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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작은 행사 하나를 마무리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길을 나선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 나들이는 아이들이 걱정할 정도로 모험에 가깝다. 그도 그럴 것이 관절이 편찮은 내자(內子)와 함께 러시아를 비롯한 북유럽 여섯 나라를 둘러보는 긴 여정이니 그럴 만도 하다. 말 그대로 남부여대(男負女戴)요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진통제에 파스까지 챙겨들고 해맑은 모습으로 길벗이 되어준 포근한 내 반려(伴侶), 이 아니 고마운가.
러시아 항공, 우리의 국적기와는 그 느낌이 전혀 다르다. 승무원들의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가 살가울 리 없다. 정오께 이륙하여 열 시간 가까이 날아 해거름에 모스크바에 내린다. 철의 장막, 크렘린(Kremlin), 변증법, 노동가치설, 나 또한 한 때는 반공강사로 목청을 돋우던 위인이니 그 감회가 어찌 남다르지 않으랴. 공동생산, 필요분배, 노동자 농민 지상낙원, 그 화려한 수식어는 한갓 신기루였단 말인가. 레닌의 동상이 끌어 내려진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종주국,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가시지 않는다.
일정에 따라 노르웨이 오슬로로 먼저 향한다.
노르웨이.
6.25 전란에는 스웨덴과 함께 병원선을 파송하여 많은 생명을 구해주었고, 휴전이 된 후에도 오래 머물면서 의료 장비는 물론 현대 의술을 전수해 준 고마운 나라다.
서로 상반되는 통계 하나가 눈길을 끈다. 우리는 낮은 출산율에 이혼율은 높고 여기는 높은 출산율에 이혼율은 낮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향해야할 모델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젊은 남녀의 대다수가 혼전 동거를 하고 신생아의 과반이 미혼모의 아이들이라면 다 한 말이다. 어린 학생들이 아이와 함께 등하교가 자연스러운 나라 분명 별난 동네다. 앞서가는 선진국들이 다 이런 추세다. 역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너지는 윤리관, 천지개벽이 어디 따로 있으랴 싶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바이킹의 후예들, 우리의 가족 제도와는 그 가치관이 너무 다르다. 그런데도 풍요와 번영, 질서와 평화, 차원 높은 문화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우리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까 하여 넓은 시야로 눈여겨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오슬로에서 돔바스로 가는 길,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릴레함메르를 지나 고요한 오타강 가에서 그리그의 솔베이지 노래를 가슴으로 들으며 한숨을 고른다.
희한한 일이다. 벌써 몇 시간째 똑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자작나무, 소나무, 전나무, 이 세 종류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사이 사이 크고 작은 초원들이 융단처럼 깔린다. 사람이 사는 동네에 먹거리가 보이지 않는다. 밀, 옥수수, 감자, 채소는 물론 과일나무 한 그루도 볼 수 가 없다. 구릉지나 바위들이 많은 풀밭에 새끼들을 거느린 양과 소는 이따금 보일 뿐 사람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다 그만그만한 집들이 지형에 따라 터를 잡은 풍경이 그림보다 더 아름답다. 특별히 크거나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라해 보이지도 않다. 커튼이 단정하게 쳐져 있고 장작더미 승용차 트렉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이 사는 것은 분명한데 이 어찌된 일인가.
짧은 여름 햇살에 곡식이나 채소의 수확은 신통치 않고 그 대신 한 해에 목초를 세 번 베어 이웃 나라에 수출도 하고, 숲속에 방목중인 가축들의 겨울 먹이로 쓰는 이 나라 녹색사업이라는 것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이다. 이전에는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그러기에 악명 높은 바이킹으로 도전의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놀라운 일이다. 어디를 보아도 허술한 데가 한 구석도 보이지 않는다. 멍석만한 자락에도 나무 아니면 초지다. 이들의 성실과 근면이 한 눈에 보인다. 자연환경은 우리와 비교도 안 되는데 그 삶은 저만큼 앞서 있다. 초탈해 보인다. 마치 전설 같은 무슨 도인들의 세상을 보는 것만 같다.
신선한 충격이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이런 삶도 있구나. 없는 듯이 있고, 노는 듯이 일하며 죽은 듯이 살고 있구나.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스럽다. 이방의 나그네 눈이 열린다. 신비한 나라 노르웨이, 가슴이 설레어 발걸음이 가볍다.
내 늘그막에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꿈같은 이 길을 걷고 있으니, 이 아니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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