된다. 길이 20미, 건10미, 높이 15미 가량의 이광장우측에는 석간수가 고여있고 주위 사방의 석벽에는 기묘한 대자연의 조각이 보는 이로하여금 황홀케하고 이 사이로 나는 박쥐떼의 난무는 이 광장의 분위기를 더욱 음산하게 만든다.
*제1광장에서 다시 전진하여 5미를 나가면 이곳이 제2의 광장이다. 광장전역에 걸쳐 깊이 1미가량의 탁수가 뒤덮고 있어 천고를 두고
아직 한 번도 햇볓을 쬐지못한 물은 뼈가 쑤시도록 차급고 길이 25미나되는 점토의 미끄러운 웅덩이를 간신히 건너 박쥐들의 똥이 분석으로 변한듯한 직경3미의 굴을 기어오르면 로변에 또하나의 새로운 석천이 보이고 더욱 전진하면 제3의 광장과 연이은 제4광장이나타난다. *이 제4광장에서 1행을 경탄케한 것은 높이 15미나 되는 대석탑이다. 어찌 괴공신력으로도 저만큼 만들 수 있을가의 의심이 갈만한 대자연의 조화와 미, 바로 옆에는 두드리면 굉장한 소리를 내는 소위 석북이있다. *여기서 다시전진하여 협로에 이르게되면 다시석간수, 연이은 이물을 따라 오른쪽으로 굽힌 잿목에 올라서면 여기가 휘황찬란하고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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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호에 계속>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계신 울진의 옛 자료들을 제공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소중한 문헌 자료를 제공해주시면 『월간 울진』 지면에 최대한 반영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