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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1기 새로 발견···총 5기로 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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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1.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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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면 광회1리서 석영 재질 비석이 비좌(碑座)없이 발견돼···높이 76.5×너비 32.8×두께 11.8cm 크기


현령 김태희 영세불망비는 비좌(碑座) 없이 상부의 큰 바위 밑에 깔려서 눌린 채로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다


지금까지 울진 지역에 총 4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던 현령(縣令) 김태희(金泰熙)와 관련된 비석 1기가 서면 광회리에서 추가로 발견되어 향토 사가들의 큰 관심을 부르고 있다.
  
서면 광회1리 산 54번지 일명 ‘비석거리’에서 새로 발견된 현령 김태희의 영세불망비는 광회1리(廣回一里) 회룡천(回龍川) 1길 38번지 민가 바로 옆 서쪽 담벼락 아래에 남향하여 서 있다.
  
특히 비석에는 광회리(廣回里)의 원래 지명인 ‘광비(廣比)’가 명문으로 표기되어 있어, 조선 시대 울진 지역의 역원(驛院) 중 한곳인 광비원(廣庇院) 터를 추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며 향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울진군지』는 ‘광비(廣比)라는 마을 지명은 1500년경에 구씨(具氏)가 개척(開拓)하였는데, 이곳이 울진(蔚珍), 봉화(奉化) 간의 12령(嶺) 중에서 가장 넓은 영(嶺)의 밑이라 하여 광비(廣比)라 하였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비좌(碑座, 비신碑身을 세우는 대좌臺座)가 없이 상부의 큰 바위 밑에 깔려서 눌린 채로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데, 원래 짝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비좌는 주위에서 찾아볼 수 없다.   
  
비석의 재질은 차돌(석영, 石英)이며, 비의 크기는 높이 76.5×너비 32.8×두께 11.8cm이다.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세장방형(細長方形) 비석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위치에서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좌), 현령 김태희 비석을 최초로 발견한 주보원씨는 광회1리 마을에 광비원(廣庇院) 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우)


기자와 함께 현장을 확인한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비석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위치에서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고, 비는 세장방형(細長方形, 직사각형 형태)으로 비신(碑身)의 상부는 반원형(半圓形)으로 하여 비수(碑首, 비석의 머리 부분)를 표현했다”며, “비의 앞면과 양 옆면은 물갈이를 한 반면 윗면과 뒷면은 물갈이를 하지 않아서 정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말했다. 
  
비석의 명문은 앞면에만 해서체로 음각했고, 비를 세운 입비(立碑) 연대는 1881년(조선 고종 18년) 3월이다.
  
비석에는 「縣令金公泰熙 永世不忘碑(현령김공태희 영세불망비)/薑桂之性(강계지성)/氷檗其聲(빙벽기성)/仁播嶺院(인파영원)/惠洽山氓(혜흡산맹)/革罷痼瘼(혁파고막)/訟理淸平(송리청평)/碑雖在口(비수재구)/石豈無銘(석기무명)/廣比(광비) 辛巳(심사) 三月(삼월) 日立(일립)」이라고 적혀 있다.
  
비석을 최초로 발견한 주보원(남, 76세, 서면 전곡리)씨는 “산림청이 복원한 현재의 십이령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비석이 있는 광회1리 마을 뒷산의 아래쪽으로 돌아서 가도록 설계됐다. 그런 이유로 그동안 이 비석이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원래 보부상들은 이 마을 앞길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네 주민들은 예전부터 이곳을 비석거리로 불러왔다. 특히 지척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방모 서면 면장이 운영했던 양조장(釀造場)이 있었고, 인근에는 주막(酒幕)도 두어군데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동네에 조선시대의 광비원(廣庇院)이 있었을 개연성이 크다. 비석이 서 있는 앞길은 예전에 보부상을 비롯해 숱한 사람들이 오가던 곳이 아닌가? 조선시대에 관(官)에서 관리 운영하던 원(院)이었다고 하지만 주막의 봉놋방 두어 개를 빌려서 운영하던 소규모의 원(院)이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했다.
  
현령 김태희의 불망비가 서 있는 바로 옆집에 거주하는 유금남(여, 81세)씨는 “30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와서 살고 있는데, 오래전부터 어른들이 이곳을 비석거리라고 불렀다. 인근 지역 주민들이 비석에 새겨진 한문의 뜻을 몰라서 그랬겠지만 모두 저 비석을 예전의 무슨 암행어사 비석으로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현령 김태희(金泰熙)는 무과에 급제했고, 1877년 8월에 울진현 현령으로 부임하여 1881년 7월 전라우후(全羅虞候)로 전보 발령된 인물로 서울에서 살았다.
  
울진 지역에는 기존에 울진봉평리신라비 전시관 비석거리의 ‘현령 김태희 청덕선정비((크기 비신 높이 107.5×너비 36.4×두께 12.9cm, 비대 너비 83.3×두께 56×현 높이 6cm, 입비 년대 1881년(조선 고종 18년) 7월))’, ‘현령 김태희 영세불망비((크기 비신 높이 84.3×너비 36.8×두께 12cm, 비대 너비 83.2×두께 56×현 높이 5cm, 입비 년대 1878년(조선 고종 15년) 3월))’, ‘현령 김태희 애민청덕비((크기 비신 높이 103.5×너비 38.3×두께 12.4cm, 비대 너비 83.5×두께 55.6×현 높이 5cm, 입비 년대 1877년(조선 고종 14년) 8월 이후))’ 3기와 북면 두천1리의 내성행상불망비 옆 ‘현령 김태희 선정비((비신 크기 높이 85.6×너비 35.5×두께 10.2cm, 새 비대 크기 너비 60.9×높이 13×두께 42.7cm, 원 비대 크기 너비 64×두께 40×높이 25cm, 비좌공 크기 너비 30×두께 9.6×깊이 6cm, 입비 년대 미상)’ 1기 등 총 4기의 비석이 알려져 있었다.
  

 
비석의 ‘광비(廣比)’ 지명은 조선 시대 울진 지역의 역원(驛院) 중 한곳인 광비원(廣庇院) 터를 추정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북면 두천1리의 내성행상불망비 옆 현령 김태희 선정비

한편 이번에 새로 발견된 비석에는 서면 광회리(廣回里)의 옛 지명인 ‘廣比(광비)’의 한자로 ‘견줄 비(比)’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조선시대 역원 이름인 ‘광비원(廣庇院)’에는 ‘덮을 비(庇)’자가 사용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울진·평해 지역의 역원을 기록한 책자의 기록을 살펴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년)』,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1656년)』,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년)』에는 ‘광비원(廣庇院)’의 ‘비’자로 ‘덮을 비(庇)’가 사용되고 있고, 『관동지(關東志, 1829~1831년)』, 『대동지지(大東地志, 1864년)』, 『관동읍지(關東邑誌, 1871년)』에 나타나는 ‘광비원(廣比院)’에는 ‘견줄 비(比)’자가 사용되고 있다.
  
이로 볼 때 1765년께까지는 ‘광비’의 지명에 ‘덮을 비(庇)’자가 사용되다가 최소 1829년 이후부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광비’의 지명에 ‘견줄 비(比)’자가 사용되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전에 주막(酒幕)으로 운영되던 곳. 지척에는 방모 서면 면장이 운영하던 양조장이 있었다


현령 김태희 영세불망비는 광회1리(廣回一里) 회룡천(回龍川) 1길 38번지 민가 바로 옆 길가에 위치하고 있다


울진봉평리신라비 전시관 비석거리의 현령 김태희 애민청덕비(좌), 영세불망비(가운데), 청덕선정비(우)


원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비좌(碑座)는 주위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 현령 김태희 영세불망비(縣令金公泰熙 永世不忘碑)의 원문과 번역문 ▣
(※ 명문 해석 : 김주부 한국국학진흥원 전임연구원, 문학박사, 한문학 전공)

<<<원문과 번역문>>>

縣令金公泰熙 永世不忘碑 / 현령 김태희 영세불망비
(현령 김태희 공을 영원히 잊지 못하여 세우는 선정비)

薑桂之性 / 생강과 계피 같은 강직한 성품
氷檗其聲 / 얼음과 황벽 같은 청빈한 명성
仁播嶺院 / 선정은 읍령과 광비원에 미쳤고
惠洽山氓 / 은혜는 산간의 백성에도 미쳤네.
革罷痼瘼 / 백성들의 고통을 혁파하였고
訟理淸平 / 청렴하고 공정하게 송사를 처리했네.
碑雖在口 / 송덕비가 비록 백성의 입에 있으니
石豈無銘 / 빗돌(비석)에 어찌 칭송하는 글이 없겠는가?

廣比 / 辛巳 / 三月 / 日立 / 광비리에서 신사년(1881, 고종 18) 3월 일에 세움.

* 김태희(金泰熙) : 무과로서 1877년 8월에 부임하여 1881년 7월 정부 발령에 따라 전라우후(全羅虞候)로 전보되었다. 서울에 살았다. 울진군지 하, 울진군 관안(官案) 406쪽 참조.

* 강계(薑桂) : 생강과 육계(肉桂)를 말한다. 증자(曾子)는 “상주가 병이 나면 술과 고기로 보하고 생강과 육계를 먹는다.” 하였다. 《禮記 檀弓》초목의 맛있는 음식이란 바로 생강과 계피를 말한 것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니, 전하여 주육(酒肉)을 의미한 것이다. 강계(薑桂)는 생강과 계피로 맛이 매우므로 의기가 합함에 비한 것이다.

* 송(宋) 나라 때 간관(諫官) 안돈복(晏敦復)이 매우 강직하여 말을 과감하게 하였는데, 간신(姦臣) 진회(秦檜)가 금(金) 나라와의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주장한 데 대하여 안돈복이 매우 강력하게 정쟁(廷爭)을 하므로, 진회가 사람을 시켜 그에게 자기의 주장을 따라 주도록 권하자, 그가 말하기를, “강계의 성질은 늙을수록 매워지는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薑桂之性 到老愈辢 請勿言]”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빙벽(氷檗) : 빙(氷)은 얼음이고 벽(蘗)은 황벽(黃, 황벽나무)을 이르는바, 얼음은 차갑고 깨끗하며 황벽은 맛이 쓰기 때문에 청빈(淸貧)함을 이른다. 얼음물을 마시고 황벽나무를 먹는다는 뜻으로, 청고(淸苦)한 생활을 하며 절조를 지키는 것을 뜻한다. 빙벽 같은 지조를 가리킨다.

* 읍령원(泣嶺院) : 읍령(泣嶺)과 광비원(廣比院)을 가리킨다. 읍령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창수면을 경계 지어 주는 고개로 높이가 527m이다. 일명 서읍령, 울티재가 그곳이었다 한다.

* 고막(痼瘼) : 병. 백성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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