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최
온 세상을 씻어 버릴 듯 세찬 비가 밤새 내린다.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쉬이 잠이 오지 않는 시간, 오랜 기억 하나가 살며시 다가와 나를 잠식한다.
생각해 보면 바람에든 비에든 열두 번도 더 씻겨 내려갔을 10년도 훨씬 더 지난 시간의 일인데, 그 오랜 기억은 흐릿해 지기는커녕 어째서 요즘 들어 더 선명해 지는지 알 수가 없다.
지난 시간과 흐르는 물은 결코 다시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운명의 여신은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태우고 간다는 그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새삼 어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나는 지금에서야 누군가를 진정 이해하며 동시에 누군가에게 이해를 구하게 되는 심정을 전하고 싶다.
10년 전에 나는 처음으로 시간에 맞추어 출퇴근을 반복하면서 월급을 받는 일을 가졌었다.
누군가는 사실 내 친구이며, 친구가 하는 레스토랑 주방에서 여러 가지 일을 배우면서 제법 수개월을 다녔다.
그러나 그때는 주인 마음이 흡족하게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묘한 이치를 익히기엔 나는 너무 초보였다.
지금 되돌아보니 그렇다는 거다.
찾아서 일을 하고, 만들어서 일을 하고, 앞서서 일을 해야 되는 남의 집 일임에도 시키는 것만 할 줄 알았으니 주인 입장에서는 많이 부족하고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도 막상 그만두고 한참 뒤에 바람결에 전해진 “친구라서 일을 마음대로 시키지도 못했고 또 잘 못해서 속이 상했노라”는 말은 씁쓸했다.
내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다고 한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지금, 쓰디쓴 그 말이 섭섭했다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속상했다는 그 말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때는 그런 일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일이 눈에 보이면서도 일부러 안하는 꾀돌이는 아니었다는 것 하나만 알아주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이다.
손발이 편하고 몸뚱이가 편한 것을 견디기 힘들 때, 육체적인 노동이 너무나 그리울 지경이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으려나.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머리를 쓰면서 책상에서 하는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턱이 없기에 선택하기도 했지만, 지금 식당 주방일이 적성에도 맞는 듯 즐거이 하고 있다.
대학가 앞 식당.
그리 크지는 않지만 문전성시를 이루다 보니 직원들도 제법 많다.
처음이든지 경험자이든지 상관없이 내 일처럼, 내 집처럼 일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맞고 손발이 맞는다.
정말 초보라서 열심히는 하는데 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고, 경험이 많아서 일을 잘한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정작 요리조리 얄밉게 일을 미루는 사람도 있다.
일을 못하기는 똑같은데 분명 차이가 있는 게 이제는 어느 정도 눈에 보인다.
사정에 의해 한 달 전에 그만 두었었지만, 월급도 올려주고 문화센터 나가는 날 시간도 빼주고, 그러고도 모자라 내가 원하는 요구조건을 다 들어 줄 테니, 일 너무 잘하는 언니 다시 와달라고 사장님이 하도 전화를 해대서... 하하, 나는 다시 그 일을 기꺼이 한다.
설명으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태도로 살아가게 하는 사람에게 저절로 알게 하는 게 인생이라 했던가?
그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던 기회로 채워가다 보면, 그게 인생인 것도 같다.
간밤의 폭우가 10년 동안이나 내 마음 한구석에 삭지 않고 걸려있던 무언가를 씻어 주었는지 모처럼 개운하다.
이제 나는 그 친구가 이해된다.
그리고 또 나는 친구에게 이해를 구한다.
그때는 그랬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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