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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햇살이 빚는 '울진 고포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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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5.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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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역없으면 울진사람 모두 굶어 죽었지"


미역건지기

4월의 울진은 ‘미역의 세상’입니다. 겨우내 그물코를 깁던 어부들은 긴 겨울동안 바다 속 바위군락에 포자를 뿌리내리고 바다로 흘러드는 숱한 양분을 빨아올려 잘 자란 미역을 뜯기 위해 새벽을 가릅니다.

울진사람들에게 미역은 생명을 지켜 준 소중한 먹을거리이자 환금작물이었습니다. 40~60년대 먹을거리가 턱없이 부족했던 보릿고개 시절,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준 유일한 생명초였습니다.

‘미역 없었으면 울진사람 모두 다 죽었지’라는 향언이 지금도 전승되고 있듯이 미역은 울진사람들의 생존을 지켜준 버팀목인 셈이지요.

동해연안 갯마을 울진사람들은 바다 속 바위군락인 ‘짬’에 서식하는 자연산 미역을 ‘돌미역’이라 부릅니다.

돌미역(자연산 미역)은 바다 속 1.5~20m 내외의 바위군락(미역짬)에서 자랍니다.



미역말리기

미역짬은 뭍에서는 논밭이 농민의 생명줄이듯 어민들의 삶을 담보하는 텃밭이기도 합니다.

미역짬의 관리와 미역채취는 마을 공유자산인 까닭에 마을자치조직인 ‘대동추’나 ‘어촌계’에서 공동경영과 공동분배 규정에 따라 철저하게 관리합니다.

울진 연안의 해촌에서는 매년 마을별로 정월 초하루나 대보름에 열리는 ‘마을총회’때나 6월 경에 ‘대동추'(마을 공동자치조직)나 ‘어촌계’모임을 열고 ‘미역짬’을 분배합니다.

미역짬 분배는 마을별 짬의 숫자에 따라 어촌계원들을 고르게 나누고 ‘송치'라고 부르는 표식을 ‘뽑기’형식으로 뽑아 정합니다.
예컨대 지난해에 미역이 많이 생산된 ‘짬’에는 어촌계원의 숫자를 많이 배분하고, 미역이 적게 생산된 ‘짬’에는 어촌계원을 적게 배분하는 방식입니다.
소출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해야 어촌계원 모두가 고루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짬’ 배분에도 이렇듯 각별한 선조들의 공동체 정신과 사람살이의 지혜가 깃들여 있는 것이지요.
어민들은 자신들을 살려 준 미역에 대해 각별한 정성을 쏟아 왔습니다.


미역말리기


미역말리기(휴식)



울진 해촌에는 지금도 '짬고사'라는 독특한 제의가 치뤄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역 생장을 기원하는 고사입니다.

해촌의 아낙들은 10월 경이면 미역이 포자를 내리는 짬(미역바위)을 흡사 자기 몸을 씻듯 잘 닦아낸 뒤, 보름달이 뜨는 날을 잡아 정성껏 빚은 막걸리에 좁쌀을 섞어 미역바위에 뿌리고 미역씨앗이 좁쌀알갱이처럼 바위에 많이 붙도록 빌었습니다.

울진사람들은 또 매년 입동을 전후해 ‘짬매기’를 했습니다. 짬매기는 미역포자의 발아를 돕기 위해 돌미역이 무리지어 자라는 수중의 바위군락을 닦는 일입니다. 짬매기는 '기세닥기'라고도 부르지요.

해촌 주민들은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어촌계별로 품앗이를 이뤄 '낫대'와 '씰개'를 들고 정성 들여 미역바위를 닦았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이미 우리 주민들은 오래 전부터 친환경적 생업기술을 체득해 온 셈입니다.

미역의 생장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바람'과 '해류'입니다.
울진지방이 자연산 미역의 보고로 자리 잡은 까닭은 특히 바람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울진 돌미역이 한창 출하되는 시기는 3월에서 5월 사이로, 이 무렵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로 불어 오는 '높새바람'(푄현상)은 때깔좋은 미역을 건조시키는 데 필수적인 조건인 셈이지요.

때문에 울진의 사람들은 음력 이월 초하루날에 ‘바람을 관장하는 신’인 ‘영등할미’를 모시는 ‘영등고사’를 지내고 보름동안 풍물을 치고 별신굿을 벌이며 노동축제를 벌였습니다.

이월 초하루날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려야’ 미역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영등할미가 하늘에서 내려온다고 믿는 이월초하루에 진눈깨비가 내리면 ‘영등할미가 며눌아기’를 데리고 내려오고, 날씨가 맑으면 ‘딸’을 데리고 내려온다고 여겼습니다.
며늘아기를 데리고 내려와야 그 해 미역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이월 영등은 해촌에서는 설 명절 다음으로 큰 명절이자 공동축제였습니다.

집집마다 떡시루 채로 시루떡을 하고 오곡밥을 지어 고사상을 차리고 식구 수 대로 숟가락을 꽂아 영등할미에게 집안의 평안과 미역농사 풍년을 기원했습니다.


미역널기

“봉화·영주사람 울진미역 없으면 산모 미역국도 못끓였지”

울진의 최북단에 자리잡고 있는 자그마한 해촌인 ‘고포(姑浦)마을’은 동국여지승람이나 조선왕조실록에 빈번하게 등장할 만큼 이름난 ‘조선의 특산물이자 울진의 명품’입니다.

동해연안 울진지방에서 생산된 돌미역은 ‘바지게꾼’들의 손에 들려 북면 두천마을에서 시작하는 ‘십이령’을 넘어 봉화, 영주, 안동 등 영남내륙지방으로 유통됐습니다.

평생 바다 구경할 수 없는 영주, 봉화 지방사람들은 오롯이 울진지방에서 넘어오는 ‘돌미역’과 ‘토염(전오염)’과 ‘간고등어’로 바다냄새를 맡고, 해산물을 먹고, 출산한 산모의 산후조리를 했습니다.
요즘도 봉화, 영주지방에서는 “울진 미역없으면 산모 미역국도 못 끓여주었다”는 향언이 전해집니다.


고포미역

울진 고포마을에서 생산되는 돌미역은 ‘장곽(長藿; 올이 긴 미역 단)’으로 이름나 있습니다.
스무올을 기준으로 한 단에 30만원을 홋가합니다.

3월 말에서 4월 초순, 높새바람이 불어오는 보름동안 고포마을을 비롯 울진연안 해촌은 싱싱한 돌미역 내음이 온 마을을 휘감고 돕니다.  

동이 트기 무섭게 어부들은 ‘떼배’를 띄우고 해녀를 동원하여 돌미역을 채취합니다.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틀개'(3m 크기의 장대에 갈고리를 단 긴 장대)를 들고 파도에 떼밀려오는 ‘돌미역’을 건지러 불가(백사장)로 나갑니다.

해녀들은 연신 미역짬으로 자맥질하고 어촌계원들은 해녀들이 채취한 돌미역을 ‘떼베’로 나르며, 아낙들은 싱싱한 돌미역을 ‘미역발’에 널어 말립니다.

미역발을 널다가 따사로운 햇살에 떼밀려 아낙들은 ‘불가(백사장)’에 엎디어 단잠을 즐기기도 합니다. 노동의 피곤함을 짧은 낮잠과 맑은 햇살로 씻는 셈이지요.

태백을 넘어 동해로 치닫는 높새바람은 잘 자란 미역을 사흘이면 윤기로 반짝거리는 ‘울진 고포 돌미역(돌곽)’으로 탄생시킵니다. 
  
울진 4월은 푸른 동해바다와 바람이 만드는 ‘돌미역 세상’입니다.

/ 사진출처 남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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