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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聖留窟) 다시 보기

  • 편집인 신상구 기자
  • 입력 2010.10.21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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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 입구에서     

 

성류굴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 산30에 있는 석회암 동굴이다. 근남면 구산리 성류봉 서쪽 기슭에 있다.   

 

영양군 수비에서 발원한 물과 매화천이 합류하여 굴 앞을 흐른다. 불영계곡을 돌아온 광천을 만나 왕피천을 이루고 망양정이 있는 동해로 들어간다.   

 

‘성불이 머물던’ 뜻으로 성류굴(聖留窟)이라 부른다. ‘선유굴(仙遊窟)’ ‘탱천굴’ ‘장천굴(掌天窟)’이란 이름으로도 불렀다. 성류굴은 기묘한 석회암들이 마치 금강산을 보는 듯하여 ‘지하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2억 5천만년의 연륜이 쌓인 동굴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총연장 870m 정도 뚫어져 있다. 최대 광장은 폭 18m, 길이 25m, 높이 40m이며 수심은 대개 4-20m이고 온도는 15~17℃로 연중 거의 변화가 없다.   

 

1963년에 천연기념물 155호로 지정하였다.

신라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수도했으며, 고려 말에 이곡(李穀)의「관동유기」, 매월당(梅月堂)의 시, 김창흡(金昌翕)의 기문 등이 전해져 오고 있다.
우리지역에서는 자연과 역사문화의 보물이다.

 

1970년 당시 성류굴 내부 약도

 

성류굴의 또 다른 이름들

 

성류굴은 장천굴(掌天窟), 성류굴(聖留窟), 선유굴(仙遊窟), 탱천굴(撑天屈) 이란 이름으로도 불렀다.  

 

-. 장천굴(掌天窟)

보천은 늘 신령한 계곡의 물을 떠서 마셨다. 만년에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 유사강 밖에 이르러 울진국 장천굴에 머물렀다.   

 

(보천은) 아침저녁으로 수구다라니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굴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제가 굴의 신이 된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를 들었습니다. 청컨대 보살계를 받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보살계를 받은 다음 날 굴은 또한 형체도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21일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서 다시 50년간 수도를 하였다.(『三國遺事』卷3 塔像4 臺山五萬眞身條〕  

 

보질도태자는 언제나 계곡의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육신이 공중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 후)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 동안 도를 닦았다.(『三國遺事』卷3 塔像4 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條〕

 

-. 성류굴(聖留窟)

이곡(李穀, 1298~1351)의「관동유기(關東遊記)」에 ‘성류굴’로,『신증동국여지승람』과『대동지지』에는 ‘성류굴’이라 하면서도 옛날에는 ‘탱천굴’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보아 이 동굴의 최초 이름은 ‘장천굴’로 통일 신라 때(8세기 전후)부터 불리어 왔으며, 늦어도 고려시대 말(14세기 초)부터는 ‘성류굴’로 불린 것 같다. 그리고 ‘탱천굴’은 한자로 보아 장천굴의 장(掌)자를 탱(撑)자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 선유굴(仙遊屈)

‘선유굴’은 경치가 우아하여 신선(仙)들이 놀던(遊) 곳이라 하여 불리어졌으며, ‘성류굴’은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부근에 있던 성류사란 절이 소실되자 그 절의 불상을 이곳으로 옮겼다는데 유래되어 성불(聖佛)이 머문(留) 곳이라는 뜻이라 하나, 이미 고려 말에 성류굴이라는 명칭이 나오므로 신빙성이 없다.   

 

■ 연혁과 현황은

 

1970년 당시 성류굴 전경

1970년대에 새로 개발된 제12광장 보물섬. 지금은 출입이 제한되고 있다
1963년 5월 7일 동굴입구 절벽의 측백나무(수령 1,000여년)와 함께 천연기념물 제 155호로 지정되었으며, 1966년 4월 2일 군유재산을 취득하였다. 1967년 3월 3일 동굴을 공개하고 민간 위탁 관리를 실시했다. 1976년 1월 1일부터 울진군이 직영 관리를 하고, 1977년 6월 11일에 울진군 성류굴 관리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사실 성류굴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굴을 방문했다는 기록을 보아 그 전부터 지역에서는 이 굴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굴 내부로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고려 말의 이곡(李穀)은「관동유기(關東遊記)」에서 “좌우측이 더욱 기이하여 혹은 깃발 같기도 하고 혹은 부처 같기도 하다. 수십 보를 가면 돌들이 더욱 기괴하고 그 형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이 더욱 많다. 그 깃발 같고 부처 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크다. 또 4, 5보를 더 가면 불상(佛像)같은 자도 있고, 고승(高僧)같은 자도 있다. 또 못 물이 있는데 매우 맑고 넓이가 두어 묘(畝)는 될 만하며......”라고 했다.

 

이 동굴은 선유산 북서쪽에 위치하여 입구(해발 약20m)에서 북동쪽으로 발달해 있으며, 주굴의 길이는 약 330m, 지굴의 길이는 약 540m로 총연장은 약 870m로 이중 약 270m를  개방하고 있다.   

 

성류굴은 전체적으로 수평동굴이고 동굴 내 여러 개의 다양한 크기의 호수가 형성되어 있고, 왕피천과 연결되어 있다.   

 

이 굴은 석회암이 순수한 물에 녹아 생긴 것이 아니라, 지하수에 녹아있는 산(酸)에 의하여 용식작용이 일어난 석회동굴(石灰洞窟)로 생성 시기는 2억 5천만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굴 내에는 종유석, 석순, 석주, 베이컨시트와 동굴진주, 석화, 동굴산호, 동굴방패 등 다양한 생성물로 인해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어 ‘지하금강’이라고 불린다. 

 

또 지금까지 발견된 동굴동물로는 박쥐, 곤충류 등 10강 24목 43과 49속 54종이 서식하고 있다.  

 

2007년 한국동굴연구소의 조사에서 국내 최초로 수중구간이 약 85m 발견되었는데, 대형의 종유석, 석순 등의 동굴 생성물이 물속에 잠겨있으며, 이는 과거 빙하기 동안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또 진동굴성 쥐며느리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성류굴주변의 암석이 하부 고생대 오르도비스기(약 4억 6천만년~4억 7천만 년 전) 동안에 퇴적된 것이라는 사실도 처음으로 밝혀졌다.   

 

성류굴, 이런 저런 명소에 서다

 

-. 토착신앙소(土着信仰所)

1970년 초 제5광장은 용궁(龍宮)이 아니라 선녀동(仙女洞) 천연지(天然池)로 불렸다

개방이 제한되기 전의 제11광장 삼불상. 보천태자가 수도한 곳으로 전한다
성류굴은 지역 토착신의 하나인 굴신의 개념으로 중시되었다.
노중국 선생은 “굴신은 울진지역의 토착 신으로서 중요한 제사의 대상이고, 우유국 아래 성류굴 지역을 신성지역으로 여기고, 지역 전체와 관련된 중요한 제의 행사에는 장천굴의 굴신을 모셔다가 신좌(神坐)에 두고 제사를 드렸으며, 장천굴의 굴신은 고대 울진지역에서 대표적으로 신앙된 토속적인 신”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옛날부터 지역민들은 성류굴을 신성시한 제의(祭儀) 장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고 있다. 대표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성류제향이다. 울진군의 오래된 축제인 성류문화제의 경우 행사의 시작은 성류굴 앞에서 올리는 성류제향이다. 

 

-. 지하금강

성류굴은 석순과 종유석이 아름답게 발달되어 있다. 동굴 안에 형성된 못(池)과 어우러져 마치 “금강산을 보는 듯하다”고 하여 ‘지하금강’이라 부르기도 한다.  

 

-. 단애청류(斷崖淸流)

깎아지른 절벽과 성류굴 앞을 휘돌아가는 물의 풍광은 한 폭의 한국화다.
절벽에서 자라는 측백나무, 분재 같은 크고 작은 나무들과 풀은 절벽의 기암괴석들과 어우러졌다.   

그 아래는 응당 있어야 할 돌아 흐르는 물과 모래톱이 풍경의 완성도를 높인다.  

 

화가에게는 절로 화심(畵心)을 돋우고, 문인에게는 어찌 시 한 수 읊어지지 않겠는가.   

 

겸재(謙齋) 정선의 성류굴(聖留窟)-(28.5×27.3cm)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3대 화가요,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인 겸재(謙齋) 정선((鄭歚)도 이곳에 와서 그림을 남기고 있다. 그가 1734년에 그린 성류굴도(聖留屈圖)는 절벽을 극명하게 강조하여 표현한 걸작으로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 초기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이 봄날 성류굴 앞에서, 절벽과 흐르는 물을 보면서 읊은 시가 있다.   

“굴 앞 봄풀은 이끼 낀 돌 위에서 일렁이고, 바위산 꽃들은 빛나게 떨어진다. 맑고 그윽한 맛 더욱 새롭고, 밤 깊은데 인기척에 놀란 학이 집 속에서 날아가네(窟前春草漾苔磯  山後巖花暎落暉 更有一般淸意味  夜深巢鶴警人飛)”  

 

또 조선시대 울진의 문인으로 평생 이 고장에 살면서 지역의 여러 명소를 시문으로 남긴 청파(靑坡) 장만시(張萬始)의 ‘성류굴(聖留窟)’이란 시에, “속이 뚫린 굴이 봉래(蓬萊)로 접하는데, 건곤 일월을 뱃속에 감추었네. 석종의 만고 사연을 묻지 마오. 성인이 머물다 간 흔적은 이미 창망하네. (中通一穴接蓬島 茅腹乾坤日月藏 莫問石鍾千古事 聖人留蹟已蒼茫)”라고 읊었다.    

 

※창망(蒼茫) : 넓고 멀어서 푸르고 아득한 모양
※봉도(蓬島) : 신선이 살고 있다는 섬, 봉래산(蓬萊山)  

 

-. 대산낙조(對山落照)

서쪽으로 구산리와 수곡리의 뒷산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물은 그 산 어디쯤 시작되어 이곳으로 온다.   

 

도연명의『귀거래사』구절처럼 구름은 무심히 산 너머에서 올라온다(雲無心而出岫).   

 

또 당(唐)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산행(山行)’이란 시에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보이고, 단풍 숲의 저녁 경치가 좋아 수레를 멈췄다(白雲生處有人家 停車坐愛風林晩).”고 했다.  

 

그들이 왔으면 이곳에서 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단풍이 좋아 수레를 멈추었을 것이다.   

 

오후로 접어들자 한 줄기 바람에 놀란 물결이 내게로 다가온다. 산 그림자 짙어지고 노을이 지는데 가끔씩 물고기가 뛴다. 이미 내 몸은 배를 타고 미끄러지듯 흘러가고 있었다.  

 

1980년 당시 성류굴관리사무소 전경. 뱃놀이하는 관광객이 이채롭다

 

성류굴 12광장 이야기

 

성류굴 개발 당시인 1963년경 ‘한국동굴학회’에서 성류굴을 탐사하면서 특이하게 전개되는 명소를 ‘무슨 무슨 광장’이란 이름으로 자연스레 붙였다.   

 

‘제1광장’에서부터 ‘제12광장’ 등으로 명명한 것이 그것이다. 총연장 870m에 이르는 동굴을 편의상 5지(池) 12광장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럼 이제 굴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제1광장

성류굴에서 제일 넓은 광장으로, 연무동 석실(鍊武洞 石室)이란 별칭이 있다. 말하자면 ‘무예를 수련하는 곳이다’라고 이름을 지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지역주민들이 이곳에서 무술을 연마하였다는 설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임진란 때 왜적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슬픈 사연도 전해온다. 탐사 당시 유골이 발견되어 이를 뒷받침 하고 있다.  

 

-. 제2광장

은하천(銀河川)이라고 부른다. 굴밖에 흐르는 왕피천의 물과 서로 통하여 항상 깨끗하다.  

 

물고기가 왕래하고 있는데 비가 많이 오면 왕피천 물이 내부로 유입되어 동굴관람을 통제하기도 한다.
은하수를 건너간다고 하여 이곳에 있는 다리를 ‘오작교’라 부른다.   

 

-. 제3광장

미륵동(彌勒洞)이라 한다. 마치 미륵보살 같이 생긴 석순이 자라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  

 

이처럼 성류굴은 석회암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보는 각도에 따라 새로운 형상이 창조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모두가 그렇게 생겨난 이름들이다.  

 

-. 제4광장

탑실(塔室)로 부른다. 이곳 역시 석회암이 물에 녹으면서 만들어진 석순과 종유석이 큰 탑을 만들어 놓았다.   

 

성류굴은 성불이 머문 곳의 의미가 있는데 불가적인 요소가 많다. 신라의 보천태자가 수도하였다는 기록과 매월당 김시습이 성류굴 앞에 있는 성류사에 묶었던 기록 등을 보더라도 석탑으로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불을 밝히기 전에는 그야말로 무영탑(無影塔)이 아니었는가.  

 

-. 제5광장

용궁(龍宮)으로 부르는 곳이다. 성류굴에서 제일 멋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魔)의 심연(深淵)이라 부르는 용신지(龍神池)가 나온다. 신라시대 신문왕의 아들 보천태자가 이 연못을 지날 때 용이 나타나 다리를 놓아 주었다는 전설이 있다.  

 

상상해보라. 굴 만큼 용을 연상시키기 좋은 장소가 또 있을까. 굴 안에 서면 불쑥 심연 깊은 곳에서 용이 물보라를 치며 솟아오를 것 같지 않던가.   

 

마의 심연은 수심 30m가 족히 넘는다고 한다. 2007년에 이 부근에서 새로운 수중 동굴을 발견하였는데 동굴의 길이가 약 85m에 이른다고 한다. 이 수중동굴은 12광장까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 제6광장

지옥동(地獄洞)으로 부른다. 급작스레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무엇일까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굴 안에 지옥이라 부르니 더더욱 으스스하다.   

 

‘선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만 건너갈 수 있다’고 한다.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마음이 잡힐 듯하다. 언제나 어질고 착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지었을 것이다.   

 

-. 제7광장

만불상(萬佛相)으로 부르는 곳이다. 이곳에 이르면 만불이나 되는 부처를 만나는 곳이다.  

 

흔히 ‘천불 천탑’이란 말이 있듯이 이곳도 많은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어 이렇게 지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모마리아 상’이라 부르는 형상도 있다. ‘천불동 계곡’이나 금강산의 ‘만물상(萬物相)’이나 모두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지만, 기기묘묘한 성류굴의 내부를 말해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성류굴 내부를 직접 구경하고 기문을 남겼다.   

 

그는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아들로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영의정을 지낸 형 창집(昌集)함께 이이(李珥) 이후의 대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의 기문에 “금장식 나레옷 신선의 향연인 듯! 찬란한 큰 대궐이 열리고 보석장식들이 연이어 있다. 자장법사가 영취산에 들어온 듯, 부처상이 금연좌대에 앉은 듯, 기묘한 극락천에 서광이 비쳐졌다.”고 했다.   

 

그는 전기불도 없던 시절 등불을 들고 굴 안에 들어가 오염되기 전의 성류굴 원시비경을 보았을 것이다.  

 

-. 제8광장

초연광장(初戀廣場)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첫사랑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광장이다. 남녀가 포옹하다 들켜 수줍어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이곳은 성류굴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으로, 하마, 멧돼지, 마귀할멈 등의 형상이 있어 재미를 더하는 곳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성류굴의 내부에서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주는 장소가 있었는데 바로 이곳이다.   

 

사진기가 귀했던 시절에는 관광객의 성류굴 방문 기념은 이곳에서 남긴 사진이었다. 지금은 천연기념물인 동굴의 보호를 위해 일체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옛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 제9광장

수례동(守禮洞)이라 부른다. 즉 예를 지키는 곳이다. 예란 무엇인가? 예는 곧 인(仁)이라 하기도 한다.  

 

『논어』「안연(顔淵) 편」에, 안연이 인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인이 된다(顔淵問仁 子曰克己復禮爲仁). 하루라도 나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인을 행함은 자기를 말미암은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미암겠는가(爲仁由己 而由人乎哉).”   

 

그렇다 예를 지키고 인을 행하는 것이 어찌 남에게 있더란 말인가. 모두 나를 이겨야 하는 본인의 몫인 것을.   

 

성류굴의 여러 곳을 이렇게 저렇게 명명한 것이 절묘하다. 형상을 직지(直指)한 이름에서부터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이름을 수례라 한 것은 자연의 신비로움과 웅장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예로 돌아간다는 의미라고 한다.  

 

1980년 당시 성류굴 전경

 

■ 떠나며

 

여의동(如意洞)이라 부른다. ‘만사여의형통(萬事如意亨通)’이란 말이 있다. 입춘첩의 대표적 문구 중 하나다. ‘마음먹은 뜻과 같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그것을 만사에 그렇게 한다고, 그렇게 되라고 한다.   

 

지옥동에서 용을 타고 건너는 용궁을 지나 만불을 만나고, 예를 지키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성류굴이다.   

 

여의동은 이곳을 찾은 모든 사람이 만사형통하고 원하는 것을 뜻과 같이 하라는 곳이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또 다른 큰 깨달음을 얻어 갈 수도 있다.   

 

수도의 도량으로, 토착 신을 모시는 성스러운 제의(祭儀)장소로, 사람들의 인기 있는 관광지로 성류굴은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음향동(音響洞)’이라 부르는 제11광장과 ‘보물섬’이라 부르는 제12광장이 있다. 그러나 이곳은 1976년부터 동굴의 보호를 위해 출입을 금하고 있다.  

 

어디서 물방울 하나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린다. 그 방울방울이 싹을 틔워 수 만년에 걸쳐 탑을 쌓고, 한 사람이 지날 길을 뚫었다.   

 

영겁(永劫)의 시간 앞에서 겸허를 배우고 조용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자신을 돌아본다.   

버들잎 드리운 물가에서 탁주 한 잔 마시면 봉래산이 이곳이다.   

 

성류굴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특수한 자연환경이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지역의 명소이다.  

 

간략하나마 성류굴의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역사문화적인 접근을 해보았다. 이 글이 성류굴의 가치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초기 성류굴의 무분별한 개발로 많은 훼손과 오염을 야기하기도 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지역의 성류굴과 같은 소중한 문화자산을 잘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줄 책무도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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