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일(시인, 수필가) |
운해(雲海)에 가려 속계(俗界)는 저만큼 멀고 사위(四圍)가 고요하다. 5시 37분, 마침내 8,000여 미터의 안나푸르나 영봉(靈峰)이 숨은 햇살을 받아 그 신비로운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앵두 빛 봉홧불인가 싶더니 순백의 장막(帳幕)이 허공에 뜬다. 신선이 산다는 선계(仙界)가 바로 저런 곳인가. 태양보다 먼저 어둠을 밝히는 경이로움, 하늘 아래 어느 일출(日出)을 여기에 비할 수 있으랴……
룸비니로 가는 길 200여 킬로, 풀어진 넥타이 같은 외길을 돌아 오르고 감아 내리다가 해가 기운다.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면서 진종일 스쳐간 풍경들이 아련하다.
네팔, 국토의 80%가 산으로 된 나라다. 3천여 만 명에 이르는 백성들이 터를 잡고 살기가 어디 그리 쉬우랴. 깎아지른 산비탈에 손 바닥만한 밭을 일구어 옥수수를 심고 멍석만한 논을 만들어 벼를 심는다. 흡사 비집 같은 다랭이 논들이 골짜기마다 마치 묘기를 부리듯 줄줄이 걸려 있다.
태어났으니 살아야 하고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한다. 먹을 것을 위해 척박한 환경과 지루한 싸움을 하고 있는 왜소한 체구에 무표정한 네팔인들이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민수, 현지 안내인의 한국 이름이다.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불법노동자가 되어 육년이 넘도록 한국에서 살았다는 수더분한 청년이다. 운이 나빠 안 좋은 기업주를 만나 여권을 빼앗긴 채, 노예 아닌 노예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단다.
야간작업은 볶음밥 한 그릇이 전부요, 심지어는 노동의 대가를 못 받기 일쑤였다. 봉제공장, 가구공장, 양계장, 공사판에 잡부까지 이리 밀리고 저리 차이다가 추방을 당했다며 헤픈 웃음을 흘린다.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그 때 배운 한국말로 이렇게 가이드가 되어 이제는 주위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한국 체험담을 들으면서 부끄러운 자화상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경이다. 어찌 민수 군 뿐이랴. 스리랑카에 갔다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봉변을 당했다는 어느 지인(知人)의 말이 가슴에 닿는다. 제발 양심의 기본을 지킬 줄 아는 자랑스러운 대한국민(大韓國民)이 되었으면 싶다.
룸비니, 여래(如來)가 탄생한 거룩한 땅이다. 하루 해가 서산에 걸치고서야 성소(聖所)의 문턱을 넘는다. 마야부인이 목욕을 했다는 연못, 아기 부처를 낳은 반석, 부처의 탄생을 기념해 기원전 3세기 경 아쇼카 왕이 세웠다는 석주(石柱), 깨달음의 나무 보리수 숲 등등,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감동이 진하면 도리어 말문이 막히는 법, 청맹과니가 되어 볼 것을 보지도 못한 채 몇 번이고 두 손만 모은다. 사대성인(四大聖人)의 한 분인 싯다르타, 그 분이 탄생한 땅을 밟아 본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의미요,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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