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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일(시인, 수필가) |
마음이 포근하다. 처음 보는 곳인데도 전혀 낯설지 않다. 늘 그리던 고향 마을을 들어선 느낌, 죽마(竹馬)를 함께 타던 옛 동무가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만 같다.
용인의 산수(山水)가 다 그러하듯, 풍광(風光)이 유정하다. 높거나 낮지도 않고, 어느 한 구석 허한데도 없다. 만여 점의 옛 돌 조각 유물들이 별유세계(別有世界)를 이룬 곳, ‘세중옛돌박물관’이다. 하루 나들이에 알맞은 거리여서 더욱 좋다. 상수리나무 뿌리를 타고 갯도랑이 졸졸졸 흐르는 어귀, 익살스러운 장승 내외가 나그네를 반긴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언덕, 천태만상의 석상(石像)들이 숲을 이뤘다. 만조백관(滿朝百官)의 하례를 받는 제왕(帝王)이라도 된 듯 한 환상에 젖는다. 오금이 저려 발걸음이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복건(㡤巾)에 홀(笏)을 든 문관(文官)과 갑옷을 입고 칼을 쥔 무관(武官)들이 공손하게 도열해 있다. 다듬잇돌로 계단을 쌓고 맷돌을 깔아 길을 내었다. 옥양목을 매만지던 누나들이 떠오르고 대대로 이어온 가난에 시달리던 주름진 오매의 얼굴이 어른거려 발부리를 내려 보다가 하늘을 쳐다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장자(莊子)가 나비 되듯, 한 덩이 돌이 되어 이끼 낀 세월을 넘나든다. 조상의 숨결이 살아 있다.
고개 숙인 조선의 벼슬아치, 입을 다문 고려의 무사(武士), 살며시 웃는 신라의 화랑, 합죽한 할배와 할매. 소박하다. 한결같이 너그럽다. 차디찬 돌이 이토록 따스하게 다가올 줄이야. 언제 어디서 누구를 지키다가 예 왔는가. 주인은 간 데 없고 지킴이만 남아 흐름의 무상(無常)을 반추(反芻)하는 이 언덕에, 이명(耳鳴)처럼 맴도는 말이 있다. 부질없이… 부질없고… 부질없다…
돌을 우러러 돌고 돌아 동자(童子)마을에 발길이 멎는다. 달덩이 같은 얼굴들,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순수 무구한 아이들의 자화상이 어우러졌다. 무에 그리 좋은지 입이 찢어지도록 웃는 놈, 무슨 일로 골이 났는지 입을 꼬옥 다문 아이, 뿔난 머리에 막대기를 든 골목대장, 땋아 내린 댕기머리가 앙증맞은 대갓집아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평화의 동산에 온갖 시름은 봄눈이 된다.
마을이나 사찰입구에 서서, 오가는 길손에게 친근감을 주던 벅수들이 정겹다. 수호신의 역할도 했으니, 험상궂게 생길 법도 하건만 그와는 정 반대다. 아내의 방에 침입한 간부(姦夫)를 노래와 춤으로 물리쳤다던 처용(處容)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수더분하고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태산 같은 무게가 배어난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불가사의(不可思議)라 했다던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천 여 번의 외침을 겪으면서도, 하나의 민족이 하나의 언어로 하나의 문화를 반 만 년이나 연면히 이어왔다. 불사조 같은 그 끈질긴 저력은 내면에 있는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포용하던 우리 민족의 순후하고 질박한 삶과 정신이, 여기 이렇게 담겨있음을 어찌 알랴.
돌절구, 돌확, 그리고 맷돌, 잊고 살던 오두막 풍경들이 널려 있다. 어느 하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손이 부르트도록 찧고 갈아, 허기를 달래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뚝배기보다도 더 투박한 갈마을 이웃들이 불현듯 그립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느 유역을 흐르고 있는지, 먼 산을 바라보는 눈가에 뿌연 안개가 어린다.
해학이 넘치는 디딜방아, 빻고 찧는 게 어찌 곡식뿐이랴. 아낙네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 도덕군자라도 견디기 어렵다. 걸쭉한 입담으로 시름을 풀고, 밟고 또 밟아 설움을 달래던 곳이기도 하다. 이슥하도록 까르르 까르르 자지러지던 웃음소리가 어디선가 들릴 것만 같아, 몇 번이고 뒤돌아본다.
어느 철인(哲人)은 사람을 일컬어,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고등동물’ 이라고 했다. 여부(與否)를 떠나, 문명의 발달은 곧 생활도구의 발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미소가 들어서면서 물레방아와 디딜방아가 자취를 감추고, 절구와 맷돌은 믹서기에 밀려서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상상도 못할 정도로 편리해진 정보화시대, 머지않아 먹지 않고도 사는 날이 올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무엇이 올까.
속된 말로 ‘호강이 겨우면 요강에 ○ 싼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는 러브호텔, 걷잡을 수 없이 파고드는 원조교제,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인신매매, 이 모든 게 호강에 겨운 현대인들의 배설물이 아니겠는가. 인간과 도구의 함수관계가 참으로 묘하다. 거칠고 힘들 때는 여유도 있었고, 인정도 훈훈했다. 모든 도구가 쉽고 빠르고 편리해진 지금은 어떠한가. 괴이하게도 빠를수록 조급해 하고 배부르고 편할수록 인정이 메말라, 본성(本性)을 잃어 가는 현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문명(文明)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돌부처, 뜬 듯 감은 눈 열린 듯 다문 입, 천 년의 침묵이 고요히 흐른다. 부처는 말이 없다. 나무도 말이 없다. 푸르른 하늘도 말을 하지 않는다. 참 말은 말이 없다. 말없는 말은 가슴으로 듣고, 말의 말은 귀로 듣는다. 말없는 돌, 옛 돌 조각의 따스한 숨결이 메마른 가슴에 봄비로 젖는다. 수몰지구 혹은 무너진 집터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돈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아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던가. 스무 해가 넘도록 온 누리 구석구석을 찾아 나선 설립자의 소박한 뜻과 그 집념에,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
지친 나그네, 한 덩이 돌이 되어 삽상한 가을날, 한나절을 돌과 돌을 돌고 돌다가 가슴 가득 돌을 안고 가벼워진 걸음으로 갯도랑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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