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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1930년 ‘특별연고삼림양여허가서(特別緣故森林讓與許可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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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8.13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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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일제강점기인 소화(昭和) 5년(1930년) 1월 14일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총독 야마나시 한조(Hanzo Yamanashi-산리반조, 山梨半造)가 발행한 ‘특별연고삼림양여허가서(特別緣故森林讓與許可書)’이다. 
  
가로 19.5cm, 세로 27cm 크기의 양여 허가서는 강원도 울진군 북면 주인리에 거주하던 임택노(林澤魯)씨에게 주인리 산99번지 29정(貳拾九町) 2반(貳反) 4묘(四畝) 면적의 삼림의 양여를 허가한다는 조선총독부의 공문서이다.  
  
정(町), 반(反), 묘(畝)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계량 방법인 척관법(尺貫法)에 의한 지적의 단위로 1정은 10반, 1묘는 30보로 정해져 있는데, 1보가 1평에 해당한다.
  
1정은 100묘, 100묘는 1보의 3천배가 되므로 3천보는 1천평이 되고, 1정은 9천917평방미터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임야 조사 사업에 착수하기 이전인 1911년 11월 10일, ‘요존치 예정 임야 선정 표준에 관한 건’을 통하여 군사, 학술상 공용의 필요가 있거나 보안림에 준하여 공용의 목적을 위해 필요한 국유림을 요존치임야로, 나머지 임야를 불요존치임야로 분류했다.
  
그리고 임야 조사 사업이 마무리되고 난 1926년 4월 5일, 제령 제7호로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을 제정하여 1년 이내에 양여를 출원한 연고자에 한하여 국유림 가운데 불요존치임야를 특별한 연고자에게 양여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런데 특별연고자의 범위는 ‘조선임야조사령’과 부속 법령에서 정한 연고자의 범위와 유사했고, 특별연고자라 하더라도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 시행일로부터 1년 이내에 양여와 관련한 출원을 해야 했다.
  
특별연고자는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 제2조에 ‘고기(古記) 또는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여 임야에 연고를 가진 사찰’, ‘융희 2년 법률 제1호 삼림법 제19조의 규정에 의하여 지적의 계출을 하지 않아 국유로 귀속된 삼림에 있어서는 그 종전의 소유자 또는 그 상속인’, ‘융희 2년 법률 제1호 삼림법 시행 전 적법으로 점유한 삼림에 있어서는 그 점유자 또는 그 상속인 전항 제2호 또는 제3에 해당하는 자가 부면 내의 마을인 경우에는 그 부면을 특별 연고자로 규정한다’고 되어 있다.  
  
일제의 특별연고자에 대한 삼림 양여 사업은 임야 조사 사업 과정에서 소유권을 박탈당한 다수의 연고자들을 구제함으로써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시행한 것으로, 제반 요건을 갖춘 특별연고자에게는 무상으로 양여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비록 그 형식은 양여였지만, 결국에는 일제의 임야 조사 사업에서 당연하게 삼림 소유자로 인정받아야 했던 실제 연고자들에게 소유권을 되돌려 주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앞서 대한제국 정부는 1908년 1월 24일, 법률 제1호로 삼림법을 제정하여 1908년 1월 24일부터 3년 이내에 농상공부 대신에게 지적과 면적의 견취도(見取圖)를 첨부하여 계출(屆出, 신고)하도록 했고, 계출이 없는 경우에는 국유로 간주했다.
  
그 이후 임야 조사 사업 당시 국유림에 관하여 소유주의 신고가 없으면 국유로 편입했다.
  
그리고 그 후 신고 해태(懈怠, 어떤 법률 행위를 해야 하는 기일을 넘겨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일)를 이유로 소유권을 박탈당한 연고자들을 구제하고 혼란한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1926년 4월 5일 제령 제7호로 “조선특별연고삼림양여령”을 제정하여 국유림을 특별연고자에게 양여할 수 있도록 했고, 이것을 조선총독부 관보에 고시한 것이다.
  
한편 이 문서를 발행한 조선총독부 총독 ‘산리반조(山梨半造)’는 1868년 태어나 1944년에 세상을 뜬 인물로, 1927년부터 2년간 제5대 조선 총독을 지내다가 부정 사건과 연루되어 사직한 인물이다.
  
‘역대 한국 통감, 조선 총독, 정무총감’에 따르면,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한 그는 육군대학교 교관, 교육총감부 본부장, 육군 차관, 육군 장관, 육군 대장, 군사참의관, 간토계엄사령관 겸 도쿄 경비사령관 등의 요직을 역임한 후 당시 다나카 군벌의 중심에 있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의 천거로 조선 총독에 임명됐다.
  
산리반조 총독은 1928년 한국 독립 운동가인 조명하(趙明河)가 육군 특명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 일본 왕족이면서 일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를 독검으로 찌르는 의거로 인해 정치적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부산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 설립 허가와 관련하여 당시 엄청난 거금이었던 5만원을 받은 야마나시 총독 독직(瀆職) 사건에 연루되면서 사임했다. 
  
특히 그는 군대에 재임하던 시절부터 시베리아 원정군이 탈취한 황금을 횡령한 사건 등의 온갖 부정 혐의에 연루되면서 돈을 좋아하는 ‘배금장군(拜金將軍)’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돈을 밝혔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번호에 소개하는 양여 허가서 가운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산리반조 총독의 직인 바로 옆에서 보라색 스탬프를 이용하여 세로로 찍혀 있는 자작(子爵) 제등실(齊藤實)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제등실은 조선총독부의 3대와 5대 총독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이로 볼 때 1929년 산리반조 총독이 사임하고 난 다음, 3대에 이어 5대 총독으로 다시 부임한 제등실이 소화(昭和) 5년인 1930년에 이 양여 허가서를 발행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기존에 산리반조 총독 명의로 양식이 인쇄되어 있는 양여 허가서를 폐기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면서, 스탬프로 자작(子爵) 제등실(齊藤實)의 이름을 덧찍어서 사용한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실제 이 허가서는 산리반조 총독이 아닌 제등실 총독이 발행한 문서가 된다.
  
이번호에 소개하는 특별연고삼림양여허가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조선에 대한 삼림 수탈 정책과 울진 지역에서의 세부 정황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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