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중마을 하당리 '성검할매'의 아름다운 추억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한 잎 두 잎 따먹은 진달래에 취하여
쑥바구니 옆에 낀 채 곧잘 잠들던
순이의 소식도 이제는 먼데
예외처럼 서울 갔다 돌아온 사나이는
조을리는 오월의 언덕에 누워
안타까운 진달래만 씹는다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고픈 꽃
<조연현의 시, 「진달래」전문>

![]() 남효선/시인·언론인 |
# 기억 하나, 허기진 배를 달래는 먹을거리
「진달래는 먹는 꽃/ 먹을수록 배 고픈 꽃...」그 때는 그랬다. 봄날 양지바른 산천을 붉게 물들이며 지천으로 피어나는 참꽃을 보면 ‘꾹죽’ 냄새가 난다. 종일 허기져 하늘만 쳐다보던, 아슴한 유년의 기억이다.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시절, 꾹죽은 긴긴 보리고개를 넘어가는 유일한 양식이었다. 꾹죽은 ‘짝두보리’라는 섬뜩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꾹죽은 ‘국도 아닌, 죽도 아닌 먹을거리’였다. 곡기는 전체 양의 2할에 불과했다. 8할은 거의 ‘씨래기(무청을 말린 나물)’나 봄나물이었다.
한 해 동안 애써 거둔 양식은 이듬해 봄이 오기도 전에 바닥이 나기 일쑤였다. 지천으로 붉은 꽃망울을 터트리며 피어나는 참꽃은, 이 무렵 아이들이 허기진 배를 달래는 요긴한 주전부리였다. 아비는 채 익지도 않은 시퍼런 보리를 한줌 베어 작두로 줄기 채 썰어, 봄나물과 함께 범벅을 쑤었다. 그나마 식구들이 실컷 먹을 만큼 양도 차질 않는 ‘짝두보리범벅’을 놓고 식구들은 허기진 배를 채웠다. 아비들이 짝두보리를 벨 무렵이면, 아이들은 주린 배를 잡고 산으로 내달았다.
산천을 발갛게 달군 참꽃을 뜯은 아이들의 입술은 푸르딩딩하게 물들었다. 정신없이 참꽃을 뜯은 아이들은 푸르딩딩한 입술을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배꼽을 잡았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없었지만, 입 안에서 달짝시큼하게 씹히는 맛만으로도 허기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 기억 둘, 신명과 해방의 꽃
참꽃은 여성해방의 꽃이다. 무슨 거창한 말이냐 하겠지만 참꽃은 60년대를 어렵게 헤쳐 나온 여성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기계화영농법이 보급되기 이전, 60~70년대 농법은 오로지 인력과 축력(소)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새봄이 오고 청명 무렵이면 농촌의 가계는 한해농사준비로 부산해진다. 청명과 곡우를 전후해 못자리를 내야하기 때문이다. 못자리내기는 한 해 농사를 가늠하는 소중한 일이었다. 특히 못자리를 준비하는 곡우를 기점으로 농촌사회는 한참도 쉴 새 없는 노동의 세계로 몰입한다. 바로 이 노동의 세계로 들어가는 어귀에 ‘삼월삼짇날’이 자리하고 있다. 농촌여성이 일 년 중 가장 학수고대하는 ‘화전놀이를 즐길 수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삼짇날을 앞두면 갓 시집 온 새댁들의 가슴은 콩닥콩닥 뛴다. 이 무렵이면 ‘꽃놀이’ 생각에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는다.
이 날이면 그토록 지겹도록 만지던 솥뚜껑과 냄비 뚜껑은 고된 시집살이를 훌훌 털어내고 신명을 열어젖히는 훌륭한 악기로 변신한다. 처녀 적 숨 죽여 부르던 노래가락도 이 날이면 목청껏 부를 수 있었다.
발밑에는 참꽃이 흐드러지고 봄 햇살이 잔잔하게 내려 앉는 산 속 맑은 계곡 물에 발을 담그면 온 몸을 휘감던 시집살이는 어느새 시냇물을 따라 저만치 흘러간다.
솥뚜껑을 두드리고 냄비두껑을 두들기며 한바탕 신명나게 놀다가 너럭바위에 누워 세상모르게 단잠도 즐겼다.

상당할매들
"소두배에 참꽃 지짐 굽고... 다라이 두드리며 신명나는 화전놀이"
산중 마을 하당리의 성검할매는 지금도 만산에 흐드러진 참꽃을 보면 마음이 울렁거린단다. 열여섯에 산중마을로 시집와서 동네 아낙들과 즐긴 '화전놀이' 기억 때문이다. 하당마을에서는 화전놀이를 '산놀이' 혹은 '진달래놀이'라고 불렀다. 성검할매는 타고난 천성이 쾌활해 화전놀이의 리더 격이었다. 마을 아낙들 사이에서 성검할매는 '큰 싱겁이', '똘신김'으로 불렸다. 키가 큰데다 우스개소리며 노래 가락을 잘하기로 평이 났기 때문이다.
삼월삼짓날 무렵이면 성검할매의 주동으로 화전놀이 날을 잡았다. 이 때 마을 아낙들끼리 준비물을 각각 분담했다. 치밀하게 사전준비를 마친 뒤 아낙들은 화전놀이를 가는 날 아침 일찍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시어른들과 식구들의 아침밥을 챙겨드리고 점심식사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안방 찬장에 차려놓았다. 하당리 아낙들은 화전놀이 날이 잡히면 미리 시아버지께 "언제 화전놀이 가니더"라고 말씀을 드린다. 그러면 시아버지들은 "그래 잘 놀다 와라" 고 수락하신다. 이때부터 아낙들의 마음은 울렁거리기 시작한다.
아낙들은 화전놀이 당일 날, 미리 역할 분담을 한 대로 쌀, 밀가루, 고추장, 간장, 등 먹을거리를 챙긴 뒤, 지짐을 구을 '소두배(솥두껑)'와 찌그러진 냄비 등을 챙긴다. 솥뚜껑은 참꽃지짐을 부칠 판이며, 냄비는 한바탕 노래를 부르며 두들길 악기인 셈이다. 화전놀이는 주로 마을에서 오리쯤 떨어진 구수골 용소바위를 즐겨 찾았다. 편편한 너럭바위가 있고, 거울처럼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무엇보다도 양지녘이어서 참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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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펀하게 노래판이 무르익으면 아낙들은 '수건돌리기'나 '강강술래', '동에따기' 같은 놀이를 펼쳤다. 성검할매가 꽃다운 새댁 시절 화전놀이에서 불렀던 노래 한 소절을 부르신다. 아들딸 모두 시집장가 보내고 대학 다니는 손주를 둔 할매이지만 여전히 초성이 좋다..
"눈날이 사탕 먹을 적에는 단맛으로 먹구요/ 몽침게 찜질을 나갈 때는/ 하늘이 삥삥 돌더라/ 어랑 어랑 어야디야/ 요것도 내 사랑이로구나".
봄날 햇살은 연기처럼 왜 이다지도 빨리 흩어지는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산 비얄길을 내려오면서 아낙들은 못내 아쉬워 연신 참꽃 무리를 뒤 돌아 본다. 해거름이 깔리고 어둑어둑해서야 죽을힘을 다해 집으로 내달으면 벌써 시아버지는 긴 곰방대를 들고 뒷짐을 쥔 채 사립문 앞을 돌고 있다. 며눌아기의 발자욱 소리가 가까워지면 시아버지는 곰방대를 물고 '어흠 어흠' 헛기침을 놓는다. 시어머니의 지청구를 미리 막기위한 속내임을 며느리는 금세 알아 채리고 후다닥 정지 칸으로 들어선다.
"그래 놀러 나가면 일하다가 산놀이 나가는데, 얼매나 좋아요. 해 지고 조금 늦게 들어가면 시아버지고 영감이고 얼매나 난리를 친다고. 보따리고 솥이고 뭐고 마당에다 다 팽개쳐버린다고. 땅거미가 들어오면 한 여덟시 되면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들어가지요. 시아버지가 며느리한테 야단은 몬 치고 아들래미한테 호랑이 맨쿠로 담뱃대를 두들기며 그래 뭐라 한다꼬. 그래 놓으면 아들래미(신랑)가 바짝 약이 올라가지고 보따리 집어다 내팽개치고 길길이 날뛰는데. 그래도 그 때가 제일 신나고 재밌었지요."
성검할매가 그 시절을 떠올리는 듯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지그시 눈을 감는다.
울진지방의 농촌 아낙들은 ‘삼월삼짇날 화전놀이’를 ‘진달래놀이’로 부른다. 화전놀이를 가는 날이면 시댁의 어른들도 짐짓 모른 척 용인해준다. 갓 시집 온 며느리들은 이날 새벽부터 뜬 눈으로 ‘화전놀이’를 즐길 준비로 부산해진다. 그렇다고 특별한 먹을거리를 준비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 때 등장하는 것이 ‘진달래 지지미’이다. ‘지지미’는 ‘부침’의 울진지방 방언이다.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눈길을 피해 준비해 온 ‘솥뚜껑’에 밀가루 반죽을 올리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참꽃이파리를 뜯어 노릿노릿하게 부쳐 낸 ‘참꽃지지미’를 놓고 한바탕 펼치는 춤판은 고된 시집살이와 힘든 농촌의 노동을 일거에 날려 보내는, ‘노동의 해방이자 삶의 재충전’이었다.
진달래가 붉은 꽃망울을 구름처럼 피워내는 산 계곡 너른 바위에 솥을 걸고, 아낙들은 냄비뚜껑과 양재기를 두들기며 시집살이와 노동의 껍질을 훌훌 벗어던졌다. 이들이 은밀하게, 그러나 신명으로 풀어내는 ‘화전놀이’는 우리 농촌사회의 소중한 여성 민속으로 남아있다.
바야흐로 세상은 참꽃이 툭툭 토해내는 붉은 향내 천지인데, 사람살이 세상은 국민을 등에 업고 연일 권력쟁투를 벌이는 이전투구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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