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화재연구원 윤천수 과장 “겸재 정선과 정충엽 등의 ‘월송정도’ 등에서 월송만호진의 남쪽 성벽과 연결된 문루 확인... 조선 후기 제작 평해군 지도들은 읍성과 함께 월송만호진성이 표기되어 있는데, 월송정은 성내에 있고 성의 남쪽에 별도의 문루가 있다” 밝혀·····문루(門樓), 2011년 8월~2012년 3월말 기성 망양~평해 직산간 도로 확·포장 공사현장 발굴 조사 결과 확인돼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 건립 후 400년여 지나 제작된 그림·고지도로만 설명하기에는 상당한 한계·····본지 [울진뉴스] 2010년 9월호에서 일제강점기 촬영 월송정 사진 단독 입수 보도하며 “창건 당시에는 정자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 월송만호진 들어서며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보도해
달밤에 신라의 화랑 네 명이 놀았다고 ‘월송정(月松亭)’...? 월국(越國)의 소나무 묘목을 심었다고 ‘월송정(越松亭)’...?·····화랑은 월송정을 구경도 못하고 그냥 지나갔고, 월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 전설은 100% 허구이다.
월송정(越松亭)은 조선 후기 월송만호진성(越松萬戶鎭城)이 축성된 이후에도 군사적 목적 등으로 활용되지 않고 성내에서 독립된 정자로만 존재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끈다.
지금까지는 당초 정자로 건립됐던 월송정이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군사용 망루(望樓,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높이 지은 다락집)나 문루(門樓, 성문 등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의 용도 등 다목적으로 활용됐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지난 8월 3일 강원대 삼척캠퍼스 제5공학관 대강당에서 열린「이사부 우산국 복속 1500주년 기념-2012 대한민국 독도 이사부 컨퍼런스」에서 삼한문화재연구원 윤천수 과장은 『월송포 진성 발굴 의의와 울릉도 수토 출발지 변천사』라는 주제의 논문을 통해, “겸재 정선과 정충엽 등의 ‘월송정도’를 통해 보면 월송정은 파악되지 않고 월송만호진의 남쪽 성벽과 연결된 문루가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평해군 지도들을 살펴보면 읍성과 함께 월송만호진성이 표기되어 있는데, 월송정은 성내에 있고, 성의 남쪽에 별도의 문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건립·····월송정을 나타낸 그림·고지도, 최초 건립 이후 400년여 지나서 제작·····건립 목적·후기 군사적 활용도 등 충분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
그런데 애초에 독립된 정자로 건립된 월송정이 조선 후기에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된 이후에도 계속 정자로만 활용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월송정 건립의 목적 또는 조선 후기의 군사적 활용도 등까지 충분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울진군지』는 월송정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와 진경산수화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애초 월송정이 건립되던 때로부터 400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 제작된 그림과 고지도만으로는 월송정의 당초 건립 목적과 후기에 변형된 쓰임새를 명확하게 설명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400년여 세월동안 정자의 퇴락 등으로 인해 최소 몇 번에 걸친 보수 또는 재건축 등이 필요에 따라 이루어 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지 [울진뉴스]는 2010년 9월호 통권 제53호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월송정 최초 사진을 단독으로 입수하여 보도한 바 있다.
그 당시 본지는 사진 속 월송정 정자의 우측 하부 기둥에 맞물려서 기와를 두른 토석축(土石築)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점 등을 이유로 “애초에 월송정이 정자가 아닌 군사용 망루의 용도로 건축됐거나, 당초부터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추정했었다.
또한 “아니면 기존에 전해지는 대로 고려 충숙왕 13년에 존무사 박숙이 창건할 당시에는 정자의 용도로만 사용됐지만, 조선 후기에 월송만호진이 들어서면서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다.”고도 추정했었다.
월송정이 애초 독자적인 정자로서의 용도로 건립됐는지, 해안가에 위치한 군사용 시설의 용도로 건립됐는지의 여부를 지금 와서 명쾌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기록과 진경산수화, 사진 등을 종합해 볼 때, 처음에는 정자의 용도로 건립됐다가 후대에 와서 또 다른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군사용 시설 또는 일부 군사용 기능으로 활용됐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고려시대에 고려 양식의 정자로 건축됐는데, 후대로 와서 허물어진 정자를 새로 쌓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경산수화에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정자 양식으로 형태가 변모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특히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됐는데, 당시에 정자의 특성상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을 월송정의 지리적인 이점을 살리기 위해 월송정을 그대로 두고 주변을 빙 둘러서 월송만호진성을 쌓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관동읍지 등에 따르면 월송만호진성의 축성 연대는 1555년(명종 10년)이다.
이는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월송포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성의 규모나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성이 없었고 군영만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영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 권153 진보조에 1397년(태조 6년)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수군 만호 수어처(水軍萬戶守禦處)가 6이니, 월송포(越松浦)가 평해(平海) 동쪽에 있고, 배가 1척, 군사가 70명이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달밤에 신라의 화랑(花郞) 네 명이 놀았다고 해서‘달월자 월송정(月松亭)’...?·····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해서‘넘을월자 월송정(越松亭)’...?·····아니다. 화랑은 월송정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고, 월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 전설은 허구이다.
한편 『울진군지』를 비롯한 각종 기록물에서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고, 신라시대에 영랑(令郞), 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 등 네 화랑의 유람지라 하였는데,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하고 또한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월송(越松)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가정집(稼亭集) 권5의 동유기(東遊記)에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학자로 1333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한 이곡은 문장에 아주 뛰어났던 인물로 전해진다.
1349년(고려 충정왕 1년)에 이곡이 지은 기행문인 동유기는 송도를 떠나서 철령으로부터 평해에 이르기까지 한 달이 넘게 천이백리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곡은 동유기에서 월송정과 관련하여 “시일도평해군(是日到平海郡)。미지군오리(未至郡五里)。유송만주(有松萬株)。기중유정왈월송(其中有亭曰越松)。사선지유우과어차(四仙之遊偶過於此)。고명언(故名焉)-(이날 평해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참조. 한국고전번역원)”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역 그대로 신라의 화랑 4명은 도의를 연마하고 가악을 즐기며 전국 산천을 유람하던 중 평해 월송정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럴듯하게 보다 극적인 사실 효과를 위해 포장되고 미화되는 과정에서 ‘화랑 네 명이 달밤에 놀다가 갔다’느니, ‘월국에서 소나무 씨앗을 가져와서 심었다’느니 하면서 일종의 기정사실화된 전설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는 “월송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곡의 동유기 원문을 해석하면서 예전에 오류를 범했었는지, 아니면 후대로 내려오면서 필요에 의해 그럴듯한 전설로 만들어져 굳어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유기에는 신라 화랑이 월송정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사실은 한문 번역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특히 처음에는 월송정(越松亭)으로 불리던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 월송정(月松亭)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강원도의 경승지를 묘사한 관동십경((關東十境, 조선 영조 때에 김상성 등이 제영(題詠)한 그림첩))에 달월자 월송정(月松亭)으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영조 임금 당시에는 이미 월송정(月松亭)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조선 선조 때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개인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에서는 넘을월자 월송정(越松亭)이 사용된다.
이산해는 넘을월(越)자를 사용한 이유를 ‘월송정기(越松亭記)’를 통해 “그 이름은 어떤 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聲音)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이다’ 하니, 두 설(說)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자를 버리고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볼 때, 이산해가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해 어가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로 탄핵을 받아 평해에 귀양을 올 당시인 1592년에는 넘을월(越)자를 사용한 월송정(越松亭) 현판이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산해는 자신의 문집에 월송정과 관련해 ‘월송촌(越松村) 농가에 처음 우거하며’, ‘월송정(越松亭)에서 달 아래 거닐며’, ‘월송정(越松亭)가의 주인 집’, ‘월송정(越松亭)’, ‘월송정기(越松亭記)’ 등의 글을 남기는데, 모두 다 넘을월(越)자 월송정(越松亭)을 사용한다.
또 1603년에 건립된 평해 북천교비(경북 유형문화재 제361호)에도 마을 이름이 ‘월송(越松)’으로 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 건립 후 400년여 지나 제작된 그림·고지도로만 설명하기에는 상당한 한계·····본지 [울진뉴스] 2010년 9월호에서 일제강점기 촬영 월송정 사진 단독 입수 보도하며 “창건 당시에는 정자의 용도로 사용되다가 조선 후기 월송만호진 들어서며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보도해
달밤에 신라의 화랑 네 명이 놀았다고 ‘월송정(月松亭)’...? 월국(越國)의 소나무 묘목을 심었다고 ‘월송정(越松亭)’...?·····화랑은 월송정을 구경도 못하고 그냥 지나갔고, 월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 전설은 100% 허구이다.

지난 8월 3일 강원대 삼척캠퍼스에서 열린 '2012 대한민국 독도 이사부 컨퍼런스'
월송정도(정충엽, 18세기, 개인소장)
월송정(越松亭)은 조선 후기 월송만호진성(越松萬戶鎭城)이 축성된 이후에도 군사적 목적 등으로 활용되지 않고 성내에서 독립된 정자로만 존재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끈다.
지금까지는 당초 정자로 건립됐던 월송정이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된 이후에는 군사용 망루(望樓, 적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높이 지은 다락집)나 문루(門樓, 성문 등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의 용도 등 다목적으로 활용됐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지난 8월 3일 강원대 삼척캠퍼스 제5공학관 대강당에서 열린「이사부 우산국 복속 1500주년 기념-2012 대한민국 독도 이사부 컨퍼런스」에서 삼한문화재연구원 윤천수 과장은 『월송포 진성 발굴 의의와 울릉도 수토 출발지 변천사』라는 주제의 논문을 통해, “겸재 정선과 정충엽 등의 ‘월송정도’를 통해 보면 월송정은 파악되지 않고 월송만호진의 남쪽 성벽과 연결된 문루가 확인된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평해군 지도들을 살펴보면 읍성과 함께 월송만호진성이 표기되어 있는데, 월송정은 성내에 있고, 성의 남쪽에 별도의 문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월송정도(정선의 관동명승첩, 1738년, 간송장)

월송정도(전김홍도, 해산도첩)
실제 조선시대에 그려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정충엽(鄭忠燁, 생몰년 미상), 허필(許佖, 1709~1761) 등이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살펴보면 월송만호진성 안에 ‘월송정’이 독립된 건물로 그려져 있고, 따로 이름까지 표기하고 있다.
또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서(輿地圖書) 평해군지도, 관동읍지(關東邑誌) 평해군지도, 조선후기 지방지도 등의 고지도를 살펴봐도 대부분 월송만호진 성벽을 별도로 표시하고 그 안에 월송정을 따로 그려 넣거나 문루와 월송정을 별도로 표시하고 있다.
진경산수화와 고지도에 나타나는 월송만호진성 문루는 2011년 8월부터 2012년 3월말까지 기성 망양~평해 직산간 도로 확·포장 공사현장에서 실시된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되기도 했다.
발굴 당시 조사지의 서쪽 경계에서 동쪽으로 23m 떨어진 지점에서 성벽이 축조되지 않은 공간이 확인됐는데, 외벽의 기저부가 직각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문지(門址)로 판단됐다.
확인된 문지의 폭은 4m 정도로, 문지 동쪽에는 내벽 안쪽으로 60~30cm 가량의 할석을 이용하여 ‘ㄷ’자 형태로 덧댄 후 20cm 정도의 할석을 채워 넣은 구조물로 드러났고, 크기는 길이 730cm, 폭 80cm이다.
또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서(輿地圖書) 평해군지도, 관동읍지(關東邑誌) 평해군지도, 조선후기 지방지도 등의 고지도를 살펴봐도 대부분 월송만호진 성벽을 별도로 표시하고 그 안에 월송정을 따로 그려 넣거나 문루와 월송정을 별도로 표시하고 있다.
진경산수화와 고지도에 나타나는 월송만호진성 문루는 2011년 8월부터 2012년 3월말까지 기성 망양~평해 직산간 도로 확·포장 공사현장에서 실시된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되기도 했다.
발굴 당시 조사지의 서쪽 경계에서 동쪽으로 23m 떨어진 지점에서 성벽이 축조되지 않은 공간이 확인됐는데, 외벽의 기저부가 직각에 가까운 형태로 축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문지(門址)로 판단됐다.
확인된 문지의 폭은 4m 정도로, 문지 동쪽에는 내벽 안쪽으로 60~30cm 가량의 할석을 이용하여 ‘ㄷ’자 형태로 덧댄 후 20cm 정도의 할석을 채워 넣은 구조물로 드러났고, 크기는 길이 730cm, 폭 80cm이다.

해동지도-평해군 부분(18세기 중엽)
◈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건립·····월송정을 나타낸 그림·고지도, 최초 건립 이후 400년여 지나서 제작·····건립 목적·후기 군사적 활용도 등 충분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
그런데 애초에 독립된 정자로 건립된 월송정이 조선 후기에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된 이후에도 계속 정자로만 활용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월송정 건립의 목적 또는 조선 후기의 군사적 활용도 등까지 충분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울진군지』는 월송정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건립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고지도와 진경산수화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애초 월송정이 건립되던 때로부터 400년여의 세월이 흐른 후에 제작된 그림과 고지도만으로는 월송정의 당초 건립 목적과 후기에 변형된 쓰임새를 명확하게 설명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400년여 세월동안 정자의 퇴락 등으로 인해 최소 몇 번에 걸친 보수 또는 재건축 등이 필요에 따라 이루어 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지 [울진뉴스]가 단독 입수해 2010년 9월호에 공개했던 일제강점기 월송정 최초 촬영 사진
본지 [울진뉴스]는 2010년 9월호 통권 제53호를 통해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월송정 최초 사진을 단독으로 입수하여 보도한 바 있다.
그 당시 본지는 사진 속 월송정 정자의 우측 하부 기둥에 맞물려서 기와를 두른 토석축(土石築)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점 등을 이유로 “애초에 월송정이 정자가 아닌 군사용 망루의 용도로 건축됐거나, 당초부터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추정했었다.
또한 “아니면 기존에 전해지는 대로 고려 충숙왕 13년에 존무사 박숙이 창건할 당시에는 정자의 용도로만 사용됐지만, 조선 후기에 월송만호진이 들어서면서 정자와 망루의 용도를 겸했던 것으로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다.”고도 추정했었다.
월송정이 애초 독자적인 정자로서의 용도로 건립됐는지, 해안가에 위치한 군사용 시설의 용도로 건립됐는지의 여부를 지금 와서 명쾌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각종 기록과 진경산수화, 사진 등을 종합해 볼 때, 처음에는 정자의 용도로 건립됐다가 후대에 와서 또 다른 목적의 필요성에 따라 군사용 시설 또는 일부 군사용 기능으로 활용됐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고려시대에 고려 양식의 정자로 건축됐는데, 후대로 와서 허물어진 정자를 새로 쌓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진경산수화에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정자 양식으로 형태가 변모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면서, “특히 조선 명종 10년(1555년)에 월송만호진성이 축성됐는데, 당시에 정자의 특성상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을 월송정의 지리적인 이점을 살리기 위해 월송정을 그대로 두고 주변을 빙 둘러서 월송만호진성을 쌓은 것 같다”고 추정했다.
관동읍지 등에 따르면 월송만호진성의 축성 연대는 1555년(명종 10년)이다.
이는 1454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와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월송포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성의 규모나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성이 없었고 군영만 있었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영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세종실록지리지 권153 진보조에 1397년(태조 6년)으로 나타난다.
이 책에서는 ‘수군 만호 수어처(水軍萬戶守禦處)가 6이니, 월송포(越松浦)가 평해(平海) 동쪽에 있고, 배가 1척, 군사가 70명이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평해군)
여지도 평해군 부분 확대-월송정
광여도-강원도 평해군 부분(규장각)
광여도-강원도 평해군 부분(규장각) 확대-월송정
1872년 지방도-(강원도 평해군 부분)
관동읍지-평해군(1871)
◈달밤에 신라의 화랑(花郞) 네 명이 놀았다고 해서‘달월자 월송정(月松亭)’...?·····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해서‘넘을월자 월송정(越松亭)’...?·····아니다. 화랑은 월송정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고, 월나라에서 가져온 소나무 묘목 전설은 허구이다.
한편 『울진군지』를 비롯한 각종 기록물에서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인 월송정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지었고, 신라시대에 영랑(令郞), 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 등 네 화랑의 유람지라 하였는데,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하고 또한 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월송(越松)이라고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가정집(稼亭集) 권5의 동유기(東遊記)에 최초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의 학자로 1333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한 이곡은 문장에 아주 뛰어났던 인물로 전해진다.
1349년(고려 충정왕 1년)에 이곡이 지은 기행문인 동유기는 송도를 떠나서 철령으로부터 평해에 이르기까지 한 달이 넘게 천이백리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이곡은 동유기에서 월송정과 관련하여 “시일도평해군(是日到平海郡)。미지군오리(未至郡五里)。유송만주(有松萬株)。기중유정왈월송(其中有亭曰越松)。사선지유우과어차(四仙之遊偶過於此)。고명언(故名焉)-(이날 평해군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군에 이르기 전 5리 지점에 소나무 만 그루가 서 있고 그 가운데에 월송정(越松亭)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었는데, 이는 사선(四仙)이 유람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참조. 한국고전번역원)”라고 기록하고 있다.
번역 그대로 신라의 화랑 4명은 도의를 연마하고 가악을 즐기며 전국 산천을 유람하던 중 평해 월송정에 들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럴듯하게 보다 극적인 사실 효과를 위해 포장되고 미화되는 과정에서 ‘화랑 네 명이 달밤에 놀다가 갔다’느니, ‘월국에서 소나무 씨앗을 가져와서 심었다’느니 하면서 일종의 기정사실화된 전설로 굳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심현용 울진군청 학예연구사는 “월송정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이곡의 동유기 원문을 해석하면서 예전에 오류를 범했었는지, 아니면 후대로 내려오면서 필요에 의해 그럴듯한 전설로 만들어져 굳어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동유기에는 신라 화랑이 월송정에 들르지 않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사실은 한문 번역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치한다.”고 말했다.
특히 처음에는 월송정(越松亭)으로 불리던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 월송정(月松亭)으로 불리게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강원도의 경승지를 묘사한 관동십경((關東十境, 조선 영조 때에 김상성 등이 제영(題詠)한 그림첩))에 달월자 월송정(月松亭)으로 표기된 것으로 볼 때, 최소한 영조 임금 당시에는 이미 월송정(月松亭)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앞서 조선 선조 때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의 개인문집인 아계유고(鵝溪遺稿)에서는 넘을월자 월송정(越松亭)이 사용된다.
이산해는 넘을월(越)자를 사용한 이유를 ‘월송정기(越松亭記)’를 통해 “그 이름은 어떤 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飛仙越松)’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월(月)자를 월(越)자로 쓴 것으로 성음(聲音)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이다’ 하니, 두 설(說)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월(月)자를 버리고 월(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볼 때, 이산해가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유성룡과 함께 서수론(西狩論)을 주장해 어가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일로 탄핵을 받아 평해에 귀양을 올 당시인 1592년에는 넘을월(越)자를 사용한 월송정(越松亭) 현판이 걸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산해는 자신의 문집에 월송정과 관련해 ‘월송촌(越松村) 농가에 처음 우거하며’, ‘월송정(越松亭)에서 달 아래 거닐며’, ‘월송정(越松亭)가의 주인 집’, ‘월송정(越松亭)’, ‘월송정기(越松亭記)’ 등의 글을 남기는데, 모두 다 넘을월(越)자 월송정(越松亭)을 사용한다.
또 1603년에 건립된 평해 북천교비(경북 유형문화재 제361호)에도 마을 이름이 ‘월송(越松)’으로 되어 있다.

월송정(관동팔경도-김오헌, 근대)
월송정도(백운의 관동팔경, 조선말-근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당초 넘을월(越)자를 사용했던 월송정(越松亭)은 조선 선조와 영조 사이 어느 때부터인가 달월(月)자 월송정(月松亭)으로 변하게 됐다는 걸 알 수 있다.
ⓒ 울진뉴스 & 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문의 054-781-6776)
NEWS TOP 3
추천뉴스
정치/행정/의회
more +-
제293회 울진군의회 임시회 개회!
울진군의회(의장 임승필)는 8월 3일부터 8월 14일까지 10일간 일정으로 제293회 임시회를 개회했다. ... -
울진군, ‘왕피천유역 생태·경관보전지역’ 하반기 주민감시원 운영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인 왕피천유역의 체계적인 보호와 ... -
울진군, 임업사관학교 교육생 모집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임업인들의 소득 증대와 지속 가능한 산림경제 실현을 위해 ‘2026년 울진 임... -
울진군, 농협중앙회 울진군지부와 지역 상생협력 업무협약 체결
울진군(군수 황이주)은 지난 7월 31일 군수 접견실에서 농협중앙회 울진군지부와 농업·농촌의 공익적...
사회/경제/교육
more +-
울진국유림관리소, 지자체와 더불어 하천·계곡 불법행위 합동 점검 실시
울진국유림관리소(소장 김기한)에서는 울진군청 산림과와 함께 최근 여름철 관광객 방문이 급증하는 ... -
국립울진해양과학관, ‘제1회 KOSM 국민안전점검단 모집’
해양수산부 산하 공공기관인 국립울진해양과학관(관장 김외철, 이하 해양과학관)은 오는 8월 3일부터 21... -
후포초, ‘한수원 2026년 울진군 초등학생 방학 중 점심도시락 바우처 지원 사업’으로 시원한 방학 선물
후포초등학교(교장 김은희)는 이번 방학 동안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 본부의 지원으로 추진... -
울진산림항공관리소, 산림·소방 산불대응 협력 강화 위한 소통 간담회 개최
산림청 울진산림항공관리소(소장 안성철)는 7월 28일 관리소에서 산림·소방 유관기관 간 산불 ...
원자력소식
more +-
한울원자력본부, 울진군 부구천 산책로 조성 지원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한수원 지원사업의 일환인 ‘부... -
한울본부, 2027년도 한수원지원사업 공모 시행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오는 7월 31일(금)부터 8월 31... -
한울본부, 울진 소상공인 최대 5천만 원 금융지원
한울원자력본부가 경기침체와 소비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울진지역 소상공인의 경영 안정을 ... -
한울본부, 신한울3·4호기 건설현장 용접사 양성 하반기 교육생 모집
한국수력원자력(주) 한울원자력본부(본부장 이용희, 이하 한울본부)는 한수원, 울진군, 현대 컨소시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