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용일(시인, 수필가) |
차창에 스치는 농민들의 삶이 고단해 보인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풍경과는 천양지차이다. 여기저기 뜯기고 파인 2차선 도로를 한 나절이 넘도록 달려 이 나라 제2의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닿는다.
17세기에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를 통해 유럽 진출을 목표로 수심이 깊은 네바강을 중심하여 늪지대에 세운 역사 깊은 도시다. 크고 작은 운하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또 하나의 베니스로 불릴 정도로 운치가 있다. 배치된 건물들이 파리의 거리를 연상케 한다. 구역마다 마치 잘 꾸며진 하나의 세트장 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군들이 포위를 하고도 문화재 보호를 위해 대포 사격을 보류할 정도로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겨울궁전박물관, 건물에서부터 중압감을 느낀다. 화려한 전시물들은 차치하고, 하얀 방에 멈춘 탁상시계 하나가 눈길을 끈다.
1917년 10월 25일, 군함 오로라호의 대포 소리를 신호로 봉기한 볼세비키 혁명군들이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를 체포하고, 새로운 역사의 정점으로 그 자리에 있던 시계를 정시시켜 놓은 역사적인 기념물이다.
“전 세계 노동자 농민들이여! 붉은 깃발 아래 뭉쳐라. 흡혈귀 같은 소수의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무산 대중이 주인이 되는 지상낙원을 만들자!”
그렇게 시작된 새 역사는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우리도 그 피해자요, 아직도 아픈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그 잘난 이념을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음들이 목숨을 버렸는가.
주인이라던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빵을 달라”고 외치던 절대 빈곤을 양산하지 않았던가. 이제 그 낡은 이념을 스스로 버리고, 반드시 망할 것이라던 자본주의의 시장경제를 답습하고 있는 사회주의 종주국, 이에 더한 아이러니가 어디에 있으랴.
각설하고 문화유산으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황실과 귀족들의 화려한 사치품들을 보면서 이게 곧 역사인거야 하며 웃을 수밖에 없다. 루빈스의「로마인 기브」라는 그림 앞에 멍하니 서있다. 이 세상에서 이토록 기막힌 장면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작품 속에 배어있는 ‘오브제’를 상상하며 소설을 쓴다. 숨이 턱에 걸려 있는 노인, 손목에 쇠사슬을 보아 종신형으로 수감 중인 죄수가 분명하다. 젊고 예쁜 여인이 그 노인을 품고 풍만한 젖가슴을 열어 젖꼭지를 물리고 있다. 누가 이 광경을 외설스럽다고 하겠는가.
마지막으로 허락된 면회 통보를 받고 하나 뿐인 딸이 찾아 왔다. 이 순간이 이 세상 마지막 이별임을 직감하고 물이라도 한 모금 먹이고 싶으나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본능적으로 젖가슴을 열어 몇 방울의 젖으로 입술을 적셔주며 내려다보는 저 애절한 눈 빛,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을 몇 번이나 삼킨다.
데카브리스 광장에 황금의 돔을 이고 우뚝 서 있는 성 이삭 성당, 시내 어느 곳에나 보이는 당당한 위용이다. 백 톤이 넘는 대리석 원형 기둥이 48개, 그 위층에 60여 톤의 기둥이 24개다. 핀란드 국경에서 다듬어 끌어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를 흘렸을까. 무려 40여 년에 걸쳐 50여 만의 백성들이 동원되어 약한 지반을 다지기 위해 2천여 톤에 가까운 철, 주철, 구리 등으로 천 여 개의 기둥을 박았다는 말에 할 말을 잃는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인 사람이라는 생각에 올려다보는 기분이 개운치 않다.
18세기에 건조되어 러일 전쟁에 참여했던 순양함 오로라호, 열 척 가운데 겨우 세 척이 남은 그 중 하나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만을 확보하여 태평양 진출의 야망을 품고 일본을 향해 출항한 발트함대다. 러시아의 평창을 견제하는 영국의 반대로, 스에즈 운하를 통과 못하고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9개월이란 긴 항해를 했으니 무슨 힘으로 싸울 수 있었겠는가.
그 때에 만일 러시아가 승리했더라면 우리 역사는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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