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츠바이크를 만났다. 민속학자 김열규선생으로부터다.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하며 시작되는 그의「열정적 책읽기」에서 알게 된 츠바이크. ‘나도 츠바이크처럼’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흠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에라스무스다!”라는 묘한 구절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츠바이크를 찾았다. 그의 작품들이 꽤 여러 편 번역되어 있었다. 그래, 이 전기 작가는 에라스무스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그런 궁금증으로 두껍지 않은 책을 열었다. 평이한 듯한데 점점 글속으로 빠지게 한다.
문장은 필요하고 쓸 말만 하고 있지만, 같은 사건과 상황을 달리하면서 이끈다. 나라면 같은 주제를 두고 이렇게 길게 반복해서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같은 내용을 중심에 접근시키면서 어디까지 달려가는지 지켜볼 심사로 책장을 넘겼다.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은 밑줄을 그었다. 그러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긋지 않고 지나간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그렇게 츠바이크의 펜을 통해 에라스무스를 만났다.
에라스무스! 그는 말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전형이다.
그리스 라틴어를 통한 고대와의 깊은 대화로 깨달음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프랑스로 다시 영국에서 만난 그리스와 로마의 세계. 그 고전의 바다에 침잠한 그의 학문과 정신은 가없는 넓이와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9 추정-1536)! 르네상스 최대의 인문주의자. 츠바이크가 그에 대해 한 마디로 평하기를 ‘최초의 의식 있는 유럽인’이라 일갈했다. 에라스무스가 어느 정도의 인물이었는지 잘 말해주는 대목이 있다. 츠바이크를 통해 들어보자.
「에라스무스! 100년 전부터 그때까지 유렵에 그보다 더 위대한 인물은 없었다. 어느 작가의 작품도 그의 작품만큼 그렇게 여러 차례 인쇄를 거듭하지 못하며, 어떤 도덕적 명성이나 예술가의 명성도 그의 명성에 비교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때로는 ‘만물박사’ 로, 때로는 ‘학문의 군주’ 로, 때로는 ‘연구의 아버지’, 때로는 ‘고귀한 신학의 보호자’라 칭송하며, 그를 ‘세상의 빛’ 또는 ‘서양의 파티아’, ‘견줄 데 없는 인간이자 불멸의 박사’ 라 부른다. 그는 숭고하며, 천상의 존재처럼 경건한 기도로 존경해야 할 인물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다.” 사실, 지금까지 헌사를 쓰고, 개인 교습을 하며, 구걸 편지를 써서 근근이 연명했고, 저급한 아첨으로 권력자들에게서 보잘것없는 녹을 받는 성직자 자리를 얻어냈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던 이 학자에게서 은혜를 얻으려는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다섯 개의 대학이 그에게 교수직을 수여하는 영광을 얻으려고 다투며, 세 명의 교황이 그에게 존경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결코 자신을 팔지 않는다. 에라스무스가 쓰는 모든 편지의 수신자들은 편지를 고급 비단에 싸 보관하고, 경외심에 가득 차 바라보는 친구들 앞에 마치 성인의 유물을 보여주듯 편지를 풀어 보여준다. 그리고 이 대가의 추천은 마치 동화 속의 참깨처럼 모든 문을 열어 준다. 시대는 그를 ‘야만 반대자’, 모든 후진성과 모든 전통주의를 퇴치하는 투사, 더 자유로우며, 더 인도적이고, 더 고양된 인간성의 예고자, 앞으로 올 세계시민의 안내자로 다른 모든 사람들 앞에 내세운다.」 물론 츠바이크의 말이긴 하지만 가히 한 인간을 평하는데 이만큼 찬사를 받은 사람이 역사상 또 있을까 싶다.
에라스무스는 선천적으로 연약한 육체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난다. 14살 무렵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후견인은 그를 수도원에 맡겼다. 문법학교와 수도원에서 라틴 고전학과 신학을 공부한 그는 21살 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다.
1492년 사제가 된 에라스무스는 1495년 유럽 최고의 학문 기관인 파리 대학 신학부에 들어가 1499년까지 머물렀다. 파리에 유학한 후에는 다시 수도생활에 복귀하지 않고 언어의 정확한 이해를 기초로 한 실증적·역사적 방법에 의해서 성서·교부 문학이나 고대의 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고대 문헌을 처음으로 활자화했다.
한편 이런 학구적 성과에다 당시의 사회·문화의 왜곡을 비판하는 데 놀랄 만한 건필을 휘두르고, 유럽 각지를 전전하다 스위스의 바젤에서 사망했다.
그의 저작은 이절판 전10권 11분책에 이른다. 이것이 대략적 그의 이력이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에라스무스의 일대기를 년대 별로 나누지 않고 그가 정한 임의의 주제에 따라 주요 일생을 그렸다.
자세한 조사보고서가 아니지만 시대와 인물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시대는 물론 그와 관련된 인물과 사상이 하나의 제목에 따라 차례로 인생여정에 치밀하게 직조되어 있다. 마치 에라스무스가 곁에 있는 듯 한 착각이 들 정도다. 총 10장으로 되어있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밑줄을 친 구절을 재구성하여 음미해본다.
에라스무스가 살았던 시대.
그야말로 새로움으로 눈을 뜨기 시작하는 여러 가지 역사적 전기가 많은 때다. 1486년, 디아스가 유럽인 최초로 희망봉까지 항해한 것을 시작으로 콜럼버스지오반니 캐벗, 바스코 다 가마, 카브랄 마젤란 등에 의해 새로운 대륙과 미지의 세계가 알려지자 오랫동안 불가침으로 여겼던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지도는 어린애 웃음거리가 된다.
코페르니쿠스의 발견, 마르틴 베하임스가 만든 최초의 지구의 등 지금까지 미지의 영역 위에서 불확실하고 침울하게 별들의 공간을 돌고만 있었던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중세시대 서양인들은 단지 통일된 하나의 영혼, 말하자면 가톨릭의 영혼만 가지고 교회의 품안에서 잠자고 있었다. 이제 지구의 비밀들은 규명 가능해졌는데, 왜 신의 비밀은 그럴 수 없는 것일까?
순종 대신에 새로운 생각의 용기, 질문의 용기가 일기 시작하여 어느새 새로운 종교개혁의 거대한 세계사적 요구가 처음에는 산발적으로, 그 다음에는 대중의 확신에 의해 고조되는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이성에 눈을 뜨는 단초를 에라스무스는 제공한다.
그가 일약 스타가 되는 책이 출간되는데 이태리에서 교황 율리우스를 보고 분노하여 만든『바보 예찬』이다. 교회와 당시 지식인 학자 예술인 대한 신랄한 비판에 유럽은 열광했다.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삶.
“고요함의 인간, 끊임없이 일했던 한 인간. 그러나 그의 본래의 업적은 현대의 의식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세워진 건물 아래 주춧돌처럼 숨어 있다.”
“그는 서양의 모든 저술가와 창조자 중에서 최초로 의식 있는 유럽인이었으며 최초의 투철한 평화애호가였고 인문주의의 이상과 세계우호 및 우호정신이라는 이상을 위한 달변의 변호사였다는 점이다. 그가 증오한 것은 ‘광신’과 폭력이었다.” 그의 좌우명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에라스무스는 세상을 향해 열린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고 마르지 않는 어느 오지의 조그만 늪처럼 결코 굳는 법이 없었다. 경험이 풍부한 그는 알고 있다. 언젠가는 지쳐 사라지는 것이 모든 격정의 성향임을.”
시대를 밝히는 위대한 스승의 초상으로 그를 표현한 그림.
엄격한 노동의 얼굴, 금욕자의 모습, 가장 성스러운 순간, 작업의 창조적 순간, 에라스무스를 표현한 홀바인의 그림이다. “벌처럼 부지런한 학자와 자유정신을 가진 신학자, 엄격한 시대 비평가와 온화한 교육자, 조금은 단순한 시인, 뛰어난 편지쓰기, 무서운 풍자작가와 모든 인류의 온화한 사도, 이 모든 것이 서로를 적대시하거나 압박하지 않고 그 넓은 정신 속에 공존하고 있다. 그가 가진 재능중의 재능, 즉 서로 싸우는 것을 화해시키고 대립을 풀어 주는 재능이 새로움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주는 자가 그 길을 최초로 걸어가는 자보다 덜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고 그림을 통해 본 츠바이크는 말한다.
종교개혁가 루터와의 논쟁.
두 사상가는 끝없는 갈등과 위대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을 잘 묘사하고 있다.「에라스무스와 투쟁가의 천성을 타고난 루터처럼 성격적으로, 육체적으로 그렇게 완벽한 대비를 이루는 사람은 드물다.
에라스무스는 문장을 예술적으로 다듬고 손질해 핵심에 이르도록 예리하게 만든다. 그러나 루터는 말을 폭풍처럼 쏟아내고, 그의 펜 또한 ‘마치 눈 먼 말처럼’ 앞으로 질주한다. 루터에게서는 주변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힘이 나온다.
에라스무스는 의심이 여지없이 폭넓은 시야를 가진 사람이고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삶의 어떠한 것도 그에겐 낯설지 않다. 반면, 루터는 폭은 좁지만 깊이에 있어서는 에라스무스를 능가한다. 에라스무스의 가장 내면에 있는 본질이 루터를 근본적으로 자극했고, 루터의 가장 내면에 있는 본질이 에라스무스를 근본적으로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싸움의 승리자, 그것은 처음부터 분명했고, 루터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터에게는 종교였고, 에라스무스에게는 인간이었다. ‘그는 알을 낳아 주었고, 루터가 그것을 부화 시킨 것’이다.
에라스무스가 문을 두드린 곳을 루터가 밀고 들어온다. 루터의 ‘부자유 의지론’은 투쟁적 인간이 쓴 가장 강력한 논박서에 속하며, 에라스무스와의 논쟁으로 서로 상반된 기질을 가진 두 사람 사이의, 그러나 가장 강력한 기준의 사상 세계사에서 이루어진 극히 의미 있는 토론에 속한다. 이 싸움은 위대한 두 상대를 통해 세계문학의 정신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중립을 지키려는 고독한 투쟁과 좌절.
「어떤 독단에도 관계하려하지 않고, 어떤 파를 위한 결정도 하지 않으려는 이 자유로운 정신,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이 정신은 이 땅 어디에서도 정착지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책이라는 숭고한 침묵으로 도망간다. 중립이 범죄로 불리는 시대가 존재한다.
에라스무스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글 중 대부분을 바젤에서 썼다. 이곳은 에라스무스를 통해 유럽 정신의 수도가 된다. 그는 이편이든 저편이든 어느 편에 서려고만 하면 세속의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싸움에서 교황의 교회가 저지르는 여러 가지 악행을 비난하고, 그 개혁을 첫 번째로 주장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나는 결코 어떠한 파벌에도 봉사하지 않을 것이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에라스무스는 위대한 중재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개인적인 연약성 때문에, 그리고 불치의 용기 부족 때문에 결정을 미루는 그 운명이 또 다시 비극적으로 되풀이 된다.
긴장된 운명의 시간에 글로 쓰인 언어는 결코 따뜻한 피를 가진, 살아 있는 호소만큼 강하지 못하다. 프라이부르크의 자기 서재에 들어앉은 이 늙은 사내는 불필요한 존재일 뿐이며, 한때 찬란했던 명성의 빛바랜 그림자일 뿐이다. 사람들은 문학의 세밀한 언어, 깊은 사색 끝에 나온 언어를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사람들이 듣는 유일한 언어는 거칠고 격정적인 정치언어이다. 가톨릭에서는 더 이상 그를 찾지 않으며 신교들은 그를 조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적은 점점 많아지고 내 친구들은 사라지고 있구나.” 인간의 정신적 교류가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고 가장 행복한 것이라 여겼던 이 고독한 남자는 절망하고 탄식한다.」
그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인문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은 “인문주의가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위에서 그들을 가르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기 방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상한 말은 현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이러한 숙명적인 격리 상태, 정열과 민중성의 부족으로 인해 인문주의는 그 생산적 이념에 실제 생산성을 부여 하는데 실패했다.
에라스무스는 저 깊은 곳으로부터 점점 더 격렬하게 울려나오는 불만의 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고 츠바이크는 말한다. 여기에 유럽정신의 수도라는 말이 보이는데 혹 안동 도시브랜드인 ‘한국정신문화의 수도’가 여기서 따온 것은 아닌지 재미있는 상상도 해본다.
에라스무스는 과연 무엇을 역사에 남겼는가?
츠바이크는 말한다.「그의 사상은 지금까지 역사를 형성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유럽의 운명을 형성하는데 뚜렷한 영향을 끼친 적도 없었다. 정의의 정신 속에서의 대립을 해소한다는 위대한 인문주의자의 꿈, 공동의 문화라는 목표 속에서 열망되던 여러 국가의 통일은 이뤄지지 못한 채, 아니 우리의 현실에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을 유토피아로 남게 됐다.
약삭빠르고 냉혹한 계산꾼이 ‘에라스무스적인 것’은 가망이 없음을 늘 새롭게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리고 현실이 그 계산 꾼의 계산이 옳았다고 끊임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분열돼 있는 민족들에게 화합을 말해 주고, 앞으로 다가올 더 지고한 시대사상인 인류애를 인류의 가슴에 믿음으로 새롭게 주는 그런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사마천이 일찍이 말했듯이 “정의와 도덕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고 했다. 또 츠바이크는 “역사는 패배자들에 대해선 불공평하다”고도 했다.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사상과 철학은 인간을 의식화하는, 즉 자아를 획득하는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가 그 과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인간사에 너무나 이상적인 것이었을까? 이성과 실천사이의 문제를 조용한 마음의 호수에서 담가 보았다. 심연 저 밑에서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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