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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일 |
여행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라 했던가.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짚으면서부터 잔잔한 설레임이 고개를 든다. 내 늘그막에 설렘은 생기(生氣)를 북돋우고 활력(活力)을 더하니, 회춘(回春)이 어디 따로 있으랴. 이것저것 챙기는 아내의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늦가을에 살림살이를 젖혀두고 길을 나선다. 춘삼월(春三月)에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둘러본 후, 반 년만이다.
작아도 큰 나라 싱가포르, 자정(子正)이 가까운데도 활기가 넘친다. 인구 사백 오십여 만명에 우리의 서울과 비슷한 넓이의 국토인 이 작은 나라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부존자원은 물론 앞서가는 선진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저력은 무엇일까. 지도자의 통치력에 찬사가 절로 난다. 금융, 무역, 관광, 의료, 교육 등 이른바 굴뚝 없는 산업으로 국민소득 삼만여 달러의 선진복지국가를 이룩해 놓았다.
국방예산이 인구 2억이 넘는 인도네시아와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작은 거인이 있듯 작아도 큰 나라를 실감케 한다. 어느 누가 약소국이라고 얕볼 수 있으랴.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천여 번의 외침을 겪은 우리들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니겠는가. 여기저기 눈여겨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늦가을에 여름 여행, 두터운 외투 구겨 넣고 반소매 차림으로 차에 오른다. 자연과 도시의 절묘한 조화, 어느 한군데 허술한 구석이 보이지 않는다. 테두리 안에서 질서와 자유를 누리는 백성들. 이들의 시민 의식에 주눅이 들 정도다. 담배 꽁초하나 잘못 버리면 천 여 달러의 범칙금을 물리는 제도. 그래서일까, 그 지저분한 껌 자국 하나 있을 리 없다.
자유란 무엇인가. 책임이 수반되지 않으면 방종일 뿐이다. 가래침을 휴지로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스스로 놀란다. 밀물이 밀려오면 그 높이만큼 모든 배들이 떠오르는 이치가 이런 것인가.
다리 하나 건너 말레이시아 조호바루, 이슬람 공동묘지에 발길을 멈춘다.「메카」를 향해 45도 각도로 세워서 매장을 한다는 설명에 종교와 인간의 함수관계가 목에 걸린다.
종교를 위한 인간도 있고 인간을 위한 종교도 있다. 문득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성구(聖句)가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유는커녕 도리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종교를 앞세워 인권을 유린하고 종교를 명분으로 전생을 불사한다. 인류평화에 가장 큰 장애물이 종교라면 이에 더한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으랴. 민속마을을 곁눈질 하다가 다시 다리를 건너 재입국을 한다. 주룽새공원을 둘러보고 식물원 숲길을 휘적휘적 걷는다.
태국을 이웃한 동남아지방은 12월부터 건기라는데 여기는 반대로 우기라는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바탐행 배에 오른다. 절차가 까다롭지는 않다고 하나 세 번 입국에 세 번 출국이면 누구나 지치기 마련이다. 두 늙은이, 늘어진 어깨를 서로 의지하고 나른한 피로를 감미롭게 즐기다가 눈을 뜬다.
일만 삼천 여 개의 섬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인구가 많다. 우기와 건기기 밖에 없다며 눈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현지 가이드의 말에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한다.
봄은 물론 가을과 겨울도 모르는 사람들이라 평생 더위와 싸우다가 환갑도 되기 전에 죽는다며 말끝을 흐린다. 사계의 변화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내 조국에 대한 자부와 긍지를 감추기 어렵다.
국경이 바뀌었다고 생활환경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자연의 횡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단결과 화합은 필연이다. 리더와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이를 일러 정치라 해도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석탄 천연가스 석탄 등, 풍부한 자원이 많은데도 부정과 부패로 백성들의 삶이 어렵다는 푸념에 우리의 어제를 돌이켜 본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의 삶도 이러했다. 부디 싱가포르 같은 통치력이 꽃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관우는 왕이요 유비와 장비는 신하로 모셔진 사당을 보고 문화의 이질에 거리감을 느끼다가 귀에 익은 어린아이들의 카랑한 함성에 토끼눈이 된다.
“대 한 민 국......”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원주민 마을 아이들이 우리 일행을 향해 외치는 구호다. 여기까지 와서도 응원구호를 들을 수 있다니,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만감이 교차한다. 미군 병사들에게 “추잉 껌”을 외치며 때 묻은 손을 내밀던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민망한 마음 어쩌지를 못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행복지수는 높다고 한다. 부족함이 없을수록 자살률이 높다는 통계에 비하면 누가 더 행복한지는 아무도 모른다.
싱가포르, 이번 여행길에 세 번째 입국이다. 마천루의 숲 속을 보트도 저어 보고, 케이블카에 매달려 굽어도 본다. 한 해에 천여 만 명의 관광객이 모여 드는 곳, 인도양과 태평양을 넘나드는 크고 작은 배들이 장관을 이룬다. 동서의 길목이 한 눈에 보인다. 대영제국이 이 작은 섬에 그토록 집착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쳉호크루즈 용선에 올라 노을에 물드는 저녁바다의 정취에 젖는다. 물 위에 흐르는 휘황한 불빛, 전통악기로 연주되는 정겨운 우리 가락, 느긋하게 즐기는 선상 만찬, 모두가 다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이다.
작아도 큰 나라 싱가포르. 타산지석을 가슴에 안고 흐뭇한 마음으로 귀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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